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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와 당현종(현대적 의미의 그림)
▢ 시안 여행을 다녀와서
시안(西安) 여행은 1월 18일 토요일 밤 9시 45분 출발하여 23일 오전 06:20분 ‘에어부산’ 편 김해공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딸아이와 집사람 셋이 했다. 실속 패키지여행이라 대략 150만 원 정도 들었듯 한데 다른 상품과 비교하면 싸게 했다는 생각이다. 밤 비행기로 갔다 와 조금 피곤하지만 더 나이 들면 몰라도 아직은 할 수 있었다 싶다. 새벽에 시안에 도착하자 ‘서하풍윤주점(西荷豐潤酒店)’이라는 호텔에 들어가 조금 자고 이튿날부터 4일간 어쩌면 ‘행군’같은 여행을 했는데 3일이면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역시나 싸다보니 강제쇼핑으로 재미가 반감된 것도 사실이었다.
첫날 아니 둘째 날 오전에는 ‘중국혁명군’(팔로군,공산군)이 일제와 싸운 것을 기념해 세운 전쟁기념관 「팔로군 서안 변사소 기념관」이란데를 찾았는데 여기는 항일전쟁 당시 혁명군 근거지로 독일의사 치과병원으로 위장했던 곳으로 주은래, 주덕, 등소평 등이 묵으면서 일본과 싸울 것을 계획하고 또 논의했던 곳으로 며칠 전에 읽은 유필화 선생의 「승자의 공부」라는 책에 주은래, 장제스, 모택동, 장학량 등이 연관된 ‘시안사변’의 현장이 여기라 더 실감이 났다.
‘천부(川府)’ 라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장안성에 올라 가 보았는데 성은 1384년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朱元璋)때 지어진 것으로 둘레가 1.3㎞, 성벽 높이보다 성루의 넓이가 더 넓어서 버스가 교행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전쟁 이후 많은 파괴가 있었으나 현재 중국주석 시진평의 아버지가 시안시 인민위원으로 있을 때 보존가치를 주장하였다 하고 1984년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에는 호텔 근처에서 닭꼬치를 사 객실에서 갈 때 가져간 소주 한잔을 마시고 곤히 잤다. 3일째는 진시황 릉과 병마용, 화청지 등을 돌아보는 코스였는데 이번 여행의 백미(白眉)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듯이 후회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가지고 갔다. 실제로 병마용과 진시황 릉의 위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화청지에서는 아직도 더운 온천수가 나오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감나무에 대추나무를 접붙인 나무에서 ‘대추감’을 딴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8,000여개 병마용들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발굴된 1974년 이후 지금까지 겨우 보병부대와 지휘부인 1,2호 갱만을 발굴하고 지원부대인 3호 갱은 아직 발굴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발굴로 인한 파괴, 변색 등을 우려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발굴하지 않아도 기히 발굴된 것으로 충분히 관광객을 모으고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어 차후로 미룬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는 지금은 아름답고 보편적인 이야기 같지만 당시 정치에는 관심 없이 사랑에 빠진 왕에 대해 비난한 두보나 이백 같은 이도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들어야하는지 생각해 보게도 하였다. 휴양시설인 화청지를 둘러보며 느낀 것은 사랑이란 언제나 좋은 것이고 아름답지만 영원할 수 없고, 또한 모두에게 존경받는 일일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광장에 커다란 바위에 새긴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가 그들의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장한가(長恨歌)」- 백거이(白居易, 772-846)
