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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알아가기 (내셔날 트러스트 행사)
◇ 혜화문(惠化門) : 종로구 혜화동 34번지
- 한양도성의 4소문 중 북동쪽의 성문
동소문동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한양도성의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이 있었으나 일제 때 헐리고 도로가 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이 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원 위치인 도로 가운데에 세우려고 하였으나 교통에 저해되므로 조금 떨어진 북쪽에 1994년 말 복원하였다.
속칭 동소문으로 불리는 이 문은 동대문과 숙정문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문은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의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문은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같이 군사를 배치하여 파수하게 하였다. 특히 연산군을 축출하던 중종반정(中宗反正) 때에는 여러 성문 중에서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도록 명했는데, 이는 문 밖에 군대가 주둔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혜화문은 태조 5년(1396)에 한양도성을 축조하고 이곳에 성문을 낼 때 홍화문(弘化門)이란 이름으로 세워졌으나 도성 동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다. 그런데 조선 초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한 까닭에 동소문과 중복되므로 1511년(중종 6)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다.
조선 초에는 여진족 사신의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동대문 옆의 전일 이화여대 부속병원 자리에 있었다. 여진족이 서울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문루(門樓)를 세워놓아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淸)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이 전일의 명나라 사신과 같이 서대문으로 출입하면서부터 혜화문의 관리는 소홀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1744년(영조 20)에 국왕은 어영청(御營廳)에 하명하여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게 하고, 당시의 명필인 조강이(趙江履)가 쓴 ‘혜화문’이란 현판(懸板)을 새로 달게 하였다. 그런데 이 문의 문루의 천정에는 봉황(鳳凰)을 채색으로 그린 것이 특이하였다. 그 이유는 혜화문 밖 삼선평(三仙坪 : 지금의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일대)에 새가 많이 날라와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삼선평은 성북동부터 흘러 내려오는 성북천(城北川) 좌우의 평평한 저지대인데다가 부근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모래사장이어서 조선시대에는 군대의 연병장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국왕이 도성 내를 거둥하거나 궁궐 밖에서 자게 되는 경숙(經宿) 때에는 높은 산이나 고지대에 척후병을 두고, 통로에는 복병(伏兵)을 배치하는데 이곳 혜화문 성벽 위에도 도성 내 14군데와 같이 척후병을 두어 경비를 엄중히 하였다. 그리고 복병도 이 곳 혜화문 밖 삼거리 등 6군데에 배치하였다.
조선왕조 5백년간 의연히 서 있던 혜화문은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핑계와 건물이 퇴색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1928년에 문루(門樓)를 헐어내었다. 1939년에는 돈암동행 전차(電車)를 부설하면서 홍예문(돌로 된 아치 성문)마저 헐어버린 관계로 최근까지 혜화동, 동소문동이라는 동명(洞名)만 전해왔다.
◇ 한양도성 전시관(옛 서울시장 공관) : 종로구 혜화동 27-1(서울미래유산 2014-035)
- 혜화문 옆의 옛 서울시장 공관
옛 서울시장 공관은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1940년대 목조 건축물이다. 서울시는 2016년 10월에 전시관과 도성 탐방안내센터로 개관하였다.
이 건물은 일제 말기 1941년에 영화제작자 다나카 사브로(田中 三郎)가 건축하였고, 1941년~45년에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였던 하준석이 살았다. 광복 후에는 1955년~57년에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손원일 장군이 거주하였으며, 1957년~59년에 기업가 한석진이 살았다.
1959년부터 20년간은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어 4.19 혁명재판의 판결문이 작성되는 등 대한민국 사법부의 중요한 역사현장이었다. 또한, 1981년부터 2013년까지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돼 흔히 '옛 시장 공관'으로 불린다.
서울시는 "이곳은 한양도성 유산 구역 안에 자리하고 있지만, 2014년 부지 발굴 결과 한양도성에 직접적인 피해를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에 따라 건물과 장소의 역사성을 고려해, 철거하기보다는 리모델링 후에 한양도성 전시 · 안내센터로 활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2년여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지난해 새로 단장한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 서울시장공관)는 1,628㎡ 넓이의 대지에 전시관, 관리실, 순성 안내실 등 3동의 건물로 이뤄졌다. 전시관은 1∼4전시실과 영상실을 갖추고 한양도성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한 볼거리를 선보인다.
제1전시실은 한양도성·순성놀이·혜화문 등의 모형을 전시하고 있고, 제2전시실은 시장 공관과 한양도성의 이모저모를 보여준다. 제3전시실은 역대 시장 관련 자료·기증품·인터뷰 영상 등을 갖췄고, 제4전시실은 시장 공관 건축 연혁과 한양도성 관련 도서를 마련했다.
영상실에서는 공관 관련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영상과 서울시장 연표를 볼 수 있다.
특히 전시관 1층에는 카페가 마련돼 정원을 바라보면서 차 한 잔의 여유도 즐길 수 있다. 전시·안내센터 입구에는 한양도성 탐방객을 위한 순성 안내실이 자리하고 있어서 인근의 백악·낙산 구간 지도 등을 얻을 수 있다.
