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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十三回 伍員吹簫乞吳市 專諸進炙刺王僚
제73회:오원이 오나라 저자에서 피리를 불며 구걸하고, 전제가 구운 생선을 드려 왕료를 찔러 죽이다.
話說,漁丈人已渡伍員,又與飲食,不受其劍。伍員去而復回,求丈人秘密其事,恐引追兵前至,有負盛意。漁翁仰天嘆曰:「吾為德於子,子猶見疑。倘若追兵別渡,吾何以自明?請以一死絕君之疑!」言訖,解纜開船,拔舵放槳,倒翻船底,溺於江心。史臣有詩云:「數載逃名隱釣綸,扁舟渡得楚亡臣,絕君後慮甘君死,千古傳名漁丈人。」至今武昌東北通淮門外,有解劍亭,當年子胥解劍贈漁父處也。伍員見漁丈人自溺,嘆曰:「我得汝而活,汝為我而死,豈不哀哉!」伍員與羋勝遂入吳境。行至溧陽,餒而乞食。
한편, 늙은 어부가 오원을 건네주고 또한 음식을 구해 주었지만, 사례로 주겠다는 칼은 받지 않았다. 오원은 어부와 헤어져 가다가 다시 돌아와 자기를 만난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추격병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어부의 두터운 정을 불신한 것이다. 어옹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해 말하기를, “내가 덕으로써 그대를 대했건만 그대는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있소. 만약에 초나라의 추격병이 따로 강을 건넌다면, 내가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어서 그대의 의심을 끊겠소!” 하고, 말을 마치자 벌이줄을 풀고 배를 띄어 키를 뽑고 노를 던지며 배를 뒤집어엎어서 물에 빠져 죽었다. 후세의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여러 해 이름을 숨기고 낚시하던 어부가, 초나라의 망명하는 신하를 편주로 강을 건너 주었다. 그대의 염려를 끊겠다며 기꺼이 죽었으니, 천고에 이름이 전해오는 고기잡이 늙은이라네.” 했다. 지금도 무창(武昌) 동북쪽의 통회문(通淮門) 밖에 해검정(解劍亭)이 있는데, 그때 오자서가 찬 칼을 풀어서 어부에게 주려고 했던 곳이다. 오원은 늙은 어부가 스스로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대 덕택에 살았는데, 그대는 나 때문에 죽었구나!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했다. 오원이 미승과 함께 마침내 오나라 지경에 들어가서 율양(溧陽)에 이르렀다. 그들은 주렸기 때문에 걸식을 했다.
遇一女子,方浣紗於瀨水之上,筥中有飯。伍員停足問曰:「夫人可假一餐乎?」女子垂頭應曰:「妾獨與母居,三十未嫁,豈敢售餐於行客哉?」伍員曰:「某在窮途,願乞一飯自活!夫人行賑恤之德,又何嫌乎?」女子抬頭看見伍員狀貌魁偉,乃曰:「妾觀君之貌,似非常人,寧以小嫌,坐視窮困?」於是發其簞,取盎漿,跪而進之。胥與勝一餐而止。女子曰:「君似有遠行,何不飽食?」二人乃再餐,盡其器。臨行謂女子曰:「蒙夫人活命之恩,恩在肺腑,某實亡命之夫,倘遇他人,願夫人勿言!」
그들은 뇌수(瀨水) 가에서 빨래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광주리에 밥이 있었다. 오원이 발길을 멈추고 묻기를, “부인께서 한 끼 밥을 줄 수 있습니까?” 하니, 여자가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기를, “첩은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서른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찌 감히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내가 곤궁한 처지라 한 끼 밥을 빌어서 목숨을 구하려고 합니다. 부인께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덕을 행하는데 어찌 예의를 따집니까?” 하니,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오원의 생김새가 크고 위엄이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제가 보니 그대의 모습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 작은 예의에 구애받아 곤궁한 처지를 앉아서 보기만 하겠습니까?” 했다. 이에 대광주리를 열고 간장 그릇과 함께 꿇어앉아 바쳤다. 오자서와 미승이 한 끼 밥을 먹고 그쳤다. 여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아마 멀리서 온 모양인데, 어찌하여 배불리 먹지 않습니까?” 하니, 두 사람은 곧 다시 먹어서 대광주리를 비웠다. 헤어지려는 순간에 여자에게 말하기를, “부인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구했으니 그 은혜를 가슴속에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실은 목숨을 구해 도망쳐 온 사람이라 만약 다른 사람을 만나면 제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했다.
女子淒然嘆曰:「嗟乎!妾侍寡母三十未嫁,貞明自矢,何期饋飯,乃與男子交言。敗義墮節,何以為人!子行矣。」伍員別去,行數步,回頭視之,此女抱一大石,自投瀨水中而死。後人有讚云:「溧水之陽,擊綿之女,惟治母餐,不通男語。矜此旅人,發其筐筥,君腹雖充,吾節已窳。捐此孱軀,以存壺矩,瀨流不竭,茲人千古!」伍員見女子投水,感傷不已,咬破指頭,瀝血書二十字於石上,曰: 爾浣紗,我行乞﹔我腹飽,爾身溺。十年之後,千金報德!」伍員題訖,復恐後人看見,掬土以掩之。
그 여자가 처연히 탄식하기를, “슬프다. 첩은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느라고 서른이 되도록 시집도 못 가고 몸을 곧고 밝게 가지기를 스스로 맹세했는데, 뜻밖에 나그네에게 밥을 바치고 남자와 말을 주고받았으니 예의와 절개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대는 가십시오.” 했다. 오원이 작별하고 몇 걸음 가다가 머리를 돌려 뒤돌아보니 그 여자가 큰 돌을 안고 뇌수에 빠져서 죽었다. 후세 사람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율수의 남쪽 강변에, 빨래하던 여인이 있었다. 오로지 모친을 봉양하느라, 남자와는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어, 대광주리를 열어 음식을 바쳤다. 그대는 배불리 먹었지만, 나의 절개는 이미 이지러졌도다. 가냘픈 몸을 강물에 던져,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밝혔도다. 뇌수가 흘러 마르지 않듯이, 이 여인의 절개는 천고에 빛나리.” 했다. 오원은 그 여자가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돌 위에 스무 자의 글을 썼다. ‘빨래하던 그대에게 내가 음식을 구걸하였다. 나는 배불리 먹고 그대는 물에 빠져 죽었네, 십 년 후에 천금으로 보답하리라!’ 오원이 글을 다 쓰고 나서 다시 사람들의 눈에 띌까 걱정되어 흙을 움켜서 덮었다.
過了溧陽,復行三百餘里,至一地,名吳趨。見一壯士,碓顙而深目,狀如餓虎,聲若巨雷,方與一大漢廝打。眾人力勸不止。門內有一婦人喚曰:「專諸不可!」其人似有畏懼之狀,即時歛手歸家。員深怪之,問於旁人曰:「如此壯士,而畏婦人乎?」旁人告曰:「此吾鄉勇士,力敵萬人,不畏強禦,平生好義,見人有不平之事,即出死力相為。適纔門內喚聲,乃其母也。所喚專諸,即此人姓名。素有孝行,事母無違,雖當盛怒,聞母至即止。」員嘆曰:「此真烈士矣!」次日,整衣相訪。專諸出迎,叩其來歷。員具道姓名,并受冤始末。
오원이 율양을 지나서 다시 300여 리를 가서 한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오추(吳趨)였다. 거기에서 한 장사를 보았는데,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가서 모양이 굶주린 호랑이 같고 목소리가 우레 같았다. 그가 바야흐로 덩치가 큰 사내와 싸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힘써 싸움을 말렸지만,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문안에서 한 부인이 부르기를, “전제(專諸)야, 싸우지 마라!” 하니, 그 사람은 마치 무섭고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즉시 손을 거두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원이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여 곁에 있던 사람에게 묻기를, “저 같은 장사가 부인을 두려워합니까?” 하니, 곁에 있던 사람이 알려주기를, “저 사람은 우리 마을의 용감한 장사요. 힘은 만인을 상대할 만하여 어떤 힘센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평생 의로운 일을 좋아하여 남의 불공평한 일을 보면 곧 사력을 다해서 싸웁니다. 조금 전에 문 안에서 부른 사람은 그의 어머니입니다. 전제라고 불렀는데 곧 그의 이름입니다, 평소에 효행이 있어 그 모친의 말을 어긴 적이 없으며 비록 그가 매우 노했지만, 모친의 말을 듣고 즉시 싸움을 그쳤습니다.” 오원이 찬탄하기를, “이 사람은 진실로 열사로다!” 했다. 다음날 오원은 옷을 가다듬고 전제의 집을 방문했다. 전제가 나와 맞이하며 그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오원이 자기의 성명을 말하고 아울러 억울한 일을 당한 전말을 이야기했다.
