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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계서원(大溪書院)
대계서원은 문강공(文康公)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 선생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1704년(숙종 30)에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주소 : 전남 보성군 보성읍 동암2길 100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544-10)
전화번호 : 061-853-1040 / 011-604-7715
1. 연혁
1657년(효종 8) 보성 유림의 발의로 보성읍 우산리 대계(大溪; 현재 보성여중 앞쪽) 근처에 서원을 창건
1689년(숙종 15) 유후상(柳後常)·이우진(李宇晋)의 모함으로 서원이 헐림
1694년(숙종 20) 관학 유생 홍최일(洪最一) 등이 상소 변론하여 다시 서원이 세워짐
1695년(숙종 21) 호남의 유생 이기억(李祺億) 등이 상소하여 사액을 청함
1703년(숙종 29) 예조판서 조상우(趙相愚)가 사액을 청함
1704년(숙종 30) 대계서원이라 사액함
1773년(영조 49) 서원에서 <우산집(牛山集)>을 간행
1787년(정조 11) 수재(水災)로 장원봉(壯元峰) 기슭(보성읍 신흥동)에다 옮겨 지음
1864년(고종 1) 서원에서 <은봉전서(隱峯全書)>를 간행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림
2003년부터 서원 복설 사업을 추진
2012년 10월 준공
2. 대계서원 복설사적비문(大溪書院復設事蹟碑文)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이 짓고
송파(松波) 이규형(李圭珩)이 썼다
서원(書院)은 선현(先賢)의 학덕(學德)을 높이고 강수(講修)하여 그 업적(業績)을 기리는 곳이다. 문강공 은봉 안선생(文康公隱峯安先生)은 휘(諱)는 방준(邦俊) 자(字)는 사언(士彦)이니 포은(圃隱)의 충정(忠貞)과 중봉(重峰)의 절의(節義)를 계승한 조선(朝鮮) 유현(儒賢)의 거장(巨匠)이다. 관향조(貫鄕祖) 죽성군(竹城君) 원형(元衡)은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는데 고려조신호위상장군(高麗朝神虎衛上護軍) 자미(子美)의 증손인 회헌선생(晦軒先生)의 후예(後裔)이다. 고조(高祖)는 예안 현감(禮安縣監) 범(範), 증조(曾祖)는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 수륜(秀崙), 조(祖)는 남원 부사(南原府使) 축(舳)이다. 고(考)는 첨지중추(僉知中樞) 중관(重寬), 비(妣)는 진원 박씨(珍原朴氏)로 조선조 선조 6년(1573) 11월 20일(朝鮮朝宣祖六年十一月二十日) 보성읍 우산리(寶城邑牛山里)에서 출생하여 8세에 숙부(叔父) 진사(進士) 중돈(重敦)의 후(後)로 입계(入系)되었다. 선생(先生)은 천성(天性)이 총민(聰敏)하고 기상(氣像)이 비범(非凡)하여 항상 도학(道學)에 뜻을 두었다. 11세에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4세에 난계(蘭溪) 박종정(朴宗挺) 두 선생에게 수학하고 19세에는 파주(坡州)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에게 지례(贄禮)하여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도통(道統)을 잇고 인의충신(仁義忠信)의 덕행(德行)을 닦아 사림(士林)의 거봉(巨峰)으로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20세 되던 임진년(1592)에 죽천(竹川)을 따라 창의(倡義)하여 참모(參謀)로 활동했고 42세에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을 피해 문덕면 우봉리(文德面牛峰里)인 송광면 우산리(松廣面牛山里)로 낙향(落鄕)하여 학문(學問)에 전념(專念)하면서 성현(聖賢)의 교훈(敎訓)을 후학(後學)에게 계도(啓導)하니 학자(學者)들이 우산 선생(牛山先生)이라 앙모(仰慕)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에 창의(倡義)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에도 64세의 나이로 동지(同志)와 의병(義兵)을 모아 북진(北進)하다가 여산(礪山)에서 적(敵)에게 굴복(屈服)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투과통곡(投戈痛哭)하고 환향(還鄕)하였다. <진주서사(晋州敍事)>, <호남의록(湖南義錄)>, <항의신편(抗義新編)>, <임정충절사적(壬丁忠節事蹟)>, <노량기사(露梁記事)>, <부산기사(釜山記事)>,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서술(敍述)하고 수찬(修撰)하여 왜란(倭亂)에 충절(忠節)을 바친 충신(忠臣)과 절사(節士)의 정신(精神)을 일깨웠다. 