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번째 殺人
S호텔 지하 주차장은 어둠침침했다.
에어컨 시설은 물론 통풍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몹시 후덥지근했다.
넓은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지만 군데군데 빈 자리가 더러 있었다.
황개의 최신형 고급차는 맨 구석쪽에 세워져 있었다. 그는 차를 몹시 아꼈다.
그의 차는 2천만 원대가 훨씬 넘는 고급 차로 구입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검은색의 그 차는 항상 번쩍번쩍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요즘은 장마 때문에 차를
닦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물론 그가 직접 차를 닦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한 달이 뻔질나게 차를 갈아치우곤 했다.
새 모델이 나오면 구 모델에 금방 싫증을 느끼고 최고의 새 모델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적당한 방법이 할부로 차를 구입하는 방법이었다.
차를 조금 굴리다가 싫증이 나면 중고차 시장에 내다 판다. 빨리 내놓을수록 많은 값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돈으로 새 모델을 할부로 구입하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그는 항상 새 차를 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급 차는 과시욕과 사치벽을 충족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후덥지근한 주차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기 위해 서둘러 차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올라가 앉았다. 그의 얼굴은 낭패감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될대로 되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문을 닫고 엔진을 걸었을 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푹 꺼진 느낌이 들면서 앞에 무엇인가 걸렸는지 나가지가 않는다.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꺼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가 바싹
옆으로 다가붙으면서 접근해 왔다.
그 소형차는 후진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곧장 다가들고 있었다.
차가 세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도 스치듯 바싹 다가붙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개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곁을 스치면서 운전석의 여인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순간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수세미 같은 머리에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쌍년!"
투덜거리면서 황개는 다시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러나 차는 더욱 밑으로 꺼지면서 앞바퀴에 무엇이 걸린 듯 나가지가 않는다.
그러고보니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펑크가 난 것 같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옆에 차가 바싹 붙어서 있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여자가 운전해 들어온 차는 황개의 차와는 엇갈리게 서 있었다.
황개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뒤로 뺀 다음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차를 이렇게 바싹 붙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갈 수가 없잖아. 자리도 넓은데 왜 빨리 빼요!"
그러나 상대방은 차를 빼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엔진을 꺼버린다.
"이봐! 안 들려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황개는 고함을 질렀다. 그때 뒤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그의 차 뒷문 창이 박살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여자가
운전석에 앉은 채 망치로 차창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저런 미친년! 야, 이 미친년아! 무슨 짓하는 거야?"
황개는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반대편 문도 벽에 막혀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다. 그는 어떤 미친년이 발작을 일으킨 몸을 웅크렸다.
그때 뚫린 구멍을 통해 큼직한 플래스틱 통이 안으로 던져졌다.
황개는 가솔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는 위기를 느꼈다.
그 여자가 차를 바싹 갖다댄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운전석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옆차에 쿵하고 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 그가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마련되지 않았다.
겨우 주먹 하나가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생겼을 뿐이었다.
여자는 황개의 욕석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움직임이 결코 서두르는 빛이 없이 매우 침착해 보였다.
황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뻥 뚫린 뒷문 유리창을 통해 날아든 빨간 담뱃불이었다.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악! 사람 살려!"
황개는 몸부림치면서 발로 문을 박찼다.
그때 여자는 자기 차의 운전석 옆자리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 문이 옆차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단말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처절하게 지하실을 울렸다. 차 안의 사내는
시뻘건 연옥 속에서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오다가 멈추는 것이 보였다. 차 안에서 남자 두 명이
놀라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베이지색 소형차에서 빠져나온 여인은 마치 도움을
청하듯 헐떡거리며 그들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너무 놀라고 숨이 차서 말을 꺼낼 했다.
남자들은 앞뒤 가릴 새도 없이 차속의 남자를 구하기 위해 사고차쪽으로 달려갔다.
그 틈을 이용해 선글라스의 여인은 호텔 로비로 통하는 비상구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그녀는 체크 무늬 바지에다 헐렁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점퍼는 푸른색이었다.
사고차쪽으로 달려간 남자들은 우선 그 옆에 바싹 세워져 있는 소형차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열기와 연기 때문에 그 차에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용감하게 거기에 다가섰다.
두 사람이 차를 끌어내려고 밀어보았지만 그것은 조금 움직이는 듯하다가 말았다.