專諸曰:「公負此大冤,何不求見吳王,借兵報仇?」員曰:「未有引進之人,不敢自媒。」專諸曰:「君言是也。今日下顧荒居,有何見諭?」員曰:「敬子孝行,願與結交。」專諸大喜,乃入告於母,即與伍員八拜為交。員長於諸二歲,呼員為兄。員請拜見專諸之母。專諸復出其妻子相見,殺雞為黍,歡如骨肉。遂留員勝二人宿了一夜。次早,員謂專諸曰:「某將辭弟入都,覓一機會,求事吳王。」專諸曰:「吳王好勇而驕,不如公子光親賢下士,將來必有所成。」員曰:「蒙弟指教,某當牢記。異日有用弟之處,萬勿見拒!」專諸應諾。三人分別。
전제가 말하기를, “그대에게 그런 큰 원한이 있다면 어찌하여 오왕을 찾아뵙고 군사를 빌려 원수를 갚지 않으십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아직 나를 오왕에게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감히 스스로 찾아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런데 오늘 이렇게 누추한 곳을 찾아온 뜻은 무슨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그대의 효행을 내가 존경하여 교제를 맺고자 하오.” 했다. 전제가 크게 기뻐하며, 들어가 어머니에게 고하고 즉시 오원과 여덟 번 절하여 결의형제를 맺었다. 오원이 전제보다 두 살이 많아서 전제가 오원을 형님이라 불렀다. 오원이 전제의 어머니에게 절하여 뵈었다. 전제는 다시 그 처자를 나오게 하여 오원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고, 닭을 잡고 기장으로 밥을 지어 마치 골육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오원과 공자 승은 전제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오원이 전제에게 말하기를, “나는 장차 동생을 이별하고 오나라 도성에 들어가 기회를 찾아서 오왕을 섬길 작정이네.” 하니, 전제가 말하기를, “오왕은 용기를 좋아하고 교만합니다. 차라리 현자들과 친하고 선비들을 존대하는 공자 광(公子光)을 찾아가십시오. 장래에 반드시 이루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동생의 가르침을 마땅히 기억해 두겠네. 훗날에 내가 동생의 도움이 필요하여 부르면 절대 거절하지 말기를 바라네!” 하니, 전제가 응낙했다. 오원과 공자승은 전제와 작별했다.
員勝相隨前進,來到梅里,城郭卑隘,朝市粗立。舟車嚷嚷,舉目無親,乃藏羋勝於郊外,自己被髮佯狂,跣足塗面,手執斑竹簫一管,在市中吹之,往來乞食。其簫曲第一疊云:「伍子胥!伍子胥!跋涉宋鄭身無依,千辛萬苦淒復悲!父仇不報,何以生為?」第二疊云:「伍子胥!伍子胥!昭關一度變鬚眉,千驚萬恐淒復悲!兄仇不報,何以生為?」第三疊云:「伍子胥!伍子胥!蘆花渡口溧陽溪,千生萬死及吳陲,吹簫乞食淒復悲!身仇不報,何以生為?」市人無有識者。(時周景王二十五年,吳王僚之七年也。)
오원과 공자 승이 함께 매리(梅里)에 도착했는데 성곽은 낮고 좁았으며 거리도 엉성했다. 배들과 수레 소리는 시끄러웠으나 눈을 들어 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어 미승(羋勝)을 교외에 숨겨 놓고, 자기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하여, 맨발에 얼굴에는 칠을 하고 손에는 반죽(斑竹) 퉁소를 들고 시중에서 돌아다니며 그것을 불면서 걸식했다. 그 퉁소의 첫째 곡조에 이르기를, “오자서야! 오자서야! 산 넘고 물 건너 송나라와 정나라로 갔건만, 아무 데도 의탁할 곳이 없으니, 천신만고 끝에 처량하고 또 슬프구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살아서 무엇하리?” 했다. 둘째 곡조에 이르기를, “오자서야! 오자서야! 소관을 한번 넘다가 수염과 눈썹이 세었고, 수없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처량하고 또 슬프구나!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살아서 무엇하리?” 했다. 셋째 곡조에 이르기를, “오자서야! 오자서야! 갈대밭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율양의 냇가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에 도착했으나, 퉁소를 불며 구걸하니, 처량하고 또 슬프구나! 이 몸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살아서 무엇하리?” 했다. 그러나 저잣거리 사람들은 그 노랫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가 주경왕 25년으로 오왕 요(僚) 7년이었다.)
再說,吳公子姬光,乃吳王諸樊之子。諸樊薨,光應嗣位,因守父命,欲以次傳位於季札,故餘祭夷昧以次相及。及夷昧薨後,季札不受國,仍該立諸樊之後,爭奈王僚貪得不讓,竟自立為王。公子光心中不服,潛懷殺僚之意,其如群臣皆為僚黨,無與同謀,隱忍於中。乃求善相者曰被離,舉為吳市吏,囑以諮訪豪傑,引為己輔。一日,伍員吹簫過於吳市。被離聞簫聲甚哀,再一聽之,稍辨其音。出見員,乃大驚曰:「吾相人多矣,未見有如此之貌也!」乃揖而進之,遜於上坐。伍員謙讓不敢。
한편, 오나라 공자 희광(姬光)은 곧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이었다. 제번이 죽고 공자 광(光)이 당연히 자리를 이어야 했었다. 그러나 제번은 부왕의 유언을 지켜 왕위를 계찰(季札)에게 전하기 위해 형제들 순서대로 여제(餘祭)와 이매(夷昧)의 차례로 잇게 했다. 이매가 죽은 후에 계찰이 나라를 받지 않자 마땅히 제번의 아들을 세워야 했으나, 이매의 아들인 왕료가 욕심을 내어 왕위를 양보하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왕이 되었다. 공자 광이 마음속으로 승복을 하지 않고 몰래 왕료를 죽이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신하는 모두 왕료의 무리였기 때문에 같이 모의할 사람이 없어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관상을 잘 보는 피리(被離)라는 사람을 얻게 되어 그를 시장 관리로 천거하여 호걸들을 수소문하여 발견하면 데려와서 자기를 돕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는 오원이 퉁소를 불며 오나라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데, 피리(被離)가 퉁소 소리를 듣고 심히 애처로워 다시 한번 들어보니, 그 노랫말을 차츰 알아들을 수 있었다. 피리가 나와서 오원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가 관상을 본 사람은 많지만 이와 같은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하고, 읍을 하고 다가가서 상좌에 앉기를 청했다. 오원이 겸양하며 감히 상좌에 앉지 않았다.
被離曰:「吾聞楚殺忠臣伍奢,其子子胥出亡外國,子殆是乎?」員跼蹐未對。被離又曰:「吾非禍子者。吾見子狀貌非常,欲為子求富貴地耳。」伍員乃訴其實。早有侍人知其事,報知王僚。僚召被離引員入見。被離一面使人私報姬光得知,一面使伍員沐浴更衣,一同入朝,進謁王僚。王僚奇其貌,與之語,知其賢,即拜為大夫之職。次日,員入謝,道及父兄之冤,咬牙切齒,目中火出。王僚壯其氣,意復憐之,許為興師復仇。姬光素聞伍員智勇,有心收養他,聞先謁王僚,恐為僚所親用,心中微慍。
피리가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초나라에서 충신 오사를 죽이자 그 아들 오자서가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혹시 그대가 아닙니까?” 하니, 오원이 두렵고 조심스러워서 대답하지 못했다. 피리가 다시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해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그대의 관상을 보니 평범한 사람이 아니어서, 부귀할 수 있는 지위에 그대를 이끌어 드리려고 할 뿐입니다.” 했다. 오원이 이에 사실대로 호소했다. 그런데 어느새 시중드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오왕 요에게 알렸다. 오왕 요가 피리를 불러 오원을 데려오라고 했다. 피리는 한쪽으로는 사람을 시켜 희광(공자 광)에게 알리고 한쪽으로는 오원을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혀서 궁궐에 함께 들어가 오왕 요를 알현했다. 오왕 요가 오원의 얼굴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그와 말을 나누어 보고,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즉시 대부의 직에 임명했다. 다음날 오원이 입조하여 오왕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고 그의 부친과 형이 억울하게 죽은 일을 말하면서, 이를 갈고 눈에서 불이 나오는 듯이 했다. 오왕 요는 오원의 기개를 장하게 여기고 또한 그를 동정하여 군사를 일으켜 복수할 것을 허락했다. 희광은 평소에 오원의 지혜와 용기를 알고, 마음속으로 오원을 거두어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으나, 오원이 먼저 오왕 요를 알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왕 요가 친히 쓰지 않을까 걱정하여 마음에 약간 화가 났다.
乃往見王僚曰:「光聞楚之亡臣伍員,來奔我國,王以為何如人?」僚曰:「賢而且孝。」光曰:「何以見之?」僚曰:「勇壯非常,與寡人籌策國事,無不中窾,是其賢也。念父兄之冤,未曾須臾忘報,乞師於寡人,是其孝也。」光曰:「王許以復仇乎?」僚曰:「寡人憐其情,已許之矣。」光諫曰:「萬乘之主,不為匹夫興師。今吳楚搆兵已久,未見大勝。若為子胥興師,是匹夫之恨,重於國恥也。勝則彼快其憤,不勝則我益其辱,必不可!」王僚以為然,遂罷伐楚之議。伍員聞光之入諫,曰:「光方有內志,未可說以外事也。」乃辭大夫之職不受。
공자 광이 오왕 요를 뵙고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초나라의 망명객 오원이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다는데 왕께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어질고 효성 있는 사람이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무슨 연유로 그렇게 보십니까?”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그는 용기 있고 씩씩하기가 매우 비상한 사람이오. 과인이 그와 함께 나라의 일에 대해 한번 의논해 보니 그의 말이 적중하지 않는 게 없었소! 그러니 그가 어질고, 그의 부친과 형의 원한을 한시도 잊지 않고 나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고 하니 그래서 그가 효자라고 생각하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그가 원수를 갚을 수 있게 군사를 빌려주신다고 허락하셨습니까?”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과인은 그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이미 허락했소.” 했다. 공자 광이 간하기를, “만승의 군주께서 필부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오나라와 초나라는 전쟁을 벌인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크게 이기지 못했습니다. 만약 오자서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필부의 원한을 나라의 수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긴다면 오자서는 그의 원한을 통쾌하게 풀겠지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치욕을 더할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안 되는 일입니다.” 했다. 오왕 요가 옳다고 생각하여 즉시 초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취소했다. 오원은 공자 광이 들어가 간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공자 광이 속에 딴 뜻을 품었으니, 나라 밖의 일을 말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이에 대부의 직책을 사양했다.