또한 우계(牛溪)의 <위학지방(僞學之方)>을 간행(刊行)하여 주자학(朱子學)의 공부 방법을 전했고 당쟁(黨爭)의 자료(資料)를 수집(蒐輯)하여 <혼정편록(混定編錄)>을 간행하였으니 이는 시비(是非)를 견별(甄別, 뚜렷하게 나눔)하여 포폄(褒貶, 시비를 가림)하였던 <춘추(春秋)>의 정신을 부식(扶植, 뿌리를 박아 심음)하고자 함이다.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을 무훼(誣毁, 꾸며서 비방함)하는 사론(邪論)이 횡행(橫行)하여 문조(文朝)에서 입패(立牌)가 폐출(廢黜, 작위나 관직을 내침)되자 이를 논박(論駁)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여 청(淸)과 화친(和親)하려던 무리들을 배척하였다. <기묘유적(己卯遺蹟)>을 편찬하여 사화(士禍)를 입었던 유현(儒賢)을 기리고 정여립(鄭汝立) 역옥(逆獄, 역적 사건에 대한 옥사)의 전말(顚末)을 밝히는 <기축기사(己丑記事)>를 저술하였으며 <우산답문(牛山答問)>을 통해 학문(學問)과 절의(節義)의 관계를 평하여 진유(眞儒)의 표상(表象)을 제시하였다. <대학연의(大學演義)>를 저술하여 격치성정(格致誠正)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학술을 새롭게 밝혔다. 74세 때 능주(綾州) 쌍봉(雙峰)의 매화정(梅花亭) 은봉정사(隱峯精舍)에서 강학(講學)하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내방(來訪)하여 강토(講討)하고 그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感服)하였으며 80세에는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을 배격하고 유민(流民)의 추쇄(推刷)를 혁파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렸다. 효종 5년(1654) 11월 13일 82세로 하세(下世)하니 조야(朝野)가 애도(哀悼)하고 그 올바른 삶을 추모(追慕)하였다. 이에 사림(士林)들은 선생의 학문(學問)과 유덕(遺德)을 기리고자 능주(綾州)의 도산사(道山祠)와 보성(寶城)의 대계서원(大溪書院)을 건립하여 제향(祭享)하고 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도 병향(竝享)하였다. 숙종 30년(1704)에 대계서원(大溪書院)이 사액(賜額)되고 영조 49년(1773)에 서원에서 <우산선생문집(牛山先生文集)> 5책이 인출(印出)되었다. 순조 21년(1821)에는 시호(諡號)를 문강(文康)이라 하였는데 도덕박문 왈 문(道德博聞曰文) 연원유통 왈 강(淵源流通曰康)이라 하였으니 가위(可謂) 8자 신사(信史, 정확한 사적)임에 분명(分明)하다. 고종 1년(1864)에 대계서원에서 <은봉전서(隱峯全書)> 20책이 간행(刊行)되고 고종 5년(1868)에는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에 따라 대계서원 또한 훼철(毁撤)되었다. 광복 후 선생의 사우(祠宇) 복설(復設)에 대한 여망(輿望)이 불이(不已, 멈추지 않음)하되 결행(決行)하지 못하다가 2004년 8월 전국(全國)의 유림(儒林)과 유지 제현(有志諸賢)의 성원(聲援)에 힘입어 보성 향교(寶城鄕校)에 대계서원 복설 추진위원회(大溪書院復設推進委員會)가 구성(構成)되고 2004년 12월 사단법인 은봉선생 기념사업회(社團法人隱峯先生記念事業會)가 법인 설립 인가(法人設立認可)를 받아 다음 해 대계서원 유허(大溪書院遺墟)의 건너에 대계서원 복설 기공식(大溪書院復設起工式)을 가진 지 8년만인 2012년 10월에 사우(祠宇)와 강당(講堂) 등 13동을 준공(竣工)하게 되어 선생의 유덕(遺德)은 이제 현대(現代)에 다시 빛나게 되었다. 이 사업(事業)은 문강공종회(文康公宗會)와 사단법인 은봉선생 기념사업회(社團法人隱峯先生記念事業會) 주간(主幹) 하에 보성향교 유림(寶城鄕校儒林)과 안씨대종친회(安氏大宗親會) 그리고 유관기관(有關機關)의 협조(協助)로 성취(成就)되었으니 그 만중일심(萬衆一心, 모두가 한 마음)이 더욱 값진 것이다. 이에 문강공 종중(文康公宗中)에서 서원 복설 사적비문(書院復設事蹟碑文)을 청하기에 여러 번 사양(辭讓)하다가 유문(遺文)을 안고 안고(按考, 살펴서 깊이 생각함)하고 그 사실(事實)을 기록하여 명(銘)을 붙인다.
山河毓靈兮여 鍾出人傑이라 / 산과 강이 신령한 기운을 길러서, 인걸(人傑,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니,
氷壺秋月兮여 儀表皎潔이라 / 빙호추월(氷壺秋月, 얼음을 넣은 항아리와 가을 달)처럼 의표(儀表, 몸가짐)가 밝고 맑았도다.
名賢之裔兮여 庭誥是襲이라 / 명현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정의 교훈을 물려받았고,
早從賢師兮여 得受正學이라 / 일찍부터 어진 스승을 좇아 정학(正學, 올바른 학문)을 공부했도다.
篤信力踐兮여 旌別淑慝이라 / 독실한 믿음으로 힘써 실천하여 선과 악을 뚜렷이 구별했으니,
不慕權貴兮여 不畏威嚇이라 /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을 흠모하지 않으며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國亂倡義兮여 和議排斥이라 / 국란에는 의병을 일으켜 적들과 화친하려던 무리들을 배척했고,
立言垂後兮여 麟經筆法이라 / 훌륭한 저술을 많이 남겨 <춘추(春秋)> 처럼 비판의 태도는 엄정했도다.