◇ 한양도성 암문(暗門)
- 한양도성의 출입을 쉽게 할 수 있는 사잇문
암문(暗門)은 성곽의 대문(大門)과 대문 사이에 위치한 작은 사잇문이므로 성곽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城門)이다. 이름 그대로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일반 성문보다 작고, 문루나 육축(陸築)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가축, 수레, 양식, 무기 등의 군수 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을 하거나 포위한 외적을 역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암문은 평지성보다는 산성(山城)에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형적으로 암문 설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암문은 성곽의 방어와 관련된 주요한 시설인 만큼 삼국시대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지만 산성의 기본적인 구조물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암문의 숫자는 성곽의 규모에 비례하기도 하지만 성곽의 규모보다는 지형적인 여건이 더 고려되었다. 암문은 여러 가지 효용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방어에 어려움이 커지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암문 내측에는 석축 옹벽이나 흙을 쌓아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워 암문이 폐쇄될 수 있게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 북정마을 : 성북구 성북로 23길 132-3
- ‘북적마을’이 변해서 북정마을이 되었다는 400가구의 마을
와룡공원으로 올라가는 급경사 계단 옆의 암문을 통해 한양도성 밖으로 빠져 나가면 바로 ‘북정마을’이다. 이곳이 오래된 동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포백(布帛) 훈조(熏造) 계(契)가 이곳에 있어서 인부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소리, 또는 메주를 쑬 때에 ‘북적북적’ 끓는 소리를 내서 ‘북적마을’이라고 부르다가 북정마을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물결이 거세던 광복 이후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정착하며 형성된 복정마을은 시간이 비껴간 듯 지금도 그때의 모습 그대로다. 도시 서민의 생활터전인 북정마을은 서울에 몇개 남지 않은 산동네 중의 하나이다. 마주치는 사람과 어깨가 스칠 것 같은 좁다란 골목길을 걷다보면 복잡한 현대의 삶에서 만날 수 없는 정겨움이 느껴진다.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고 있는 북정마을은 한양도성 백악구간 코스에 포함되어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尋牛莊’)과 연계하여 관광을 할 수 있다. 북정마을은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런 고유의 멋과 현대성이 어우러진 새로운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북정마을은 오래된 골목길의 정취를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양도성 백악구간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북정마을 꼭대기, 마을버스 종점에 도착하면 가게가 보인다. 겨울이면 이 앞에서 연예인들이 연탄 봉사를 하기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북정마을 카페도 있고, 이발관도 보인다.
성북동 북정마을은 서울시가 2013년 한 해 지역적 특성, 주민의 지혜와 역량을 마을 자원으로 활용해 공동체 의식을 이끌어내고, 지역 문제를 해결한 ‘2013 우수마을공동체’에 선정되었다. 2013년에 우수마을공동체로 선정된 곳은 성북구 ‘아름다운 북정마을’을 비롯해 7곳이었다.
아름다운 북정마을은 2012년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주민 간의 불신을 성북구에서 주최하는 ‘찾아가는 마을학교’ 교육을 받고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통해 해소해 나가고 있다.
400여 가구가 밀집한 북정마을은 마을회의를 통해 주민들 스스로가 ‘아름다운 북정’이라고 이름 짓고, 매월 1회 대청소를 실시해 더 살기 좋은 마을로 가꾸고 있다. 또 2013년 5월부터는 메주, 두부 만들기, 풍물 강습 등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 심우장 (尋牛莊) :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 1호(서울시 기념물 제7호)
- 3·1독립선언 33인의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살던 집
성북동 한옥 주택가 골목 안에는 3·1운동 때 33인 중의 한 사람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이 살던 심우장이 있다.
심우장은 건평 52㎡되는 작은 기와집으로 한용운 선생이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중풍으로 운명할 때까지 살았다. 이 집안의 오른쪽의 한용운 선생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한용운 선생의 아호 중에는 만해, 오세인(五歲人), 성북학인(城北學人),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이 있는데 그 중의 목부는 소를 키운다는 뜻으로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왕생(往生)의 그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의미심장한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으로 그의 수양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을 짓게 된 것은 한용운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자 오갈 데가 없는 것을 아는 김철중(金鐵中)씨가 성북동에 비어있는 그의 형 집에 임시로 머물게 하였다. 그 때 김벽산(金碧山) 스님이 이곳에 대지 52평을 사둔 것이 있으므로 이를 한용운 선생에게 제공하고 몇 칸 집을 지어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집을 지을 1,000원 정도의 돈이 없어 주저할 때 부인 유씨(兪氏)의 소지금 약간에다 조선일보사 방응모(方應謨) 사장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외에 금융조합에서 대부를 받아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용운 선생이 이 집을 지을 때 남향을 피해 북향으로 앉힌 것은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남쪽에 지어 놓았으므로 이것이 보기 싫다하여 등을 돌려 지은 것이다. 그 당시 소나무 숲에 지어진 이 집은 매우 한적하였다. 한용운선생은 청빈한 가운데에도 정원에 많은 화초를 가꾸는 것을 즐겼다. 지금도 당시에 그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높이 자라고 있어 옛 주인의 꿋꿋한 절의를 말해 주는 듯하다.
