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륵산(461m) : 경남 통영시 |
열린 가슴으로 거두어주는 일망무제 다도해 조망이 일품인 산 |
1. 개념도
2. 개요
통영은 남해 최고의 미항(美港)으로 소문 난 도시다. “동양의 나폴리”라는 애칭으로 더 알려져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는 미륵산이 버티고 있는 미륵도가 없었다면 결코 얻어질 수 없다. 미륵도와 통영 시가지 사이의 좁은 수로인 운하와 그곳을 연결하는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바다와 어우러져 도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임진왜란의 전승지로 수많은 유적지가 있고, 자연의 아룸다움과 따뜻한 기후, 청정해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해산물의 먹거리 등이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로 붐비게 한다. 통영해협을 가운데 두고 시가지와 남쪽으로 마주 대하며 그 가운데에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미륵산(彌勒山). 경남 통영시 봉평동. 미수동과 산양읍을 가르며 솟아 있다. 산정에 서면 사방이 탁 트인 쪽빛 바다 위로 수많은 섬들과 함께 맑은 날이면 멀리 대마도까지 바라보이는 등 그 조망이 아름답기로 널리 이름난 산이다. 그래서 이 산은 산림청이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이다.
특히 이곳에서의 일출과 일몰은 장관을 이룬다. 한려수도의 물길 가운데 떠있는 섬들을 헤집고 솟아오르는 태양은 정염이라도 불태우듯 찬연한 빛으로 황홀경을 연출한다. 또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너머로 지는 일몰은 사람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미륵산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여기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삼회설법(三會說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불교 설화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또 미륵산의 속칭인 용화산(龍華山)은 이곳 산록에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절 용화사의 이른을 딴 지명으로 약칭하여 용산(龍山)이라 일컫는다. 미륵, 용화 등 불교 용어가 암시하듯 산기슭에는 용화사, 관음암, 도솔암, 미래사 등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불교문화의 요람인 동시에 영산임을 알 수 있다. 산정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옛 천제단을 비롯하여 제2봉에는 봉수대터가 아직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3. 산행길잡이
미륵산 산행은 주로 용화사에서 시작하여 원점회귀 산행이 주를 이루나 산행 길잡이에서는 현금산과 미륵산을 잇는 미륵산 종주산행을 소개한다.
산양읍에서 읍사무소 앞을 지나 남평교를 건너 왼쪽 마을길로 들어서면 금평교를 건넌다. 미륵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금평 마을길에서 밭 밑에 있는 허름한 창고를 지나서 돌담길을 따라 오르면 산 밑에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무덤 옆 소나무에 부산일보에서 매어둔 표지기가 보인다.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능선 길을 따라서 약30분 정도 올라서면 억새풀로 덮인 무덤이 보인다. 좌측으로 약300봉 정도 되어 보이는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우측으로 저 멀리 오늘 올라야 할 미륵산 정상이 조망된다. 무덤을 뒤로 하고 우측으로 약200고지 정도 되는 능선 길을 올라서면 바로 앞에 바위로 된 전망대가 보인다. 바위로 된 전망대에 올라서면 누군가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아 놓았다. 바로 전방에 화려한 한려 수도 국립공원의 다도해와 방금 올라온 금평마을과 상촌 마을이 조망된다. 여기에서 조금 오르면 303봉이다.
303봉에서 바로 앞에 315봉을 보면서 능선길이 양쪽으로 나있는 가파른 길을 내려선다. 303봉 정상에서 양쪽으로 갈라진 능선 길은 조금 아래에서 다시 합쳐진다. 안부에 내려서면 온통 쑥밭이다. 사람이라곤 다니지 않은 그야 말로 원시림 그대로다. 주위에 화려하지 않지만 엉컹키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섬이여서 일가 잡목이 거의 없고 우리나라 재래종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울창한 숲을 따라서 그리 험하지 않은 315봉을 올라서기 전 바위로 된 전망대에서 다시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다도해를 본다.
