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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천학
(시인, 캐나다 K-문화사랑방 대표)
한강문학 제36호 · 2024년 가을호 - 한국문학 해외임시정부②
독도獨島에서 하버드까지
권 천 학
(시인, 캐나다 K-문화사랑방 대표)
◆ 아, 독도獨島!
한국 국내에 독도사태가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미국의 지명위원회〉(BGN : United States Board on Geographic Names)에서 독도의 이름을 ‘리안쿠르 롹스(Liancourt Rocks)’로 바꾸려는 찰나에 그 사실을 발견, 저지에 나선 ‘김하나’란 이름이 검색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 국내신문마다 중요한 기사로 다루어지고, 주요 방송국의 중심 뉴스시간에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분위기와 어쩌다 들려오는 소식으로 짐작만 할 뿐 정작 ‘김하나’나 우리 가족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그저 마음만 초조할 뿐이었다. 오로지 정부기관에서 나서주기만을 기대하는 처지인데, 관련기관들의 느슨하고 안이한 태도와 접하면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마디로 허탈했다. 국토에 대한 중요한 일이 아닌가. 제보 하나만으로도 신속하고 진중하게 대처하리라 기대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것이 정치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애가 닳아서 동동거리며 사생활이 모두 제한 받고 있는데도 그 사람들은 어디 있는지 손도 닿지 않았다.
어쩌다 돌아가는 기색을 접하다보면 ‘김하나’라는 존재는 없고 생색과 회피의 기미가 역력했다. ‘김하나’가 나의 딸이어서가 아니다. 따라서 ‘김하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토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발 빠른 조처가 있을 줄 알았다. 이것이 정치고, 이것이 관료사회의 분위기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처음, 그 움직임을 감지한 김하나가 토론토 총영사에게 알리려고 총영사관에 급하게 전화연락을 했다. 오전 11시 경이었다. 이른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는 직원은 총영사님께서 점심식사 하러 나갔다고 답했고, 언제 돌아오느냐고, 급히 연락할 일이 생겨서 그렇다고, 다급하게 묻는 물음에 오히려 알 바 아니라는 듯, 오후 2시쯤? 혼잣말처럼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재차 독도문제에 대한 자초지종을 대충 이야기하고 매우 급하고 중요한 일이니 꼭 전해주고 빨리 연락이 닿게 해달라고 당부했지만,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분노했다.
대한민국 사람 맞는가! 각국에 나가있는 외교관에 대한 불신과 불평의 말들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교관이든 아니든, 사무실 직원이든 아니든,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벌떡 일어나야할 일이 아닌가. 나는 딸을 호주로 유학 보내었을 때도 “너는 외국인에게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大使이며 향토예비군이다”라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캐나다에 사는 국민 한 사람이, 혹은 교민 한 사람이 주미한국대사관이나 재미在美 한국학 관련인들 등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동분서주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말하기조차 민망하고 한심한 일도 있었다. 급하게 서류를 만들고 작성하고 해서 요로要路에 보낼 서류로 사용한 용지의 맨 밑에 ‘토론토대학교’라고 인쇄된 것을 트집 잡는 전화가 오기도 했다. 토론토대학에 있는 아무개라는 것을 나타내어 너의 이름을 알리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 기막힌 현실을 어디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뿐만이 아니었다. 누구도 관심 가지려하거나 응원하는 사람은 없었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분위기였다. 뉴스에 귀기울이지도 않고, 그런 류의 뉴스가 떠들썩함에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떠나와 살아도 조국은 조국이고, 외국에 있건 국내에 있건, 조국이 건재해야 국민도 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아무 힘도 되지 못한 채 그저 곁에서 마음을 졸이며 초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우연히 한국에서 방송되는 TV를 보았다.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이라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인터뷰 하는 장면이었다.
한 기자가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한국국내의 여론이 들끓고 있음을 전제로 한 후 “이번 사태에 캐나다의 교포 한 분이 알아내고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인데, 정부에서는 어떤 조처를 하고 있습니까?” 하는 내용의 질문이었다. 그 답이 어이없었다.
“다 알아서 조처하고 있습니다. 거, 캐나다의 한 사서 아가씨가 우연히 알게 되어 그런 모양인데, 우리가 다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전에 정부에서 다 알아서 조처하고 있는 일이라는 투였다.
캐나다의 한 사서 아가씨라니? 한 사서 아가씨가 우연히 알게 되어 뒷북을 치고 있다? 정말 기막혔다.
총영사관으로 급하게 전화를 했을 때, 점심 식사하러 나갔다는 총영사는 그 때까지도 아니 그 후로도 아무 연락이 없었고, 김하나는 계속해서 이웃 사무실인 일본도서관이나 중국도서관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TV를 보고도 그 TV를 보았다는 말조차 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실망할까봐, 기운을 잃을까봐서 였다.
