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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73
요한계시록 19:1-5
아멘 할렐루야
17-18장에서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서술한 다음 19장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대해 말씀한다. 1-5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의로움을 찬송하는데 1-3절은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찬송이 있고, 4절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송, 그리고 5절은 보좌로부터 교회가 찬송하도록 선포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6-10절은 하나님의 통치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말씀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이 묵시라는 차원에서 기록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시간적으로 어떤 일 후의 내용이라기보다 그 사건을 근거한 배경으로 장면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 일어난 결과로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그 자체가 찬양의 근거가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멸망과 상관 없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란 한 족속, 한 언어로 바벨 성과 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땅의 무리와는 대조된 하늘에 속한 무리이다. 각종 질병의 고통 속에서, 죄의 권세에 매여 죽음의 상태에 있는 줄 모르고 종교 행위로 그저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살고자 하는 땅의 무리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자들로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7:4)이며 ‘흰옷 입은 셀 수 없는 큰 무리’(7:9)이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표현이 “할렐루야”(1, 3, 4, 6절)인데 신약에서는 여기 네 번이 유일하다. 구약에서는 시편 104:35에서 처음 언급한 것을 비롯하여 시편에서만 23회 언급되는데 히브리어로 ‘할렐루야’는 ‘밝게 비추다, 자랑하다, 찬양하다, 보이다, 명백해지다’라는 뜻의 ‘할랄’과 ‘여호와’를 의미하는 ‘야’의 합성어로 ‘여호와를 찬양한다’라는 뜻이다. 요한 사도는 구약 용어를 사용함으로 구약에서 보여주신 심판과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완성되었다고 노래한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는 찬양이다. 시편 기록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1-2, 6)
하나님의 “성소”는 성막, 성전이지만 “그의 권능의 궁창”이라는 표현을 통해 보자면 하늘의 성소, 궁창 위에서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는 말씀은 죽었던 자가 산 자의 호흡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허다한 무리의 찬송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그 구원, 그 영광, 그 능력이 우리의 그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말이다. 즉 하늘에 속한 허다한 무리가 구약에서 말씀한 그 구원, 그 영광, 그 능력의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말씀한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결과이다. 그러기에 “무리의 큰 음성”은 단수로 표현되었다. 즉 무리가 ‘한 음성’으로 찬송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찬송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1-3)
모세의 노래는 단순히 홍해를 무사히 건넜다는 것에 대한 찬송이 아니며, 애굽의 군사들을 물리치신 것에 대한 감사만도 아니다. 홍해를 무사히 건넌 것으로 노래하거나 원수들을 복수한 것에 대해 노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유행가와 같은 노래에 불과하다. 여기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송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에 대한 찬송이다. 언약의 원수들을 바다에 던져넣으시고 자기 언약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통해 주시는 계시였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출 15:13, 17-18)
“거룩한 처소”가 현실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가나안 땅이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심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인데 그것을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들이 비록 홍해를 건넌 후에도 무수히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지만 홍해를 건넌 이 순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언약의 궁극적인 뜻을 찬송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타내신 것은 앞으로 이 땅에 보내실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구원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죄에서 건져내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 광야교회로서 홍해 바닷가에서 불렀던 그 찬송을 이제 교회가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오직 십자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이렇게 볼 때 “하늘에 허다한 무리”는 ‘네 생물, 이십사 장로, 두 증인, 천사들’이며 곧 교회이다(5:11). 그래서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4절)라고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찬송을 보여준다.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구원, 그 영광, 그 능력을 십자가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아멘 할렐루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할렐루야”는 전화 받을 때 “여보세요” 대신 써야 할 말이 아니며, 예배나 모임에서 찬송가나 CCM 몇 곡 부르는 것이나 4부 화음의 성가대 노래가 찬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십자가에 죽는 죽음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인 일이 잘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찬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헬, ‘호 데우 헤몬’)이다. 즉 ‘우리의 하나님’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된 자이다.
이제 찬송의 근거를 더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2절). “참되고 의로운지라”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의 의로 이루진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전하였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되었다(롬 1:17).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에 자기 의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롬 10:3).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났다는 것은 음녀요 바벨론인 내가 이 땅을 더럽게 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십자가로 폭로되고 심판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라고 말씀한다. 즉 내가 음녀로 심판의 대상이 되어 죽어야 할 존재이다.
바울 사도가 율법을 행함으로 교회를 핍박하였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었다(행 9:4, 빌 3:6). 따라서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라는 것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수이며 처벌이다. “갚으셨도다”라는 말의 ‘에크디케오’는 ‘복수하다, 원수를 갚다, 처벌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우리’ 혹은 ‘나’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에 대한 처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신 것은 자신이 친히 하신 언약 때문이다. 그 언약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세상에 대하여 심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만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3절). 바벨론에 대한 완벽한 심판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빌려서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고 표현하였다.
8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9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10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사 34:8-10)
“연기”란 율법적 행위의 근거로 삼는 성전을 태운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인 십자가 외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이 땅에 아무것도 없다. 음녀 바벨론과 하나 되어 거기에 기대를 걸고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이다. 그 율법적 행위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세상을 노래하는 음녀 바벨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진 바벨론을 보고 “아멘 할렐루야”(4절)만 한 음성으로 찬송한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5절). 누구든 작은 자나 큰 자나 가리지 않고 구속받은 자라면 하늘의 찬송에 응답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찬송하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끌고 들어가 죽이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좌에서 나온 말씀이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 은혜에 의해 하늘에 속한 자로서 이 땅에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하나님의 종들로 경배하며 찬송한다(202404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