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은 조용하고 기슭이 좋은 곳이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담하고 산세가 좋다.
게다가 소백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드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경개는 감탄사를 연발하고도 남음이 있다.
곳곳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는 것도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을 하고 정진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리라.
구인사는 한반도의 중심에서 가장 우람하고 웅대한 사찰로서 천태종의 본산이다. 삼척동자도 익히 알고 있다.
인근에서 초등학교시절을 보낸 나는 반세기가 넘도록 구인사 경내의 웅장하던 모습이 여태 기억에 남아있다.
그 후 사찰이라면 으레 거대한 대웅전과 산뜻한 단청과 아울러 바람소리를 재우는 은은한 풍경소리가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예리성(曳履聲)조차 부끄러운 듯 자취 없이 사라지던 경내가 그윽하고 신비스럽기만 했다.
초파일을 앞두고 주변의 내로라하는 집은 정말로 목욕재개하고 구인사를 찾아 불공을 드리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때의 불경과 목탁소리는 여전히 귓전에 울리고 있는데 목조건물은 시멘트 건물로 현대화 되고
단청은 한결 뚜렷하고 곱기만 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와 탑골승방이 담장을 이웃하고 있어서 내내 호기심이 나기도 했다.
사찰이란 으레 경건하고 경외스런 곳이란 사고방식 탓으로 감히 담장 너머로 눈길을 주는 것조차도
불경스런 일로 치부되고 말았다. 탑골승방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늘 호기심과 신비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무런 논리도 접하지 못한 채 불교는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생활 속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사찰은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독교 교리에 입각한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종교와 생명과의 많은 인과관계를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종교와 철학이 환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의학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기도 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을 대하면서 때로는 현실생활의 각박함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이승을 고하는 인간의 진솔한 표정에 안타깝기도 했다.
그 동안 헛되이 보낸 시간이 안타깝고 몹시도 부끄럽기만 하다.
이미 사랑과 자비가 결여된 채 집념과 편견이 우선한 황혼이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공휴일 날을 잡아 도월마을에서 하루 밤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부지런히 장호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서울로 향하려던 일정을 바꿔 내비게이션에 구인사를 입력시켰다.
왠지 근 반세기만에 조용히 구인사를 다시 찾아보고 싶었다. 색 다른 감회를 혼자만 느끼고 싶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낯익은 포스터 한 장에 어깨가 펴진다. 금강승가대 주임교수의 이름 석자가 너무도 선명했다.
학창시절 여섯 해중에 한번은 그와 함께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지난번 부석사에서 만났던 그의 조용하고 차분한 말속에 깊은 뜻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많은 동창들이 있으니 얼마나 흐뭇한지 모르겠다. 다음번 동창회가 기다려진다.
시인과 더불어 박주를, 스님과는 곡차를, 문우와는 임자 없는 술잔을 돌려보아야겠다.
취하지 않아도 취한 척해보고, 마시고도 멀쩡하게 풍월을 읊어 보아야겠다.
진정한 풍류란 반드시 특기를 전제하는 게 아니다.
어쩐지 막걸리와 젓가락이 더 어울릴 것만 같다.
술잔을 채워주는 주모는 없더라도 김삿갓의 해학을 다시금 음미해보는 좋은 시간이 될게 틀림없다.
어질고 자비로움을 구하는 곳에서 삿갓시인의 풍류를 흉내라도 내 보아야겠다.
조금도 거리낌 없는 그들이야말로 살아가는 중에서 가장 큰 자산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zl3jkl
첫댓글 낭만가객이시네요.
저 역시 옛벗 한 명이 출가하였습니다.
함께 법당에서 저는 학생부지도교사로 그 친구는 행자로 있었습니다.
작은 암자에서 긴밤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차를 마시면, 멀리 밤잠없는 개가 달을 짖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결에 댕그랑 거리는 풍경소리도 참 좋았습니다.
벗은 출가를 하면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함께 출가하지 않겠느냐고?
저는 출가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교사의 길을 가겠다고... 수행자보다 교사의 길이 나에게 맞는 것 같다고..
먼길 가는 벗을 배웅하였습니다.
그 벗은 이제는 중년의 수행자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따금 편지를 전하며 벗을 그리워합니다. ^^
그런일이 있었군요.... 이샘의 고운 엽서를 받았습니다. 봄을 맞는 느낌이 이런건지... 봄이란 선입관때문인지 몸이 먼저 나른해 질때 샘의 엽서가 약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운동을 또 시작하면서 몹시도 고마워 하고 있습니다.
남부지부 창단 등의 많은 일을 하시고, 많은 좋은 일을 하시는 선생님께 보내는 보내는 감사엽서입니다.
^^ 일종의 뇌물이죠! 다음에 더 힘을 보태주십사하고...^^
행복한 새봄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