光復言於王僚曰:「子胥以王不肯興師,辭職不受,有怨望之心,不可用之。」僚遂疏伍員,聽其辭去,但賜以陽山之田百畝。員與勝遂耕於陽山之野。姬光私往見之,饋以米粟布帛,問曰:「子出入吳楚之境,曾遇有才勇之士,略如子胥者乎?」員曰:「某何足道。所見有專諸者,真勇士也!」光曰:「願因子胥得交於專先生。」員曰:「專諸去此不遠,當即召之,明旦可入謁也。」光曰:「既是才勇之士,某即當造請,豈敢召乎?」乃與伍員同車共載,直造專諸之家。專諸方在街坊磨刀,為人屠豕,見車馬紛紛,方欲走避。
공자 광이 다시 오왕 요에게 말하기를, “자서는 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여 대부의 직을 받지 않으니, 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듯 합니다. 그를 쓰지 마십시오.” 했다. 오왕 요는 마침내 오원을 멀리하고 그가 사양한 대부의 직을 거둬들였다. 다만 양산(陽山)의 전답 100무(1무는 백평)만을 하사했다. 오원과 공자 승이 양산의 들판에서 밭을 갈았다. 희광(공자 광)이 몰래 오원을 찾아와 쌀과 비단을 주면서 묻기를, “그대가 오나라와 초나라의 경계를 넘어올 때 대략 그대와 비슷한 재주와 용기를 갖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족히 말할 바이겠습니까마는 전제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참으로 용사였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대가 전제를 소개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전제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니 지금 당장 부르면 내일이라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가 재주 있고 용감한 선비라면 내가 당장 가서 만나야지, 어찌 감히 그를 부르겠소?” 하고, 이에 오원과 함께 수레를 타고 곧 전제의 집으로 갔다. 전제는 그때 저잣거리에서 남을 위해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수레가 떠들썩하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피하려고 했다.
伍員在車上呼曰:「愚兄在此。」專諸慌忙停刀,候伍員下車相見。員指公子光曰:「此吳國長公子,慕吾弟英雄,特來造見,弟不可辭。」專諸曰:「某閭巷小民,有何德能,敢煩大駕。」遂揖公子光而進。篳門蓬戶,低頭而入。公子光先拜,致生平相慕之意。專諸答拜。光奉上金帛為贄,專諸固讓。伍員從旁力勸,方纔肯受。自此專諸遂投於公子光門下。光使人日饋粟肉,月給布帛,又不時存問其母。專諸甚感其意。一日,問光曰:「某村野小人,蒙公子豢養之恩,無以為報。倘有差遣,惟命是從。」光乃屏左右,述其欲刺王僚之意。
오원이 수레 위에서 부르기를, “어리석은 형이 여기 있네.” 하니, 전제가 허둥지둥 칼을 멈추고 오원이 수레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오원이 수레에서 내려 공자 광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분은 오나라의 공자 중 맏이시네. 동생의 영명한 이름을 듣고 특별히 찾아오셨으니 동생은 사양하지 말게.” 하니, 전제가 말하기를, “저는 시장의 골목에 사는 백성일 뿐입니다. 무슨 능력이 있다고 감히 어른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했다. 전제가 공자 광에게 읍을 하고 집안으로 안내했다. 사립문에 누추한 집이라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공자 광이 먼저 절하며 평생에 사모하던 뜻을 드러냈다. 전제가 답례했다. 공자 광이 가지고 온 황금과 비단을 폐백으로 주었으나 전제는 한사코 사양했다. 오원이 옆에서 힘써 권하자 그제서야 전제가 받았다. 이때부터 전제는 공자 광의 문하에 몸을 들이게 되었다. 공자 광이 사람을 시켜 날마다 양식과 고기를 보내고 달마다 면포와 비단은 보내 주었다. 또한 이따금 그 모친에게 문안을 드리곤 했다. 전제는 공자 광의 성의에 매우 감격했다. 어느 날 전제가 공자 광에게 묻기를, “저는 시골의 백성일 뿐인데, 공자님께서 보살펴 주는 은혜를 입었으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에 저에게 시킬 일이 있다면 오로지 공자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이에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그가 오왕 요를 죽이려는 뜻을 말했다.
專諸曰:「前王夷昧卒,其子分自當立,公子何名而欲害之?」光備言祖父遺命,以次相傳之故:「季札既辭,宜歸適長。適長之後,即光之身也。僚安得為君哉?吾力弱不足以圖大事,故欲借助於有力者。」專諸曰:「何不使近臣從容言於王側,陳前王之命,使其退位?何必私備劍士,以傷先王之德?」光曰:「僚貪而恃力,知進之利,不能退讓,若與之言,反生忌害。光與僚勢不兩立!」專諸奮然曰:「公子之言是也。但諸有老母在堂,未敢以死相許。」光曰:「吾亦知爾母老子幼,然非爾無與圖事者。苟成其事,君之子母,即吾子母也,自當盡心養育,豈敢有負於君哉?」
전제가 말하기를, “선왕이신 이매가 죽고 그 아들이 당연히 이었는데 공자께서는 무슨 명분으로 그를 해치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자 광은 조부 수몽이 그 아들 형제에게 순서대로 왕위를 전하라고 한 유언을 상세하게 말하면서, “숙부 계찰이 이미 왕위를 사양했으니 당연히 적장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고, 적장자의 후손은 바로 나입니다. 오왕 요가 어찌 왕이 될 수 있겠소? 내가 힘이 약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없어서, 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공자께서는 근신을 시켜 왕의 측근에게 조용히 말하여 전왕의 명을 밝혀서 왕을 퇴위하도록 하지 않고, 하필 비밀리에 자객을 고용하여 선왕의 덕을 해치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오왕 요는 욕심이 많고 세력을 믿어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사람이오. 만약 그 말을 했다가는 도리어 그가 나를 해치려 할 것이오. 이 광과 요는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했다. 전제가 분연히 말하기를, “공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노모가 계시니, 목숨을 바쳐 일을 돕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그대의 모친이 늙고 아들이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가 아니면 이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소. 만약 이 일이 성사되면 그대의 아들과 모친은 바로 나의 아들과 모친이 될 것이오. 내가 마음을 다하여 노모를 봉양하고 아들을 양육할 것이니, 어찌 감히 그대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소?” 했다.
專諸沉思良久,對曰:「凡事輕舉無功,必圖萬全。夫魚在千仞之淵,而入漁人之手者,以香餌在也。欲刺王僚,必先投王之所好,乃能親近其身。不知王所好何在?」光曰:「好味。」專諸曰:「味中何者最甘?」光曰:「尤好魚炙。」專諸曰:「某請暫辭。」公子光曰:「壯士何往?」專諸曰:「某往學治味,庶可近吳王耳。」專諸遂往太湖學炙魚。凡三月,嘗其炙者,皆以為美。然後復見姬光,光乃藏專諸於府中。髯翁有詩云:「剛直人推伍子胥,也因獻媚進專諸。欲知弒械從何起?三月湖邊學炙魚。」
전제가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무릇 일이란 가볍게 움직이면 공을 세우지 못하는 법이니 반드시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천 길 깊은 연못의 고기도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은 향기로운 미끼 때문입니다. 왕료(오왕 요)를 찌르려면 반드시 왕료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주고 이어서 그 옆에 가까이 접근해야 합니다. 혹시 왕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요.”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음식 중에서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합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구운 생선이오.”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제가 잠시 하직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했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장사는 어디로 가려고 하오?” 하니, 전제가 말하기를, “제가 가서 맛을 내는 것을 배워야만 오왕의 곁에 갈 수 있습니다.” 했다. 전제가 즉시 태호(太湖)에 가서 생선 굽는 것을 배웠다. 대체로 석 달이 지나서 그가 구운 생선을 맛본 사람들이 모두 맛이 훌륭하다고 했다. 그런 뒤에 다시 희광(공자 광)을 찾아왔다. 공자 광은 곧 전제를 부중에 숨겼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강직한 사람이라고 오자서를 추천하지만, 그도 전제를 바쳐 아첨했구나. 시해 음모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석 달 동안 호반에서 생선 굽기를 배울 때부터라고.” 했다.
姬光召伍子胥,謂:「專諸已精其味矣,何以得近吳王?」員對曰:「夫鴻鵠所以不可制者,以羽翼在也。欲制鴻鵠,必先去其羽翼。吾聞公子慶忌,筋骨如鐵,萬夫莫當,手能接飛鳥,步能格猛獸。王僚得一慶忌,旦夕相隨,尚且難以動手。況其母弟掩餘燭庸並握兵權,雖有擒龍搏虎之勇,鬼神不測之謀,安能濟事。公子欲除王僚,必先去此三子,然後大位可圖。不然,雖幸而成事,公子能安然在位乎?」光俛思半晌,恍然曰:「君言是也。且歸爾田,俟有閒隙,然後相議耳。」員乃辭去。
희광(공자 광)이 오자서를 불러 말하기를, “전제는 이미 그 맛에 정통했는데 어떻게 오왕 가까이에 갈 수 있겠소?” 하니, 오원이 대답하기를, “무릇 사람들이 기러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은 기러기에게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러기를 잡으려면 반드시 먼저 그 날개를 없애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 왕료의 아들 경기(慶忌)는 근골이 쇠처럼 강하여 만 사내가 당하지 못하고 손으로 능히 날아가는 새를 잡을 수 있고, 발로 맹수를 찬다고 합니다. 왕료가 경기를 늘 곁에 데리고 있으니 손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의 동모제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이 오나라의 병권을 장악하여, 비록 용을 붙들고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용기와 귀신도 모르는 꾀가 있다 한들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왕료를 죽이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이 세 사람을 없앤 연후에 왕위를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비록 다행히 일이 이루어져도 공자께서 능히 편안히 왕위에 있겠습니까?” 했다. 공자 광이 머리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문득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잠시 영지에 돌아가서 한가로운 틈을 기다린 다음에 상의하기로 합시다. ” 했다. 오원이 이에 작별 인사를 하고 양산(陽山)으로 갔다.
