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
베네치아 공화국, 신성 로마 제국과 조약을 맺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1570년 그야말로 뜬금없이 키프로스를 침공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침공은 정확한 이유나 근거가 없어 뜬구름 잡는 추측이 난무하는데, 당시 오스만 술탄인 셀림 2세(재위 1566~1574)가 포도주를 좋아해서 좋은 포도의 산지인 키프로스를 점령하려는 목적이었다고도 하고(그게 진짜라면 흠좀무), 셀림 2세가 엄청난 위업을 쌓아 대제로 존경받은 아버지 술레이만 1세(재위 1520~1566)가 로도스 섬을 함락(1522)시켰듯이 자기도 서방 기독교 세계가 지배하는 섬들 중 하나를 점령하려고 마음먹었을거라는 설도 있지만...어느 게 진짜 이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저런 야사에 가까운 설화들은 치워 두고, 당장 지도만 보면 동지중해의 복판에 떠 있으며, 유일하게 자체적으로 군사를 주둔 시키고, 해군 기지로 만들 만한 규모와 농업이 가능한 토양이 되었던 키프로스의 전략적 중요성이 대반에 파악 된다. 당시 동지중해 전체를 거의 꿀떡 집어 먹고 아드리아해 내부로의 진출을 노리던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자기네 안마당 복판에 떠 있는 적성 세력의 불침 항모와도 같았던 키프로스를 차지 하는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저런 잡스러운 야사에 매달릴 필요 없이 단박에 알 수 있다. 베네치아와 화평을 맺고 있었다 한들 이거야 당시 누구나 오래 가지 않을거라 예측 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양쪽 다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휴전에 불과했고, 게다가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접수 하기 훨씬 이전부터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왕국이 영혼 까지 털린 이후 기 드 뤼지냥이 건너가서 차지하여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 까지 해적질과 기습을 걸었던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2].
당시 키프로스에는 1만명 전후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7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왔던 까닭에 상대가 될리 없었고, 맨 처음 공격당한 니코시아는 그대로 짜부라지고 키프로스의 중요한 거점인 파마구스타까지 포위당했다. 다행히 파마구스타는 잘 요새화된 지역이었고 요새와 즉시 연결될 수 있는 항구가 있었서 보급이 가능했던 까닭에 오스만군은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이듬해 4월까지 포위를 한 상태에서 대치만을 반복한다.
한편 느닷없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는 교황에게 열심히 로비를 하게 되고, 교황 비오 5세(재위 1566~1572)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가 신성동맹의 소집을 결정하고 1570년 9월에 180척 가량의 신성동맹 연합함대가 구성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그 영향으로 제노바 출신 용병지휘관으로 스페인에 의해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3]가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나 그냥 돌아갈래"라면서 시칠리아로 뱃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없이 해산(…)되었다.
사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동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대 같은 건 별 관심도 없는 문제였다. 극단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를 모두 장악한다고해도 스페인이 아쉬울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스페인의 돈줄은 신대륙에서 오는 황금이었고, 오히려 프랑스를 견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반면, 베네치아는 지중해 교역이 국가의 생명줄이었으니 오스만 제국을 막는 것에 국운이 달려 있어 필사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펠리페 2세가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요청때문이었는데 수십척으로 해전을 벌이는 것은 아무리 잘나가던 당시 스페인에도 국력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었으니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레판토 해전이후 스페인은 파산 선언을 할 정도였으니 뭐. 때문에 펠리페 2세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체면치례로 함대를 적당히 보내는 시늉만 하고 싶어했던 것이고, 안드레아 도리아는 이 지시에 충실히 따른 것 뿐으로 당시 스페인의 정황으로 보았을때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4]
이에 실망한 베네치아는 일단 12척의 갤리선을 동원하여 파마구스타에 일시적인 보급을 하고, 다시 로비 작업에 착수한다. 이번에는 펠리페 2세도 마음을 돌려 적극적인 참여를 결정하고 1571년 5월 다시 신성동맹 연합함대의 결성하였음이 선포된다. 그리고 애초에 신성함대를 해산시킨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대신 자신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1547~1578)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저 유명한 아르마다 무적함대를 8월말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사실 스페인 입장에서도 동지중해의 패권 문제가 국익에 서유럽과 네덜란드 문제 보다는 부차적이였다 해도, 당장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스페인 왕실의 영지였거나 제후국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마그레브 지방에 기반하여 스페인 동부의 지중해 해안을 아예 황무지로 만들 만큼 털어대던 바르바리 해적들의 물주 노릇을 했기 때문에 마냥 방관할 수도 없었다.