영토문제이기 때문에, 한 국민은 애가 타서 이리저리 있는 힘과 없는 힘을 다해가며 애를 쓰고 있는데, 당국이나 정부 등의 큰 힘을 기대하고 있는데, ‘너무나 순진한 국민 한 사람이구나’ 하는 자괴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정치, 정치하는 사람들. 관료, 자리에 급급하고 생색내기에 바쁜 사람들. 다시 한 번 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이야 구구하게 다 늘어놓을 수 없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그때 일을 기억할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김하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노심초사하며 어려운 일을 추진해가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입맛을 잃고 있었다. 심지어 퇴근하여 집에 오면 주방의 타일바닥에 벌렁 누워서 호흡조절을 하며 체온을 식혀야 할 정도로 지치고 힘들어했다. 답답하고 초조하기는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은 물론이었다. 세 살이 된 아리(Ari)가 감기에 걸려 앓고 있는데도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집의 전화까지 차단했다.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걸려오는 모든 전화는 전화응답기에 녹음 될 뿐, 우리식구들은 듣고만 있었다. 어쩌다 안부를 물어오는 한국가족이나 지인들의 전화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조심조심, 매사가 살얼음판이었다.
필요한 기관과 직접 연결하는 핫라인만이 김하나와 소통되었다. 주미한국대사관과 모 국회의원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취재하러 온 유일한 모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도 촬영도 옆 사무실에 있는 일본학이나 중국학 관계자들이 눈치 채지 않게 외부에서 조용히 빠르게 처리해가기도 했다. 이웃나라간의 미묘한 국제관계로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와중에 한국의 삼촌들(나의 형제들)과 나를 아는 몇몇 문인, 지인들이 응원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것이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또 한국의 J 언론사의 모 기자가 나에게 한 연락을 받았다. 당시 한국의 언론사들이 다루고 있는 중에 어느 신문의 논설란을 보았는데 김하나에 대한 칭찬내용이라면서, 논설이 사람 칭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다. 그 글 속에 내가 딸에게 한 말을 상기하면서, 몇 가지 나의 생각을 묻는 질문인터뷰였다.
후에 해결이 되고 평정이 된 후에 다시 한 번 속이 보이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뒤늦게 알게 된 사람들, 혹은 지인들 중에는 걱정이 돼서 여러 차례 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거나, 엄청 걱정했다거나, 걱정해주는 척 하는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들을 하는 것을 보고 그저 웃기만 했다. 민망해서 얼버무리려는 꼴들이 오히려 민망했다. 개인만이 아니라 그런 언론매체도 있었다. 취재하려고 여러 차례 연락했는데 닿지 않았다나? 다른 언론매체들이 취재해서 다룬 내용들을 적당히 베껴 실었으면서. 훗날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른 채 살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각과 함께 마음을 스스로 진정시키고자 하는 빌미로 삼았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경각심인 동시에 세상살이에 대한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사람공부, 세상공부를 했다. 소소해보이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은 사람공부, 세상공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가끔 느끼고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삶에서 반복되는 사람공부, 세상공부, 살아있는 한은 멈출 수 없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중에 나는 오래 전에 쓴 나의 연작시 〈독도 시리즈〉를 다시 꺼내어 토론토의 한국일보에 발표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에 대해선 기대할 수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그저 그러고 싶었다. 시가 읽히지 않는 세상, 시집이 팔리지 않는 세상. 신문사측은 장사에 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를 싣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민망함을 무릅쓰고 한 일이었다.
〈일어서라 독도여〉
- 독도 · 하 나
천 · 군 · 만 · 마떼로 거느리고 맨몸으로 우뚝
푸른 갈기 휘날리며 호령호령 사는 것은
바다를 놓아먹이는 넓은 가슴 때문이다
더러, 불청객 검은 솔개 나타나
평화의 기류 흔들어놓기는 하지만
그 흙에 뿌리내린 왕오장근이나 섬보리장
봄이면 피어나는 민들레 술패랭이 섬장대···
수시로 들락거리는 바람은 안다
단 한 번도 바다를 팔아치운 일이 없음을
때맞춰 찾아들어 번창하는 괭이갈매기들
가끔씩 다녀가는 흰줄박이 오리 노랑발도요와 상모솔새
어쩌다 들리는 강치들까지도 안다
누구에게나 넉넉한 가슴 열어놓고 있음을
열어놓았으나
결코 내어주지는 않은 바다
오늘도
동해의 벼리 거머쥐고 내닫는다
잠들지 마라 독도여
일어서라 독도여.
*〈일어서라 독도여〉는 이미 한국에 있던 198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한 바다테마 연작시 〈독도 시리즈〉에 포함 된 작품이다.
우여곡절 끝에, 8월 5일, 조지 부시 대통령의 방한시기에 맞춰, 독도의 명칭을 ‘독도’(Tok Island Korea)’ 그대로 보존한다는 공식발표를 하였다. 그렇게 부시 대통령의 방한 선물 삼는다는 명분으로 최종 마무리 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다 밝힐 수 없는 일이 많지만, ‘독도’ 명칭을 지켜낸 2008년의 여름은 그렇게 뜨거웠다.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 문화예술인들의 독도방문
독도獨島는 훨씬 이전부터 대한민국과 일본과의 사이에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었다. 2008년의 독도의 명칭을 바꾸려는 것도 그 분쟁의 일환으로 이어진 일이다.