차 속의 울부짖음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고, 격렬히 몸부림치던 모습도 많이
그을린 두 개의 팔이 삐져나오더니 허공을 더듬는 것이 보였다.
시뻘겋던 불길이 시커먼 연기와 뒤엉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야 해!"
한 남자가 다급하게 말하자 다른 남자가 차 문을 당겨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그는 상체를 디밀어 기어를 중립에 놓은 다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이 함께 차를 밀어보았다.
소형차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어느새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있었다.
그러나 맹렬히 뿜어대는 시커먼 연기와 불길 때문에 모두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삼가고 안전한 위치에 서서 구경들만 하고 있었다.
접근하지 못한 채 불길에 싸여 있는 차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와요! 이제 나올 수 있으니까 밀고 나와요!"
그때 펑하면서 불길이 솟았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쳤다.
지금까지의 불길보다 더 맹렬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연료탱크가 터졌어!"
소형차를 끌어냈던 두 사람도 황급히 몸을 피했다.
"저거 봐! 사람이 나오고 있어!"
그들은 놀란 눈으로 사고차를 바라보았다. 운전석 문이 열려 있었고 거기서 불길에 싸인
시커먼 것이 차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몸부림치지도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쓰러진 채 꿈틀거리던 그것이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구경꾼들 가운데 특히 여자들이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이제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일어선 괴물은 몸에 불이 붙은 채 구경꾼들쪽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여자들이 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명 소리에 괴물은 멈칫하는 것 같더니 더 이상 걸어오지 못하고 술취한
나무토막처럼 쿵하고 쓰러졌다.
지하실에는 이제 연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호텔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얼굴에 가스마스크를 쓴 채 소화기를 들고와서 괴물을 향해
소화액을 분사하자 비로소 불길이 잡혔다. 그때까지도 괴물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괴물의 몸에서는 이제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연기로 질식할 것 같았기 때문에 모두 밖으로 빠져나갔다.
주차장 출입구가 굴뚝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것을 보고 특히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사람이 타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의 차가 어떻게 됐는지
더러는 호텔측에 거칠게 항의하기도 하고 일부는 소방차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해대기도 했다.
비까지 내기고 있었기 때문에 호텔 주위는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고 있었고 호텔 경비원들과 경찰은 구경꾼들을 몰아내느라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순식간에 커지더니 이윽고
빨간색의 소방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경찰 퍼트롤카들도 도착하고 있었다.
비상등을 깜박이며 낡아빠진 승용차 한 교통경찰관이 막아섰다. 그가 붉은
신호봉을 흔들며 돌아가라고 하자 차 안에 있던 젊은이가 신분증을 내보였다. 그것을
보고 교통경찰관은 거수경례를 한 다음 그 차를 통과시켰다.
"굉장한데요."
호텔 주위에 몰려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남달호(南達浩)형사가 말했다. 비가
거세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않고 우산을 받쳐든 채 몰려 서
있었다. 무수히 퍼져 있는 우산들을 보고 마인(馬仁)은 그것이 꼭 물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호텔 정문 앞 빈 터에다 차를 박았다.
"요즘은 왜 호텔에서 이렇게 자주 말썽이 생기지?"
"글쎄 말입니다."
그들은 삼엄한 경기바 퍼져 있는 호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 주차장 출입구는
연기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출입구를 통해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서있다가 S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번쩍거리는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바닥과 벽을 치장한 로비가 그들을 맞았다.
로비의 사치스러움에 비해 형사들의 모습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
S호텔은 그들의 관내에 있는 특급 호텔이었다. 직속 상관인 구계장이 S호텔에
빨리 가보라고 전화를 걸어온 것은 30분 전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사람이 불에 타죽은 모양이야. 빨리 가봐. 20분 후에 거기서 만나.
계장의 지시를 받고 난 주지 않는 상관과 조직의 횡포에 그는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랄 수도 없는 것이다.
수사 인원에 비해 사건이 너무 폭주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튼 그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 주차장을 내려갔을 때 시체 주위에는 몇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안개가 걷히듯 연기가 걷히고 있었고 환풍장치를 모두 가동시켰는지 바람 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침을 해대고 있었고 소방대원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차에다 대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지하실 바닥은 온통 물에 젖어 있었다.
"물 그만 뿌려요! 불 다 꺼졌는데 쓸데없이 왜 물을 자꾸 뿌려!"
구계장이 소방대원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다가가
계장에게 목례를 보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좀 오지 않구......."