是年,周景王崩。有嫡世子曰猛,次曰匄,長庶子曰朝。景王寵愛朝,囑於大夫賓孟,欲更立世子之位,未行而崩。劉獻公摯亦卒,子劉卷字伯蚡嗣立。素與賓孟有隙,遂同單穆公旗殺賓孟,立世子猛,是為悼王。尹文公固、甘平公鰌、召莊公奐,素附子朝,三家合兵,使上將南宮極率之以攻劉卷。卷出奔揚,單旗奉王猛次於皇。子朝使其黨鄩肹伐皇,肹敗死。晉頃公聞王室大亂,遣大夫籍談荀躒帥師納王於王城。尹固亦立子朝於京。未幾,王猛病卒,單旗劉卷復立其弟匄,是為敬王,居翟泉。周人呼匄為東王,朝為西王。二王互相攻殺,六年不決。
그해에 주(周)나라 경왕(景王)이 죽었다. 경왕에게는 정비 소생인 세자 맹(猛)과 차자 개(匄)가 있고, 서자이지만 맏이인 조(朝)가 있었다. 경왕이 조(朝)를 총애하여 대부 빈맹(賓孟)에게 부탁하여 세자의 자리를 바꾸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일을 못하고 죽었다. 유헌공(劉獻公) 지(摯) 또한 죽자, 그 아들 유권(劉券)은 자가 백분(伯蚡)인데 자리를 이어받았다. 평소에 빈맹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유권은 마침내 선목공(單穆公) 기(旗)와 공모하여 빈맹을 죽이고 세자 맹을 주왕으로 세웠다. 이가 주도왕(周悼王)이다. 평소에 왕자 조(朝)와 사이가 좋았던 윤문공(尹文公) 고(固), 감평공(甘平公) 추(鰌), 소장공(召莊公) 환(奐)은 세 집안의 가병을 모아 상장 남궁극(南宮極)에게 주어 유권 일당을 공격하도록 했다. 유권은 양(揚) 땅으로 도망치고, 선기(單旗)는 왕맹(王猛)을 모시고 황(皇) 땅으로 도망쳤다. 왕자 조가 그의 무리에 속하는 심힐(鄩肹)을 시켜 황(皇) 땅에 가 있는 왕맹과 선기를 토벌하도록 했으나 심힐은 싸움에 패하여 죽었다. 진(晉)나라 경공(頃公)은 왕실에 대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대부 적담(籍談)과 순력(荀躒)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왕[王猛]을 왕성으로 모시게 했다. 윤고도 역시 왕자 조를 경(京) 땅에서 주왕으로 세웠다. 얼마 되지 않아 왕맹(王猛)이 병들어 죽자, 선기와 유권이 다시 그의 동생 왕자 개(匄)를 주왕으로 세워 적천(翟泉)의 땅에 머물렀다. 이가 주경왕(周敬王)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왕개(匄)를 동왕(東王)이라 하고, 왕자 조를 서왕(西王)이라고 했다. 두 왕이 서로 싸워 죽이기를 6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召莊公奐卒,南宮極為天雷震死,人心聳懼。晉大夫荀躒,復率諸侯之師,納敬王於成周,擒尹固,子朝兵潰。召奐之子嚚反攻子朝,朝出奔楚,諸侯遂城成周而還。敬王以召嚚為反覆,與尹固同斬於市,周人快之。此是後話。且說.周敬王即位之元年,吳王僚之八年也。時楚故太子建之母在鄖,費無極恐其為伍員內應,勸平王誅之。建母聞之,陰使人求救於吳。吳王僚使公子光往鄖取建母,行及鐘離,楚將薳越帥師拒之,馳報郢都。平王拜令尹陽匄為大將,并徵陳、蔡、胡、沈、許五國之師。胡子名髡,沈子名逞,二君親自引兵。
소장공 환이 병으로 죽고, 남궁극이 벼락에 맞아 죽자, 인심이 벌벌 떨며 두려워했다. 진(晉)나라 대부 순력(荀躒)이 다시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경왕을 성주(낙양 근처)로 들이고 윤고(尹固)를 사로잡자, 왕자 조의 군사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소환의 아들 소은(召嚚)은 도리어 왕자 조를 공격하자, 왕자 조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제후들은 성주(成周)에 성을 다시 쌓고 돌아갔다. 주나라 경왕은 소은의 반복된 배신을 벌하여 윤고와 함께 저잣거리에서 참수하니, 주나라 사람들이 통쾌해했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한편, 주경왕(周敬王) 즉위 원년이며 오나라 왕료 재위 8년에 초나라 태자 건의 생모는 운(鄖) 땅에 살고 있었는데, 비무극이 그녀가 오원과 내응할 것을 걱정하여 평왕을 권하여 잡아다가 죽이려고 했다. 태자 건의 모친이 알고 몰래 사람을 오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오왕 요가 공자 광에게 군사를 주어 운(鄖)에 가서 태자 건의 모를 모셔 오라고 했다. 공자광의 군사들이 종리(鍾離)에 이르자 초나라 장수 원월(薳越)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자 광의 앞길을 막고 영도에 사람을 보내 보고했다. 초평왕은 영윤 양개(陽匄)를 대장으로 삼아 진(陳), 채(蔡), 호(胡), 심(沈), 허(許) 등 다섯 나라의 군사를 동원했다. 호(胡) 나라의 군주 곤(髡)과 심(沈) 나라의 군주 영(逞)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陳遣大夫夏齧,頓胡二國,亦遣大夫助戰。胡、沈、陳之兵營於右,頓、許、蔡之兵營於左,薳越大軍居中。姬光亦馳報吳王。王僚同公子掩餘率大軍一萬,罪人三千,來至雞父下寨。兩邊尚未約戰,適楚令尹陽匄暴疾卒,薳越代領其眾,姬光言於王僚曰:「楚亡大將,其軍已喪氣矣。諸侯相從者雖眾,然皆小國,畏楚而來,非得已也。胡沈之君,幼不習戰。陳夏齧勇而無謀。頓、許、蔡三國久困楚令,其心不服,不肯盡力。七國同役而不同心,楚帥位卑無威,若分師先犯胡沈與陳,必先奔。諸國乖亂,楚必震懼,可全敗也。請示弱以誘之,而以精卒持其後。」
진(陳)나라는 대부 하설(夏齧)을 보냈으며, 돈(頓), 호(胡) 두 나라도 대부를 보내어 싸움을 돕도록 했다. 호(胡), 심(沈), 진(陳) 세 나라의 병사들은 오른쪽에 진영을 세우고, 돈, 허, 채 세 나라의 병사들은 왼쪽에 진영을 세웠으며, 원월의 초나라 대군은 중간에 진을 쳤다. 오나라 희광(공자 광)도 본국에 급보를 띄우니, 오왕 요가 공자 엄여와 함께 만 명의 대군과 죄인 3천 명을 거느리고 계보(鷄父)에 이르러 진영을 세웠다. 양쪽에서 아직 교전을 정하기도 전에 초나라 영윤 양개(陽匄)가 폭질로 죽으니, 원월이 대신하여 군사들을 거느렸다. 희광(공자 광)이 왕료에게 말하기를, “초나라의 대장이 죽어 군사들의 사기가 이미 꺾였습니다. 제후들이 이끌고 온 군사들이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모두 소국이라 초나라가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온 것입니다. 호나라와 심나라의 군주는 어리고 전쟁에 익숙지 않습니다, 진(陳)나라의 하설은 용감하나 무모합니다. 돈나라, 허나라, 채나라 삼국은 오랫동안 초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 마음속으로 불복하고 있어서 힘을 다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일곱 나라가 함께 참전하기는 했으나 마음이 한결같지 않고 초나라 장수의 직위는 낮고 위엄이 없습니다, 만약 군사를 나누어 먼저 호나라, 심나라, 진나라 군사를 치면 틀림없이 먼저 달아날 것입니다. 제후국 군사들이 무너지면 초나라 군사들도 반드시 두려워하여 전패할 것입니다. 청컨대 우리의 약함을 보여 적군을 유인하고 정예병을 후방에 두십시오.” 했다.
王僚從其計。乃為三陣,自率中軍,姬光在左,公子掩餘在右,各飽食嚴陣以待。先遣罪人三千,亂突楚之右營。時秋七月晦日,兵家忌晦,故胡子髡沈子逞及陳夏齧,俱不做整備﹔及聞吳兵到,開營擊之。罪人原無紀律,或奔或止﹔三國以吳兵散亂,彼此爭功追逐,全無隊伍。姬光帥左軍乘亂進擊,正遇夏齧,一戟刺於馬下。胡沈二君心慌,奪路欲走。公子掩餘右軍亦到,二君如飛禽入網,無處逃脫,俱為吳軍所獲。軍士死者無數,生擒甲士八百餘人。姬光喝教將胡沈二君斬首。卻縱放甲士,使奔報楚之左軍,言:「胡沈二君及陳大夫俱被殺矣!」
왕료(오왕 요)가 그 계책에 따라 즉시 오나라 군사들을 3대로 나누어 스스로 중군을 거느리고, 희광(공자 광)은 좌군을, 공자 엄여는 우군을 거느리게 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진영을 굳게 지켜 대기하도록 했다. 먼저 죄인 3천 명을 출전시켜 초나라 우측 진영을 어지럽게 치고 들어갔다. 그때는 가을 7월 그믐이라 군대에서는 그믐을 꺼려서, 호나라 곤(髡)과 심나라 영(逞), 진(陳)나라 하설이 모두 준비가 없었다. 오나라 병사들이 돌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세 나라의 군사들은 진영의 문을 열고 적군을 맞이해 싸우려고 했다. 죄인들은 원래 기율이 없어서 어떤 자는 달리고 어떤 자는 멈추니, 세 나라 병사들은 오나라 군사가 산만하고 어지러워 피차간 공을 쫓았지만 전혀 대오도 갖추지 않았다. 희광(공자 광)이 좌군을 거느리고 혼란한 틈을 타서 진격하다가 하설을 만나, 극을 한번 휘둘러 하설을 말 아래 떨어뜨렸다. 호나라와 심나라 두 군주는 마음이 황망하여 활로를 찾아 달아나려고 했다. 공자 엄여가 거느린 우군이 도착하여, 두 군주는 마치 그물에 걸린 새처럼 도망칠 수가 없어 모두 오나라 군사들에게 잡혔다. 세 나라 군사들이 셀 수 없이 죽었고 사로잡힌 군사들이 8백여 명이었다. 희광(공자 광)이 소리쳐 호나라와 심나라 두 군주를 끌어내어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사로잡은 군사들은 풀어 주며 초나라 좌군으로 달아나게 하여 말을 전하게 하기를, “호나라, 심나라 두 군주와 진(陳)나라 대부가 모두 죽었다.”라고 하게 했다.