1990년대 초 쯤, 당시에 일본의 조업선들이 독도 근해를 침범하여 해상난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대치상태가 이어지는 등 어업권 침해와 영토권사이에서 한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미묘한 외교 전쟁이 소리 없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런 민감한 상황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문화부와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주선한 〈문화예술인의 독도방문〉 행사가 있었다.
문화예술인 100인을 선정, 독도를 방문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영화인, 연극인 등 문화예술계 전체를 아우르는 행사에 시인詩人도 포함되었다. 그 속에 나도 포함되었다. 1995년 쯤, 고인이 된 권일송權逸松 시인이 〈현대시인협회〉의 회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때, 생전 처음 울릉도와 독도에 가게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그 행사에 초청된 문화예술인 모두가 그랬다. 독도가 개방되기 전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로선 우리나라의 본토와 독도를 잇는 길을 트는 첫 방문이라는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더듬어 본다.
선 플라워(Sunflower)호를 타고 포항을 출발했다. 그런 크기의 여객선을 타본 것도 처음이었다.
파도가 높았다. 파고波高가 2m를 넘어서 뱃길이 험하다는 선내방송을 들으며 배안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파고가 2m 이상 되면 출항이 어렵다는 상식도 그 때 배안에서 처음으로 들어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바다테마 연작시’를 쓰고 있는 중이어서 바다에 관한 지식이나 일반적인 상식들을 많이 채집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포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출발시간이 지연되어 뭍에서 시간을 보내었고, 배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어져서 울릉도에 도착하는 시간이 평소의 항해시간보다 두 배 이상 걸렸다고 했다. 안전한 항로를 이용하느라고 늘 다니는 최단 코스를 변경, 북쪽에 있는 후포항으로 올라가서 거기 어디쯤에서 울릉도로 가는 바닷길을 택했다. 일기불순 때문이었다.
울릉도에서 내릴 때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배 멀미로 쓰러져 있었다. 배안의 바닥은 오물로 더렵혀져 여기저기 신문을 펼쳐 임시로 덮어둔 상태여서 바람을 쏘이러 갑판에라도 나가거나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발 디디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의자에 앉은 채, 배안에 설치된 TV에서 보여주는 영상을 보며 버티었는데, 거의 도착할 무렵쯤부터 울렁거림이 시작되었고 심상찮았다. 울릉도에 곧 도착한다는 선내 방송을 들으면서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며 견디다가 울렁거림이 너무 심해졌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최후의 5분이다! 생각하면서도 견디기 어려워서 TV 보는 것을 멈추고 눈을 감아버렸다.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시각視覺만으로도 몸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
“독하다 독해!”
울릉도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릴 때 내가 들은 말이다. 거의 모두가 기진맥진, 지쳐있는 모습이었고, 그나마 나만큼이라도 생생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울릉도 도동항에서 내려 바닷바람을 맞으며 두어 시간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독도를 향해 출발했다. 체력이 감당해낼 수 있는 사람들만 자원했다. 승선인원이 20명 정도인 모터보트였다. 마치 파도의 등을 타고 출렁이며 미끄러지듯, 날치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달려 독도에 도착했다.
접안시설도 되어있지 않은 독도. 선착장에서부터 독도를 지키는 해군(해병대?)들이 하선下船을 도와주었다.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한 바퀴 돌았다. 아스라한 ‘물골’을 올려다보며 설명을 들었다. 섬의 둘레 절벽에 피어있던 해수국海水菊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독도 주변의 바다에서 해양감시선의 호위를 받으며 물파랑 위에 떠서 눈어림 짐작으로 100여 미터(?)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근접한 일본 배들과 대치하기도 했고, 손마이크로 물러나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사실 그런 행동들이 뭐 그리 대단한 효과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저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상징적 몸짓이었다.
다시 울릉도로 돌아와 숙박하며 섬 안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울릉국민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울릉도에 대한 역사와 내력, 행정구역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독도를 드나들며 생계를 잇는 어부들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독도로 주민등록을 옮겨 첫 번째 독도주민이 된 최종덕씨 이야기, 독도경비대가 결성되어 활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으며, 벽 여기저기에 붙여놓은 사진도 보았다.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 해안도로 공사를 하는 중이라도 했는데, 키로(km)수는 잊었지만 반半의 반半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였던 걸로 기억한다. 공사를 마친 곳까지 벌겋게 해안자락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곳까지 갔다 오면서 반짝이는 바다표면과 곳곳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산등성이에 올라 산간마을에서 명이나물 무침안주에 울릉도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 독도방문 여행에서 울릉도 섬사람들의 명命을 이어주었다는 명이나물, 도동항을 내려다보는 바위절벽에 선 향나무, 울릉도 특산품이라는 호박엿 등을 알게 되었다.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할 당시, 나는 남모르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미 ‘바다테마 연작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다테마 연작시’ 중에 울릉도와 독도에 관심이 더 깊어진 것은 우연히 들은 ‘가산도’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어디에서였는지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울릉도 근처의 동해바다에 ‘가산도’라는 섬이 있었다는 것, 전설인지, 전설 같은 것으로 내 안에서 구성된 것인지 확실히 감지하지 못하면서 그저 막연히 ‘가산도’라는 이름에 매달려있었다. 그것을 발판으로 이미 〈가산도〉, 〈그 섬엔 푸른 바람이〉 등 몇 편을 써 놓은 상태였다.
