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8장
숨어서 지내기를 바라는 예수와 그 공동체의 의사와는 달리 민중들의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각종 능력이 나타나서 중들을 해방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와 그 공동체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와 환영은 반대하는 무리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는 가운데 각종 악령에 시다리는 사람이나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감싸안는 일들은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 즈음에 큰 민중무리가 예수와 그 공동체에 속한 나머니 사흘이나 있게 되었다. 그 동안은 의식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나 같이 있는 민중들은 이제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 20세 이상된 남자가 4000명이라고 하니 어린이, 인들까지 생각한다면 만명도 넘는 수가 모여 있었다. 이들에게 어떻게 밥을 줄것인가? 예수와 그 공동체에게 부여된 시급히 해 해야할 문제였다. 예수님의 관심도 역시 이 민중무리를 먹여살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였고 이들을 굶겨서 짐으로 보 다면 기진하여 죽을 지도 모른다. 제자공동체를 모아놓고 회의에 들어갔다.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들이 먹을수 있는 해결의 길이 없다는 절망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제자들이 겨우 할수 있는 말이란?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하는 정도였다. 예수께서 지도자요 스승이요, 나사렛당의 당수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민중에게 먹거 를 해결해 주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아무리 말해 본들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이 돌아가다가 기 하여 죽는다면 참으로 사회적으로 얼마나 비난을 받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 뻔하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를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떡 일곱개 있습니다. 그리고 생선 두어마리가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50-100명씩 앉 록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정돈을 좀해보게! "50명씩 무리저 앉아도 200개며 100명씩 앉혀도 100개이니 그 중간책들을 불러서 앉도록 하고 돌아와 이야기하세" 제자들이 50,100명씩 무리저 앉게하고 난후 예수는 떡과 고기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그리고 떡과 고기를 나눠주면서 갔다주라고 했다. 이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제자들은 자기 맡은 동체에게 갖어갈 떡과 고기를 갖어갔다. 그리고 배불리 먹었다. 남은 조각을 광주리에 담았더니 일곱광주리나 되었다. 도데체 런 놀라운 일이 광야 한적한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늘의 새로운 만나가 내린 것이다. 이때 음식을 먹은 사람이 남자만 4000 이라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와 예수공동체가 있는 곳에서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기적,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민중과 예수공동체의 만남의 이야 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민중들은 하늘나라에 굶주려있다. 정의와 평화, 안식이 있는 세상은 로마가 외치는 힘에 의한 평화나 력에 의존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상대대로 사모해 온 하늘나라를 이어받기 위해서 굶주린 민중들이다. 어느나라, 민족이나 가난하고 배고픈 민중들은 세상이 한번 바뀌기를 바란다. 이들은 힘들고 지쳐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중들에게 필요한 사람예수와 그 공동체, 이들이 숱한 민중들의 배골픔을 해결해 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중 돌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이기셨는데 이곳에서는 새로운 기적을 이루신 것은 꼭 필요한 경우에 주님은 임재하고 기적을 일 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는 영적일 뿐 아니라 육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민중들을 사랑하는 예수와 그 공동체의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졋고 드디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 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예수께서 표적을 구하는 시대가 악한 시대임을 아시기에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 않겠다”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다. 이 논쟁은 참으로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물음이었고 예수는 그 제자들과 더불어 탄식하신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예수 자신이 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하는 능력을 보면서 또 다른 표적을 원하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에대한 판이기도 하다. 이들은 예수와 예수공동체의 활동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정파적 부류나 이해당사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사 당에 대한 이들의 편견의식은 세상권력에 눈이 어두운 이리떼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이런 악한 세대를 탄식하신 것이다. 뿐만아니라 러한 이기적인 바리새인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거나 나타낸다면 이들은 그것을 돈벌이로 전락시키면서 민중을 착취할 것이 분명한 악한 생각이 든 말이다. 표적은 시대의 징표로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이적, 기적, 체험은 경건한 사람이나 예수와 그 공동 는 이미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의 지도자들 공동체로서 자유분방한 예수공동체, 나사렛당을 인정하려들지 않 고 결국은 예수와 그 공동체를 말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삶은 경건을 빙자한 자기 합리화에 뜻을 두고 있다.
배를 타고 가시던 예수와 그 공동체는 쉬지 않고 예수의 말씀에 대한 토론으로 논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제자들이 떡 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었다. 금방 사흘을 같이 있었던 민중 만여명에게 먹거리를 주고 일곱광주리에 담았던 떡을 배가 부르자 누구도 챙기는 사람이 없어서 그 떡을 민중들이 모두 갖고 간것같다. 그래서 예수와 그 일행은 떡을 잊어버리고 우 히도 한개의 떡을 갖은 제자가 있었다. 이 떡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마 떡이 주제어이고 이로 인해서 예수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경계하여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보스요 스승이신 예수께서 제자들 은 떡을 숨겨온줄 알고 이런 말씀을 하신 줄 알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에게 떡이 없습니다.”하거늘 예수께서 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 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제자들이 말하기를 “일곱입니다”그러자 예수는 그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물으셨다. 이러한 대화는 달마누다 지방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서 하신 가르침이 다.
벳새다에 이르자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낳게하시는 손을 대기를 간구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다른때와는 달리 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리고 그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면서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다. 매우 남다른 행동이며 안수 방법이었다. 그 소경은 우러러 보며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봅 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 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들이 예수와 그 공동체의 헌신적인 희생과 돌봄가운데 일어났던 것이다.