生平憂國兮여 至于暝日이라 / 한평생 나라를 걱정하여 눈 감을 때까지 이어지니,
吁嗟高風兮여 水長山卓이라 / 아! 선생의 높은 기풍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게 가리라.
於千百祀兮여 此銘不泐이리라 / 아, 천백년토록 빛나리니 이 명(銘)에 실어 영원하리라.
서기 2011년 후학 이백순(李栢淳,1930~2012) 근서
안내표지석
3. 관련유물
― 대계서원 유허비(大溪書院遺墟碑)
: 김영한(金寗漢)이 지은 유허비를 1995년에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 앞에 세움.
― 대계서원 진신장의안(大溪書院搢紳掌議案)
: 서원을 운영한 임원들의 명단을 모아놓은 것.
― 대계서원 유안(大溪書院儒案)
: 서원에 등록하여 학문을 닦은 유생(儒生)들의 명부.
― 대계서원 심원록(大溪書院尋源錄)
: 서원을 찾아 봉심(奉審)한 후손과 후학들의 방명록.
― 대계서원 전답양안(大溪書院田畓量案)
: 서원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전답과 소출 현황을 기록한 문서. 이상의 문서 외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303호로 지정된 132점이 소장됨.
은봉 사당(隱峰祠堂) 전남 보성읍 우산리 종가.
이 사당은 은봉을 제사하는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이다. 1879년에 종손 안영환(安永煥,1812~1882)이 사재를 기울려 건립했다. 1999년에 목우회장 안준(安俊)과 종손 안재호(安在祜), 보존회 총무 안삼영(安三英), 목우회 총무 안병훈(安秉勳)을 비롯한 목우회원과 후손의 협력으로 중건하였다. 매년 음력 11월 13일에 후손들이 모여 기일(忌日) 제사를 봉행한다.
조문사(祚文祠)
하늘이 사문을 도왔다는 뜻.
*문강공 위패를 모신 사당의 명칭
*동춘 송준길 선생의 글씨를 집자
숭도문(崇道門)
도학을 숭상했다는 뜻.
*내삼문의 명칭
*녹양 박경래 글씨
대계서원(大溪書院)
보성읍 대계 가에 세운 서원
*서원 강당의 명칭
*숙종대왕의 어필을 집자
격치재(格致齋)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함
*동재의 명칭
*송파 이규형 글씨
성정재(誠正齋)
대학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을 뜻함
*서재의 명칭
*유당 기호중 글씨
전사청(典祀廳)
제사상을 차리고 제기와 제례 용구를 보관함
*일속 오명섭 글씨
은봉유물전시관(隱峯遺物展示館)
고서와 고문서 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303호로 지정된 132점 소장
*금봉 박행보 글씨
장절문(獎節門)
절의를 장려했다는 뜻
*외삼문의 명칭
*학정 이돈홍 글씨
II. 은봉(隱峰) 선생의 사상과 학문
1. 은봉 연보
1573년(선조 6) 11월 20일에 보성군 오야리(梧野里,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남.
1583년(선조 16, 11세) 이황(李滉)의 제자 박광전(朴光前)에게 배움.
1586년(선조 19, 14세) 고경명(高敬命)의 제자 박종정(朴宗挺)에게 배움.
1589년(선조 22, 17세) 경주 정씨(慶州鄭氏) 승복(承復)의 딸과 혼인함.
1591년(선조 24, 19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함.
1592년(선조 25, 20세) 임진왜란에 박광전·임계영(任啓英) 의병막하에서 종사관(從事官) 정사제(鄭思悌). 은봉이 참모로 활동함.
1596년(선조 29, 24세) 진주성 전투를 기록한 《진주서사(晉州敍事)》를 집필함.
1613년(광해군 5, 41세) 조헌(趙憲)의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함.
1614년(광해군 6, 42세)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보성 소뫼(牛山)으로 낙향하여 우산전사(牛山田舍)에서 강학을 시작함.
1616년(광해군 8, 44세) 《호남의록(湖南義錄)》을 집필함.
1622년(광해군 14, 50세) 조헌(趙憲)의 〈동환봉사(東還封事)〉를 편찬하여 간행함.
1625년(인조 3, 53세) 오수도 찰방(獒樹道察訪)에 19일 동안 있다가 사직하고 돌아온 뒤로 한양에 발걸음을 끊음.
1627년(인조 5, 55세) 정묘호란에 창의하여 호남 의병장으로 출병함.
1632년(인조 10, 60세) 스승 성혼(成渾)의 《위학지방(僞學之方)》을 간행함.
1635년(인조 13, 63세) 능주 매화정(梅花亭)에 터를 잡고, 당쟁자료를 모아 《혼정편록(混定編錄)》을 편찬함.
1636년(인조 14, 64세)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수백 명을 이끌고 여산까지 진군함. 성혼과 이이(李珥)를 변론하는 장문의 상소를 지음.
1640년(인조 18, 68세) 상소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시국을 비판함.
1642년(인조 20, 70세) 《기묘유적(己卯遺蹟)》을 편찬하여 기묘사화의 전말을 정리함.
1643년(인조 21, 71세) 〈기축기사(己丑記事)〉·〈우산답문(牛山答問)〉을 지음.
1646년(인조 24, 74세) 매화정에 은봉정사(隱峯精舍)를 짓고 다수의 제자를 양성함.