한편 오스만군은 5월부터 8만병력으로 파마구스타 공성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8월 1일 파마구스타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초 키프로스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베네치아 군대는 크레타섬으로 보내주기로 약조하였는데, 중간에 크레타섬까지 호송할 오스만 함대의 안전보장을 놓고 양측 사이의 마찰이 생기면서 서로 디스질하다가 협정이 깨져서 베네치아 군대는 험한 꼴[5]을 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 후안을 사령관으로 하는 신성동맹 함대가 접근을 하고 오스만 해군이 요격을 위해 나서면서 양측은 레판토 부근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
1.1. 신성동맹 함대의 규모 ¶
2. 전개 ¶
10월 4일 오스만군의 정찰대가 기독교 함대의 규모를 140척이라고 보고하는 바람에 알리 파샤는 쪽수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믿고 기독교 함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였으며, 이 기회에 눈에 가시였던 베네치아가 점유한 섬들도 점령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그리고 10월 7일 양쪽 함대가 맞딱뜨린다.[10] 기독교 함대 중앙부대의 갈레아스 2척이 포격을 시작하고, 곧이어 좌익부대의 갈레아스 2척도 포격을 하면서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함대의 우익부대를 지휘하던 시로코는 자신이 직접 부대 절반을 이끌고 기독교 함대와 정면으로 맞서고, 나머지 부대는 다시 둘로 나눠 우회를 시킨 후에 포위를 하려고 하였다. 이에 맞서던 기독교 함대 좌익부대 사령관 바바리고는 그 즉시 틈을 막아 저지하려 하였으나 7척이 무사히 뚫고 나오는 바람에 4척의 갤리선을 잃고 바바리고의 기함이 습격당해 심한 부상[11]을 당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돌진했던 갈레아스들이 피하기 위해 갈라진 오스만 함대의 틈바구에 섞여서 마구 깽판부리고, 시의적절하게 구원출동한 갤리선들이 발목잡힌 오스만 해군을 포위하여 암초지역으로 밀어붙이면서 전세가 회복되었다.
한편 중앙부대 역시 갈레아스 진격으로 오스만 해군은 갈라져서 일단 피한 다음 기독교 함대를 공격하였다. 반면 돈 후안은 오스만 해군의 원거리 사격에 응하지 않고 접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함대가 접근하자 일제사격을 가한 후에 접근전에 돌입하였다.(전투 초입에 신성동맹 함대의 총사령관 후안의 기함 레알을 항해 오스만군 총사령관 알리 파샤의 기함 술티나가 돌입을 감행, 술티나의 충각이 레알의 뱃머리에 부딪쳐 단단히 박혀 버렸고, 레판토해전 최초의 본격적인 백병전이 레알과 술티나로부터 시작했다.)[12] 중앙부대의 전투가 달아오르자 예비병력을 이끌고 있던 알바로 데 바잔은 돈 후안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투입하여 충각 전술로 오스만 갤리선을 박살내버리고, 추가 갤리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알리 파샤 주변의 오스만 군을 수세에 몰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예비병력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몰타 기사단 함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역시 오스만 함대의 예비병력을 이끌고 있던 드라굿 레이스 역시 알리 파샤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해 즉시 예비병력을 파견하였다.
