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어머니.
어머니.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요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신지 벌써 일년이 되었습니다.
그 날은 제 가슴에 먹구름이 몰려오며 요란하게 천둥이 울리고 땅이 꺼졌습니다.
저는 막연하게 언젠가는 그 날이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작년 1월에도 어머니는 심하게 아파 중환자실에 며칠 입원했지만 거뜬히 퇴원하셨지요. 그 때 어머니는 답답해서 안 되겠다며 산소호흡기를 잡아채는 영웅담을 남기기도 하셨습니다. 유병욱 병원장은 정신력으로 병마를 이긴 것이라고 어머니의 강인한 정신력에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에도 어머니는 늘 여기저기가 편치 않다고 하셨지만 여일하게 경로당에도 다녔습니다. 특히 며칠 전 추석 때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으시고 밝은 모습으로 친척들과 즐겁게 환담하셨지요. 그랬던 것이 사흘 뒤 어머니는 몸져누워 다음 날 입원하였습니다. 저는 이 번에도 어머니가 병마를 털고 다시 걸어 나오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습니다. 그 날이 삼일 뒤 화요일이었지요.
그 날은 어찌나 날씨가 좋았던지 날개를 단 듯이 날 것처럼 청명하였지요.
그런 상쾌한 가을날이 삼우제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이 세상에 오신 날은 10월 3일(음력 9월 5일),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신 날은 9월 28일(음력 8월 21일).
가을에 왔다가 가을에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한없이 맑은 가을의 정기를 타고 나서
그렇게 깨끗하고 분명한 정신력을 지녔셨던가요.
그리고 그런 정신의 힘으로 상큼한 가을에 가쎴습니까.
저는 어렸을 적 일 두 가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저가 여섯 살 때 어느 가을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사십 리 길 외가에 갔습니다.
어린 저의 발걸음은 느렸고 짧아진 가을 해는 빨리 기울었지요.
외가가 있는 마을은 아직도 멀었는데 무인지경의 일제 때 군용지에 이르렀을 때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날이 어둡고 말았습니다. 무섬증을 느낀 어머니는 업히기에는 너무 커진 저를 등에 업고 오리나 되는 길을 마구 뛰셨습니다. 땀이 비 오듯 하며 달리던 어머니는 멀리 마을의 불빛을 보고서야 길게 숨을 내쉬며 안심을 하셨지요.
저에게는 그 날 맑은 시냇물을 건너기도 하고 호젓한 산길을 걷기도 하던 어머니와의 동행이 그리운 추억으로 가슴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하지 아니한 외롭고 쓸쓸한 길이었다는 것을 철이 들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슴 시린 감정이 세월의 더께 아래 응어리가 되었고 어머니는 평생 그 응어리를 가슴에 담고 사셨겠지요.
또 하나는 저가 아홉 살 되던 이른 봄날의 일이였지요.
어머니와 저 단 두 식구가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사 가던 그 날입니다.
동구 밖 주막집 앞길에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별 장면이지요.
삼십을 갓 넘은 젊은 며느리와 육십대의 중반을 넘겨 머리가 반백이 된 시어머니가 서로 손을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는 이별은 길었습니다.
할머니는 혼자 사는 며느리가 하나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대처로 나가겠다는데 말릴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면서도 아무런 사회경험도 없는 젊은 아낙네가 혼자 낯선 도회로 나가 당하게 될 수많은 고초를 어찌 감당할 것인지 걱정하셨겠지요.
또 고향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할머니로서는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 것인지 막막함이 가늠할 수 없었겠지요. 그날 할머니는 우리가 탄 트럭이 산모롱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같은 자리에서 하얀 손수건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대처로 나와서 어머니가 한 첫 번째 일이 쪽머리를 자르는 것이었지요.
그 동안 유가의 전통에서 살아온 어머니로서는 과히 혁명적 거사이었지요. 앞으로 어머니 혼자서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단단한 결의이였겠지요. 그 날 이후로 어머니는 험한 세파가 넘치는 도시에서 저가 겨우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중에도 어머니는 학자금에 대하여 저가 두 번 말씀드리지 않게 마련해 주셨고 용돈도 언제나 모자라지 않게 주셨습니다. 어머니 덕에 우리는 가난하였지만 저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또 저가 이 만큼이라도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모두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지요.