1647년(인조 25, 75세) 은봉정사를 찾은 송시열(宋時烈)에게 〈충효전가서(忠孝傳家序)〉를 지어줌.
1652년(인조 30, 80세) 상소하여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고, 유민(流民)의 추쇄(推刷)를 파해 주기를 청함.
1653년(효종 4, 81세)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654년(효종 5, 82세) 11월 13일 은봉정사에서 세상을 떠남.
1656년(효종 7) 능주의 유생들이 도산사(道山祠)를 세움.
1657년(효종 8) 보성의 유생들이 대계서원(大溪書院)을 세움.
1670년(현종 11) 호남 유생들이 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을 세움.
1687년(숙종 13) 도원서원에 사액(賜額)을 받음.
1704년(숙종 30) 대계서원에 사액(賜額)을 받음.
1773년(영조 49) 대계서원에서 《우산선생집(牛山先生集)》을 간행함.
1821년(순조 21) 문강공(文康公) 시호를 받음.
1864년(고종 1) 대계서원에서 목활자로 《은봉전서(隱峰全書)》를 중간함.
2. 진유(眞儒)의 철학과 정신
은봉의 진유론(眞儒論)은 자신의 철학과 정신을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게 논의한 부분이다. 은봉은 「우산답문(牛山答問)」속에서 학문(學問)과 절의(節義)의 함수관계를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절의가 학문 가운데에 있었으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절의가 학문 밖에 있다.우리나라의 학문은 포은(鄭圃隱, 정몽주)과 양촌(權陽村, 권근)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학문을 논한다면 양촌이 포은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절의를 논하자면 양촌은 볼만한 것이 없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도 그 폐단이 아직 남아있어 학문과 절의를 나누어 둘로 여긴다. 따라서 이름난 현인(名賢)은 많아도 참된 선비(眞儒)는 적은데, 사람들은 그것을 분별할 줄 모른다.” 이처럼 은봉이 절의를 학문의 가운데 포함시킨 의도는 ‘절의(節義)’ 곧 유학이 요구하는 올바른 윤리적 가치를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할 때만이 학문의 의미를 비로소 온전하게 꽃피울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학문이 살아있는 학문으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역사적 관계속에서 윤리적 당위(當爲)인 ‘절의’를 시의적절하게 실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배운 것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참된 선비(眞儒)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러한 철학에 기초하여 은봉은 사회와 역사 속에서 윤리적 선악의 기준을 명확히 세워 강인하게 실천하는 절의의 정신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실제로 은봉은 간신들이 달콤한 관직과 이권(利權)으로 유혹할 때는 미련 없이 자연으로 돌아와 깨끗한 마음을 지켰고, 국토가 외세에 유린당할 때에는 이순(耳順, 60세)의 나이에도 창의(倡義) 진군하여 애군호민(愛君護民)의 마음을 보였으며, 국정의 혼란을 목격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상소(上疏)하여 격렬한 어조로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했고, 도학(道學)을 꽃피우려다 좌절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유적과 외침에 항거한 충절(忠節)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절의정신을 고무시켰다. 한마디로 배운 것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참된 선비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은봉정사 유허비(隱峯精舍遺墟碑) 전남 화순군 이양면 매정리
이 정사는 은봉이 만년에 강학했던 곳이요, 또 1654년 11월 13일 아침에 82세를 일기로 운명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은봉(隱峯)’이라는 명칭은 선생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충효와 절의를 지극히 사모하여, 그 분들의 호에서 끝 자를 한 자씩 따서 편액으로 붙인 것이다. 은봉은 이 정사에서 서봉령(徐鳳翎)·양주남(梁柱南) 등 많은 제자들과 경전과 성리학을 강론했다. 이 정사가 언제 유허(遺墟)로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79년에 후손들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은봉이 서식하고 강학하고 임종했던 모습을 되새겨 줄 뿐이다.
도산사 유허비(道山祠遺墟碑) 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도산사는 1656년 5월에 능주와 인근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은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우(祠宇)이다. 은봉은 말년에 능주 쌍봉리 은봉정사(隱峰精舍)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쳐, 이 고장의 유교문화를 진작하는 데 크나큰 기여를 한 바 있다. 당시 능주목사 노문한(盧文漢)이 사우의 상량문을 지었다.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인해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한 채 빈터만 남아있다.
3.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삶
문강공 은봉 선생은 1573년(선조 6)에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언(士彦), 호는 빙호자(氷壺子)·우산(牛山)·은봉(隱峰).
젊어서 박광전(朴光前)과 성혼(成渾)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성장했다. 20세에 임진왜란을 당해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인조반정 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은둔하여 제자들을 양성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도 각각 격문을 띄워 근왕(勤王)의 의기(義旗)를 높이 세웠다. 말년에 능주 쌍봉리에 은봉정사(隱峯精舍)를 짓고, 많은 제자들에게 성리학과 예학(禮學)을 강론하다가, 82세를 일기로 1654년(효종 5)에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삶을 마쳤다.