칠월칠일장생전(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천장지구유시진(天長地久有時盡;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차한면면무절기(此恨綿綿無絶期; 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 장한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했다
3일째인 21일에는 호텔을 출발하자 말자 ‘라텍스’ 침대공장, 매장으로 가더니 소비를 현혹해 결국 매트 2개를 30만원에 사기에 이르렀고 다시 시안에서 120㎞ 떨어져 있는 화산에 올라(중국 5악 중 하나) 위용을 감상했다. 산에 오르기 전에 중국무술의 일면이자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화산객잔’이라는 곳에서 점심 먹었다. 화산까지 오며 느낀 것은 들이 참 넓다는 생각도 했지만 도심 근처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던 무덤들이 여럿 보였고 큰 나무들이 많은데도 까마귀 집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케이불카를 타고 올라갔지만 여간 강심장 아니고는 가슴 떨리게 하는 아찔함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딸아이는 눈을 감고 오르고 내렸다고 하고나는 이 험한 산에 오르내리며 생각한 것은 ‘죄짓지 않고 살았으니 설마 잘 못 될 일은 없겠지’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항우와 유방이 만남을 가졌다는 곳에 가보고, 병마용 만들기 체험도 했다. 체험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왔으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화산에서 돌아 와 저녁은 ‘덕발장(德發長)’이라는 서태후가 배고플 때 시안에 와서 먹었다는 만두집에서 만두를 먹었는데 이름값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유명세를 타는 식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근처에서 종루(鍾樓)와 고루(鼓樓)가 조명 속에 휘황찬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전보다 조명을 많이 줄인 이유는 변질을 막아 오랫동안 보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저녁 먹은 후에는 회교도들이 장사한다는 ‘회족거리’를 둘러보았는데 간판과 조명, 사람들은 엄청 많았지만 우리가 즐겨 먹을 만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떡매치듯 매를 쳐 강엿을 만드는 모습이 특이했고, 오징이 양념구이, 양고기 족발 등 낯설고 특별한 음식도 많았다. 오징어 구이를 사와 호텔에서 안주삼아 먹었지만 맛은 그저 그랬다.
장안성, 진시황 릉, 병마용, 화청지, 화산, 회족거리까지 둘러보았으니 장안의 반쯤을 돌아 본 기분도 들었지만 아마 몰라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행 마지막 날에는 홍경궁공원, 소안탑, 시안박물관, 대안탑, 진2세 황제 호해의 릉을 관광하고, 대당부용원과 불야성 축제를 보고 공항으로 가서 02:00에 출발하는 비행기 탈 일만 남았다.
‘홍경궁공원’은 장안성 3대 궁궐 중 하나로 현종과 양귀비가 살았다는 곳이다.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작약이 많이 심어져 있었지만 아직은 꽃도 잎도 피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중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들을 볼 수 있었는데 수양버들 널어진 둥근 모양 다리 모습과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가 짓고, 이백(이태백)이 쓴 글씨까지 볼 수 있었다.(아마도 대부분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여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의 시다.
《千秋節有感 二首(천추절유감 이수)》 - 杜甫
自罷千秋節(자파천추절) 천추절을 포기해버렸다