반면 기독교 함대의 우익부대는 우루치 알리가 좌측을 공격하려 해서 이를 막으려고 우현으로 향하는 바람에 기독교 함대 본대와도 떨어지게 되었으며 전투도 늦게 돌입하였다. 우루치 알리는 갤리엇이 지닌 속도의 우위를 앞세워 기독교 함대의 우측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를 보고 베네치아 갤리선 16척이 사령관 안드레아 도리아의 명령없이 멋대로 돌진하는 바람에 포위당하였으며,[13] 뒤늦게 갈레아스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화약고에 불이 붙어서 폭발한 갤리선(오스만 군에게 배를 나포당하게 되자 선장이 아예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했다고...)으로 인해 기독교군의 함선이 막대한 피해를 보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옆의 오스만 함선들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연쇄 폭발을 일으켜 오스만에게도 적잖은 피해를 안겨줬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오스만의 우익부대는 전면적인 패주 상황에 놓여있었다. 상황을 깨닫고 잽싸게 도주한 갤리선들도 있었지만, 포위망에 갇힌 갤리선들은 숫적우위를 앞세운 기독교 함대의 공격에 줄줄히 침몰되었으며, 결국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부상당한 시로코가 기독교 함대에 포로로 잡혔다[14].
비슷한 시기 오스만의 중앙부대도 서서히 몰리고 있었다. 특히 알리 파샤의 기함과 그 주변의 갤리선들이 기독교 함대에 완전히 포위되어 간신히 저항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15] 지원을 위해 출동한 병력도 기함에 접근하지 못한채 족족 저지당하고 있었다. 돈 후안은 알리 파샤의 기함을 발견하여 공격하였고, 3번의 시도 끝에 배에 올라타서 알리 파샤를 참수하여 이를 높이 내걸자, 오스만 함대의 중앙부대도 사기를 잃고 서서히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비슷한 시기 우익함대의 안드레아 도리아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고립된 함대 구출을 위해 접근하였다. 하지만 우루치 알리는 휘하의 30척을 거느리고 기독교함대 중앙부대를 공격하여 우군을 지원하려 하였다.
하지만 알리 파샤의 전사소식을 듣자 곧 이를 포기하고 근처에 있던 몰타 기사단 함대를 공격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몰타 기사단 함대는 순식간에 패배하여 기함이 점령당하고, 기사단장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으나 다행히 알바로 데 바잔이 몰타 기사단 기함이 나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즉시 구원병력을 보낸 덕분에 우루치 알리는 노획물만 챙기고 도망가버렸다. 이후 전선에 남아서 저항하던 나머지 오스만 함대도 기독교 함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하였고, 기독교 함대도 더이상의 추격을 포기하면서 해전은 끝을 맺었다.
3. 결과 ¶
기독교 함대는 갤리선 40척 가량이 격침 또는 파손되었으며, 7500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부상했다.
오스만 함대는 170척의 갤리선과 60척의 갤리엇이 격침 또는 파손[16]되었으며, 3만 명이 전사했다. 여기에 3천명 가량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오스만 함대는 170척의 갤리선과 60척의 갤리엇이 격침 또는 파손[16]되었으며, 3만 명이 전사했다. 여기에 3천명 가량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이유는 당시 기독교 함대가 더 많은 포를 싣고 병사들도 모두 총기류로 무장하고 있었던 까닭에 화력면에서 앞섰다. 게다가 베네치아의 신병기 갈레아스가 함열에 뛰어들어 깽판을 부리는 바람에 초반부터 대열이 붕괴되어 기독교 함대에 각개격파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기독교 함대의 노잡이들은 대부분이 고용된 사람들이어서 전투가 벌어지면 그 즉시 무기 빼들고 싸울 수 있는 중요한 전력이었던 것에 비해 오스만 제국 갤리선의 노잡이는 기독교도 노예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 함대와 전투가 벌어지자 당연히 노잡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오스만군은 기독교 함대와 교전을 하면서 동시에 노예들의 반란도 진압(…)해야 했으므로 정상적으로 전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1만 5천명 가량의 기독교도 노예 노잡이들이 해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어쨌든 키프로스를 점령하였으며,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 명성을 날리던 인재들을 너무 많이 상실한 까닭에 실질적인 해군력은 과거에 비하면 떨어졌다. 반면 베네치아는 비록 키프로스를 상실하였지만, 오스만 제국과 협상하여 크레타 섬과 나머지 섬 지역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나머지 참여한 기독교 국가들은 전투에서 건진 전리품들을 적당히 나눠가짐으로써 이익을 챙겼는데, 솔직히 가장 이익을 많이 챙긴 곳은 베네치아다.