사후에 유림들이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과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독향(獨享)했고,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도 병향(竝享)했으며, 1821년(순조 21)에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학산재사(鶴山齋舍)와 묘소 전남 화순군 남면 복교리 갈학등
은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齋室)이다. 1829년에 후손 안창훈(安昌勳,1748~1828)·안수록(安壽祿,1776~1857)·안수(安洙,1776-1843) 등이 협력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 재실은 동쪽에 방 1칸, 서쪽에 방 2칸, 중앙에 대청 2칸으로 이루어졌고, 정문은 3칸인데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으며 서쪽 담장에 조그만 문을 하나 달았다. 현판은 한말의 명필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썻다. 1989년에 ‘은봉선생유적보존회’에서 왼쪽 산기슭에 있던 재실을 묘소 아래로 옮겨지었다.
4. 불후(不朽)의 저술
° 임진·정유왜란과 관련된 저술 : 「진주서사(晋州敍事)」·「임정충절사적(壬丁忠節事蹟)」·「삼원기사(三寃記事)」·「호남의록(湖南義錄)」·「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부산기사(釜山記事)」·「노량기사(露梁記事)」·「임진기사(壬辰記事)」등.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 은봉이 1627년에 임진·정유왜란과 관련된 저술 속에서 특별히 「임진기사(壬辰記事)」·「노량기사(露梁記事)」·「진주서사(晋州敍事)」등 세 편의 글을 뽑아 편찬한 책이다. 은봉 사후인 1663년 고흥향교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일본에서도 이 책을 입수하여 읽어오다가 1849년 와타나베(渡邊)가 유호이재(有乎爾齋)에서 재차 간행하여 일본 사회에 유포했다. 이를 가영본(嘉永本)이라 부른다. 일본인들을 「은봉야사별록」을 통해 임진·정유왜란의 전말(顚末)을 상세히 고찰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충절(忠節)을 본보기로 삼아 자국인에 대한 정신교육을 하려고 했다. 그만큼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비중이 높다. 이 책은 1996년에 성균관대 이상익(李相益,1964년생)·최영성(崔英成,1962년생) 교수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 사림정신을 고취한 저술 : 『기묘유적(己卯遺蹟)』·『항의신편(抗義新編)』·「사우감계(師友鑑戒)」·「우산답문 (牛山答問)」등.
° 동서 분당과 관련된 저술 : 『혼정편록(混定編錄)』·「기축기사(己丑記事)」·「매환문답(買還問答)」등.
『은봉전서(隱峰全書)』와 유묵(遺墨)
「은봉전서(隱峰全書)」는 은봉 선생의 도학·절의·문장이 함축되어 있는 문집이다. 은봉의 문집은 생존시에 초고본을 『우산수필(牛山隨筆)』·『은봉수필(隱峰隨筆)』·『매환필기(買還筆記)』라 불렀고, 1773년에 목판본으로 5책을 간행하면서 『우산집(牛山集)』이라 불렀으며, 1864년 20책(본집 38권, 부록 2권)으로 중간하면서 『은봉전서(隱峰全書)』라 불렀다. 1969년에는 전국 유림과 후손들이 협력하여 속집 2권 1책, 부록 4권 2책을 다시 보완하여 모두 44권 21책으로 완편(完編)하였다.
유묵은 은봉이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아들 영해부사(寧海府使) 고용후(高用厚,1577~1648)에게 보낸 친필 서신이다. 여러 차례 임명된 관직에 한 번도 부임하지 못해 황송해하는 은봉의 마음이 드러나 있고, 고용후가 선정을 베풀었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로서 기뻐하는 심정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 서신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5. 창의(倡義) 사실
1592년 임진왜란에 은봉의 스승 박광전(朴光前,1526∼1597)은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 7백여 의병을 규합한 뒤, 임계영(任啓英,1528~1596)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정사제(鄭思悌,1556∼1592)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은봉은 참모로 삼아 북진케 하였다. 은봉은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1536-1593)을 찾아가 왜군에 맞설 전략·전술을 논의하고, 이후 경상도로 이동하여 여러 곳의 전투에 참여했다. 또 정묘호란(1627년) 때에는 호남의병장이 되어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영무사(領撫使) 이원익(李元翼,1547~1634)에게 시의적절한 방비책을 낱낱이 개진하였으나, 조정에서 주화론(主和論)을 채택하고 즉각 의병을 파할 것을 명하니 해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64세 백발의 나이를 잊고, “국운이 불행하여 오랑캐가 돌진해오니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으나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의 기치를 올리려 하니 모두 힘을 모읍시다.”라는 격문(檄文)을 발하여 수백 명의 의병관 군량미를 모았다. 은봉은 네명의 아들, 친인척 및 제자들,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충절(忠節)의 후손들, 개인적으로 격문에 호응한 사람들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성·금구를 거쳐 여산(礪山)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주화파 최명길(崔鳴吉,1586~1647)의 주장에 따라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이 당시 의병의 구성과 활동 상황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隱峰倡義錄』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의병조직은 다음과 같다.