울릉도 독도 방문의 또 다른 목표, 시창작 때문에 방문하자마자 짬만 나면 여기저기 마주치는 어부나 주민들에게 ‘가산도’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특별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개는 내가 아는 정도의 대답이었다.
그런 중에 부둣가에서 그물작업을 하던 한 늙은 어부로부터 “글쎄... 전에 나도 어른들로부터 듣긴 했는데... 잘 모르겠고, 저기 어디 바다 가운데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모르겠어요” 하는 정도의 답변을 들었다. 명쾌하지 못했다. 그 후로 ‘가산도’는 나에게 전설의 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남해의 ‘이어도’처럼.
독도에 관련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된 것은 울릉도에서 돌아온 후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독도점령 야망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도를 통해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포함시키는 선서식을 한다거나 데모 같은 격렬한 시민행동을 하는 일본인들의 보도를 접하면서 나의 독도에 대한 생각은 더 굳어졌다.
어느 유치원에 ‘독도이야기’를 어린이용 이야기로 만들어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알았다. 그때 생각했다. 독도와 관련한 이야기를 어린이용 글로 만들어야 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실천에 옮기기 못하고 있다.
◆ 제1회 ‘바다의 날’에 시 〈달려라 독도!〉 낭송
1996년 5월 31일, 해양수산부에서 이 날을 ‘바다의 날’로 제정했다. 5월 31일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828년(신라 흥덕왕 3년)에 청해진淸海鎭을 무역기지로 설치한 날이다. 청해진은 지금의 ‘완도莞島’다. 완도는 당시 신라, 당나라, 일본의 3국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중요거점이었다.
바다의 날!
해양부에서 주관한 그 첫 기념행사가 강남에 있는 무역회관(?)에서 열렸다. 부산의 해양대학교 황을문 교수와 함께 초대되었다. 그 행사에서 ‘독도 시리즈’ 두 번째 〈달려라 독도!〉를 낭송했다.
〈달려라 독도!〉
- 독도 · 둘
절 · 해 · 고 · 도
덜미 푸른 동해의 등뼈가
우두둑 소리 내며 아득하게 일어서고 있어
용암에서 일어나 끓어오르는 심지
바다 복판이 아니었으면 식히지 못했을
열정의 한 시대를 기억하는 섬
무량한 햇살 여전히 빛 부시고
날 선 섬의 어깨를 딛고 서서
더운 가슴 식히는 근육질의 바람은
카랑카랑 끝없는 시간을 자아올리는데
460만년이라니··· 그 아득함에
말문 막아버린 수평선 또한 아득해
외로움도 아득하여
불보다 뜨거운 물속에 삶의 뿌리박고
불길보다 뜨거운 침묵으로 서있는 바위섬
태생이 뜨거운 섬
외롭지 마라 독도여
달려라 독도여.
독도사태가 홍역 치르듯 지나갔다.
‘김하나가 애국자다’, ‘김하나가 국방부방관이다’, ‘김하나가 해냈다’ 둥의 댓글들을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못 마땅했을 한 무리의 그들, 그런 위선의 그들, 그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뿐, 떴다지는 물그림자일 뿐.
2012년 8월, 나에게 다시 한 번 독도가 떠올랐다. 한국의 국방대학교 김병렬 수가 토론토 문화회관에서 ‘독도강연회’를 하게 된 것이었다. 김병렬 교수와 연락이 되었다. 나는 교민들에게 독도에 대한 관심을 높여줄 것을 당부했다. 그것은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마음이었다. 김교수는 당신의 강연회에서 김하나의 ‘독도명칭변경을 저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독도 시’를 낭독했다.
2021년 12월, 오타와 주재 한국대사관의 요청으로 독도관련 인터뷰와 독도관련 시詩 시리즈의 시낭송과 함께 1990년대의 독도방문이야기를 배경으로 독도 홍보를 위한 영상을 촬영했다.
그 인터뷰에서 나의 앞으로의 독도에 관한 활동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문학을 통하여 독도관련 작품들을 꾸준히 써서 차세대들에게 알리겠다고 답하면서, 독도명칭이 ‘리안쿠르롹스’로 바뀔 뻔 했던 2008년도의 사건 때, 마음먹고 독도관련 작품을 써야겠다고 작정 했던 일을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했다. 그 작정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이어서 2022년 6월, 오타와 주재 주캐나다한국대사관(장경룡 대사)에서 주최하는 ‘독도간담회’에서 독도관련 강의를 요청받았다. 장경룡 대사는 나를 ‘독도홍보대사’라고 소개 하였다. 오타와의 교민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독도그리기대회’의 그림전시회도 병행했다.
나는 2008년의 일본의 독도명칭 변경 음모에 대한 비하인트 스토리 몇 부분을 포함한 이야기를 하면서 독도를 어떻게 지켜야하는지를 강조했다. 처음 듣는 소리라면서 놀라워하는 청중들의 반응을 보고 오히려 내가 놀랐다. 다시 한 번 고국을 벗어나 외국에 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교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그렇게 독도는 잔잔해져가고 있지만 아직도 나의 마음속에는 출렁이고 있다.