울창한 숲 속 길을 따라서 315봉에 올라서면 바로 앞 전방 330봉인 현금산의 송신탑이 보인다. 능선길은 오솔길처럼 선명하게 잘 나있고 주위의 푸른 풀들과 울창하게 우거진 재래종 소나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고도 차가 거의 없는 330봉에 올라서면 송신탑이 서 있고 주위에는 군부대 무기고를 연상케 하는 허름한 창고가 있다. 좌측으로 통영시가 한눈에 들어오고 또한 해변에서 올라올 수 있는 능선길이 잘 나있다. 가끔 식 해변에서 올라오는 등산객을 볼 수가 있다.
한마디로 초원지대라 할 수 있는 능선 길을 따라서 역시 송신안테나가 서있는 341봉에 올라선다. 이곳 역시 허름한 창고가 있다. 바로 전방에 우뚝 솟은 미륵 산이 보인다. 341봉에서 안부에 내려서면 주위가 넓은 풀밭이 형성 되어 있다. 좌측으로 통영시가가 한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 는 상촌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게 나 있다. 바로 전방에 구멍바위와 작은망335봉이 위용을 자랑하고 서있다. 구멍바위와 작은망을 오르기 전 좌측으로 등산로 가 아닌 조그마한 임도가 나 있다. 아마 송신안테나를 관리 하기 위해서 나 있는 길인것 같다. 아마 이 조그마한 임도 를 따라서 쭉 가면 도솔암 쪽으로 내려가는 임도 가 아닌가 생각된다. 좌측의 조그마한 임도를 버리고 능선 길을 따라서 올라선다. 여기까지 오면서 제일 험한 등산로가 아닌가 생각 된다. 험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고도가 높지 않아서 쉽게 올라설 수가 있다. 올라서니 양쪽이 바위로 된 안부 이다. 아마도 우측이 개념도에 표기된 구멍 바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생각 같아서는 올라가고 싶었으나 안부에서도 화려한 한려해상 국립 공원의 다도해와 오늘 올라온 금평마을이 그리고 바로 앞에 상촌 마을이 조망된다. 마을 우측으로 오늘 올라온 주 능선이 조망된다. 여기서 보니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던 주 능선이 500고지 이상은 되어 보인다. 섬에 있는 산들은 바다와 인접 해 있어서 그 높이가 육지의 산들보다 더 높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주위의 조망을 감상한 다음 바로 앞에 있는 바위로 된 작은 망을 올라선다. 이제는 바로 앞에 미륵산이 있다. 작은 망에 올라서니 이곳 역시 바위 위에 누군가 조그마한 돌탑을 쌓아 놓았다. 바로 아래가 미륵치다.
미륵치에는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옆길로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주위의 경치가 과히 환상적이다. 시원한 해풍과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 길을 따라서 미륵산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미륵산 정상은 생각 보다 조금 멀리 있다. 정상을 오르기 전 좌 우측에 바위 전망대가 있어서 쉬엄 쉬엄 쉬어 가면서 갈수가 있다. 철 계단을 올라서서 좌측에 있는 바위에 이번에는 꽤 큰 돌탑이 있다. 바로 우측으로 미륵산 정상이 보인다. 태극기와 함께 미륵산 정상 표지석도 서 있다. 이곳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주위의 아름다운 다도해를 보면서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 정상에서 내려서면 안부 사거리이다. 바로 전방의 225고지 부근에서 케이블카를 놓기 위해서 공사가 한창이다. 왜 굳이 저렇게 자연을 파괴하면서 공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이곳에 케이블카가 놓이면 이 미륵산은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이 아름다운 자연이 많이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사거리 안부에서 조금 내려서면 평평한 공터가 나온다.