許、蔡、頓三國將士,嚇得心膽墮地,不敢出戰,各尋走路。王僚合左右二軍,如泰山一般倒壓下來。中軍薳越未及成陣,軍士散其大半。吳兵隨後掩殺,殺得屍橫遍野,流血成渠。薳越大敗,奔五十里方脫。姬光直入鄖陽,迎取楚夫人以歸。蔡人不敢拒敵。薳越收拾敗兵,止存其半,聞姬光單師來鄖陽取楚夫人,乃星夜赴之。比及楚軍至蔡,吳兵已離鄖陽二日矣。薳越知不可追,仰天嘆曰:「吾受命守關,不能緝獲亡臣,是無功也。既喪七國之師,又失君夫人,是有罪也。無一功而負二罪,何面復見楚王乎?」遂自縊而死。
허, 채, 돈 세 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은 놀라 간담이 떨어져서 감히 나가 싸울 생각을 못하고 각기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 왕료가 좌우의 두 부대를 합쳐 태산과 같은 기세로 압도해 왔다. 초나라 중군 원월이 미처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군사들 태반이 흩어져 버렸다. 오나라 병사들이 그 뒤를 쫓아 초나라 군사를 무찌르니,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고 흐르는 피는 내를 이루었다. 원월이 크게 패하여 50여 리를 달아나 겨우 추격에서 벗어났다. 희광(공자 광)이 바로 채나라 운양으로 들어가서 태자 건의 생모인 초부인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왔다. 채나라 사람들은 오나라 군사들을 감히 막지 못했다. 원월이 패잔병을 수습하니 원래 병력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공자 광이 휘하 좌군을 이끌고 운양으로 초부인을 데리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밤낮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가 채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군사들은 이미 운양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원월은 오나라 군사를 추격할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기를, “내가 소관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도망치던 신하를 잡지 못했으니 이것은 공이 없음이요, 이미 일곱 나라의 군사를 잃고, 또 군부인까지도 놓쳤으니 이것은 죄가 있음이다. 공은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지은 죄가 두 가지나 되니, 무슨 면목으로 초나라 왕을 다시 볼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원월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楚平王聞吳師勢大,心中甚懼,用囊瓦為令尹,以代陽匄之位。瓦獻計謂郢城卑狹,更於其東闢地,築一大城,比舊高七尺,廣二十餘里,名舊城為紀南城,以其在紀山之南也﹔新城仍名郢,徙都居之。復築一城於西,以為右臂,號曰麥城。三城似品字之形,聯絡有勢,楚人皆以為瓦功。沈尹戍笑曰:「子常不務修德政,而徒事興築,吳兵若至,雖十郢城何益哉?」囊瓦欲雪雞父之恥,大治舟楫,操演水軍。三月,水手習熟,囊瓦率舟師,從大江直逼吳疆,耀武而還。吳公子光聞楚師犯邊,星夜來援,比至境上,囊瓦已還師矣。姬光曰:「楚方耀武而還,邊人必不為備。」乃潛師襲巢滅之,并滅鐘離,奏凱而歸。
초평왕은 오나라 군세가 크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워하여, 낭와(囊瓦)를 영윤으로 삼아 양개(陽匄)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낭와가 초평왕에게 계책을 올려 영성(郢城)은 낮고 좁아서 그 동쪽 땅에 큰 성을 쌓았다. 옛 성보다 높이가 일곱 자가 높고 넓이가 20여 리나 넓었는데, 옛 성은 기산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기남성(紀南城)이라 부르고, 새 성의 이름은 영성이라고 하여 도읍을 옮겼다. 다시 서쪽에 한 성을 쌓아 오른팔로 삼아 맥성(麥城)이라고 불렀다. 세 성이 마치 품(品)자 모양이 되어 서로 연락 호응하는 형세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를 낭와의 공이라고 말했다. 심윤수(沈尹戍)가 웃으며 말하기를, “자상(낭와)이 덕으로써 정사를 돌보지 않고, 헛되이 토목 공사를 일으키니, 만약 오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면 비록 영성이 10개가 있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했다. 낭와가 계보(雞父)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전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고 수군을 조련시켰다. 3개월이 지나자 수군들이 익숙해졌다. 낭와가 수군을 인솔하여 장강의 흐름을 타고 오나라 경계까지 갔다가 무력을 시위하고 돌아왔다. 오나라 공자 광은 초나라 군사가 변경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도우러 왔으나, 오나라 경계에 이르렀을 때 낭와는 이미 군사를 돌이킨 뒤였다. 희광(공자 광)이 말하기를, “초나라가 방금 무력을 시위하고 돌아갔으니 초나라의 변경 군사들의 경계가 틀림없이 느슨해졌을 것이다.” 하고, 비밀리에 행군하여 소(巢) 땅을 기습하여 멸하고, 아울러 종리(鍾離)를 멸한 후에 개선하여 돌아갔다.
楚平王聞二邑被滅,大驚,遂得心疾,久而不愈。至敬王四年,疾篤,召囊瓦及公子申,至於榻前,以太子珍囑之,而薨。囊瓦與郤宛商議曰:「太子珍年幼,且其母乃太子建所聘,非正也。子西長而好善,立長則名順,建善則國治,誠立子西,楚必賴之。」郤宛以囊瓦之言,告於公子申。申怒曰:「若廢太子,是彰君王之穢行也。太子秦出,其母已立為君夫人,可謂非嫡嗣乎?棄嫡而失大援,外內惡之。令尹欲以利禍我,其病狂乎?再言及,吾必殺之!」囊瓦懼,乃奉珍主喪即位,改名曰軫,是為昭王。囊瓦仍為令尹,伯郤宛為左尹,鄢將師為右尹,費無極以師傅舊恩,同執國政。
초평왕은 두 고을이 전멸됐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아 마침내 병을 얻어 오래되어도 낫지 않았다. 주경왕 4년(기원전 516년)에 이르러 초평왕의 병세가 위독하여 낭와와 공자 신(公子申)을 침상 앞으로 불러 태자 진(太子珍)을 부탁하고 죽었다. 낭와가 극완과 상의하기를, “태자 진은 나이가 어리고 또한 그의 모친이 태자 건의 부인으로 데려온 여자이므로 올바른 후사가 아닙니다. 자서(子西 ; 공자 신)가 나이도 많고 선(善)을 좋아합니다. 장자를 세우는 일은 명분도 순조롭고 착한 사람을 세워야 나라가 잘 다스려집니다. 진실로 자서를 세워야 초나라의 사직이 의지할 만할 것이오.” 했다. 극완이 낭와가 한 말을 공자 신에게 전했다. 공자 신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만약 태자를 폐한다면 군왕의 더러운 행위를 널리 알리는 것이 됩니다. 태자는 진(秦)에서 온 여인의 소생이고 그의 모친은 이미 군부인이 되었으니 어찌 적자가 아니라고 하겠소? 적자를 버려서 큰 지원국을 잃으면 나라 안팎에서 미워할 것이오. 영윤이 이익으로써 나를 재앙에 끌어들이려고 하니 그가 미쳤소? 다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반드시 그를 죽이겠소!” 했다. 낭와가 두려워하여 이에 태자 진을 받들어 초평왕의 장례를 주관하게 하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름을 진(軫)으로 바꾸니, 이가 곧 초소왕(楚昭王)이다. 낭와는 그대로 영윤이 되고, 백극완은 좌윤이 되었으며, 언장사는 우윤이 되고, 비무극은 사부로서 옛 은혜가 있어 함께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卻說,鄭定公聞吳人取楚夫人以歸,乃使人賷珠玉簪珥追送之,以解殺建之恨。楚夫人至吳,吳王賜宅西門之外,使羋勝奉之。伍員聞平王之死,捶胸大哭,終日不止。公子光怪而問曰:「楚王乃子仇人,聞死當稱快,胡反哭之?」員曰:「某非哭楚王也。恨吾不能梟彼之頭,以雪吾恨,使得終於牖下耳。」光亦為嗟嘆。胡曾先生有詩曰:「父兄冤恨未曾酬,已報淫狐獲首邱﹔手刃不能償夙願,悲來霜鬢又添秋。」伍員自恨不能及平王之身,報其仇怨,一連三夜無眠,心中想出一個計策來,謂姬光曰:「公子欲行大事,尚無間可乘耶?」光曰:「晝夜思之,未得其便。」
한편, 정정공(鄭定公)은 오나라 사람들이 초부인을 데려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주옥으로 만든 비녀와 귀걸이를 보내어 태자 건을 정나라에서 죽인 한을 달래게 하였다. 초부인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오왕 요가 도성의 서문 밖에 큰집을 주어 미승이 모시게 했다. 오원은 초평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하면서 종일 그치지 않았다. 공자 광이 괴이히 여겨 묻기를, “초평왕은 곧 그대의 원수인데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땅히 통쾌할 일인데 어찌 도리어 통곡을 하시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나는 초평왕의 죽음을 통곡하는 것이 아니오. 내가 그의 머리를 베어 효수하여 나의 한을 풀지 못하고, 그가 방안에서 죽은 것이 원통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했다. 공자 광도 역시 탄식했다. 호증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부친과 형님의 원한을 미처 갚지도 못했는데, 이미 음탕한 도적은 자기의 안식처에서 죽었구나! 손에 들고 있던 칼로 사무친 원한을 갚을 수 없어, 흰 귀밑머리에 또 세월만 지나가니 슬프구나.” 했다. 오원이 직접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3일 밤을 자지 않고 마음속으로 한 가지 계책을 내어 희광(공자 광)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큰일을 행하려고 하면서 아직 그 기회를 잡지 못하셨습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밤낮으로 궁리를 하고 있으나 아직 기회를 얻지 못했소.” 했다.