4. 의의 ¶
오스만-이슬람과의 충돌에서 기독교 군대가 거둔 결정적인 승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론되는 해전이지만, 의외로 그 세계사적 파급효과는 미미했다. 세계사적 영향력은 고사하고 이슬람 세계나 기독교 세계, 지중해 세계 모두에 별다른 여파가 없다고 보아도 좋은데, 해전 이후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불협화음으로 베네치아는 오스만과 강화조약을 맺어버려 전쟁에서 빠졌고 스페인도 튀니지를 지키는데 실패하고 1574년 북아프리카의 거점을 상실해버렸다. 그 결과 해전 전보다 오히려 기독교 동맹은 세력이 줄어들어버린다.
실제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상 메메드 소콜루는 베네치아 대사 마르칸토니오 바르바로에게 "키프로스는 팔과 같고, 우리네 패전은 수염과 같다. 당신네들은 팔을 뽑혔으니 다시 자랄 리 없지만, 우리의 수염은 다시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배가 아파 혹은 대제국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허세(...)를 부린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튀니지를 탈환하고 해군의 규모 자체는 [17]수복하여 체면치레는 했지만, 이후 막장 술탄들이 넘쳐나게 되면서 레판토 해전 자체의 의미가 덧칠된다. 레판토 해전과는 별개로 막장 술탄들의 실정으로 오스만 제국이 점차 침체하지만, 기독교 세계의 선전으로 마치 레판토 해전 패전 이후 오스만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려진 것이다. 사실과는 전혀 다르며, 오스만의 진정한 쇠퇴는 레판토 패전 후 무려 110년이나 지난 2차 빈 포위(1683)의 실패 이후 오스트리아-폴란드-베네치아-러시아가 뭉친 '신성동맹'시즌 투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른 뒤부터 시작된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가 이토록 과대평가되는 이유는 그전까지 기독교 세력, 더 정확히는 서유럽이 오스만 제국에게 전투에서 그럴듯한 승리를 거둔 역사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세계가 1571년 이후로는 이슬람 세계에 이후 400여 년 간, 즉 현재까지 대반격을 가하여 위세를 회복하면서 그 시초로 레판토 해전을 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1503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에 동지중해의 패권을 뺏긴 뒤 레판토 해전 후에 다시 기독교 세계가 제해권을 차지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 레판토 해전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았을 뿐이지 제해권을 되찾은 것은 아니였다. 그러다 하더라도 실제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지라도 레판토 해전의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다. 1560년대까지 기독교 세계의 해군은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전체의 헤게모니를 잡을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만약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했다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레판토 해전의 승전으로 인하여 이전까지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해군을 미친듯이 바르며 그야말로 무적, 무패의 위세를 자랑했던 오스만 해군이 격파되어 반오스만 동맹군이 사기적으로 크게 고양되었다는 점이다.[18] 그리고 중세 이후 유례없는 대해전이었던 레판토 해전의 타격으로(그것이 실질적인 피해였든 정신적인 것이었든)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려는 방향에서 선회, 동지중해와 레반트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정도에서 만족했고 서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비록 그 이후 점차 유럽세계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에서 북해로 옮겨가기는 하지만 지중해의 역사에서 레판토 해전의 의의를 그저 과소평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5. 그 외 참고할 이야기 ¶
- 636년 야르무크 전투이후로 기독교측이 이슬람측에 레판토 해전 시점까지 늘 수세에 몰려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무리한 해석이다. 확실히 그때부터 9세기 중반까지는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기독교측이 이슬람측에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심지어는 과학기술적인 면에서 열세였던 것은 사실이나, 이 시기가 넘어가면 동유럽 쪽에서는 7~9세기의 과정을 거치며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체제 정비를 완료한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측에 분명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다.
