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동 수정약국 안 골목에서 ‘장충단로 7길’(지명 쌍림동)인데 얼마 전 백반기행에도 나온 서울곰탕, 장충칼국수 등 1층으로 이어진 이면도로 골목길이 나온다. 쌍림동 산책 라운딩을 추천한다.
조선의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오백년 이어진 이곳 쌍림동을 1904년 일본은 땅 2만3140㎡(7000평)를 사들여 신정 유곽(遊廓)으로 만들었다. 특히 아마 국힘 정진석 같은 부류들이 존경할 일진회를 만든 송병준이 공창사업파트너 역할을 했다.
식민지시대 조선 경성인구가 40만이 조금 넘었는데 일본인이 12만 명이었다. 청계천에서 남산 쪽에 사는 사람들 80%가 일본인이었다.
조선은 식민지를 넘어 일본의 새로운 조국이었고 그래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서 강제로 싸게 빼앗은 땅을 일본인들에게 주며 조선 특히 경성은 제2의 대륙에 있는 일본 수도였다.
일본 현지보다 많은 부를 모을 수 있고 성공이 담보된 조선에 일본 청년들을 엄청나게 몰렸고 장사한 곳이 명동이고 사업한 곳이 혼마치(충무로)였다. 이들이 타국에서 외로움을 달래려고 영화를 보았기에 충무로에 영화관이 생겼고 혼자 사니 애견을 키우니 충무로에 애견 가게가 생겼다.
대표적인 일본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 매춘시설을 이들은 조선의 성지 장충단 옆에 세웠다. 쌍림동을 매입한 이후 그곳에 새마을이란 뜻인 신정(新町)이란 이름으로 유곽사업을 했다. 즉 군 성노예사업은 조선 총독부에 의해 역사적으로 의도적으로 치밀하고 무섭게 진행된 것이다.
1910년 통계를 보면 한국에 일본 여성 4093명이 매춘여성이었으니 당시 어떤 분위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매춘업 관련 세금이 세수 예산의 10%에 달했다.
6월6일 현충일은 모든 룸들도 영업을 안 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기본 예였다. 최초 국립 현충원 장충단은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시민들을 집을 빼앗기고 조선의 영혼은 짓밟히었다.
이때 유곽을 드나들던 일본 군인들이, 술을 마시며 조선인을 깔보며 하는 말이, 조선의 땅을 빼앗은 일본정치인들이, 이런 일본의 못된 짓을 묵인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늘 자신들을 정당화 하면서 조선을 빼앗을 것을 정당화 한 자들이 하는 말이 바로 망나니 정신석이 말한 조선이 망한 것은 일본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말이다.
국힘에는 저런 간신배들이 많고 극우 다수는 왜 못난 망나니들인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나는 작년 한 여름 고생하며 3개월 매일 장충단을 중심으로 이 모욕당한 땅을 찾아 탐사하였다. 조선 바다에 욱일기가 들어오고 이것을 비판하는 조선의 결기를 이렇게 막말하는 망나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없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