능선길을 따라서 내려서면 좌측에 또 누군가 정성스럽게 쌓은 돌탑을 볼 수가 있다. 이 깊은 산속에 홀로 서 있는 돌탑이 때로는 산을 찾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돌탑을 뒤로 하고 내려서면 도솔암과 약수터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약수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울창한 측백나무 숲을 지나서 내려서면 시원한 약수가 나오는 약수터이다. 약수터 주위에는 약수를 먹을 수 있게 여러 개의 바가지가 나무에 걸려 있다. 약수터 바로 아래에는 팔각정으로 된 정자가 서있다. 여기서부터 용화사 까지는 임도 처럼 길이 나있다. 주위의 울창한 소나무들은 수령이 오래 되어 보이나 소나무 재선충으로 인해서 말라 죽은 것이 보이고 잎이 무성 해야 하나 심한 바다 바람의 영향이 여서 일가 잎이 그렇게 푸르지만은 않다. 조금 더 내려서면 쉴수 있게 나무 의자가 있고 앞에는 넓은 잔디 밭이 조성 되어 있다. 이곳이 용화사 광장인 듯 보인다.
여기서 용화사로 내려 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우측에 나있는 넓은 길은 돌아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에 나 있는 길이 용화사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다.
여기서 철탑이 보이는 체육공원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바로 앞의 봉우리가 165m봉이다. 165봉을 지나면 등산로가 희미하다. 미륵산 종주산행을 하는 등산인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25봉을 지나면 좌측으로 통영청소년 수련관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고 미래고개에서도 좌측으로 하산길이 보인다. 미래고개를 지나면 마지막 전망바위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려수도의 아름다움을 조망하고 내려서면 바로 군부대 훈련장이 나온다. 훈련장을 내려서면 군부대 초소가 있는 도로에 닿는다.
<기타 등산로>
1) 용화사 광장(버스종점)~용화사~관음사~도솔암~미륵치~띠밭등 안부 갈림길~정상~미륵치~작은망~현금산~303m봉~산양중학교~산양 삼거리(4시간 소요)
2) 용화사 광장~용화사~디밭등~정상~미륵치~작은망~헬기장~도솔암~관음암~용화사 광장(2시간30분 소요)
3) 용화사 광장~관음암~도솔암~헬기장~작은망~미륵치~정상~미래사~띠밭등~용화사~용화사 광장(3시간 소요)
4. 주변의 명소
(1) 세병관 - 국보 제305호 (2002.10.14. 지정)
세병관은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두룡포에 옮겨온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이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으로 개방하였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바닥의 중앙 일부를 한단 올려 놓았는데 여기에 전패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식이지만, 익공식 수법과 다포식 수법이 많이 보인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직접 화반을 놓아 주심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십일량가로서 대들보를 양쪽 내고 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보를 걸고, 다시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걸었다. 종보 위에는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내고주와 전면 평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용마루, 합각마루,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였다
(2) 두룡포기사비 - 유형문화재 제112호 (1974.12.28.지정)
세병관 경내 수항루 뒷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는 두룡포기사비는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우리 고장(당시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치적이 새겨진 통영의 뿌리를 밝히는 사적비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3년(1625) 구인후 제19대 통제사가 세웠는데, 당시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가 지은 비문의 내용은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이경준 통제사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혜안과 업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통제영 남문 밖의 바닷가 큰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무 8년(1904) 이곳 사람 이학재, 이승주 두 사람이 세병관 앞뜰에 옮겨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귀부가 없어진 듯하고 비신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오랫동안 비문의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다.
1996년 4월 12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비각을 짓고 하대를 새로 만들어 옮겨 세움으로써 1세기만에 비신의 하부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수는 운문(雲紋) 위에서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으로 조형미가 특히 뛰어나다.
(3) 제승당 - 사적 제113호
한산대첩을 이룩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절이 얽힌 호국의 성지로서, 주변 경관 역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받아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을 때 지금의 제승당(사적 제113호) 자리에 공이 막료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운주당을 세웠다.
(4) 해저터널
1931년부터 1932년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만든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로 길이 483m, 너비 5m, 높이 3.5m이다. 양쪽 바다를 막아 바다 밑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을 만든 것으로, 터널 입구에 쓰여 있는 용문달양(龍門達陽)은 "섬과 육지를 잇는 해저도로 입구의 문" 이란 뜻이다.