◆ 김하나, 비추미상 수상
2008년 11월 어느 날, 선배시인인 김후란 시인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뜻밖이었다. 김후란 시인은 내가 한국에서 1980년대부터 ‘여성저축생활중앙회’ 활동을 할 때 알게 된 분으로, 선배시인이라서 더욱 좋았었다.
〈새마을 운동〉이 활발하던 1970년~80년, 그 시절 나는 지방에 살면서 서울의 중앙부처나 중앙기관, 여성잡지사 등에서 시행하는 각종 행사에서 알뜰주부상, 식생활개선상, 창의력개발상 등을 수상하였는데, 상금 외에도 부상으로 주어지는 대통령의 공작문양이 새겨져있는 만년필, 시계 그리고 육영수여사의 역시 공작문양이 새겨진 옻칠자개다반 등이 있었다.
문학과 관련 있는 것으로는 여성잡지 《여원》에 단편 〈모래성〉이 당선되어 ‘부록’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지금은 다 기억도 나지 않는 에피소드가 여럿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저축생활중앙회’의 김채봉 전북지부장을 알게 되었고, 이리(현, 익산)시청 황의경 부녀과장을 알게 되었다. 황의경 부녀과장은 나와 가장 잘 통하는 ‘언니’가 되었고, 부녀국장을 거쳐 오랜 공무원 생활에서 은퇴한 황의경 언니와는 고국과 타국에 헤어져 사는 지금까지도, 소식 나누며 지내고 있다.
1977년 서울로 옮겨 온 첫 해, 우연히 ‘전국주부백일장’에서 시 〈전설〉로 장원壯元을 했다. 시골촌놈인 내가 동숭동 작은 이모님 댁에 오셨다는 외할아버지를 만나 뵈러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 우연히 전국주부백일장 소식을 듣고 도중에 하차, 낯선 경회루까지 찾아가 참여했던 그 때의 일 또한 새롭고 아득하다.
〈전설傳說〉
1.
털실로 무늬를 넣어
세월을 엮는 여인의 손가락 사이에서
새실 새실 피어오르는
아릿한 날들
해묵은 초롱에 전설을 밝히면
학鶴의 날개를 짜던
내 사유의 실 끝은
강물이 되고
비단 수건에 들여진 얼룩을
밤새도록 비누질하여
헹구어낸
새벽
그렇지
그는
이렇게 외로운 이야기를
두고 갔지
서러운 입김이 서린 비단수건을
남겨두고 갔지
2.
눈길 주는 곳마다 윤이 흐르고
강물의 회귀로 열려오는 뜨락에서
풍성한 식탁에 초대된 바람
바람결에 이우는 꽃잎을 띄워
건배하는 술잔에 떠도는
신기한 구름
구름 속에서
문득 당신의 귀한 웃음을 보는
여인의 속눈썹에
이슬도 맺히는
내일
그렇지
찬란한 해후의 약속을
그는
내 뜨락에
묻어두고 갔지.
그렇게 간당간당 시작한 서울살이, 모든 것이 낮선 나에게 ‘여성저축생활중앙회’(현기순 회장과 김기정 사무국장)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북지부의 김채봉 지부장을 통하여 나의 상경소식을 알고 기다리며 수소문 했다고 했다. ‘여성저축생활중앙회’는 ‘저축추진중앙회’의 연계기관이었다.
서울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들에서 간간이 발표되는 나의 시와 칼럼을 읽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여성저축생활중앙회’의 김기정 사무국장의 권유와 이끔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낯선 곳에 던져진 나에겐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다.
‘여성저축생활중앙회’의 활동은 나의 첫 사회활동인 동시에 여성운동이기도 했다. 활동하면서 김후란 시인이 김기정 사무국장의 절친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김후란 시인이 나의 시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더라는 말까지 해주어서 속으로 은근히 힘이 되었다. 이후 글을 통하여 드문드문, 그리고 김국장을 통하여 소식이 이어졌다.
‘여성저축생활중앙회’ 활동을 하면서부터 ‘한글전용운동’, ‘국산품애용운동’, ‘물자절약운동’, ‘전기아껴쓰기운동’ 등을 할 때 영등포구지회장이 맡겨졌다. 구로공단이 조성되자 정부는 행정구역개편을 실시,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나뉘어졌다. 나는 구로구지회장이 되기도 했었다. 그 후 금융기관의 ‘외부감사제도’가 생겼고 그 일을 ‘여성저축생활중앙회’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외부감사제도’란 금융기관의 전반적 시설부터 업무의 기능성, 직원들의 근무 태도 등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감사監査 제도로 암행어사 비슷하기도 하다. 심사를 거쳐 최종 9명을 선발하였다. 선발된 ‘외부감사’의 하는 일은 금융기관에 따라 전국을 서울,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강원도, 제주도 등 9개의 권역별로 나누어 정기적으로 점검하였고, 돌아가면서 크로스 체크도 했다. 외부의 간판에서부터 내부의 환경까지 다 포함됐다. 모든 금융기관, 모든 은행은 물론 투자금융회사까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했다.