"차가 밀려서......."
"이걸 좀 보라구. 이게 사람인지짐승인지 좀 보라구. 완전히 불고기야."
계장이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불고기는 불고기인데 까맣게 타서 먹을 수가 없겠군요."
마형사의 말에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너무 지나친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병원에 빨리 데려갔으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요."
남형사가 볼멘 소리로 말하자 계장이 호텔 경비원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경비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왕 죽을 바에는 현장에서 죽는 게 낫지. 시체가 병원에 가 있는 것보다는
현장에 남아 있는 게 우리한테는 일하기가 좋으니까. 냄새가 지독하군."
계장은 손수건으로 코를 싸쥐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불에 익다못해 까맣게 타버린 살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머리에는
타버리고 없었다. 타고남은 찌꺼기 같은 것들이 알몸에 눌러붙어 있을 뿐이었다.
너무 까맣게 타버린 바람에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얼굴은 까맣게 탄데다 짓뭉개져 있었다.
까맣게 타서 오그라붙어 있는 성기를 보고서야 죽은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마형사는 알 수 있었다.
"저 친구들이 최초의 목격자들이니까 이야기를 잘 좀 들어봐."
마형사는 계장이 가리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서른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마형사는 최초의 목격자라는 그들에게 바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대신 불에 완전히 슬금슬금 다가갔다. 차 안에서는 아직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무 완전히 타버렸기 때문에 참혹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남형사가 최초의 목격자들을 상대로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마형사는 차 주위를 조심스럽게 관찰하면서 돌았다.
벽쪽에 붙어 있는 쪽은 너무 바싹 붙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네개의 문 가운데 운전석쪽의
문만이 열려 있었는데 그 문은 무엇에 부딪쳤는지 많이 찌그러져 있었다.
앞창도 깨져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차 안에 있던 사람이 탈출하기 위해
깨뜨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쪽으로 탈출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앞쪽으로 가서 차 밑을 살피던 그의 눈에 그것은 보통 벽돌보다 크기와 두께가 두
배 정도 더 되는 것이었는데 양쪽 앞바퀴 앞에 괴어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들어 보았다. 그것은 장식용으로 쓰이는 벽돌 같았다.
"뭐 발견했어?" 계장이 다가와 물었다.
"이런 게 앞바퀴 밑에 괴어 있었습니다."
"움직이지 말라고 그랬겠지."
계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마형사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가 비탈길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이렇게 반듯한데다 주차시키면서 이런 걸
괴어놨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호텔 주차장에서 말입니다."
마형사는 경비원을 불렀다.
경비원은 몹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마형사는 그에게 벽돌을 보였다.
"이거...... 이 주차장에 있는 겁니까?"
"못 보던 건데요."
"여기다 차를 주차시키면서 바퀴 앞에다 이런 걸 괴어놓은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경비원은 고개를 흔들면서 실소했다.
"그런 사람은 본 적 없습니다. 여기는 편편한데 그런 걸 괴어놓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마형사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서 차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뒷부분이 왼쪽으로
꽤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앞바퀴 타이어는 불에 타지 않고 온전했다.
불에 타지 않은 부분은 타이어뿐이었다.
그는 차 밑을 살펴보니 뒷바퀴 하나가 바람이 빠져 푹 찌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차 꽁무니와 벽 사이에 사람 하나가 겨우 끼어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뚱보 형사는 낑낑거리며 엎드려서 기어들어가 보았다.
놀랍게도 바람이 빠진 바퀴에는 속이 비어 있는 원통형의 파이프 같은 것이 하나 박혀 있었다.
바퀴 속의 공기는 직경 5밀리 정도 굵기의 그 파이프를 통해서 모두 빠진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중얼거리면서 기어나온 마형사는 계장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한번 보십시오. 고의적으로 차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 같습니다."
계장은 연기에 그을린 차의 검정이 옷에 살펴보았다.
"저건 망치로 두드려 박은 것 같은데......."
비로소 계장도 생각을 고쳐먹은 것 같았다. 마형사는 손을 털면서 최초의 목격자들한테 다가갔다.
처음 사고 현장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총각들로 아가씨들과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S호텔에 왔다가 뜻하지 않게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남형사가 대신 전해 주려는 것을 마형사가 막았다.