頻傷八月來(빈상팔월래) 자주 실망에 빠지게 하는 8월이기 때문이다
先朝常宴會(선조상연회) 선대 왕 때는 하루도 빠진 적 없이 축제가 열렸고
壯觀已塵埃(장관이진애) 축제로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마저 장관(壯觀)을 이루었다
鳳紀編生日(봉기편생일) 황제들의 연대기에 적혀진 생일이었고
龍池塹劫灰(용지참겁회) 용지(龍池)에서 나와 한 세상을 멸하고 남은 재였다
湘川新涕淚(상천신체루) 굴원(屈原)이 빠져 죽은 소상강(瀟湘江)에 새로운 눈물방울 더해졌고
秦樹遠樓台(진수원루태) 진(秦)나라의 나무들 먼 훗날이 되어 누각의 땅 속에나 남아있다
寶鏡群臣得(보경군신득) 보석으로 만든 거울 여러 신하로부터 얻었는데
金吾萬國回(금오만국회) 황제를 지킨 수많은 나라들 그랬듯이 반복할 것이니
衢尊不重飲(구존부중음) 황제가 하사한 술통[은혜]에서 술을 더 마실 수 없어
白首獨餘哀(백수독여애) 늙은이에게는 오로지 슬픔만이 남았네
禦氣雲樓敞(어기운루창) 제왕의 기상 운루(雲樓)에 광대(廣大)하게 드러나
含風彩仗高(함풍채장고) 바람 품은 색칠한 의장 깃발 높이 드날리고
仙人張內樂(선인장내악) 선남선녀들 궁전 장(張)안에서 연주하고
王母獻宮桃(왕모헌궁도) 서왕모(西王母)는 궁전에 있던 복숭을 드렸었다
羅襪紅蕖豔(라말홍거염) 비단 버선을 신은 붉은 연꽃 같은 무희들 있고
金羈白雪毛(금기백설모) 황금 띠로 잡아맨 말은 눈빛같이 갈기 희다
舞階銜壽酒(무계함수주) 무희는 계단에 서서 춤추며 축수(祝壽)의 술 올렸고
走索背秋毫(주색배추호) 광대는 가느다란 줄을 거꾸로 탔었다
聖主他年貴(성주타년귀) 황제는 언제나 고귀하시어
邊心此日勞(변심차일로) 마음 구석에 이 날을 근심하였다
桂江流向北(계강류향북) 계강[桂江]이 북으로 흘렀으니
滿眼送波濤(만안송파도) 눈에 가득(눈물을 머금은 채)거스르는 흐름의 물결을 보낼 수밖에
※ 八月二日은 明皇 즉, 당 현종의 생일날로 이날을 천추절이라 하는데 임금이 양귀비에 빠져있음을 보고 유감이 생겨 시 두 수를 지었는데 두보 (712-770) 나이 37세 때다.
《청평조사(淸平調詞) 3首》 - 이백(李白)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용) : 구름 같은 치맛자락 꽃 같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노화농) : 살랑이는 봄바람 영롱한 이슬이랴
若非群玉山頭見(야비군옥산두견) : 군옥산 마루에서 못 볼 양이면
會向瑤臺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 : 요대(瑤臺)달 아래서 만날 선녀여!
一枝濃艶露凝香(일지농염노응향) : 한떨기 농염한 꽃 이슬도 향기 머금어
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산왕단장) : 무산녀의 애절함은 견줄 수 없고
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 : 묻노니 한나라 궁궐에 비길수 있을까
可憐飛燕倚新妝(가련비연의신장) : 나는 제비 새 단장하면 혹 모르리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량상환) : 꽃도 미인도 서로 즐거움에 취한 듯
長得君王帶笑看(장득군왕대소간) : 바라보는 임금 웃음도 가시질 않네
解釋春風無限恨(해석춘풍무한한) : 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날리며
沈香亭北倚欄干(침향정배의난간) : 침향정 북 난간에 흐뭇이 기대섰네
※ 743년 봄 어느 날 당현종이 양귀비와 침향정(沈香亭)에서 모란을 감상하고 있다가 이백을 불러서 시로 짓게 했다. 평소에도 술과 더불어 취생몽사(醉生夢死)하던 이백은 이날도 장취불성(長醉不醒)하여 깨어날 줄을 몰랐다. 찬물을 끼얹고 몸을 주무르는 법석을 떤 뒤에 겨우 의식을 차린 이백이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혼미함 속에 붓을 들어 단숨에 시를 지으니 바로 이 「청평조사(淸平調詞)」다.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비연(飛燕)은 한나라 성제(成帝)의 후궁으로 나중에 효성조황후(孝成趙皇后)가 된 여인이다. 그녀는 성양후(成陽侯)조림(趙臨)의 딸로 본명은 조의주(趙宜主)이며 양아공주(陽阿公主)의 가녀(歌女)였는데 날렵한 몸매 때문에 조비연(趙飛燕)으로 불렸다. 나는 제비, 시쳇말로 '물찬제비' 였다.
심지어 "비연이(임금의)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飛燕作掌中舞)는 고사까지 생겼는데 몸매가 어떠했길래 손바닥에서 춤을 출 수 있었을까? 중국 특유의 허풍과 엄살을 고려해도 쉽게 짐작이 안 간다.