세월이 흐른 후, 외부감사제도는 폐지되고 대신 ‘모니터’ 시스템으로 바뀌었다고 들은 바 있는데 지금도 그런 시스템을 작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외부감사’로 활동할 때 나의 제안으로 통과되고 개선된 것들 중 지금까지 실행되고 있는 것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은행에서 고객을 호명을 ‘아무개손님’ 하고 부르는 것. 그 이전까지는 ‘아무개씨’라고 했었다. 어느 날 은행 창구의 젊은 아가씨 행원이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 고객을 향하여 ‘아무개씨’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호칭을 바꾸도록 제안했다.
두 번째는 객장의 테이블에 몇 개의 돋보기를 준비해놓은 것. 나이 많은 사람이나 시력이 좋지 않은 고객을 위한 배려로 권장했다.
세 번째는 객장의 의자 사이에 작은 책꽂이를 마련하는 것. 가능하면 시집을 꽂도록 권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시집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여성잡지들과 시집들이 꽂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시집은 점점 사라지고 주로 여성잡지들로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꼈다.
네 번째로 간판을 건물 외부의 벽에 종縱 간판과 횡橫 간판 한 개씩으로 제한하도록 해서 거리환경 정화에 일익一翼을 했다. 그때부터 은행 앞의 길거리에 들쭉날쭉 세워져있던 소형간판들이 사라졌다.
지금은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금융기관에 좋은 제도를 정착시켜주었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는 일이었다.
후에 ‘저축추진중앙회’나 ‘여성저축생활중앙회’는 해체되었고, 김기정 국장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나 또한 캐나다로 떠나와 버렸으니 소식은 자연스럽게 끊겼다.
그런데 그때의 인연으로 이어진 김후란 선배시인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삼성공익재단에서 운영하는 ‘비추미’상에 나의 딸 김하나를 추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시상제도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었다. 알고 보니 김후란 시인이 전년도前年度 수상자였고, 전년도 수상자에게 다음 해 수상자 선정에 한 표 추천의 자격이 주어졌던 것. 그래서 독도문제로 떠오른 김하나를 추천하려고 자료조사를 하다가 나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딸 김하나에게 전했다. 김하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면서 수상을 사양했다. 나는 딸의 의사를 다시 김후란 시인께 전달했다.
“모전녀전이군! 역시 권시인 딸 다워!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배워야겠어요” 하시면서 더욱 더 강한 의지로 추천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김하나는 2008년의 ‘비추미상’ 수상자가 되었다. 12월 말에 있던 시상식에는 김하나가 토론토대학교의 한국학과 책임자로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귀국하여 한국에서의 일도 볼 겸, 겸사겸사 대리수상을 했다.
◆ 문예가족 동인
1977년 서울로 터전을 옮기지 전, 한 가지 더 기억해두고 싶은 것은 지방에서의 나의 ‘문학 활동’이다. 앞에서 짤막하게 언급한 〈문예가족〉 동인 활동이다.
〈문예가족〉은 1960년대에 자칭 ‘헝크리 영맨’이라는 전주지역 중심의 몇몇 청년들이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뭉쳐, 옵셋 인쇄본으로 얇은 문집 《웨침》을 냈고, 그것이 《문예가족》의 전신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반 친구들을 통해서 우연히 전주를 거점으로 한 어른들의 문학동인 ‘문예가족’을 알게 되어 연결이 되었다.
작품을 가져와보라는 전갈을 받고 긴장하며 처음으로 전주 ‘호수다방’ 나들이를 했다. 그 결과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그 모임에 정식 멤버가 되었다. 나는 문학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험도 부족하여 무지한 상태였고 두려움도 크고 기대도 컸다.
문학에 대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없었다. 단순히 사춘기적의 감성이 약간 남다르다고 할까, 그 정도였다.
‘문예가족’의 동인들은 서로의 호칭을 ‘형兄’의 전라도 사투리인 ‘성’이라고 부르거나 별명으로 불렀다. 조기호 시인을 ‘떼꺼위’(거위의 사투리)처럼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댄다고 해서 ‘떼꺼위성!’, 전북일보사에 근무하는 서재균 동화작가를 ‘째보성!’, 군대에서 폭발사고로 팔을 잃은 이목윤 시인은 ‘몽유니성!’, 이름에 용勇 자를 가진 이용찬 소설가를 놀리느라고 ‘개찬이성’‘... 이런 식이었다.
나는 나이가 가장 어리다보니 자연스럽게 ‘막내’가 호칭이 되었다. 때로는 ‘막내 이 지지배야!’ 하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서 매달 한 번씩 전주 나들이를 하고, 만나서 이야기 듣고 그저 웃고 떠들고 좋았다. 때 되면 작품내고, 산고기탕집이며 욕쟁이 할머니집, 콩나물국밥집 등 열심히 따라다녔다. 친혈육보다 더 정겹게 느낄 정도로 정스러웠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참 좋았다.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소양중학교의 전신인 ‘소양재건중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것도 그 시절이었다.