대장(大將) 안방준 막하의 군관(軍官)에는 흥양(興陽, 고흥)의 신지후(申智厚)·김여형(金汝泂), 보성(寶城)의 김종원(金宗遠)·김정망(金廷望)·이강(李橿)·정영철(鄭英哲)·선영길(宣英吉)·김점(金漸)·김섬(金暹), 장흥(長興)의 김태웅(金兌雄)·장영(張穎)·백안현(白顔賢)·남기문(南起文)·김기원(金器元)·양지남(梁砥南)이 포진하고, 참모관(參謀官)은 선시한(宣時翰), 서기(書記)는 이위(李悲)·원리일(元履一)·정염(鄭琰)·김여용(金汝鏞)·안후지(安厚之)·안신지(安愼之)·손각(孫珏)·윤동야(尹東野)가 맡았으며, 운량관(運糧官)은 이무신(李懋臣), 방량관(放糧官)은 제경창(諸慶昌)이 맡았다.
부장(副將) 민대승 막하에 국관에는 정연(鄭淵)·정문리(鄭文鯉)·구체증(具體曾)·윤흥립(尹興立)·박유효(朴惟孝)·한종임(韓宗任)·장후량(張後良)이 포진하고, 서기(書記)는 정문웅(鄭文雄)·송응축(宋應祝)·민간(閔諫)이 맡았다. 종사관(從事官)은 김유신(金有信) 이다. 이외에도 박춘장(朴春長)·문희순(文希舜) 등 수백 명의 의병 명단이 남아있다.
도원서원(道源書院) 전남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915번지
동복(同福) 지방에 연고를 맺고 유학 진흥에 크게 기여했던 최산두(崔山斗,1483~1536)·임억령(林億齡,1496~1568)·정구(鄭逑,1543~1620)·안방준(安邦俊,1573~1654) 등 4현(四賢)을 병향(竝享)한 서원이다. 은봉은 1641년에 동복 용안(龍岸, 지금 화순군 남면 龍里)에서 강학을 펼쳐 다수의 제자를 배출했는데, 호남 유생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1657년에 병향을 추진한 것이다. 이 서원은 1610년에 건립된 뒤 1688년에 사액(賜額)받았으나, 1868년에 훼철 당했다. 1975년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고, 1977년에 사우(祠宇), 1978년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복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빙월정(氷月亭) 전남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1924년에 후손 안사순(安思淳)이 지은 정자인데, 은봉이 광해군의 혼란한 정국을 피해 낙향하여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던 ‘은봉조대(隱峰釣臺)’ 위에 세워졌다. ‘빙월정’이란 이름은 은봉의 성품이 빙호추월(氷壺秋月)과 같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매년 음력 4월 12일에는 원근의 선비들이 모여 은봉을 추앙하는 강회와 시회를 베풀고 있다. 이 정자는 1981년 여름에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83년 9월 18일 복설되었으며, 그 뒤 주암댐으로 인해 마을의 뒤 동쪽 개미등에다 옮겨지었다.
6. 은봉의 어록(語錄)과 시(詩)
° “반정(反正: 인조반정) 한 뒤에 국내외에 변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도, 군신(君臣) 상하가 이를 보통으로 보아 넘겨 전하께서는 임금의 덕을 잊고 아침 늦게 일어나 정신이 날로 해이하며, 궁첩(宮妾)이 세력를 부려 청탁이 성행하며, 호오(好惡, 좋아함과 싫어함)가 사사로움에 치우쳐 상벌이 적절치 않으며, 기강이 무너져 호령에 질서가 없습니다.” - 「국사를 논한 상소(言事疎)」중에서(1646년 12월)
° “학문(學問)은 남음이 있는데 절의(節義)가 부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문은 부족한데 절의가 남는 사람이 있다. 학문은 남는데 절의가 부족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학문은 부족한데 절의가 남는 사람이 낫다. 이름난 현인(名賢)과 참된 선비(眞儒)의 차이는 학문에 있지 않고 절의에 달려 있을 뿐이다.” - 「우산답문(牛山答問)」중에서(1643년 12월)
° “독서하고 강학하는 것은 과거의 말과 행동을 정확히 알아서 자신 덕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 선비 된 자가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소학」한 책이면 족하고, 치국평천하의 대업을 구하려 한다면 「대학」한 책이면 족하다. 오늘의 학자는 죽도록 강학하며 만 권의 책을 독파하지만, 하루도 몸소 실행하지 않고 한 글자도 가슴에 새기지 않으니, 이는 아침 내내 밥 먹는 얘기만 하고 조금도 배부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글을 읽은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대저 사람의 자식 된 자가 ‘효(孝)’자를 배우면 반드시 어버이에게 효도를 실행해 본 뒤에야 비로소 ‘효’자를 배운 사람이라 부를 만하고, 사람의 신하된 자가 ‘충(忠)’자를 알면 반드시 임금에게 충성을 실행해본 뒤에야 비로소 ‘충’자를 아는 사람이라 부를 만하다. 진실로 충과 효를 실행함이 없다면 비록 ‘충효(忠孝)’ 두 글자를 수만 번 외우더라도, 애초에 ‘충효’ 두 글자를 모르는 것과 무엇이 조금이라도 다르겠는가?” - 「유사(遺事)」중에서
흥취를 풀며[遺興]
넓고 넓은 천지 사이에 꿈에 젖은 몸 / 納納乾坤夢幻身
하루살이 생사처럼 빈번하게 가고 오네 / 蜉蝣生死往來頻
도도하게 모두 명예와 이익을 쫓아가니 / 滔滔盡是趍名利
예로부터 대장부가 몇이나 될까 / 從古男兒幾箇
난계 선생(朴宗挺)에게 바친 ‘언지(言志)’ 시 [蘭溪丈席言志] - 14세에 지음
세상 사람들은 본래 뜻을 세움이 없이 / 世人本無志
모두가 부귀만 좋아 하는구나 / 皆好富與貴
내 마음은 여기에 있지 않으니 / 我心不在此
깊은 산속에 숨어 살고 싶어라 / 欲隱深山裏
단정히 앉아 옷깃을 바르게 하고 / 端居正衣襟
조용히 묵상한 채 벽을 향하네 / 玄默獨向壁
막걸리 두세 잔을 마시고 / 濁酒兩三杯
거문고 두세 곡조를 뜯으며 / 彈琴一二曲
《좌씨전(左氏傳)》이나 다 읽어 보리라 / 流覽左氏傳
한 평생 이 꿈을 품었으니 / 平生抱此志
언제나 이 소망 이룰까 / 何日遂所欲
마침내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 遂與同志友
오늘 저녁 서로 이를 강론하네 / 今夕相論確
망건을 벗고 차가운 돌을 베개 삼으며 / 脫巾枕寒石
맑은 여울물로 치아를 닦아보세 / 漱齒淸流湍
여기서 노래하고 여기에서 읊조리며 / 歌於斯詠於斯
이 산 사이를 마음껏 노닐고 싶어라 / 逍遙於玆山之間
입에 대한 잠엄[口箴]
말할 만하면 말하고 / 言而言
말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 不言而不言
말할 만한데도 말하지 않으면 옳지 않고 / 言而不言不可
말해선 안되는데도 말하면 또 옳지 않으니 / 不言而言亦不可
입이여! 입이여! / 口乎口乎
이와 같이 할 뿐이다 / 如是而已
신도비(神道碑) 전남 화순군 복교리 갈학등
은봉의 학문과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후손과 유림(儒林)들이 협력하여 세운 비석이다. 먼저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지은 신도비를 1899년에 세웠다. 그 뒤 후손 안규용(安圭容,1873∼1959)이 여러 가지 문헌을 조사하여 1956년에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지은 신도비를 다시 세웠는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글씨를, 본문은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 신도비의 전말을 알리기 위해 세운 추기비(追記碑)는 송병선의 사손(嗣孫) 송재성(宋在晟)이 내용을 기록하고 김노동(金魯東)이 글씨를 썻다.
III. 은봉(隱峰)에 대한 석학들의 평가
1. 당대 석학들의 평가
° 성혼(成渾,1535∼1598) |
“안방준(安邦俊)은 나에게 배울 사람이 아니다. 나를 깨우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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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윤겸(吳允謙,1559∼1636) |
“벼슬을 구하는 풍조가 이미 만연되었는데도 초연히 물러간 사람은 안방준 한 사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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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宋時烈,1607∼1689) |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와 우산 안선생을 낳으니 거의 도학과 절의를 겸비했다 하겠다.” 또 “호남의 선비들이 이 어른의 가르침에 힘입어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은 자가 매우 많으니 호남에 지극한 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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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석(李景奭,1595~1671) |