이후에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때였다. 주님은 노중에 제자들에게 묻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 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중 하나가 말하기를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라고 말하던데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갑자기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입니다.”하고 고백하자 제자들도 놀랐고 예 님이 기이히 여기시며 칭찬 해주셨다. 이제 제자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나타내시는 예수였다. 그리스도란 왕을 의미하며, 대제사장이며 대예언자의 의미를 다 갖춘 명칭으로 이것은 메씨야가 들어야 할 이름이다. 이미 예수공동체는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가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하고 있었다. 영의정에 오를 베드로 형님이 제자공동체를 대표해서 말한 것은 이미 충성을 맹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예수를 참으로 그리스도라고 인정한 것인가? 어떤 면에서 그가 왕이며 선지자이며 대제사장이란 말인가? 제자들은 예수를 따 는 공동체로서 어떻게 예수를 보고 정리한 것일까? 예수는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땅, 백성, 무기, 군사, 돈,기술, 그 어떤 것도 갖은 것이 없는 공동체였다. 이들이 보는 눈이 다른 것이다. 예수가 능력이 있어서 언제든지 7200명인 천군천사를 내려 게 할수 있는 분이기에 그렇다는 것인가? 그것은 하늘의 영광군데이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그런것을 보고 고백한 것이 아니다. 연 예수에게서 어떤 면을 보고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 왕이라고 고백한 것인가? 우선 예수의 말씀이나 가르침이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처럼 교리나 말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능력이 나타나고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그 통치와 다스림의 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악령의 세계나 질병, 민중들을 먹이는 속에 상이 볼수 없는 엄청난 권위와 사랑과 평화와 정의의 질서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본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은 곧 능력과 권 으로 삶의 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은 곧 법이며 순종하는 자에게 놀라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제자들이 체험한 것이다.
비록 세상이 바라는 그런 왕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어두운 세상에 왔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 예수는 그 나라의 왕이다. 그 능력을 이 세상 권세자나 기득권자들에게 심판으로 임하게 한다면 그것은 무성운 혁명이 되고 모두가 형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능력을 자제하고 있음을 제자들이 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왕이란 의미가 포함된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미 그의 말씀은 진리로서 모든 사람들을 움직였고, 그 진리의 말씀은 수많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로 나타났다. 또한 예수는 참된 인간의 마음을 주님앞에 바치는 거룩한 제물로서 임했다. 그는 가난한 민중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임을 선언하고 그들을 인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자신이 비난받고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차츰차츰 준비하는 단계를 밟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세상에서 시기와 모함의 대명사이다. 이것은 정적들에게 나사렛당을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 뻔한 일이기에 이에 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셨다. 이미 예수는 그 제자공동체에서 선언하고 나섰다. 즉 “주이신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고 비로소 저희 게 가르치셨다. 예수는 비장한 각오와 결단으로 자신이 죽음에대한 연설을 한 것이다. 제자들도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어이 다는 표정들이지만 설마 그런 죽음, 가장 극형인 죽음이 우리 형님예수에게 닥쳐오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의 비장한 각오가 각함을 안 가장 우두머리격인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였다.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것은 주님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없고 우리들도 무장하여 그런 이일 안일어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할 것입니다.“ 러자 이런 충성스러운 충신을 보고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제자에 대한 이 독설은 무엇인가? 이미 제자 공동체 안에 분열이 온 증거일 ? 아니다. 스승의 이런 꾸지람을 처음 듣는 베드로는 어떨결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가장 무섭게 책망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형님이 죽으시는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형님뒤를 따랐단 말인가? 예루살렘 입성하여 왕좌를 차지하고 못된 무리들에게 철 를 내려야 되지 않을까? 그런데 큰 형님이신 예수가 극형에 해당되는 십자가형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았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부르셨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민중들과 제자공동체가 모였다. 주님은 비장한 각오로 ” 아무든지 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시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게 될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습니까?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 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것입니다.“고 말했다. 주님이 하신 말씀중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예수공동체에 소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자신의 능력을 알아서 모두 주님앞에 바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든 것을 알고 주님앞에서 참으로 무가치하구나하고 깨달을때 그는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자신이 예수공동체와 나사렛 이라는 이름으로 죽임당함을 기꺼이 받아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고 예수와 복된 소식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최후의 순간을 준비하라는 총참모총장이나 왕이신 예수형님의 선언이다. 이제 자공동체인 예수공동체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야 한다. 죽음이냐 삶이냐를 선택하는 귀로에 섰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겠다"고 하 다. 이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란 무엇을 의미하시는 것일까? 이 세대에 대한 저주인가? 아니면 살고있는 인간들이 모두 음란하고 죄가 많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 시대는 더욱더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인데 예수님은 왜? 그 세대, 아니 지금의 우리세대가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란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한숨 쉴 세대, 조금도 희망이 없는 세대로서 회개만이 살길인 세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대를 정 하는 예수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한탄의 세대임을 입증한다. 이런 세대에서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양심이 마비된 람이거나 정직성과 진실성이 결여된 사람이다. 주와 그 말씀을 신봉치 않는자는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의 표징이다.이러한 사람에 대한 심판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와 함께올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그 심판을 연기하여 놓는다. 그 사람을 부 러워하리라 ,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이다는 말인데, 어떤 것일까? 예수의 최후 심판을 최종의 순간에 놓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또 저희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행전 1장에 성령님이 인간들에게 오심으로서 그 권능을 나타내셨다. 성령이 오셔서 주님의 권능을 나태내신 것을 의미하는 것같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들의 삶속에서 형성되고 있고, 가시적인 세상과 비가시적인 세상 어디나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면서 통치와 다스림이 임하고 있는 세상 디나 천국이 임한다. 영원한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다스림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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