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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일흔세 번째 강론
로마서 14:19-23
믿음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 교회라면 그 모임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다. 단순히 세상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의를 내세우면서 서로 즐기며 편안함을 느끼는 그런 평강과 기쁨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기쁨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온 것임을 고백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상은 따로 있다. 그저 이상적인 희망을 품고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갈망하면서 내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 떠도는 이른바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 그래서 현재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떤 교회에 다시 나갈 의향이 있는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라고 답변한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공동체성이 있는 교회’, ‘건강한 교회’, ‘부담이 없는 교회’, ‘편안한 교회’ 이런 순서로 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맨 마지막이 ‘성경 공부와 기도를 중시하는 교회’였다고 한다.
과연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고 존귀하게 여겨주는 그런 목사를 원하는가? 목사가 심방 하겠다고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모임을 원하나? 헌금에 대해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를 원하는가? 공동체성이 있고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 세부적인 내용을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음과는 상관이 없고 그저 자기 종교 생활을 위한 교회를 찾는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주성교회로 함께 모이는 이 모임 속에서 목사의 임무가 무엇일까? 저는 먼저 주성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하였다. 여기서 흥한다는 말은 ‘증가하고 지위나 권위가 더 높아지는 것’이고, 쇠한다는 말은 ‘보다 열등하게 되고 더 낮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생각에 요한도 흥하고 예수님도 흥하면 복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풍성히 증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쇠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흥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주성교회 교인 수가 많아지고 부흥 발전되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더 증거되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더 찌그러지고 망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인 교회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성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임무는 먼저 말씀을 안다는 입장에서 망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주성교회는 망하고 없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성교회를 붙잡고 주성교회를 위한 일들을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인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성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내가 복을 받아 잘 살고 잘 되어야 복음이 더 많이 잘 증거될 것이라고 전하는 교리는 마귀의 ‘내가복음’ 안에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면 교회 내에서 음식이나 날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면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물론 각자가 다 자기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각자 자기 입장에서 상대를 판단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본질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면 서로를 판단하면서 누가 옳은가 하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라고 하였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는데(18절) 우리의 어떤 행위로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세워진 상태여야 한다(12:1-2).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어서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9절)라고 앞의 말씀과 다소 상관이 없는 듯한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덕을 세우는”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로 ‘오이코도메’라는 말인데 ‘오이코’(집)와 ‘데모’(세우다, 짓다)의 합성어로 ‘집, 건물’이라는 뜻이다(‘덕’이라는 말이 없다). 같은 단어를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에베소서의 “건물”, 고린도전서에서 “집”이라는 말이 ‘오이코도메’라는 단어이다. 이렇게 이해하자면 로마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서로가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는 하나님 나라의 평강으로 인해 집, 즉 하나님의 집인 성전으로 세워지는 것을 추구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20절)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사업”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말이다. 즉 19절 말씀과 연결해서 정리하자면 ‘교회가 서로 평강과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을 추구하는 상태라면 음식의 문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집을 무너지게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다 깨끗하므로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이 악한 상태에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1절)라고 선언한다. “아름다우니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선하다’는 뜻이다. 우리 성경은 어법상 가장 뒤에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문장 맨 앞에 두고 있다. 직역을 하면 ‘선하도다!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음으로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않는 일’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이 무엇인가를 한다면 그것은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선함 안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다시 본질로 돌아와서 그렇게 하나님의 집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에 근거해 있는가를 밝힌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절)라고 말씀한다. “네게 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언제 믿음이 있었나? 아니 타인에 대한 믿음은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 믿는 믿음으로 존재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는 결정적일 때에는 그것조차도 내 안에서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 않는가? 결국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는데 믿음이 있다고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계시 되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3:20)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다(3:21).
결국 “네게 있는 믿음”이란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이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서 발생 된 믿음이 아니라 하늘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믿음’이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믿음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씀 또한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고 스스로 믿음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너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믿음을 자신의 소유로 가지고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꺼내놓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 날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의 상태가 죄악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믿음과 견주어 볼 때만 우리는 항상 믿음 없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과 견주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견주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날마다 그 고백이 나와지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성도요 교회이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는데 “자기가 옳다 하는”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도키마조’인데 ‘시험을 받아 인정되고 확증된 것’이라는 뜻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라 직역을 하면 ‘복이 있다. 시험을 받아 인정되고 확증되어 자기 자신을 심판하지 않는 자는’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소유한 자는 시험을 받아 인정되고 확증된 믿음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는 복의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23절에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23절)라고 선언한다. “의심하고”(헬, 디아크리노)라고 말은 ‘심판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이고, “정죄되었나니”(헬, 카타크리노)라는 말도 ‘판단, 심판하여 유죄로 선고하다’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따라”라는 말은 ‘믿음에서부터’라는 뜻으로 출처가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라고 우리가 믿음을 따라 어떤 행위를 한 것으로 이해되도록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아니하였다’라는 말이 없다. 또한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아니하는 것’이라는 말은 의역을 하여 삽입된 표현이다. 23절 말씀을 직역하면 ‘그러나 판단하고 먹는다면 죄가 선고되었으니 이는 믿음에서부터가 아니다. 모든 것에 믿음이 아닌 것은 죄이다’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라고 이미 밝혔었다. 즉 하나님의 의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 되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의에 합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믿음이 의인으로 살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아닌 것이 죄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스르는 모든 것들이 다 죄다. 우리가 언제 믿음으로 무엇을 한 적이 있는가? 이런 점에서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선포하였다.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사 64:6-7)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항상 통곡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견주어 믿음 없는 상태임을 날마다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늘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애통해하면서 십자가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일을 추구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성도는 믿음이 아닌 것에 굴복하는 자가 아닌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굴복된 자요, 주성교회에 속한 자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은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202204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