선상연회(船上宴會)를 즐기며 춤을 추던 비연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밀려 비틀거리다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황제가 황급히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몸이 유연했던 비연이 그 상태에서 몸을 가누며 춤을 이어갔다하여 飛燕作掌中舞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백은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 위해 비연(飛燕)을 끌어와 대비시킨 것이다. 그러나 비연의 미모를 보지 못했으니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황제가 총애하는 여인 양귀비가 면전에 있으니 천하의 이백이라도 어찌할 수 없었을까? 그래서 비연을 끌어온 것이 아닐까?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양귀비(楊貴妃), 이백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미모를 상찬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백은 비연이 새 단장을 해야겠다고 했으니 아마도 일말의 미안함이 있었던 모양이고 보통 여인이라면 양귀비의 용모와 견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을지 모른다. 훗날 술에 취해 환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한 일로 고력사가 양귀비를 한(漢)나라의 성제(成帝)를 유혹한 조비연(趙飛燕)과 비유한 대목을 들어 양귀비에게 고자질하고 양귀비가 현종을 부추겨 결국 이백이 추방당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아닐까?
‘홍경궁공원’을 돌아 나오다가 우리나라 경복궁과 창경궁을 생각했는데 우리 것도 중국 것 못지않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점심 먹은 후에 소안탑(小雁塔)과 시안박물관을 견학했는데, 박물관에서 기념주화 하나 20원주고 샀다. 20원이면 우리 돈으로 3,360원 정도. 박물관 안에는 여러 가지 관심 가는 볼거리들이 많았지만 찬찬히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박물관을 나와 대흥선사(大興善寺)라는 절에 갔는데, 절은 중국 밀교의 발상지로 265년에 창건된 시안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수나라 때부터 지금 이름으로 불러지고 있단다. 하지만 특별히 눈여겨 볼 유물은 없고 단지 대웅전에 ‘삼존불’ 아닌 ‘다섯불’을 모신 것이 특이했다.
저녁때에 ‘대당부용원(大唐芙蓉苑)’ 에서 유등과 불꽃축제를 보았는데 여기서 본 아름답고 커다란 용 모형의 원조가 박물관에 있었는데 당나라 때 이미 용의 형상을 금으로 만든 것을 박물관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부산 태종대를 순환하는 ‘누비라’ 같은 전기차를 타고 부용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너무 정성들여 불을 밝히고 온갖 아기자기한 모형 형상들에 그저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또 그것을 재미있게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레이저 불꽃쇼까지 보고 나와 조금 늦게 한국식당에서 삽겹살로 저녁 먹으며 소주 1병을 마시고 대당부용원과 연결된 불꽃축제인 ‘대당불야성’을 구경했는데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감을 주었다. 대안탑(大雁塔)을 배경으로 한 화려하다 못해 황홀한 불빛경연을 보고 우리도 이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시안관광은 사실상 마무리 된 셈이다.
공항으로 가던 길에 주로 백두산 특산품이라고 하는 송이를 비롯하여 대추, 참깨, 마른땅콩, 차와 술 등을 파는 한국가게를 구경하고 자정쯤에 공항에 도착하여 지겹도록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2020.1.25 오후
▢ 양귀비와 당현종
봉건사회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졌던 당 왕조는 ‘개원’ 연간을 정점으로 이어지는 ‘천보’ 연간(742~756)에는 발전상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잠재해 있던 경제·사회적인 병폐가 노골화 되면서 이었지만, 그보다도 당시 간신들의 횡포와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놀음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현종 때에는 과거(科擧, 진사과)에 의해 등용된 관료와 문벌에 의해 등용된 관료들 사이에 파벌 싸움이 격화되었는데 당시 진사파(과거파)로서대표적 인물은 장열·장구령 등이었고, 문벌파의 대표는 이림보(李林甫)였다. 이림보는 증조부가 당고조 이연의 사촌이었으므로 황족의 일원이었다. 그가 예부상서 겸 재상의 일원인 중서문하삼품(관직명)이 된 것은 개원 22년(734)이었다. 진사파의 장구령을 실각시키고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재상의 정상 자리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의 일이었다.
간신 이림보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한편 마음속으로는 상대를 모함하여 마침내 죽여 없애는 음흉한 방법으로 ‘입에는 꿀, 마음에는 칼’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이었다.