또한 에스파니아쪽에서는 기독교측이 11세기부터 꾸준히 이슬람측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었으며, 물론 이슬람측은 이것을 막기 위해 무진 많은 애를 쓰긴 했지만 결국 1492년에 그라나다 함락으로 결론이 나고마는 대세를, 끝내 뒤집을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기독교측에서 포기할 수 없는 도시였다면 마찬가지로, 설령 그보다는 약간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라나다는 물론이요 코르도바 또한 이슬람측에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추억어린 도시였다. 레판초 해전을 기독교 세력 VS 이슬람 세력의 대결로 볼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의 대결의 추가 늘 이슬람쪽으로만 쏠려 있었던 건 아니다.
- 기독교 측은 당시에 유명한 해군 지휘관인 마르코안토니오 콜론나, 아스카니오 델라 코르나, 마르코 퀘리니, 마뤼탱 로메가스 등 참전하였는데, 콜론나의 기함에 탑승한 로메가스를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배를 지휘했다.
- 이슬람 측은 벡타시 무스타파, 델리 첼레비, 하지 아가, 코스 알리, 피알리 오스만, 카라 레이스 등 여러 명이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 이 전투에 돈키호테의 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이 전쟁에서 마르케사 호에 승선해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으면서도 보병 부대를 지휘했으며, 하사관인 마르틴 무뇨스도 시칠리아의 함선인 산조반니호에 탑승해 참전했지만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았다.
-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에 세르반테스는 결국 이 전쟁으로 왼손을 잃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스페인으로 귀국 도중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알제리에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 돈세야 호의 페데리코 베누스타는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려 팔이 불구가 되면서 왼 팔을 잘라 의수를 단 채로 전역하게 되었으며, 구호기사단의 기사인 로메가스는 몰타 섬의 갤리선들이 아닌 콜론나의 기함에서 승선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당시 구호기사단의 부단장인 피에트로 주스티아니는 화살을 다섯 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 영국 국왕인 헨리 8세의 서자일 가능성이 있는 해적이자 용병인 토머스 스투켈리가 에스파냐 함선 3척을 지휘하였으며, 파마구스타 공방전에서 사망한 베네치아 사령관인 마르칸토니오 브라가딘의 일가인 안토니오 브라가딘, 암브로조 브라가딘 등이 선두에 서서 갈리아스선 2척을 지휘했다.
- 아내 살해 혐의로 12년간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한 피렌체의 음악가인 아우렐리오 셰티가 참전했으며, 총사령관 돈 후안의 기함에 애인을 따라 나선 마리아 라 바일라도라라는 여성이 남장을 하고 화승총병으로 참전했다.
- 알리 파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만 해군의 깃발이 노획되어 베네치아의 해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20세기에야 터키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교화해의 증거로 반환되었다. 흰 천에 금실로 쿠란의 경구를 자수한 군기라고 하는데, 현재 터키에서는 패한 전투의 깃발이라 그런지 공개하고 있지 않다. 그걸 가지고 시오노 나나미가 그 깃발 멋있는데 니들 땜에 이제 못보잖아라고 하면서 왜 돌려줬냐고 깠다. 이뭐병.
- 가톨릭에서는 이 해전의 승전일인 10월 7일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당시 교황 성 비오 5세가 신성동맹의 승리를 기원하며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기 때문이다.
- 이 전투 이후 오스만 해군은 이 전과 같은 정면 팽창보다 북아프리카의 가신 토후국들을 이용한 해적질에 더 무게를 두게 되고, 2세기에 걸쳐 지중해를 뒤흔든 이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 무역 자체를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 버려 결국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의 경제적 몰락에 큰 일조를 한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자금줄 또한 지중해 무역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레판토 이후 창궐한 이 해적들 때문에 전투의 참전 세력 대부분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는걸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가 아닐까. 그 후 이 해적들은 영국 배들까지 건드렸다가 한 소리 들은 후에 영국 배에 대한 공격은 하지않기로 잠정적 합의를 맺었다. 그 후 이들은 "미국? 그게 어디있는 나라임? 우걱우걱"을 외쳐대며 미국인들을 털다가 분노한 천조의 해군과 해병대에게 장렬히 산화한다.[20] 이 때를 기점[21]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전멸해버렸으며 150년 이후 천조의 해군은 전세계의 바다를 자기네 수영장으로 삼는 희대의 먼치킨으로 거듭나게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