내가 동인지에 작품수록을 시작한 것이 3호쯤(?)으로 기억되는데, 〈학鶴 - 스무살의 자화상〉, 〈기旗〉, 〈부재不在 - 열여덟의 자화상〉, 〈7인의 신부〉, 〈연가〉 등이었다. 실제로는 열일곱, 열여덟에 쓴 것들이지만, 어떻게 표기하는지를 몰라서 그리고 나이를 올려야할 것 같아서 나이를 올려서 표기했었다. 그만큼 나는 무지했었다.
동인지 표지화도 두세 번 그렸었다. 전북일보에 연재되는 소설에 삽화를 그린 일도 있었고, 신문에 짤막한 칼럼도 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문사에 근무하던 ‘째보성’(서재균 동화작가)의 연결이 아니었나 싶다.
1977년, 서울로 옮겨와 살던 언젠가 우리 동인 중 가장 연장자였던 소설가 이정환 성님이 투병 중일 때 월계동 자택에 병문안을 갔었다. 내가 동인이 되기 직전에 가장 먼저 서울로 진출했었고, 소설 〈까치방〉으로 알려졌었다. 생활이 곤궁하였다. 후에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마침 서울에 살던 황송문 교수와 함께 장례식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런가하면 김종태 성님
의 개인 ‘수채화전’이 전주 도청 근처의 화랑에서 열렸을 때 내려간 일도있다. 그런데 1990년대 넘어선 언제부터인가 느슨해졌다. 각자가 생활에 바쁜 탓이었다. 나 역시 서울살이에 바쁘다보니 한동안 무심하게 지냈다.
나는 그 사이에 첫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에 이어 〈텃밭에 몰래 심은 나의 사랑은〉, 백제테마연작시집 〈청동거울 속의 하늘〉, 나무 테마시집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 〈속담명언사전〉(편저) 등 출판과 창작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느 순간 《문예가족》이 그리웠다. 마음은 있으나 경제적 부담이 문제였다. 그래서 그 사이 서울로 옮겨 사는 동인들 중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전덕기 성님을 찾아가 제안, 경비부담을 하도록 합의를 하고 모든 출판실무는 내가 도맡아 하기로 했다.
전주의 성님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원고를 수집했다. 모두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모두들 즉시 응답했다. 그렇게 애를 쓴 결과 1997년 ‘푸른물결’에서 재창간이라는 명분으로 12집(?)을 출판했다. 내가 ‘도서출판 풀잎문학’의 주간主幹으로 일할 때여서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이후 다시 전주로 출판사도 옮기고 제자리를 찾아 활동이 재개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몇몇 분들은 고인이 되었고, 그 사이 새 가족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면서 젊은 세대의 후배들이 늘어났다.
나는 이렇게 멀리 외국에 나와 있지만 여전히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몇 해 전, 지금은 고인이 된 평론가 ‘하근이 성’(원광대학교의 교수)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중에 통화를 했다. 투병 중에 《문예가족》 창간호부터 다 있는데, 그 중 초창기의 내가 그린 그림이 ‘표지화’로 실린 것들도 있다면서 그것들을 모두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하다가 이뤄지지 못하고 말았다.
‘하근이 성’은 나의 〈살앓이〉 연작을 주로 하여 평론 〈살앓이의 승화〉를 비롯하여 몇 편의 시 해설을 다루었다. 그런가하면 나의 백제테마시집 《청동거울속의 하늘》이 출판된 후, 나의 작품론을 쓰면서, 백제테마를 좀 더 쉽게 서사적으로 풀어보라고 권하면서, “성[兄]이 가지고 있는 참고자료들을 주겠다”하며, 《문화백과사전》도 보내주었다. 나는 그러리라 마음먹고, “그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백제테마’ 시詩 참고자료는 커녕, ‘문예가족사’에 대한 수정원고와 나의 그림이 표지화로 된 《문예가족》 초창기 출판본 등도 받지 못한 채, 타국에서 부음訃音을 들어야만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문예가족》은 한국문학사상 가장 수명이 긴 지방문학의 대표주자 동인지일 것이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표제標題 자字는 전북지방의 원로 서예가인 고 강암 송성룡 선생의 글씨이고, 표지화는 글과 그림에 뛰어난 탁월한 재능을 가진 박미서 후배동인이 그리고 있다.
현재 2023년 사화집까지 출판했고, 회장을 맡고 있는 배재열 후배시인의 서두름으로 2024년도 사화집을 준비 중에 있다. 그리고 ‘단톡방’을 통하여 소통하고 있다.
직접 만나 얼굴 보며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재빠르게 소식을 전하고 주고받을 수 있으니 인터넷의 덕을 톡톡히 보는 참 좋은 세상이다.