(5) 용화사
용화사는 안정사와 같은 시대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632~646)에 은점화상(恩霑和尙)이 초창하여 「정수사(淨水寺)」라고 불렀다. 그 뒤 고려 원종(元宗) 원년(1260)에 큰 비가 내려서 산사태가 나자 전체의 가람이 쓸려 무너지니 3년 뒤 자윤(自允), 성화(性和) 두 화상이 자리를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천택사(天澤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인조(仁祖) 6년(1628) 화재로 폐허가 된 것을 벽담선사(碧潭禪師)가 현재의 용화사 자리에 새로 중창하고 다시「용화사」로 개칭하였다. 벽담 스님이 절 이름을 고친 데에는 그만한 사유가 있었다. 즉 화재로 말미암아 잿더미가 된 뒤 절을 중창하기 위해 미륵산 제일봉 아래에서 칠일칠야(七日七夜)를 미륵존불께 기도를 드렸는 바 회향날 밤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이르기를,"나는 당래교주미륵불(當來敎主彌勒佛)이니라. 이 산은 미래세에 용화회상(龍華會上)이 될 도량이니 여기에 가람을 짓고 용화사라 하면 만세(萬世)에 길이 유전(遺傳)하리라."라고 했다. 이 서몽(瑞夢)을 따라 새로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용화사라 하였다 한다. 이렇게 이룩된 용화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도들의 귀의처로서 그 구실을 다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용화사는 보광전(普光殿), 용화전(龍華殿), 적묵당(寂默堂), 해월루(海月樓), 탐진당(探眞堂), 칠성전(七星殿), 명부전(冥府殿), 요사(寮舍) 2동 등 8동 건평 145평의 사우(寺宇)가 있으며, 이중 보광전은 도지정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용화사 안에 있는 주요한 전당(殿堂)을 살펴보면 경내에는 불사리4사자법륜탑, 효봉스님 사리탑이 있다. 불사리4사자법륜탑은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고대 아쇼카 양식의 원주석탑으로 진신사리 7과가 봉안되어 있다.
(6) 통제영지 - 사적 제402호(1998.02.20. 지정)
통영시 문화동 62번지에 있는 통제영시대의 객사(客舍) 세병관을 중심으로 주위의 통영초등학교(9필지, 1만3,199㎡),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5,745㎡), 충렬여상·충렬여중학교(5필지, 9,846㎡), 통영세무서(1,782㎡)와 현 세병관 경역을 포함하는 총29필지, 4만1,022㎡ (1만2,409평)에 이르는 넓은 구역이다. 통영시는 앞으로 관아 30여동과 12공방을 이곳에 복원할 예정이다.
지정구역내 관청과 학교의 이전에 맞추어 법원·검찰청사 터에는 운주당 ·경무당·내아·병고 등을 복원하고 통영초등학교 부지에는 백화당과 12공방 등을, 통영세무서 자리에는 중영·중영내아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약 300년 동안 삼남을 호령하던 남해의 관방 통제영의 위용을 재현함으로써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명미한 자연풍광과 함께 어우러지게 통영의 면모를 가다듬고 21세기를 향한 웅비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통제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통할하던 본영을 이른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전연패하던 육군과는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연전연승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킴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를 구한다. 이에 선조는 이듬해에 당시 직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리고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수군을 통할하게 한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다 새로이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니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거제도 오아포, 고성현 춘원포등지로 옮겨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선조 37년(1604) 9월 9일 윤허를 받은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이 고장 두룡포에 통제영을 이설하면서부터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된다. 선조 38년(1605) 7월 14일,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 세병관을 창건하고 차례로 통제영 관아를 지으니 통영은 이렇게 조선조 유일한 [계획군사도시]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후 숙종 4년(1678) 윤천뢰 제57대 통제사 때에 영문 주위의 산능선을 따라 높이 1장반(약 4.7m), 둘레 11,730자(약 3.6km), 성곽 707개 규모의 평산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과 2암문 그리고 3포루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개의 관아가 통제영의 위풍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성곽과 관아가 다 헐리고 지금은 통영성의 일부와 세병관이 겨우 남아 지난날의 영광을 쓸쓸하게 증언해줄 뿐이다.