무엇보다 어머니의 저에 대한 정성의 힘이지요. 어머니는 절에 가서 기원할 때도 모두가 저를 위한 것이고, 저의 처자를 위한 것이지 당신을 위해 빌어 보지는 않았다지요. 이 이야기는 왕십리 고종형수한테서 들었습니다.
저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도 모두 어머니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날마다 새벽 남 먼저 일어나 첫 우물을 길러 치성을 드려 저의 합격을 빌었지요. 공부에 지쳐 약해진 저를 위해 탕제는 또 얼마나 달였습니까. 탕약을 짜느라 손에 못이 박힐 정도였지요. 그런 어머니의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저가 있겠습니까.
어머니 가시고 나서 하루도 어머니가 생각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날 때 마다 울었습니다. 보고 싶고 그리워서 울었습니다.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이 없어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울었습니다.
보다 많이 어머니와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한 아쉬움에서 울었습니다.
때로는 퉁명스럽게 대하고 심기를 나쁘게 한 것이 후회가 돼서 울었습니다.
궁금한 옛일이 있어도 물어 볼 수가 없어 안타까워서 울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자력으로 기동을 못하고 누워서 수발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가당치 않은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라면 한 번이라도 저가 어머니의 머리도 감겨 드리고 발도 씻어 드릴 수 있었을 터인데, 그래서 저가 강보에 싸여 있을 적에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시던 은공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깔끔한 어머니는 저에게 그런 작은 효도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가슴 아파 울었습니다.
어머니, 저도 이제 그만 울어야겠지요.
그래도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울게 되겠지요.
무시로 어머니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나니까요.
그럴 때 마다 어머니와 같이 보낸 좋은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렵니다.
함께 즐겁게 보낸 추억을 떠올려 보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막아 보렵니다.
어머니는 좋은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머니의 가신 모습이 그렇게 평화롭고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걸림이 없는 모습 이였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아미타불의 인도 하에 극락세계에 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자신이 쌓은 공력 덕분이겠지요.
어머니는 불심이 돈독하셨습니다. 철따라 절 행사에 빠지지 아니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맑은 정신으로 염주를 돌리시며 염불에 매진하셨지요. 그 일은 편찮으실 때에도 어김없이 행하셨지요. 그리고 종이학을 천 개나 접어셨지요. 갖가지 색깔의 색종이로 학을 천 마리나 만드셨습니다. 종이를 한 번 접을 때 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업장을 소멸시켰겠지요.
어머니는 그렇게 쉽게 넘볼 수 없는 공력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신 극락에는 꼭 두 가지는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먼저 어머니가 손수 가꿀 수 있는 남새밭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한시도 그냥 손을 놓고 놀지 않으셨지요. 무어라도 노는 땅이 있으면 그냥 두지 못하셨습니다. 푸성귀든 화초든 파고 심었지요. 그러면 무엇이든 무럭무럭 잘 자랐지요.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 와서는 양재천 방죽 밑을 파고 채소를 심었고 대모산까지 가서 산비탈에 조그만 밭뙈기를 일구었지요.
또 하나, 티 없이 맑은 어린이들에 둘러 싸여 지내리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어린이를 얼마나 좋아 하셨는지요. 늘 어린이는 천사라고 말하면서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 노는 것을 좋아하셨지요. 그리고 삼남매 손자손녀는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세상에 없는 보배로 알고 업어 주고 살펴 주며 키워 주셨지요. 어머니의 그 정성과 사랑으로 셋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어머니.
이제 하직 인사를 드려야 겠군요.
아무쪼록 이승의 번다한 일은 모두 잊으시고 철 따라 예쁜 꽃 피고
기이한 새들이 즐거이 노래하는 그 곳에서 편히 사시기를 빕니다.
2011. 9. 18. 어머니의 첫 기일에
아들 영식이 올립니다.
·영국 King'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LL.M. 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