조정의 권리를 한 손에 쥔 이림보는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모두 배척하여 충직한 신하 수백 명을 죽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했다. 심지어 황태자마저 그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이렇게 해서 이림보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조정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짙게 드리워졌다.
그러나 현종은 이림보의 달콤한 말에 귀가 솔깃해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현종은 늘 그의 곁에서 시중드는 환관 고역사(高力士)에게 말하였다.
“태평한 세상이로다. 국정은 이림보에게 맡기고 짐은 좀 쉴까 생각하는데….”
고역사는 현종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간하였다.
“막중 천하대사를 그렇게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아니되십니다. … 만약 이림보가 힘을 얻는 날에는 잘 눌러지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고역사의 대답에 현종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성난 표정이 역력했다. 눈치빠른 고역사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곧바로 사죄했다.
이림보가 조정의 실권을 쥔 736년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를 잃었다.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 명이나 있었으나 누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없었다.
이즈음 현종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한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수왕비(壽王妃)가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것이었다. 현종은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수왕비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악보를 보여주자 그녀는 즉석에서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수왕비가 훗날 양귀비(楊貴妃)가 되는 것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양귀비의 성은 양, 이름은 옥환(玉環)으로 원래는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부인이었다.
수왕 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귀비는 바로 현종의 며느리였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의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며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남궁에서 살게 하고는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현종은 수왕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인지 위씨의 딸을 보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남달랐다. 남궁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못 돼 태진은 마치 황후가 된 듯이 행동을 보였다.
현종과 태진은 추야장 깊은 밤이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 하여 일찍이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은 정치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 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어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되었다. 궁중 법으로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 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양씨 일족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楊釗)는 품행이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 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이다.
양귀비는 질투심이 강한 여자였다. 현종으로서도 그녀의 강짜에 두 손을 들 지경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양귀비의 이 같은 질투심이 원인이 되어 두 차례나 현종으로부터 폐출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폐출된 양귀비는 사가로 돌아와 반성하는 기색 없이 허구한 세월을 울음으로 지샜는데 양씨 일족들은 잘 못하다간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여 갖가지 대책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현종은 현종대로 한때 노여움으로 양귀비를 폐출시키긴 했으나 그녀가 없는 궁정은 마치 무덤과 같이 느껴져 하루 세 끼 밥조차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현종의 이 같은 심정을 알아차린 환관 고역사는 두 사람을 다시 결합시킬 공작을 폈다.
우선 현종의 이름으로 어선(御膳)을 양귀비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현종이 내리는 어선을 받은 양귀비는 곧바로 자신의 칠흑 같은 머리를 잘라 이를 곱게 묶어 고역사에게 건네주며 눈물로 말하였다.
“이제 나는 죽음으로써 내가 지은 죄를 보상하려 합니다. 둘러보건대 나의 모든 것은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일 뿐, 오직 이 검은 머리만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폐하에게 바쳐 오늘 내가 폐하와 영원히 이별하는 마음을 표할까 합니다.”
고역사가 바치는 머리칼을 본 현종은 양귀비를 용서하여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본래의 관계를 회복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콧대가 높은 양귀비라도 두 차례나 폐출된 일에는 충격을 받았음인지 이것저것 자신의 장래 문제를 걱정하게 되었다.
천보 10년(751) 칠월 칠석 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지가 있는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인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래는 현종을 향해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며 두 사람은 손을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였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 지이다.”
‘비익조’는 전설의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전설 속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개원 24년(736)부터 천보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는 간신들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번영의 뒤에 숨겨져 있던 위기가 점점 심화되어 갔다.