〈학鶴〉
-열아홉 살의 자화상
하늘과 바다사이
신神의 묵시로 안좌해온 피안에서
태양을 잃어버린 아득한 날부터
고고히 휴식해온
찬란한 정물靜物
해맑은 하늘로 솟구치던
절절한 노래가
억겁을 견뎌온 지금이사
조용한 물소리 되어
너
가슴 안으로
스며 흐르는데
고독에 여윈 너의 얼굴엔
선지처럼 붉은 나의 공허가 서리고
보랏빛 꽃잎을 따 먹으며
애타게
애타게 기다리던 너의
목 줄기 속으로
눈물겨운 나의 노래가 고여 흐른다
언제련가
환히 트여올 것과
설레어오는 것을 위하여
분분한 낙엽처럼 사라져갔을
어느 날
우리들의 허무한 모습
바라는 것
저 하늘만큼이나 먼
여기라 해서
오후의 낙조에 아려오는 그림자
수려한 몸매여
정지停止에서
시작되는
고요한 출발
웃다 지쳐버린 과중한
침묵
그는 잃어버린 언어를 찾고 있는가.
◆ 한국전자문학도서관 웹진 〈블루노트〉
2006년, 내가 이민 온 후로 한국전자문학도서관의 웹진 ‘블루노트’ 발행을 중단했다.
나는 웹진 〈블루노트〉를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1년부터 발행해왔었다. 한국전자문학도서관(발행인 제주대학교 윤석산 교수)의 운영상의 문제가 있었긴 하지만, 멈출 때까지는 나는 웹진 발행에 밤잠을 설쳐가며 주간主幹으로서의 최선을 다했다.
서툰 인터넷 상식과 기술을 독학 또는 어깨 너머로 여기저기에서 배워가며 일했다. 무보수였다. 처음엔 문학하는 윤교수의 젊은 제자들이 몇몇이서 끼어들어 약간씩 돕긴 했지만 다들 얼마가지 않아서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나 혼자서 오륙년을 끌어가고 있었다. 유료有料였던 전자도서 발간에도 애를 썼다. 지금은 무료인지 모르겠다.
2006년 경, 나는 이민절차를 끝내고 한국을 떠나올 때, 한국전자문학도서관은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도 한국을 오며가며 2008년 5월호까지 발행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후 얼마가지 않아서 한국전자문학도서관을 인터넷 매체에 양하였다는 소식을 풍문風聞으로 들었고, 이어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자체가 중단돼버린 것 같았다.
그 일을 통해서도 나는 사람공부 세상공부를 했다. 얼핏 헛된 명예, 작품발표기회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가 떠나곤 했다.
◆ 시 〈2H₂+O₂=2H₂O〉로 하버드대학교 세계 번역대회 우승
2006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하버드대학교의 ‘세계번역대회’에서 김하나가 나의 시 〈2H₂+O₂=2H₂O〉등 17편을 묶어 번역한 것이 우승을 하였다. 그 소식을 안고 나의 이민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캐나다 한국일보에 작품발표도 시작하였다. 그 땐 가끔 수필도 섞었지만 주로 시詩였다.
〈권천학의 문학서재〉라는 고정 컬럼난도 생겼다.
2008년 5분짜리 단편영화 〈The Bangquit〉(감독-글로리아 영)에 출연하기도 했다. 단 5분짜리지만 나에겐 매우 귀한 경험이었고, 큰 즐거움이었다. 서툰 영어실력을 동원해야했던 그 5분짜리 영화 한편을 찍는데 하루 종일 걸렸고, 동원된 촬영차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비와 세트 그리고 한 치의 틈도 없이 보조를 맞춰가며 일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이론으로만 배웠던 영화는 ‘종합예술’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CD로 갖고 있다.
〈2H₂+O₂=2H₂O〉
산소 같은 여자와 수소 같은 남자
둘이 만나 물이 되었다.
상큼한 꿈과 폭발하는 힘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아득히 떠돌다가
운명의 어느 날
부딪쳐 소리 내고
부딪쳐 빛을 내면서
서로 뭉쳐
스미고 섞이면서
씻어주고 품어주면서
하늘에도 같이 오르고
선인장 가시에도 함께 이른다
엉기지 않았던들
힘없는 꿈과 꿈 없는 힘으로
각각의 미립자 너와 나로
무의미의 세포로 떠돌았을
푸르름과 뜨거움이 만나
물이 되었다
물이 되어
구름 위에서도 살고
꽃잎에서도 머문다.
〈2H₂+O₂=2H₂O〉
The woman like oxygen and the man like hydrogen,
the two met and became water.
Refreshing dream and explosive power
float afar with different names
one fateful day
they bump into each other
and make a sound
they bump into each other
and give off a light
they become a lump
and blend into each other
they clean and embrace each other
they rise into the sky together
and settle on the spine of the cactus together.
If they were not mixed,
they would float
as a powerless dream and a dreamless power,
as each corpuscle, you and I,
and as a meaningless cell.
But the greenness and hotness met
and became water.
They become water
live on the clouds
and stay on the flower petals.
(by Cheonhak Kwŏn, Translated by Hana Kim)
하버드대학교의 번역대회 우승이 번역자 ‘김하나’에게 매우 큰 영광이라는 것은 말할 것 없지만, 나에게도 매우 기쁜 일이었다. 특히 심사위원장인 스티븐 크레이머(Steven Cramer:시인, 레스리 대학의 예술학과 석사과정의 부장)의 심사평이 나에게는 더더욱 신나는 일이었다.〈37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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