(7) 충렬사 - 사적 제236호(1973.06.11. 지정)
충렬사는 성웅 이충무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임진란이 끝난 8년후인 선조 39년(1606년) 제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공의 충절과 위훈을 숭앙추모하기 위하여 왕명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그후 현종 4년(1663년)왕께서 충렬사 사약을 하셨는데 글씨는 문정공 송준길선생께서 쓰셨다.
현종 11년(1670)에 제70대 통제사 최숙이 경충재를 증축하여 서당을 개설하고 지방민의 자제들을 훈육하였고 같은 해 제 71대 통제사 김중기께서 숭무당을 창건하고 장교 3인을 차출하여 전곡사무-관리를 집행시키는 한편 연대도(-통영시 산양읍 소재)를 사패지로 받아 위토전답을 마련, 사당의 보존책을 강구하였고 정조 19년(1795년)왕께서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게 하시어 어제제문을 하사하셨고 조선후기인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이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릴때도 유일하게 본 충렬사 서원만은 보존케 하였다.
현재 충렬사는 사당을 비롯하여 동서재,경충재,숭무당,비각,전시관,강한루 등 건물 17동과 5개문으로써 경역면적 2,723평으로 되어있고 명조팔사품(-보물 제 440호)을 비롯하여 지방유형문화재인 충렬묘비와 지방기념물인 동백나무와 많은 동산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본 충렬사는 호국의 영령이신 이충무공을 위시한 휘하장병의 위령을 위하여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춘추향사와 공의 탄신일인 4월 28일 탄신기념제, 그리고 본 지방 축제인 한산대첩축제 행사의 고유제를 정성드려 엄숙히 전통제례의식으로 봉행하고 있다.
본 충렬사의 관리는 통제영이 혁파되어 관급이 끊어진 후 1919년에 지방민이 뜻을 모아 충렬사영구보존회를 조직하여 제반행사 및 관리를 해 오다가 1951년에 재단법인 통영충렬사를 설립하여 현재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오고 있다.
(8) 착량묘 - 기념물 제13호(1974.02.16. 지정)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전란이 끝난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 수군들과 이곳 주민들이 공의 충절과 위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판도가 바라보이는 착량언덕에 초옥을 짓고 공의 위패를 모시어 춘추향사와 기신제를 모시었으니 이것이 이충무공 사당의 효시이다. 그후 고종 14년(1877) 공의 10세손 이규석 제198대 통제사가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하였으며, 이때 호상재도 같이 지어 지방민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착량묘는 비바람으로 퇴락된 채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1974년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되자 그해부터 198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정화사업을 벌여 동재와 고직사, 외삼문, 일각문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기둥머리에 포작을 두지 않은 매우 검박한 형식의 건물이다. 화강석을 잘 다듬어 만든 장대석기단과 원형정평주초는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74년 개축시에 만든 것이다.
서재는 2칸의 마루와 한 칸의 방으로 된 팔작지붕건물로 본래 강학용의 건물이거나 향사를 준비하는 용도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재는 서원의 양식을 갖추기 위해 일부러 축조한 것으로 보이나 건물형식이나 건축법식상 호상재와 차이가 많다.
착량묘는 현재 재단법인 통영충렬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음력 11월 19일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9) 미륵산 봉수대 - 기념물 제210호(1998.11.13. 지정)
통영 미륵산봉수대는 남해안 일대와 대마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통영성 남쪽 4km 지점의 미륵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에는 석축을 축대로 하여 만들어진 직경 7.5~7.8m 정도의 반원형 터가 바다를 향해 돌출된 형태로 남아 있다. 미륵산 봉수대는 <경상도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통영지> 등에 거제의 가라산에서 봉수를 받아 현 통영시 도산면의 우산봉수대에 전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