농촌에서는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져 국가 세입원이 위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조정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군사 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부병제(府兵制)가 무너져 군대를 모집해도 응하는 자가 없어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그러나 변경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도사(節度使)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어 유사시에 왕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로 보아 현종 왕조의 위기는 폭발 일보직전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출처 : 이야기 중국사2 | 저자김희영 | 청아출판사]
▢ 안사의 난
서기 755년, 당나라 절도사(節度使)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민족 출신으로 한족과 이민족으로 구성된 군사 15만 명을 이끌고 하남을 향해 진군했다. 당현종 주변의 부패를 척결하고 양귀비의 재종인 재상 양국충(楊國忠)을 토벌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당나라는 현종의 집권 초에는 ‘개원의 치’ 라고 일컬을 정도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당은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경제적으로도 번성했으며, 당의 세련된 문화가 주변국에 널리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으로 형성됐다. 수도 장안은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국제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전성기라고 할 이 시기에 균전제, 부병제 등 당나라의 근간이 되는 율령체제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측천무후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 자연재해와 관리들의 폭정, 귀족과 지주의 토지 겸병 등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당나라의 재정악화로 이어졌으며 균전제의 기초 위에 운영되는 부병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에 당 왕조는 정책에 변화를 주어 객호(客戶)를 인정하여 토지와 재산에 대해 과세하고, 변경에 열 개의 번진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두며 모병제를 일부 도입했다. 그러나 모병제 실시로 더 큰 재정적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더욱이 절도사에게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권한까지 주어 절도사가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 여기에 절도사들은 변경의 안전이 자신들에 의해 유지되자 사적인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앙정계에 영향력이 없는 무관이나 이민족 출신을 절도사로 임명하면서 절도사의 독립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써 야심에 찬 절도사가 군사를 일으키면 그것이 곧 반란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게 되었다.
현종은 ‘개원의 치’가 무색할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하고 향락만을 추구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특히 745년에 양귀비를 맞이한 후부터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이런 현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본 이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주인공인 이임보(李林甫)였다. 그는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여 아첨을 잘했으며,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10여 년간 사리사욕만 챙겼다. 또한 귀족세력을 견제하고자 무관을 경시하는 사회풍조를 이용해 이민족 출신을 번진 절도사로 등용하자고 주장한 장본인이다. 이리하여 이민족인 안녹산이 절도사로 임용되었다.
페르시아와 돌궐의 혼혈이었던 안녹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돌궐 부락에서 살았다. 716년에 돌궐에서 당으로 망명한 그는 당나라가 소수민족을 변방의 군사로 모집할 때 군에 들어갔으며, 30대에 유주 절도사 장수규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자신이 소수 민족출신으로 변방의 지리에 밝고 여러 언어에 능통한 것을 활용해 토벌작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742년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고, 744년에는 범양절도사에 임명되었으며, 751년에는 하동절도사까지 겸임하였다. 이로써 안녹산은 당 왕조 전체 군사의 40퍼센트에 가까운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안녹산이 이렇게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더불어 현종, 이임보, 양귀비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안녹산은 권모술수에 매우 능한 인물로 현종을 알현할 때 일부러 바보 같은 언행을 일삼았다. 그는 처음 태자를 만났을 때 짐짓 예를 알지 못하는 척 절을 하지 않았다. 이에 주위에서 절하라고 종용하자 그는 자신이 오랑캐라 예를 알지 못했으며 태자가 무엇인지 반문했다. 현종이 웃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인물이라고 알려주자 안녹산은 세상에 황제는 오직 현종만 있는 줄 알았다며 그제야 태자에게 절을 올렸다고 한다. 또 한 번은 현종이 안녹산의 비대하고 축 처진 배를 가리키며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물었다. 이에 안녹산은 현종에 대한 충성심만이 가득 들었다고 아첨하기도 했다. 그는 현종뿐만 아니라 조정대신들에게도 아첨하며 뇌물을 주었다. 특히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한 것을 안 안녹산은 출세를 위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이미 중년의 나이로 양귀비보다 무려 10여 살이나 위였음에도 그녀의 양아들이 되기를 자처했다. 안녹산은 때를 가리지 않고 궁궐을 드나들며 양귀비를 만났지만 현종은 둘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752년, 재상 이임보가 세상을 뜨자 재상지위를 놓고 안녹산과 양국충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으나 양귀비의 영향으로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안녹산은 양국충이 재상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양국충이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양귀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재상이 된 양국충은 무려 40개가 넘는 관직을 겸직하면서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또 안녹산을 경계하여 태자 이형과 함께 안녹산이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고 진언하여 현종과 안녹산 사이를 이간했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총애하여 안녹산을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양국충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안녹산은 결국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해, 거란, 실위, 말갈 등 이민족으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에서 이민족 출신 500여 명을 선발해 장군으로 삼고, 2천여 명은 중랑장으로 임명했으며 또한 이민족 출신 장군 32명을 한족 장군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로써 안녹산의 군대는 당나라 중앙군을 훨씬 능가할 정도였다.