員曰:「今楚王新歿,朝無良臣,公子何不奏過吳王,乘楚喪亂之中,發兵南伐,可以圖霸?」光曰:「倘遣吾為將,奈何?」員曰:「公子誤為墜車而得足疾者,王必不遣。然後薦掩餘燭庸為將,更使公子慶忌結連鄭衛,共攻楚國,此一網而除三翼,吳王之死在目下矣。」光又問曰:「三翼雖去,延陵季子在朝,見我行篡,能容我乎?」員曰:「吳晉方睦,再令季子使晉,以窺中原之釁。吳王好大而疏於計,必然聽從。待其遠使歸國,大位已定,豈能復議廢立哉?」光不覺下拜曰:「孤之得子胥,乃天賜之!」
오원이 말하기를, “지금 초나라는 왕이 막 죽었고, 조정에는 지모 있는 신하가 없습니다.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오왕에게 상주하여 초나라의 상을 틈타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쳐서 패권을 도모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만약 나를 대장으로 보내면 어찌하오?”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실수한 척하여 수레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시면 오왕은 틀림없이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엄여와 촉용을 대장으로 추천하고, 다시 공자 경기(慶忌)를 정나라와 위(衛)나라에 보내 그들과 결맹하여 초나라를 함께 공격하게 하면, 이것은 한 개의 그물에 세 마리 새를 잡는 것이니 오왕의 죽음은 목전의 일이 될 것입니다.” 했다. 공자 광이 또 묻기를, “세 날개가 비록 제거되어도, 연릉(延陵)의 계자(季子)가 아직 조정에 있는데, 나의 찬탈 행위를 보고 능히 나를 용납하겠소?”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오나라와 진(晉)나라는 서로 화목하게 지냅니다. 다시 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중원의 정세를 엿보라고 하십시오. 오왕은 큰일을 좋아하고 계책에 소홀하니 틀림없이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계자가 먼 나라로 사신으로 갔다고 귀국할 때쯤이면 왕위는 이미 정해졌을 것이니 어찌 그가 다시 폐립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공자 광이 자기도 모르게 오원에게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내가 자서를 얻은 것은 하늘이 준 것이오!” 했다.
次日,以乘喪伐楚之利,入言於王僚,僚欣然聽之。光曰:「此事某應效勞,奈因墜車損其足脛,方就醫療,不能任勞。」僚曰:「然則何人可將?」光曰:「此大事,非至親信者,不可託也。王自擇之。」僚曰:「掩餘燭庸可乎?」光曰:「得人矣。」光又曰:「向來晉楚爭霸,吳為屬國。今晉既衰微,而楚復屢敗,諸侯離心,未有所歸,南北之政,將歸於東。若遣公子慶忌往收鄭衛之兵,并力攻楚﹔而使延陵季子聘晉,以觀中原之釁﹔王簡練舟師,以擬其後,霸可成也。」王僚大喜,使掩餘燭庸帥師伐楚,季札聘於晉國,惟慶忌不遣。
다음날, 공자 광이 오왕 요에게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정벌하는 이로움을 상주하니, 오왕 요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공자광이 말하기를, “이번 일에 제가 출전하여 공로를 세우고 싶으나 제가 수레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져서 지금 치료를 받고 있으니 제가 출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그러면 누구를 대장으로 삼아야 하오?”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이번 출전은 나라의 큰일이라, 가까운 친척 중에 믿는 사람이 아니면 맡길 수가 없습니다. 왕께서 스스로 선택하십시오.” 했다. 오왕 요가 말하기를, “엄여와 촉용이면 되겠습니까?”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 두 사람이면 될 것입니다.” 했다. 공자 광이 또 말하기를, “지난날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패권을 다투어 오나라는 그들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지금 진(晉)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초나라도 우리에게 여러 번 패하여 제후들의 마음이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쪽 초나라와 북쪽 진나라가 지배했던 천하의 패권이 장차 동쪽의 오나라로 넘어올 것입니다. 만약 공자 경기를 정나라와 위나라에 보내어 그곳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한편으로 연릉의 계자(季子)를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중원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왕께서 수군을 뽑아 훈련하고 보군으로 그 뒤를 받친다면 패업이 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했다. 오왕 요가 크게 기뻐하여, 엄여와 촉용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게 하고, 계찰을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오직 공자 경기는 보내지 않았다.
單說,掩餘燭庸引師二萬,水陸並進,圍楚潛邑。潛邑大夫堅守不出,使人入楚告急。時楚昭王新立,君幼臣讒,聞吳兵圍潛,舉朝慌急無措。公子申進曰:「吳人乘喪來伐,若不出兵迎敵,示之以弱,啟其深入之心。依臣愚見,速令左司馬沈尹戍率陸兵一萬救潛,再遣左尹郤宛率水軍一萬,從淮汭順流而下,截住吳兵之後,使他首尾受敵,吳將可坐而擒矣。」昭王大喜,遂用子西之計,調遣二將,水陸分道而行。卻說,掩餘燭庸正圍潛邑,諜者報:「救兵來到。」二將大驚,分兵一半圍城,一半迎敵。沈尹戍堅壁不戰,使人四下將樵汲之路,俱用石子壘斷。
한편, 엄여와 촉용은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수륙으로 나란히 진격하여 초나라 잠읍(潛邑)을 포위했다. 잠읍 대부가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고, 사람을 초나라 도성에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그때 초나라 소왕이 새로 서서 군주는 어리고 신하들은 서로 중상모략하여, 오나라 군사가 잠읍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이 황급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자 신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오나라가 우리의 국상을 틈타 공격해 왔는데 만약 우리가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우리의 약점을 보이는 것이 되고, 그들은 깊숙이 쳐들어오려는 생각을 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한시라도 빨리 좌사마 심윤수로 하여금 육군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잠읍을 구하게 하고, 다시 좌윤 백극완에게 수군 1만 명을 인솔하여 회수(淮水)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서 오나라 군사들의 퇴로를 끊게 하십시오. 그들이 앞과 뒤에서 적을 맞게 되면 오나라 장수를 앉아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여, 곧 자서(공자 신)의 계책을 써서, 두 장수를 보내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하게 했다. 한편, 엄여와 촉용이 잠읍을 포위하고 있을 때 첩자가 보고하기를, “초나라 구원병이 도착했습니다.” 했다. 두 장수가 크게 놀라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반은 성을 포위하고 반은 초나라 구원병을 맞이했다. 심윤수는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지 않았다.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어 나무와 물을 가져오는 길목을 돌로 보루를 쌓아 모두 끊었다.