“(인조 임금에게) 안방준 등은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곧 일국의 선사(善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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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정중(閔鼎重,1628∼1692) |
“호남에서 백년 사이에 이 어른을 다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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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세정(黃世楨,1622∼1705) |
“중봉(趙憲,1544∼1592) 이후 제일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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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류(金瑬,1571~1648) |
“청송(成守琛,1493~1564) 이후 제일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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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익(趙翼,1579∼1655) |
“(효종 임금에게) 이 사람은 나이가 많아 벼슬에 종사할 수는 없으나, 서울로 불러와 그의 덕행을 ‘온 나라의 본보기’로 삼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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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계(兪棨,1607∼1664) |
“기절(氣節)이 굳세어 평생의 의지와 행동과 행동이 모두 충효의 큰 근본에서 힘을 얻어 표출되었으니, 지금 세상에는 매우 드문 것이요, 옛 사람도 능히 여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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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채(朴世采,1631∼1695) |
“공은 넓은 학문과 독실한 행동으로 고명정대(高名正大)한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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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대 석학들의 평가
° 홍직필(洪直弼,1776~1852) |
“호남의 학문에서 하서(河西: 김인후), 고봉(高峯, 기대승), 일재(一齋: 이항), 은봉(隱峰: 안방준), 손재(遜齋, 박광일)가 가장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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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순(金羲淳,1757~1821) |
“학문·절의·지조를 빛내 사림의 본보기가 되고 후생의 거울이 되니, 천고에 사문(斯文)을 붙잡아 정도(正道)를 지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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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보(李敏輔,1720~1799) |
“호남의 높은 희망이요 북두성 같은 고매한 명성으로 수많은 선행(善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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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중(李度中,1784∼1872) |
“도학과 절의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덕행의 성실함과 사공(事功, 공훈과 업적)의 탁월함을 겸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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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후(金鍾厚,1721∼1780) |
“선생의 덕업(德業)과 풍의(風儀, 풍도와 의리)는 후학들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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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환기(宋煥箕,1728~1807) |
“선생의 깊은 학문, 높은 절개, 위대한 문장, 넓은 의견은 세상에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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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 학자들의 평가
윤사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동양철학) |
“은봉은 성리학자들의 선비정신을 충실히 계승하여 실천한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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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준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
“명실공히 당대 호남지역을 대표했던 선비·학자였고, 또 그와 연결된 이 지역의 학맥(學脈)이 분명 크게 존재했음을 감안할 때, 은봉의 생애와 사상·학문은 매우 주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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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동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
“말과 글이 아니라 삶과 실천으로 보여주었고, 현실적 이해(利害)나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여 인간 본성의 의리(義理)를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삶 속에서 ‘진유(眞儒)’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은봉의 의리적 삶이 주는 교훈은 매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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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
“도학과 절의는 둘이 아니다는 그의 학문관이 응축된 표어의 참된 의미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되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나아가 한국유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제대로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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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은봉 안방준 관련 유적
오수도 찰방 교첩(獒樹道察訪敎牒)
1625년(인조 3) 8월 이조에서 발급한 문서로 은봉을 오수도 찰방에 임명하는 교첩.
