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安漑)
聽水堂 順興安公(漑) 墓碣銘
청수당 순흥안공(개) 묘갈명
마루 같은 자가 예천 관할 서쪽 대망산 간좌에 높이 있으니 이는 정언벼슬한 안공의 장사한 곳이다. 뒤로 300년 남직한 해에 자손이 비로소 묘 위에 정민할 것을 꾀하고 萬錫으로 하여금 방후손 泳達이 닦은 행록으로 하여금 나에게 보이고 현각할 글을 청하니 이에 살펴보고 서문해 가로되 공의 휘는 漑요 자는 健仲이요 호는 聽水堂이다. 안씨는 고려상호군 휘 子美로부터 관향을 봉한 조상이다. 안씨가 동국에 저성이 된 것은 다만 사문의 종앙이 있을 뿐 아니고 곧 바로 공의 대를 이어 오면서 또한 이름난 덕을 가히 칭찬함이니 문의공 휘 文凱와 양정공 휘 千善과 경혜공 휘 孫柱와 충정공 휘 俊 같은 이가 혹 훈업을 하고 혹 풍절로써 한 나라를 떨치고 빛냈으며 벼슬하지 못하고 초야에 묻힌자도 그 숭상한 뜻이다. 가히 법되었고 가까이 증조부로써 璜하시는 분은 호를 물재로 예산훈도였는데 한림 李構가 시로써 꼿꼿한 지조를 탄식함이 있었고 조부는 가로되 敬賓이니 형조정랑이고 호는 죽계자이니 단양 땅 현재가 되어 정치에 공로가 있어서 백성들이 비를 세워 송덕하였고 아버지는 가로되 命男이니 문행으로써 공조좌랑을 특증하였고 비는 宜人 감천문씨니 습독 經世의 따님으로 泰昌庚申(1620)년에 공을 생하니 천생 자품이 호매하여 배우는 데 10일의 업을 함께 다스려서 입신과 양명에 혜택을 이룩하는 것이 분수 안에 스스로 기약할 수 있었더니 일찍이 크게 발천하여 간원에 들어가니 조짐은 족히 행함직한데 그 배운바를 행하지 못한다면 어찌 해직을 하리요 이에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쫓아서 자제의 직분을 다하여 그 가내에 치성하고 제정함이 있는 것은 소장한 기량이 스스로 넉넉함을 가히 보임인데 정치할 수 있는 곳에 베풀지 못한 것이다. 仁祖丁亥(1647)년에 졸하니 향년이 약간이다. 배는 令人 전주이씨로 자혜롭고 은순하여 성가할 덕이 있더니 졸함에 같은 금정에 무덤하였다. 燦徵을 나으니 첨추요 이 분이 濬石을 낳고 이 분이 應履를 낳으니 집의요 이 분이 挺世를 낳으니 壽로 가선에 올랐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대가 멀었도다. 집이나 나라에 일을 행한 것이 있었건만 이제에 杞宋의 증거없는 것이 되었고 백씨와 중씨인 경유와 나봉의 행록에 효제의 도를 칭찬한 것이 여러 번 있었으니 이 도리를 가히 드리워서 받았던 것이다. 이제 자손이 번성하여 빼어나고 어진이 많으며 윤리와 윤의로써 한가로이 쉬면서 강하였으니 그 연유한 바를 어찌 가히 알지 못하랴 이것을 가히 써 새기노라. 銘에 가로되
공손히 생각하니 안씨는 대로 이름난 덕이 있었도다. 공께서 이 집에 태어나서 번창하게 빛나는 발자취로다. 오로지 옥과 주가 냇물과 묏부리에 다하지 아니하도다. 효도와 공경으로 근본을 하고 또한 배움에 넉넉했도다. 일찍이 장원과에 발탁되니 왕명을 출남하는 직책이로세. 내가 어려서 배움이 있으니 마땅히 왕에게 아뢰겠네 조짐은 가히써 행함직한데 곧바로 곤함이 돌부리에 부딪쳤네. 수풀 동산 돌아와 南柯一夢에 괴안국의 영화 꿈 끊어졌도다. 없어지지 않는 것 있다고 하면 경유, 나봉 두 분이 자취 남겼네. 양양의 서쪽기슭 대망언덕에 넉자 남짓 무덤이 높이 있구나. 나 또한 최고로 알고 명을 새기니 지나는 사람마다 읽어 마땅해
번와(樊窩) 김용규(金龍圭) 지음
1 2 3 4 5 6 7
안자미(安子美)ㅡㅡ>안영린(安永麟)ㅡㅡ>안정준(安貞俊)ㅡㅡ>안성철(安成哲)ㅡㅡ>안문개(安文凱)ㅡㅡ>안천선(安千善)ㅡㅡ>안손주(安孫柱)ㅡㅡ>
8 9 10 11 12 13
안준(安俊)ㅡㅡ>안숭덕(安崇德)ㅡㅡ>안효조(安孝祖)ㅡㅡ>안황(安璜),안찬(安瓚)ㅡㅡ>안경빈(安敬賓)ㅡㅡ>안명남(安命男)ㅡㅡ>
14
안집(安潗)안직(安稷)안현(安顯)안혁(安奕)안개(安漑)안홍(安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