二將大驚。探馬又報:「楚將郤宛引舟師從淮汭塞斷江口。」吳兵進退兩難,乃分作兩寨,為犄角之勢,與楚將相持,一面遣人入吳求救。姬光曰:「臣向者欲徵鄭衛之兵,正為此也。今日遣之,尚未為晚。」王僚乃使慶忌糾合鄭衛。四公子俱調開去了,單留姬光在國。伍員乃謂光曰:「公子曾覓利匕首乎?欲用專諸,此其時矣。」光曰:「然。昔越王允常,使歐冶子造劍五枚,獻其三枚於吳,一曰『湛廬』,二曰『磐郢』,三曰『魚腸』。『魚腸』,乃匕首也。形雖短狹,砍鐵如泥。先君以賜我,至今寶之,藏於床頭,以備非常。此劍連夜發光,意者神物欲自試,將飽王僚之血乎?」遂出劍與員觀之,員誇獎不已。
두 장수가 크게 놀랐다. 정찰 기병이 또 보고하기를, “초나라 장수 백극완이 수군을 이끌고 회수(淮水)의 물줄기를 타고 내려와 강어귀를 막았습니다.” 했다. 오나라 군사들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엄여와 촉용은 영채를 나누어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어 초나라 군사들과 대치할 수 있도록 하고, 한편으로 사람을 오나라로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했다. 희광(공자 광)이 말하기를, “신이 전날에 정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경기를 정나라와 위나라에 보낸다 해도 아직 늦지 않습니다.” 하니, 오왕 요가 즉시 경기를 시켜 정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을 규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네 공자가 모두 오왕 요의 곁을 떠나게 되고, 단지 공자 광만 국내에 남게 되었다. 오원이 공자 광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예리한 비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까? 전제를 쓰려면 이때입니다.” 하니, 공자 광이 말하기를, “그렇소. 옛날에 월왕 윤상이 구야자(歐冶子)를 시켜 다섯 개의 칼을 만들게 했는데, 그중 세 개를 오나라에 바쳤소. 첫째는 담로(湛盧)라 했고, 둘째는 반영(磐郢)이라 했으며, 셋째는 어장(魚腸)이라 했소. 어장은 곧 비수요. 그 모양은 비록 짧고 좁지만, 쇠를 마치 진흙처럼 벨 수 있소. 선군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 지금까지 보물로 침상 머리맡에 감춰두고 비상시에 대비하였소. 이 칼은 밤이 되면 빛을 내는데, 생각건대 이 칼이 신물이라 스스로를 시험하고자 장차 오왕 요의 피를 먹고 싶어서인 것 같소.” 했다. 공자 광이 즉시 어장 검을 꺼내와서 오원에게 보여주었다. 오원이 보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即召專諸以劍付之。專諸不待開言,已知光意,慨然曰:「王信可殺也。二弟遠離,公子出使,彼孤立耳,無如我何。但死生之際,不敢自主,候稟過老母,方敢從命。」專諸歸視其母,不言而泣。母曰:「諸何悲之甚也?豈公子欲用汝耶?吾舉家受公子恩養,大德當報,忠孝豈能兩全?汝必亟往,勿以我為念!汝能成人之事,垂名後世,我死亦不朽矣。」專諸猶依依不舍。母曰:「吾思飲清泉,可於河下取之。」專諸奉命汲泉於河,比及回家,不見老母在堂,問其妻。妻對曰:「姑適言困倦,閉戶思臥,戒勿驚之。」專諸心疑,啟牖而入,老母自縊於床上矣。
공자 광은 즉시 전제를 불러 어장 검을 주었다. 전제가 공자 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뜻을 짐작하고 비장하게 말하기를, “이젠 왕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두 동생은 멀리 떠났고 공자들은 사신으로 나갔으며 그는 이제 혼자 되었으니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생사가 갈리는 마당이니 감히 혼자 결정할 수는 없고 늙은 어머니께 이 일을 아뢰어 허락하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 했다. 전제가 집으로 돌아가서 그 모친을 보고,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모친이 말하기를, “무엇이 그리 슬프냐? 공자께서 너를 어디에 쓰려고 했겠느냐? 우리 온 집안 식구가 공자님의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충신과 효자 노릇을 둘 다 온전하게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빨리 가거라.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네가 일을 성사시킨다면 너의 이름은 후세에 남을 것이고 나는 죽더라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했다. 전제가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자 노모가 말하기를, “내가 맑은 샘물을 마시고 싶으니 냇가에 가서 샘물을 떠 오너라.” 했다, 전제가 모친의 명을 받고 냇가의 우물에서 물을 떠 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노모가 방안에 보이지 않아서 그 아내에게 물었다. 그 아내가 대답하기를, “어머니는 피곤하다고 하면서 문을 닫고 누워야겠다며 놀라게 하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했다. 전제가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 들창을 열고 들어가니 노모는 침상 위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
髯仙有詩云:「願子成名不惜身,肯將孝子換忠臣﹔世間盡為貪生誤,不及區區老婦人。」專諸痛哭一場,收拾殯殮,葬於西門之外。謂其妻曰:「吾受公子大恩,所以不敢盡死者,為老母也。今老母已亡,吾將赴公子之急。我死,汝母子必蒙公子恩眷,勿為我牽掛。」言畢,來見姬光,言母死之事。光十分不過意,安慰了一番。良久,然後復論及王僚之事。專諸曰:「公子盍設享以來吳王?王若肯來,事八九濟矣。」光乃入見王僚曰:「有庖人從太湖來,新學炙魚,味甚鮮美,異於他炙。請王辱臨下舍而嘗之!」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아들의 이름을 이루려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 기꺼이 효자를 충신으로 만들었다! 세간에는 살기를 탐하여 잘못을 저지르니, 구구한 노부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했다. 전제가 한바탕 통곡하고 시신을 염하고 입관한 후에 서문 밖에 장사지냈다. 전제가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공자의 큰 은혜를 입고도 감히 목숨을 걸지 못했던 까닭은 늙은 어머니 때문이었소. 지금 노모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나는 공자에게 달려가서 급한 일을 도와야겠소. 내가 죽더라도 그대 모자는 틀림없이 공자께서 가족처럼 보살펴 줄 것이니 나를 붙잡지 마시오.” 하고, 말을 마치자 공자 광을 찾아가 뵙고 모친이 죽었음을 말했다. 공자 광이 지나치게 마음을 쓰기 않도록 진심으로 위로했다. 한참 후에 다시 오왕 요를 암살할 일을 의논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공자님께서 어찌하여 연회를 준비하고 오왕을 초대하지 않으십니까? 오왕이 만약 기꺼이 온다면 일은 십중팔구 성사될 것입니다.” 하니, 공자 광이 조정에 들어가 오왕 요를 뵙고 말하기를, “저희 집 요리사가 태호에서 왔는데 새로이 생선을 굽는 법을 배워서 그 맛이 아주 산뜻하고 맛있어서 다른 구이와 다릅니다. 청컨대 왕께서 저희 집에 한 번 행차하시어 맛보십시오.” 했다.
王僚好的是魚炙,遂欣然許諾:「來日當過王兄府上,不必過費。」光是夜預伏甲士於窟室之中,再命伍員暗約死士百人,在外接應。於是大張飲具。次早,復請王僚。僚入宮,告其母曰:「公子光具酒相延,得無有他謀乎?」母曰:「光心氣怏怏,常有愧恨之色,此番相請,諒無好意,何不辭之?」僚曰:「辭則生隙﹔若嚴為之備,又何懼哉!」於是被狻猊之甲三重,陳設兵衛,自王宮起,直至光家之門,街衢皆滿,接連不斷。僚駕及門,光迎入拜見。既入席安坐,光侍坐於傍。僚之親戚近信,布滿堂階。侍席力士百人,皆操長戟,帶利刀,不離王之左右。
오왕 요는 생선구이를 좋아하여 즉시 흔쾌한 마음으로 허락하며 말하기를, “내일 당장 형님의 집으로 가겠소. 너무 지나친 비용은 쓰지 마시오,” 했다. 공자 광이 그날 밤 미리 무사들을 지하실 속에 매복시키고, 다시 오원에게 몰래 결사대 100명을 데리고 집 밖에서 호응하도록 했다. 이에 공자 광은 연회를 크게 준비했다. 다음 날 아침, 공자 광이 다시 오왕 요에게 청했다. 오왕 요가 입궁하여 그의 모친에게 고하기를, “공자 광이 술상을 차려 놓고 나를 청하는데, 혹시 다른 음모가 있지 않을까요?” 하니, 모후가 말하기를, “공자 광은 심기가 불편하여 항상 한을 품은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 이번에 너를 초청하는 것도 좋은 뜻은 아닌 듯한데 어째서 거절하지 않았는가?” 했다. 오왕 요가 말하기를, “제가 거절하면 그와 틈이 생길까 해서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만일에 대비하여 엄중히 준비를 하면, 또한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했다. 이에 오왕 요는 사자의 가죽으로 된 갑옷을 세 겹으로 껴입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왕궁에서 떠나 곧바로 공자 광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오왕 요를 호위하는 군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행렬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오왕 요의 어가가 문에 이르자 공자 광이 맞이하여 들이고 절하여 뵈었다. 오왕 요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공자 광이 그 옆에 모시고 앉았다. 오왕 요의 친척과 근신들이 집안에 가득 차고, 오왕 요의 주변에 장사 100명이 긴 극을 잡고 칼을 차고 왕의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庖人獻饌,皆從庭下搜簡更衣,然後膝行而前,十餘力士握劍夾之以進。庖人置饌,不敢仰視,復膝行而出。光獻觴致敬,忽作唑足,偽為痛苦之狀,乃前奏曰:「光足疾舉發,痛徹心髓,必用大帛纏緊,其痛方止。幸王寬坐須叟,容裹足便出。」僚曰:「王兄請自方便。」光一步一躓,入內潛進窟室中去了。少頃,專諸告進魚炙,搜簡如前。誰知這口魚腸短劍,已暗藏於魚腹之中。力士挾專諸膝行至於王前,用手擘魚以進,忽地抽出匕首,逕椎王僚之胸。手勢去得十分之重,直貫三層堅甲,透出背脊。王僚大叫一聲,登時氣絕。
음식을 나르는 요리사들은 모두 뜰 아래에서 몸수색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무릎걸음으로 나아갔으며 십여 명의 장사가 손에 칼을 쥐고 요리사들을 옆에서 감시했다. 요리사들이 음식을 상에 놓을 때는 감히 얼굴을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다시 무릎걸음으로 나갔다. 공자 광이 술잔을 바치며 존경의 뜻을 나타내다가, 갑자기 발을 움켜쥐며 거짓으로 매우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곧 앞으로 나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다친 발이 다시 아파서 뼛속 깊이까지 고통이 심합니다. 큰 천으로 꽁꽁 싸야 통증이 그칩니다. 왕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잠시만 앉아 계시면 제가 발을 싸매고 나오겠습니다.” 하니, 오왕 요가 말하기를, “형님께서는 편한 대로 하시오.” 했다. 공자 광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며 내실로 들어가서 몰래 지하실로 내려갔다. 잠시 후에 전제가 생선구이를 드린다고 고하니 수색이 전과 같았다. 누가 생선 뱃속에 어장 단검이 이미 숨겨져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장사들이 전제를 끼고 무릎걸음으로 왕 앞에 이르게 하니, 전제가 두 손으로 구운 생선을 바치면서 갑자기 생선 뱃속에 든 어장검을 뽑아 곧바로 오왕 요의 가슴을 찔렀다. 손에다 온 힘을 주었기 때문에 어장검의 칼날은 세 겹으로 껴입은 단단한 갑옷을 뚫고 들어가 관통하여 등 밖으로 나왔다. 오왕 요가 크게 한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侍衛力士,一擁齊上,刀戟並舉,將專諸剁做肉泥,堂中大亂。姬光在窟室中知已成事,乃縱甲士殺出,兩下交鬥。這一邊知專諸得手,威加十倍,那一邊見王僚已亡,勢減三分。僚眾一半被殺,一半奔逃,其所設軍衛,俱被伍員引眾殺散。奉姬光升車入朝,聚集群臣,將王僚背約自立之罪,宣布國人明白:「今日非光貪位,實乃王僚之不義也。光權攝大位,待季子返國,仍當奉之。」乃收拾王僚屍首,殯殮如禮。又厚葬專諸,封其子專毅為上卿。封伍員為行人之職,待以客禮而不臣。市吏被離舉薦伍員有功,亦升大夫之職。
오왕 요를 호위하던 장사들이 한꺼번에 일제히 달려들어 칼과 극으로 전제를 찔러 저민 고기를 만들었다. 집안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공자 광이 지하실에서 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즉시 무사들을 풀어 밖으로 출동시켰다. 양쪽의 무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한쪽은 전제가 이미 손을 썼음을 알고 기세가 등등했지만, 다른 한편은 오왕 요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져서 그들 중의 반은 피살되고 나머지 반은 달아나 버렸다. 집 밖의 경비 군사들도 모두 오원이 이끌고 온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흩어졌다. 오원과 무사들이 희광(공자 광)을 받들어 수레에 태우고 조당으로 들어가서 여러 신하를 모이게 했다. 공자 광은 오왕 요가 선대의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왕이 된 죄를 들어 나라 사람들에게 명백히 선포하기를, “오늘 내가 왕위를 탐해서가 아니라 실은 오왕 요가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를 죽인 것이다. 내가 우선 대위(大位)를 섭정하다가 계자(季子)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선군들의 뜻을 받들어 그를 왕으로 모시겠다.”라고 했다. 공자 광은 즉시 오왕 요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으로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 또한 전제도 후하게 장사를 지내 주고, 그의 아들 전의(專毅)를 상경으로 봉했다. 오원을 행인(行人 ; 제후 접대 담당)의 직에 임명하여 손님의 예로 대하고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 시장 관리인 피리(被離)는 오원을 천거한 공로가 있다고 하여 역시 대부의 직에 올랐다.
