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박
정 성 천
올여름은 무척 덥다. 예년 같으면 팔월 십오일 광복절이 지나면 더위가 한풀 꺾여 그나마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가 엊그제 지났건만 여전히 열대야로 밤잠을 설친다. “입추(立秋)는 배신해도 처서는 마법처럼 정확하다.”라는 말도 기후변화 소용돌이 속에서는 그 신통력을 잃은 것인지 더위가 물러갈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아내가 된장을 끓이려 하는지 애호박을 하나 따 오란다. 애호박을 따는 일은 풀숲을 헤집고 한참을 찾아다녀야 하니 여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 몫이다. 신발을 장화로 갈아 신고 호박 덩굴이 뻗어나간 뒷밭 풀숲으로 간다. 호박은 무더위에 잘 자라는지 올해에는 호박 덩굴이 다른 해보다 더 왕성하게 뻗어나가는 것 같다. 모종을 사 와서 심은 몇 포기의 호박 덩굴에 음식물 쓰레기장에서 버려져 자연 발아한 호박 덩굴까지 뒤엉켜 세력이 장난이 아니다. 감나무 밑을 점령한 덩굴은 작은 수로를 건너 산비탈 찔레 덤불 위까지 뻗었다.
며칠 전에 봐두었던 애호박을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왜 호박잎이 그렇게 넓으며 개수가 그렇게 많은지 애호박을 따는 경험을 해 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지고한 의무가 개체 번식이라는 명제를 새삼 일깨워준다. 호박은 자기가 맺은 열매를 번식 가능한 씨앗이 들어 있는 익은 누런 호박으로 키우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애호박으로 빼앗기기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잎을 커다랗게 덮고 애호박을 풀색으로 치장해서 바랭이 풀숲에 숨겨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사람들은 호박을 여린 애호박으로 먹기를 좋아한다. 나만 해도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애호박 국을 무척 좋아하고 비라도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에는 애호박으로 전을 부친 ‘달전’에 막걸리 한 사발 쫘아악 들이키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을 정도다. 동그란 보름달처럼 생겼다고 낭만적인 ‘달전’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겠지만 나는 대학생 시절 고향에 오면 어머니가 연탄 부엌 부뚜막에 앉아 부쳐주시던 ‘달전’을 먹고 처음 그 이름을 알았던 것 같다. 막걸리 안주에는 잘게 썬 생오징어가 들어간 당파전이 최상이지만 애호박전도 궁합이 썩 잘 맞는다.
풀숲을 꼬챙이로 헤치며 찾아보니 노랗게 익은 호박이 몇 개가 보인다. 더위 때문에 호박밭에 오지 않았던 며칠 사이에 미처 애호박으로 찾지 못했던 호박들이 노랗게 변한 것일 것이다. 색깔이 밝은 노란색이 되니 바랭이 풀숲 속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그런데 마치 호박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제는 씨가 번식할 수 있을 정도로 여물었으니 제발 따가서 멀리멀리 퍼뜨려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며칠 전에 너무 어려 따지 않고 두었던 호박을 바랭이 풀숲 속에서 어렵사리 하나 찾아냈다. 하지만 여린 애호박으로 된장에 넣어 먹기에는 좀 지난 것 같기도 하다. 아직 누런 호박이 되기 직전 녹색 기운이 조금 남아 있는 어정쩡한 상태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아직 익은 호박은 아니나 애호박으로 먹기에는 좀 지난 이런 호박도 옛날에는 훌륭한 반찬거리로 장만하였다. 호박을 잘게 썬 후 햇볕에 잘 말리면 호박오가리를 만들 수 있다. 호박오가리는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과 함께 먹는 묵은 나물 중 하나다. 물에 불린 호박오가리에 들깻가루를 묻혀 들기름으로 볶아내면 고기가 귀하던 시절 식감이 고기처럼 쫄깃한 묵나물이 된다.
애호박은 없고 누런 호박 몇 개만 풀숲에서 발견했다고 말하니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올해는 약초 넣고 호박즙을 짜서 딸내미와 나누어 먹는다고 늦가을까지 그놈들을 잘 보존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누런 호박즙은 어린이를 출산한 여성들에게 좋다고 옛날부터 전해오는 건강 요법이다. 아내와 딸내미는 개체 번식에 성공한 존재들이니 그럴 자격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호박은 존재의 성공을 거두는 샘이 된다. 개체 번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누런 호박이 개체 번식으로 약해진 여성들의 체력을 돕는다니 세상은 서로 통해 있다는 말이 새삼 머리에 떠오른다.
올 늦은 가을에는 호박즙을 만들기 위해 속을 파낸 호박 씨앗들은 우리 집 음식물 쓰레기장에 버려질 것이고 내년 봄에 또다시 싹이 틀 것이다. 그리고 애호박이 또 달리면 그 호박은 호박잎으로, 바랭이 풀숲으로 가리면서 애호박을 따려는 사람과 숨바꼭질을 하며 여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몇 놈은 발각되어 ‘달전’으로 부쳐져 안주로 사라지겠지만 몇 놈은 누렇게 익은 호박으로 개체 번식에 성공하게 될 것이고 자기의 육신은 다른 생명체의 영양분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하여 호박의 한 세상이 또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다를 게 있을까?
오늘 저녁에는 아무리 더워도 ‘달전’에 막걸리 한 사발 해야 쓰겠다.
첫댓글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하구려!
호박 부침개 안주 삼아.
올해 난 호박 농사 피농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