한용운 선생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에 망명하여 방랑하다가 1913년에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불교대전 ·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냈으며, 1916년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는 등 3·1운동 때는 불교계 대표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복역한 후 1926년에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뒤 신간회에 가담하였고,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월간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37년에는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 조종자로 체포되었다.
한편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심우장의 건너편 대교단지(大敎團地)에는 일본대사관저가 자리함으로써 이 집을 지키던 한용운 선생의 외동딸 한영숙씨가 이 집을 떠나 이사하였으므로 한 때 이 집을 만해사상연구소가 사용하였다. 최근 심우장 한옥채 옆에 2층 양옥이 세워짐에 따라 이곳을 찾는 뜻있는 사람들은 옛 모습이 변형된 것에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다.
◇ 마전 터 : 성북구 성북초등학교 앞
- 조선시대 선잠단 앞의 성북천에서 마전을 하던 터
성북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성북천의 상류 구간은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생업의 수단인 마전터, 아낙네들의 빨래터, 아이들의 놀이터 등으로 이용된 성북동 사람들의 중심 생활공간이었다.
마전은 생피륙을 삶거나 빨아서 볕에 바래는 일이다. 마전 터는 조선시대에 마전을 하던 현재 성북구 선잠단 앞의 성북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 영조 때에 도성의 방비를 위해 성북둔(城北屯)을 설치했으나 농토가 적고, 시장이 멀어 살기에 불편했던 이 지역 백성들의 생계를 위해 도성 안 시장에서 파는 포목을 마전[표백(漂白)]하는 권리를 주었다. 그로부터 성북동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합류되는 부근의 냇가를 ‘마전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1902년에는 성북동에 표백회사가 들어서 현재 성북초등학교 자리에 마전한 광목을 말리곤 했고, 운수교 자리에는 직조공장이 있었다. 광복 이후에는 직조 과정이 점차 기계화되면서 사람의 힘으로 마전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1970년대에 성북천 복개공사로 빨래터도 사라져 이제는 성곽 옆 ‘마전터’라는 음식점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1900년대 지도에 의하면 선잠단과 마전터를 중심으로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동소문과 가까운 성북천 주변은 아직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개간되지 않은 산간 지역으로 추정된다.
◇ 최순우(崔淳雨) 옛집 : 성북구 성북로 15길 9(국가등록문화재 제268호)
- 최순우 기념관이 된 최순우 옛집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1916∼1984) 옛집'은 대지 120평에 안채와 사랑채 등을 갖춘 1930년대 한옥으로, 건물 형태와 현판, 정원 등에 조선 말기 선비의 멋과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은 1976년에 최순우 선생이 구입하여 작고할 때까지 살았는데 그가 타계한 후에는 외동딸이 거주해 왔다. 최근 이곳에 다세대 주택 건립이 추진되면서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자 2002년 12월, 문화유산 보전운동 시민단체인 ‘한국내셔널 트러스트’가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건물을 매입함으로써 최순우 선생 옛집은 ‘시민 문화재 1호’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집은 혜곡 최순우기념관으로 시민들을 위한 전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고요한 산사(山寺)에 들어 선 기분이 든다. 이 집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던 곳으로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옛집의 은은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 집은 오색단청과 화려한 익공(翼拱)을 뽐내지는 않지만 수수한 조선 산수화를 보듯 옛집의 여유로움이 깊이 배어있다. 안채에 조심스레 발을 디뎌 보면 당시 살았던 선생의 마음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고개 흘끗 들어 창문을 바라보면 고운 가을 햇살을 한바구니 담아 뿌려 주고 있는 예쁜 미닫이창이 있고, 수묵화의 여백 미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작은 옛 장롱 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둘 수 있는 작은 마루가 기다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곳을 넓게 살펴보면 ‘ㄱ’ 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로 건물이 앉혀진 이른바 튼 ‘ㅁ’ 자 형으로 집 안쪽의 중심부에 작은 뜰이 있고, 안채 바깥쪽으로 작은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금 넓은 뒤뜰이 자리 잡고 있다.
뒤뜰에는 작은 석조물들이 바닥의 박석들을 따라 조심스레 펼쳐져 있다. 1년여의 보수공사로 새 단장을 한 이 집은 낡은 문을 떼어낸 자리에 새 문이 달리고, 기형적이었던 처마도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마당을 뒤덮었던 보도 블록 대신 돌과 흙을 깔아 조선 말기 선비 집의 운치를 고스란히 되살렸다.
집은 사람을 닮는다고 했던가? 최순우 옛집에는 말 그대로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달빛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을 미닫이창, 추녀 끝에 매달린 소방울, 바람 소리 그윽이 머금었을 산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마음이 고즈넉해진다.
안채에는 최순우 선생의 자필 원고와 안경, 라디오, 파이프 등의 유품이 상설 전시되어 조금이나마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지인들이 기증한 석상과 고가구 또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 기금 마련을 위해 윤광조, 김익영 씨 등 도예가들이 내놓은 백자(白瓷)들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