그는 한 사람 건너서 듣는 것보다는 목격자들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그것이 보다 정확하기 때문이었다. 목격자들로서는 아니었다. 상대방이 귀찮아하든 말든 그는
정확한 증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가 그러니까 6시 30분경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는데 보니까 시뻘건 불길이 펑하면서......."
증권회사에 다니는 두 젊은이는 다행히 귀찮아하는 기색없이 아주 성실하게 증언해
주었다. 그들은 그들이 끌어낸 소형 승용차쪽으로 다가가 열심히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불에 탄 차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차가 없었다면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이 차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중립에 놓고 차를 끌어냈죠."
"그 다음에 저 사람을 끌어냈나요?"
시체를 향해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고 있었다. 어느새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증권회사 사원들은 죄책감이라도 느끼는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왜 끌어낼 수가 없었나요?"
"완전히 불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에 더욱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연료탱크가 폭발해서 불이 붙은 게 아니군요?"
"네, 그렇습니다. 한참 타고 있는데 도중에 펑하고 폭발했으니까요."
엄격히 말해서 그들은 최초의 목격자가 아니었다. 그들보다 먼저 사건현장을 의해 드러났다.
"그 여자는 어느 쪽에서 뛰어왔나요?"
"사고차쪽에서 달려왔습니다. 처음에는 사고를 당한 사람하고 동행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생각하니까 혹시 이 차의 주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 정복차림의 경찰관 한 명이 다가와 계장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밖에서 차주들이 야단들입니다. 차를 왜 못 끌어내게 하느냐고 항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지하 주차장에 있던 차들은 수사진의 요청에 의해 모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계장이 마형사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그때까지 통로에 세워져 있던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를 마형사는 사고차 옆에다
3m쯤 간격을 두고 밀어다 놓았다. 처음 주차해 있었을 때처럼 차머리를 벽쪽으로 향하게 하고.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나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놀란 얼굴로 숨이 턱에 차서 사고차를 가리키기만 했습니다."
"그 뒤에 그 여자를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보이지 않기에 신고하러 간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인상착의를 묻는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서로 엇갈렸다.
한쪽이 20대 아가씨라고 말한 반면 다른 한쪽은 한쪽은 파란 옷 다른 쪽은 노란 옷이라고 증언했다.
한가지 일치한 것은 그녀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하 주차장이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증권회사 사원들로부터 대강 들을 것을 듣고난 마형사는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차의 왼쪽 뒷문짝은 많이 찌그러져 있었다. 사고차의
운전석 문과 부딪쳐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소형차의 옆구리에 막혀 문이 열리지 않자 사고차의 운전자는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운전석
문을 발로 박찬 것 같았다.
살려고 불길 속에서 미친 듯 울부짖으며 문짝을 발로 마구 차는 소리가 운전석 바닥에 무엇인가
떨어져 있었다. 집어 들어보니 꽤 큼직한 쇠망치였다.
차 안에는 그 망치 외에는 이렇다 하게 주의를 기울일만한 물건이 없었다. 석간신문 한
부와 껌을 쌌던 포장지가 구겨진 채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 차는 꽤 낡아 있었다. 오랫 동안 닦지를 않았는지 안팎이 몹시 더럽혀져
있었다. 앞에 있는 재떨이를 당겨보았다.
안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들어 있었다. 맨 위에 있는 꽁초를 집어내보았다. 필터 부분
주위에는 빨간 립스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고 필터 끝에는 그때까지도 습기가
남아 있었다. 선명한 립스틱 자국과 함께 습기가 채 마르지 않고 남아 있는 꽁초는
여덟 개나 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여자들이 지근지근 씹어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꽁초를 헤집고 그 밑에서 구겨진 종이조각을 집어내 펴보았다. 그것은 껌
포장지로 그 안에는 씹다만 껌이 들어 있었고, 포장지에는 "아카시아"라는 상표가
인쇄되어 있었다. 껌은 씹지 않은 채 말랑말랑했다.
"뭐 발견한 거 있어?" 계장이 다가와 물었다.
마인은 담배꽁초와 껌을 보여주었다.
"아직 습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 여자 차가 틀림없어. 만일 차를 가지러 나타나지 않으면 수배하는 게 좋겠어."
"지독한 골초인 모양입니다. 이것도
마형사는 망치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게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자가 이런 건 왜 가지고 있었을까요?"
