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도자기축제가 열리는 진례면의 난장.
같은 김해이긴 하지만 부산과 가까운 집이랑 김해의 서쪽에 있는 진례는 멀게 느껴진다. 일요일 오후,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아내와 같이 집을 나선다. 혼자 다니는 나들이는 재미가 없다. 내년 2월이 출산 예정일인 아내는 배가 부르다.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는 아내를 꾀어 분청사기 축제가 열리고 있는 진례로 향한다. 창밖으로 가을걷이를 끝낸 김해평야의 너른 논들이 보인다.
진례는 도예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약 50년 전부터 전국의 도공들이 모여들어 오늘의 도예촌이 만들어졌다. 분청사기 축제 마지막 날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진례는 온통 인산인해다. 애드벌룬이 떠 있는 하늘 밑 임시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으로 걸어간다. 길거리 난장엔 옹기들이 가득 쌓여 있다. 풀빵과 전통호떡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고 맛보기 단밤을 나누어주는 아저씨도 있다. 손에 쥐여준 단밤을 씹으며 우리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도자기 제작 체험을 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이고, 그늘에서 마르고 있는 흙그릇들이 보이고, 의자에 앉아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아이들도 보인다. 도자기 굽는 가마를 실제 크기로 만들어 놓은 길가의 야트막한 언덕 앞에 장작이 가득 쌓여 있다. 텔레비전에서 가마에 도자기 굽는 장면을 보면 나는 종종 도공이 되고 싶었던 어렸을 적 꿈을 떠올린다. 나는 중학생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학교에 갔다 오면 날마다 그림을 그렸다.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그림 그리기보다 준비할 재료도 많고 복잡한 과정을 그치기 때문에 해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릇을 만들어 그림을 그리고 가마에 구워내어 남들이 만든 것과는 다른 나만의 그릇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다육식물 키우기에 관심을 가지던 올 초에는 도자기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볼까 싶은 생각도 했다. 도공을 꿈꾸었던 것은 어렸을 때 읽었던 로빈슨 크루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로빈슨 크루소는 어렸을 때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가 그릇 만들기에 실패하다가 마침내 성공해서 기뻐하는 장면은 내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그 때문인지 나도 무인도에 들어가서 그릇을 만들고 집을 짓고 낚시를 해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김씨표류기’를 무척 재미있게 본 생각이 난다.
분청사기 축제가 열리는 클레이아크 박물관 근처의 길은 온통 북새통이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의 청자로부터 변화하고 발전해 간 조선 초기의 도자기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200년 동안 만들어졌다.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분으로 장식한 회색이나 청색의 사기그릇을 뜻한다. 분은 밝은 노란색의 흙물이다. 그릇을 만든 다음 노란색의 분을 입혀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바른 후 재벌구이를 해서 분청사기가 만들어진다. 고려의 청자에서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로 그리고 임진왜란 후의 백자로 이어지는 것이 한국 도자기의 대략적인 흐름이다.
전국 최초의 분청도자관이라고 하는 김해분청도자관에는 분청도자대전에 출품된 도자기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특이한 모양과 다채로운 빛깔과 그림과 무늬가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1층의 다른 전시장에 진열된 도자기들 가운데는 특히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다. 2층에는 전시판매관이 있다. 나무로 짠 장식장에 수많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다기, 주전자, 밥그릇, 국그릇, 꽃병, 접시, 화분, 물병, 잔 그리고 장식용 도자작품들까지 사방의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피리 부는 아이와 그 소리를 듣는 아이 그림이 그려진 접시를 들여다보다가 검은색 용 그림이 있는 도자기를 보다가 또 다른 도자기로 향하는 내 눈은 분주하다.
분청도자관을 나와 클레이아크 박물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박물관의 상징은 박물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도자타일이다. 클레이아크는 흙과 건축의 합성어로 흙을 재료로 하는 건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이름에는 건축도자의 발전을 꾀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건축도자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예술참여를 통해 도시계획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이 박물관의 운영 목표라고 한다. 영구적으로 원래 빛깔을 간직한다는 도자타일로 장식된 박물관 외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눈길을 돌린다. 박물관 광장에는 사진 찍는 사람과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어린 아이도 있었다. 박물관 화단 앞에는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 셋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가을 나들이를 나왔다.
박물관 옆에 자리 잡은 분청사기 전시장으로 들어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각양각색의 그릇들이 부스별로 진열되어 있다. 전시장에는 여러 가마에서 나온 다양한 도자기들로 가득했다. 칸막이로 나뉜 수많은 매장들을 하나씩 둘러본다. 한산해 보이는 매장도 있고 사람들로 붐비는 곳도 있다. 도자기를 구경하는 사람이야 비슷비슷한 차림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부스를 지키는 주인들은 그곳에 진열된 도자기와 닮아 있다. 어떤 부스의 도자기들은 무척 은은한 느낌이 드는데 부스를 지키는 주인에게서도 그런 느낌이 전해진다. 화려하지만 기품은 없어 보이는 그릇들이 진열된 부스도 있고, 수수하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그릇들이 가득한 부스도 있다. 어떤 곳은 실용적이고 튼튼하게 보이는 그릇들이 있고, 다른 곳에는 옥색이 도는 그릇들만 진열되어 있다. 학이 그려진 그릇부터 꽃과 나무가 그려진 것, 새나 물고기가 그려진 것, 아무런 문양이나 그림이 없는 것 등 그릇에 그려진 그림도 다양하다.
수많은 가마에서 나온 수없이 많은 그릇들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전시장 내에는 그릇을 들고 천천히 살펴보는 사람, 허리를 구부리고 소품을 바라보는 사람, 빠르게 걸어가며 훑어보는 사람, 주인과 이야기하는 손님, 밥그릇을 들고 여기저기 살펴보는 사람, 휴대전화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넘친다. 전시장 곳곳에 파란색, 흰색, 연둣빛, 노란색, 검은색 등의 다채로운 그릇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 많은 그릇들이 각지에서 이곳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고만고만한 그릇들 사이에서도 만든 이의 정성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것들은 눈에 잘 들어온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비슷비슷한 그릇도 있지만 한참을 보고 있어야 만든 이의 공력이 느껴지는 것도 있다. 그런 그릇에는 눈길이 오래 머무르기 마련이다.
전시장을 나와 장군차 시음장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먹을거리를 파는 곳으로 향한다. 묵무침과 순대를 시켜놓고 아내와 같이 나눠 먹으며, 작년 이맘때 이곳에 왔던 이야기를 나눈다. 일년이 참 빠르게 흘러갔다. 생각해 보니 일년 동안 우리에게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아내는 단감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오는 길에 단감 한 봉지를 샀다. 올해는 단감농사가 잘됐다고 한다. 할배는 못생겨도 단감 맛은 좋을 거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명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펼쳐진 들판과 산과 하늘을 본다. 하늘은 높고 아득하고 푸르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고 있다. (경남신문 2013-10-29)
글·사진= 김참 |
첫댓글 다음에 퇴직하면 분청도자기축제에 꼭 한번 가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