散財發粟,以賑窮民,國人安之。姬光心念慶忌在外,使善走者覘其歸期,姬光自率大兵,屯於江上以待之。慶忌中途聞變,即馳去。姬光乘駟馬追之,慶忌棄車而走,其行如飛,馬不能及。光命集矢射之。慶忌挽手接矢,無一中者。姬光知慶忌必不可得,乃誡西鄙嚴為之備,遂還吳國。又數日,季札自晉歸,知王僚已死,逕往其墓,舉哀成服。姬光親詣墓所,以位讓之,曰:「此祖父諸叔之意也。」季札曰:「汝求而得之,又何讓為?苟國無廢祀,民無廢主,能立者即吾君矣。」光不能強,乃即吳王之位,自號為闔閭。季札退守臣位。(此周敬王五年事也。)
공자 광은 오나라 부고에 쌓여 있던 재물과 양식을 꺼내어 불쌍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니 나라 사람들이 안심했다. 희광(공자 광)은 공자 경기가 나라 밖에 있는 것을 염려하여, 길을 잘 걷는 사람을 시켜 그가 돌아올 날짜를 알아내어, 친히 대군을 인솔하고 강가에 주둔하며 기다렸다. 공자 경기는 중도에서 변란 소식을 듣고 곧 달아났다. 희광(공자 광)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타고 그를 추격했다. 공자 경기가 수레를 버리고 달아나는데 마치 날아가는 것 같이 빨라 말을 탄 공자 광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공자 광이 궁수들을 모이게 하여 경기에게 활을 쏘도록 했다. 경기가 손으로 화살을 잡아내어 한 개의 화살도 경기를 맞추지 못했다. 희광(공자 광)은 경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고 오나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관리에게 철저히 대비하라고 이르고 마침내 오나라 도성으로 돌아왔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계찰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와 오왕 요가 이미 죽었음을 알고, 곧바로 그의 묘에 가서 애도하고 상복을 입었다. 희광(공자 광)이 친히 오왕 요의 묘소에 와서 왕위를 양보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조부와 여러 숙부의 뜻입니다.” 하니, 계찰이 말하기를, “네가 구하여 얻었는데, 또 어찌하여 양보하려고 하는가? 다만 나라에 제사가 폐해지지 않고 백성이 왕을 폐하지 않으면 능히 왕이 된 자가 곧 나의 군주이다.” 했다. 공자 광이 강권할 수 없어, 즉시 자신이 오왕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호를 합려(闔閭)라 했다. 계찰은 물러나서 신하의 자리를 지켰다. (이것은 주경왕(周敬王) 5년(기원전 515년)의 일이었다.)
札恥爭國之事,老於延陵,終身不入吳國,不與吳事,時人高之。及季札之死,葬於延陵,孔子親題其碑曰:「有吳延陵季子之墓。」史臣有讚云:「貪夫殉利,簞豆見色。《春秋》爭弒,不顧骨肉。孰如季子,始終讓國,堪愧僚光,無慚泰伯。」宋儒又論季札辭國生亂,為賢名之玷。有詩云:「只因一讓啟群爭,辜負前人次及情﹔若使延陵成父志,蘇臺麋鹿豈縱橫?」且說,掩餘燭庸困在潛城,日久救兵不至,正在躊躇脫身之計。忽聞姬光弒主奪位,二人放聲大哭,商議道:「光既行弒奪之事,必不相容。欲要投奔楚國,又恐楚不相信。正是『有家難奔,有國難投』,如何是好?」
계찰은 왕위 다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연릉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오나라 도성에 들어오지 않고 국정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고결하다고 했다. 계찰이 죽자 그를 연릉에 장사 지냈다. 후에 공자(孔子)가 친히 그의 비에 쓰기를, “오나라 연릉 계자의 무덤(有吳延陵季子之墓)”이라고 했다. 사관이 찬양하기를, “탐욕스러운 사람은 이익 때문에 죽으니, 조그만 이익에도 얼굴색이 변하는구나! 춘추 때에는 앞을 다투어 임금을 죽였으니, 부모 형제도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저 계찰과 같으랴. 시종일관 나라를 양보했으니, 오왕 요와 공자 광은 부끄럽겠지. 조상 태백에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울 것이다.” 했다. 훗날 송나라 유학자가 또 논하기를, 계찰이 왕위를 받지 않아 난이 일어났으니 그의 어진 이름에 옥의 티라고 했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한번 양보하여 여러 분쟁을 일으켰으니, 형제간에 왕위를 전하라는 선조의 명을 저버렸다. 만약에 연릉의 계자가 부친의 뜻을 받들었다면, 고소대에 사슴들이 어찌 멋대로 날뛰었겠는가?” 했다. 한편 엄여와 촉용은 잠성(潛城)에서 어려움에 처하여, 오랫동안 구원병이 오지 않자, 그곳을 빠져나갈 계책을 세우지 못해 주저하고 있었다. 갑자기 희광(공자 광)이 군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목놓아 운 뒤에 상의하여 말하기를, “희광(공자 광)이 군주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갔으니 틀림없이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초나라로 도망치고 싶지만, 또한 그들이 우리를 믿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야말로 달아날 집도 없고 투항할 나라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했다.
燭庸曰:「目今困守於此,終無了期。且乘夜從僻路逃奔小國,以圖後舉。」掩餘曰:「楚兵前後圍裹,如飛鳥入籠,焉能自脫?」燭庸曰:「吾有一計,傳令兩寨將士,詐稱來日欲與楚兵交鋒,至夜半,與兄微服密走,楚兵不疑。」掩餘然其言。兩寨將士秣馬蓐食,專候軍令布陣。掩餘與燭庸同心腹數人,扮作哨馬小軍,逃出本營。掩餘投奔徐國,燭庸投奔鐘吾。及天明,兩寨皆不見其主將,士卒混亂,各搶船隻奔歸吳國。所棄甲兵無數,皆被郤宛水軍所獲。諸將欲乘吳之亂,遂伐吳國。郤宛曰:「彼乘我喪非義,吾奈何效之?」乃與沈尹戍一同班師,獻吳俘。楚昭王以郤宛有功,以所獲甲兵之半賜之,每事諮訪,甚加敬禮。費無極忌之益深,乃生一計,欲害郤宛。
촉용이 말하기를, “지금 이곳에서 무한정 어려움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밤을 틈타 오솔길로 작은 나라로 도망쳤다가 후일을 도모합시다.” 하니, 엄여가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가 앞뒤에서 포위하여 새가 새장 속에 든 것과 같은데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겠느냐?” 하니, 촉용이 말하기를,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우리의 두 진영에 명령을 내려 거짓으로 내일 초나라 군사들과 교전을 한다고 하고, 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형과 함께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몰래 도망친다면 초나라 군사들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엄여는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두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에게 여물을 먹이게 하고 새벽밥을 먹게 한 후에 군령이 내려지면 포진을 하라고 했다. 엄여와 촉용은 심복 몇 사람과 함께 정탐 군사로 분장하여 본영을 벗어나 달아났다. 엄여는 서(徐)나라로 달아나고, 촉용은 종오(鍾吾)로 달아났다. 날이 밝아오자 오나라의 두 진영에서 주장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군사들이 혼란에 빠져 제각기 배를 빼앗아 타고 오나라로 돌아갔다. 그들이 버린 무수한 갑옷과 무기는 모두 백극완의 초나라 수군이 노획했다. 초나라의 여러 장수가 오나라 내란을 틈타 곧바로 오나라를 정벌하자고 했다. 백극완이 말하기를, “저들이 우리가 상중임을 틈타 쳐들어온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었소. 우리가 어찌 그것을 본받겠소?” 했다. 이에 백극완은 심윤수와 함께 회군하여, 초소왕에게 오나라 포로를 바쳤다. 초소왕은 백극완에게 공이 있다고 하여 노획한 전리품의 절반을 그에게 주었다. 초소왕은 매사를 극완과 상의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대했다. 비무극이 이를 매우 시기하여 한 가지 음모를 꾸며 백극완을 해치려고 했다.
畢竟費無極用何計策,且看下回分解。
마침내 비무극이 무슨 계책을 쓸 것인가.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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