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봉길리 해안 앞바다가 눈앞을 스쳐간다.
밀려오는 파도에 역사의 파편이 묻어 있는 봉길리 문무대왕암은 생각만 해도 신비스럽다. 문무왕을 장사지낸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기도처로도 유명하다.
신라는 특이하게도 고구려를 비롯한 북쪽으로부터 문화가 전래되었지만, 동쪽을 지향하던 국가였다. 동쪽에 대한 믿음,
즉 동녘 신앙을 갖고 있었던 나라다. 신앙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고, 초자연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동녘신앙을
갖고 있는 신라인들에게는 궁궐동쪽에 자리한 연못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무왕은 나당대전을 승리하고자 미추왕 등극시 용이 나타났었던 관동지(官東池)를 새롭게 조영하여 안압지를 설계하고,
그곳에 용왕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안압지도 동쪽으로 수경축이 길도록 설계했던 것이다.
또 문무왕 사후에 완공된 감은사의 금당 동쪽에 구멍을 뚫어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또 다른 동녘신앙설의 근거로 함월산의 골굴암 방위와 설굴암 석불의 방위가 일치하는 것 등이 있다.
이렇게 신라인들이 갖고 있었던 동녘신앙의 시작점은 신라 왕궁에서 출발하여 낭산, 사천왕사, 명활산성, 불국사, 석굴암,
감은사를 거쳐 마지막 종착점은 수중대왕암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해구 가운데서 유일한 ‘동해구’이었고 또한 특별한
장례 신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7월 1일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신하들이 유언에 의해 동해구 대석상 위에
장사를 지냈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 한다. 이로 인하여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大王石)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문무왕이 재위한 지 21년 만인 681년 세상을 떠나시자 유족과 신하들은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룬 것이다.
평상시에도 항상 지의 법사에게 “나는 죽은 뒤 나라를 위한 커다란 용(龍)이 되겠다”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에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며 과대한 왕릉(장례)을 만들지 말라는 경계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신라 임금으로는 최초로 시신을 화장하는 등 장례식을 간소화하였다.
◆ 대왕암 바위 안쪽 수중탐사 가져
경주 왕경으로부터 동쪽 해안에 위치한 포구는 세 곳이다. 양포와 감포, 그리고 대왕암 자리다.
현 대왕암이 있는 곳은 양포나 감포에 비해 동남쪽으로 치우쳐져 있지만, 신라 왕경의 동악인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대종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다.
대왕암은 해안으로부터 약 200m 떨어진 바다 가운데 위치한 바위섬으로 수심은 약 15m 정도이다.
육지에서 보면 한 개의 바위섬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6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6개의 바위섬과 주변의 소형
바위섬은 하부에서 하나의 암체를 이루고 있다. 바위섬 크기는 동서 35m, 남북이 약 36m, 높이는 최대 약 5.3m이다.
대왕암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이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했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여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돼 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지금은 화장하여 납골당에 모시기도하고 더러는 수목장을 치루기도
한다. 하지만, 그 옛날 어떻게 깊은 바다 속에 유골을 묻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줄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지난 1982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대왕암 한가운데 위치한 문제의 돌을 조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중 잠수부가 바다 밑으로 뛰어들기 직전, 발굴단은 갑자기 조사를 포기했다. 그 이유는 간단
하였다.
비록 진위 논란이 재연될지라도 하나의 금기로 그냥 놔두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었다. 어느 정도의 비밀이 있어야 신비스러움이
유지되고 그래야만 대왕암의 의미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요한 것은 진위여부가 아니라 대왕암에 서려 있는 문무왕의 나라사랑 정신이기 때문이었다. 숨죽여 보던 국민들은 또다시
사실 여부를 조용히 역사 속으로 묻어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대왕암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은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2001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모 방송사의 역사
스페셜 팀이 대왕암 바위 안쪽에 대해 수중탐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수중탐사의 핵심은 대왕암 바위 사이를 모래주머니로 막고 안쪽의 물을 양수기로 퍼낸 뒤 문제의 넓적한 바위를 조사하는 일
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바위의 위쪽에선 인위적으로 돌을 가공한 흔적이 나타났지만, 바위 아래쪽은 지하 암반이 수직으로 갈라져 있어 유골을 묻기
어려운 상태로 확인된 것이다. 반신반의하면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허무했다. 아니 무엇을 바라고 그 어려운 작업을 했을까.
꼭 그렇게 헤집어서 끄집어내어야만 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경이로움과 신비로운 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
가치와 감동이 충분하다. 그런데 이를 파헤쳐 놓게 되면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어느새 수많은 바위 중의 하나가 될 뿐이다.
유골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대왕암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 담겨 있는 문무왕의 뜨거운 호국정신일 것이다. 그것 이상 더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옛 속담에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 문무왕 뜻 기리기 위해 지은 감은사 터
바닷가에서 벗어나 산자락에 위치한 봉길 마을로 접어들었다. 통통배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해결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벽들은 그대로인데 원자력 발전소 탓일까. 초입의 도로가 넓어진 것은 물론
이거니와 주변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마을 한편에는 대개의 시골마을이 그러하듯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남겨
져 있었다.
흔히 숨이 차도록 산길을 올라가야 겨우 볼 수 있는 탑을 이곳에서는 사방이 탁 트인 평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을의
초입에서부터 훤히 드러나 보인다. 그것은 3층 높이의 동탑과 서탑으로 뒤편에는 용당리 마을을 두고 앞쪽에는 논자락을
거느리고 있다. 푸른 이끼 자국이 선명한 탑신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탑돌이를 하려고 두 손을 합장했다. 수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이 돌았던 그 길을 따라 걸어본다. 그들은 탑을 돌면서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농토의 안위와 평온한 삶을 갈구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탑을 돌며 나도 오래된 신라인마냥 소원을 빌어보았다.
이곳 감은사 터는 동해 바다에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 길을 통해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문무왕이 짓기 시작하였고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하여 이름을 ‘감은사’라 지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두 탑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해로 향하고 있다. 금당 장대석 밑 빈 공간은 동해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용이 된 문무왕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 묻혔다는 수중릉이 가까이 있어 그 이야기가 정말일까 고개를
갸웃거려본다.
◆ 전설의 대나무 피리 만파식적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설화에 의하면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해서 용을 시켜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서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해 하나가 됐다. 신문왕이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근심이 해결되어 이를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신문왕이 감은사를 낙성한 이듬해 5월 동쪽 바다에서 조그마한 산이 나타나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점을 치게 했더니 일관(日官)이 “문무대왕과 김유신공의 두 성인께서 나라를 지킬 보물을 주실 징조
입니다”라고 답해 왕은 크게 기뻐했다.
이튿날 산 위에 있던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컴컴해지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자 용이 대나무로 된 피리를 바쳤다. 그 피리를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하였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홍수 질 때는 비가 개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신문왕이 피리를 얻은 자리라고 알려진 이견대에 오른다. 정자 기둥 사이로 액자 속 그림처럼 문무대왕릉이 보인다. 이것 또한
염두에 두고 세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들 신문왕은 정자 위에 서서 아버지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비록 지금은 신문왕이 지었다는 정자는
없어지고 1979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지만 문무왕에 대한 신문왕의 뜻만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 속 대왕암을
마음에 새기며 언덕을 내려왔다.
한 줄기 장맛비가 지나간 뒤처럼 운무가 자욱하다. 마치 구름 속을 헤집고 걷는 듯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바닷바람에 실려 날아온
해무는 천 년 전 문무대왕의 혼인 양 온몸을 감싸고, 어디선가 만파식적의 피리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유옥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