755년, 안녹산은 양국충 토벌을 명분으로 범양에서 거병하여 낙양으로 진격했다. 안녹산의 15만 대군은 평균 30킬로미터의 속도로 진군하여 33일 만에 낙양을 함락시켰다. 당시 당나라의 중앙군은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 전쟁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동관까지 철수했다. 낙양을 점령한 안녹산은 756년에 대연(大燕)이란 나라를 건립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연호를 건무(建武)로 정했다.
낙양 점령 이후 안녹산은 장안을 향해 진격하려 했으나 곳곳에서 조직된 의병들에게 막혀 어려움을 겪었다. 당나라 군대가 동관에 방어진을 치고 배후에는 평원태수 안진경과 상산태수 안고경, 곽자의, 이광필 등이 공격하자 안녹산의 군대는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이때 동관을 지키던 가서한(哥舒翰)이 반란군을 저지해 무공을 세울까 두려워한 양국충은 현종으로 하여금 가서한에게 안녹산이 있는 낙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을 상주했다. 현종은 이에 가서한에게 낙양공격을 명했다. 이것은 동관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가서한은 황제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었다. 가서한은 군대를 이끌고 관문을 나섰으나 반란군에 대패했고, 당나라 군대는 동관을 반란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안녹산이 장안을 향해 빠르게 진격하자 현종은 양귀비와 황족, 양귀비의 일족, 대신, 측근들을 데리고 사천으로 피란을 떠났다. 피란 행렬이 장안에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금위군 사이에서는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양국충에 대한 불만이 쇄도하여 결국 금위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양국충의 목을 베고, 급기야 현종의 거처를 포위한 채 양귀비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했다. 양귀비가 죽은 10여 일 후 장안은 반란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난을 진정시킬 방도를 찾지 못한 현종은 결국 태자 이형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한편, 안녹산의 반란군에서 내분이 일어나 자멸의 길을 자초하고 있었는데 장안 함락 후 안녹산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고 성격까지 광폭해져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에 예전부터 안녹산에게 반감을 품은 엄장이 안록산의 태자 안경서(安慶緖)와 환관 이저아를 부추겨 안녹산 암살을 모의했다. 태자 안경서는 안녹산이 애첩 소생의 아들을 사랑해 다음 황위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757년, 안녹산은 아들 안경서에 의해 자던 중 살해당했다.
같은 해, 현종을 태상황으로 밀어내고 황위에 오른 숙종은 곽자의와 이광필을 재상에 임명하고, 회흘과 서역 여러 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반란군에 반격을 가해 당 왕조는 비로소 장안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때 안경서의 부장 사사명(史思明)이 항복했으나 숙종은 이를 거짓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사사명은 758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연황제에 올랐으나 이후 당나라는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를 살해한데 이어, 761년에는 사사명이 자신의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반란군은 완전히 분열되었으며 당 왕조는 반란군의 분열을 틈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763년 사조의가 자결하면서 9년 동안의 난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녹산에서 안경서, 사사명과 사조의로 이어진 '안사의 난'은 당나라가 번영에서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전환점이었으며 더 나아가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란으로 인구는 890만 호에서 290만 호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로써 재정적자가 악화되어 당 왕조는 군비조달을 위해 백성을 더욱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민생파탄은 균전제가 붕괴되었으며, 부병제가 완전히 무너져 군사제도는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안사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한 절도사가 병권을 장악하자 군사의 중앙집권화는 붕괴되고 지방분권화가 촉진되었다. 이렇게 당나라의 근간이 되었던 율령체제가 붕괴되자 당나라는 존속을 위해 새로운 지배체제로의 전환이 절실해졌다.
글 : 홍문숙,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 교수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