이 직책을 처임이자 마지막으로 19일간 수행하였다.
문강공 증시교지(文康公贈諡敎旨)
1821년(순조 21) 1월에 은봉에게 문강공(文康公)이라는 시호를 내린 문서.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 成均館祭酒 · 侍講院贊善 · 五衛都摠府都捴管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 성균관좨주 · 시강원찬선 · 오위도총부도총관
行 通政大夫 工曹參議 安邦俊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안방준
증시(贈諡) 문강공(文康公) 자(者)
도덕박문(道德博聞, 도덕이 널리 알려졌다) 왈(曰) 문(文)
연원유통(渊源流通, 연원에 두루 통했다) 왈(曰) 강(康)
도광(道光) 원년(1821, 순조 21년) 정월
오륜가(五倫歌)
은봉이 만년에 오륜을 노래한 8수의 시
五倫歌(오륜을 노래하다) 안방준 [安邦俊, 1573~1654]
선생은 자암(自菴) 김구(金絿, 1488~1534)의 글씨를 좋아했는데, 만년에 얻은 자암이 쓴 『천자문(千字文)』에서 필적(160자)을 얻어 , 절수(絶句) 여덟 수를 지어 그 글씨를 본떠서 간행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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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가득 차고 텅 빈 속에서 사람이 음식과 의복으로 산다네 만일 오륜을 다하지 못하면 새나 짐승과 같이 되리라 |
宇宙盈虛內(우주영허내) 人生食與衣(인생식여의) 五倫如不盡(오륜여불진) 禽獸是同歸(금수시동귀) |
부모는 하늘 땅과 같으니 뉘라 사랑과 공경의 마음 없으리 일찍이 불효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끗을 끝내 알기 어려웠네 |
父母呂天地(부모여천지) 誰無愛敬心(수무애경심) 嘗觀不孝者(상관불효자) 其意竟難尋(기의경난심) |
임금과 부모가 어찌 다르리요. 마땅히 충절을 다하는 신하가 되리라 탕(湯)ㆍ발(發)의 덕을 논하지 말게 불쌍히 여겨 치는 것도 인은 아니라네 |
君父何嘗異(군부하상이) 當爲盡節臣(당위진절신) 無論湯發德(무론탕발덕) 弔我亦非仁(조아역비인) |
도에 뜻을 둔다면 누구를 쫓아야 하나 스승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네 만일 방몽의 활 솜씨를 배운다면 천세에 악한 이름이 흐르리라 |
志道從何得(지도종하득) 非師不可成(비사불가성) 如其學蒙射(여기학몽사) 千載惡流名(천재악류명) |
거문고나 비파처럼 잘 화합하여 가정을 이끌고 나라 사람을 교화하라 일찍이 옛적의 부부를 살펴보니 서로 대우하여 손님처럼 공경하였네 |
好合如琴瑟(호합여금슬) 宣家化國人(선가화국인) 嘗觀古夫婦(상관고부부) 相待敬如賓(상대경여빈) |
한 몸이 나뉘어 형제가 되니 항상 우애하고 공순해야 한다네 오히려 서로 좋아하지 못하면 세상에 죄를 용납 받기 어려우리라 |
一體分兄弟(일체분형제) 尋常友與恭(심상우여공) 相猶不相好(상유불상호) 於世罪難容(어세죄난용) |
친구는 형제와 같으니 경계하는 깊이 또한 있다네 난잡하고 경박한 사람들과 어찌 감히 더불어 말하랴 |
友也如兄弟(우야여형제) 箴規道亦存(잠규도역존) 紛紛輕薄子(분분경박자) 豈散與之言(기산여지언) |
이 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친절하게 생각을 이에 두어라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성인 되는 근본이요 기초라 하더라 |
此外無他道(차외무타도) 丁寧念在玆(정영염재자) 尋聞古人語(심문고인어) 作聖是根基(작성시근기) |
병자창의록(丙子倡義錄)
1636년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킨 사실과 참여한 의병들의 명단을 기록한 책.
호남의록(湖南義錄)
1616년(44세)에 임진왜란에 순절한 호남 의사 최경회, 정운, 황진, 장윤 등 16명의 사적을 전기체로 적은 저술
보성의 문화유적과 관광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