마형사는 사고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쪽에 달려 있는 뒷문 유리창이 박살나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가 문 주위의 시멘트 바닥을 살펴보았다. 그 주위에는 유리
파편이 몇 개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뒷문을 열어보았다. 차 바닥과 뒷좌석이
있던 자리에 유리 파편이 수북히 널려 있었다.
"이 유리창은 밖에서 깬 겁니다. 파편이 모두 안에 깔려 있습니다."
계장이 차 안을 살피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군. 그럼 이 망치로 깼다는 건가?"
"만일 여자 혼자서 깼다면 주먹으로는 깰 수가 없었을 겁니다. 망치 같은 것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 남의 차 창문을 깼지?"
"글쎄요. 거기에 사건의 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사고입니까, 타살입니까? 방화 살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자들은 어느새 그들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계장은 마형사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증거들이 그걸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로 30대의 젊은 여인을 수배하려고 합니다."
"그 증거들이란 뭡니까?"
계장이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마형사는 마지못해 기자들에게 그 증거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들이 사람을 태워죽였을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고로 차 안에 불이 붙었다면 밖으로 급히 뚜어나와 목숨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차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먼저 사고차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피살자가 없는 사이에
앞바퀴에는 보통 벽돌의 두 배쯤 되는 장식용 벽돌을 괴어놓았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댄다 해도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차가 불에 타고 있을 당시 증권회사에 다니는 두 명의 목격자들 증언에 따르면 다른 차 한 대가
사고차 옆에 거의 밀착되다시피 세워져 있었다.
피살자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옆에 밀착되어 있는 차 때문에 문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범인은 사고차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놓은 다음 피살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초조하게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얼마 후 피살자가 나타났다.
그는 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된 것도 모른 채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승용차를 사고차 옆에다 바싹 갖다댄다. 그리고 망치로 사고차의 뒷창문을 사정없이 깬다.
"방화 살인을 하려면 불을 질러야 하는데 어떻게 불을 질렀을까요?" 기자 한 사람이 물었다.
"글쎄, 그 점을 알 수가 없는데...... 이 망치로 창문을 깬 게 확실하다면 연료를
넣기 위해 그러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확실한 거야 아직 알 수 없지요."
사람을 차 안에 가둬놓고 깨진 창문을 통해 연료를 주입시킨 다음 태워죽인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살해 방법이다.
지금까지 살인 사건을 많이 다뤄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든지 가능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가솔린통을 던져놓고 나서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타버릴걸요. 살인 방법으로는
아주 기막힌 것 같은데요."
남형사가 한 마디 했다.
"사고차의 연료탱크가 나중에 터졌다는 것은 다른 원인에 의해 먼저 차에 불이
붙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차의 주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군요?"
기자들이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를 에워쌌다. 그 차를 향해 다시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고 기자들은 그 차의 번호를 적기에 바빴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차의 주인이 자진해서 차를 가지러 것이라고 마형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차들은 거의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그 차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차의 주인이 30대의 젊은 여자란 말입니까?"
기자들이 일제히 계장과 마형사를 쳐다보았다.
마형사가 가만있자 계장은 그 차의 운전대 옆에 부착되어 있는 재떨이를 통째로 빼내
기자들에게 보였다.
"꽁초에 립스틱이 묻어 있는 거 봐요. 색깔이 선명한 거나 습기가 남아 있는 걸로
봐서 피운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아요.
여자는 이 차 안에 앉아 피살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줄담배를 피워댔을 겁니다.
남자를 잔인하게 태워죽인 걸로 생각되는군요.
젊은 기자 양반들 여자 사귀는 건 좋은데 조심들해요.
여자가 한번 앙심을 품으면 불고기되기 십상이니까요."
"그런 여자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낮은 웃음 소리가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즐거운 웃음 소리는 아니었다.
기자들이 물러가자 그동안 열기에 싸여 있던 사건 현장의 분위기도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마형사는 그야말로 철저하달 정도로 까맣게 타버린 시체와 고급승용차를 다시
살펴보면서 사람을 철저하게 태워죽이는 것이야말로 증거를 없애는 데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거듭 생각하고 있었다. 시체가 너무 타버렸기 때문에 감식반원들은 지문
채취도 불가능하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타버린 것 같았다. 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동전과 열쇠 정도였다.
마형사는 사고차의 운전대에 꽂혀 있는 열쇠를 뽑아내 보았다. 열쇠고리에는 여러
개의 열쇠가 걸려 있었다.
"두 차의 차적을 즉시 조회해 봐. 난 돌아가 봐야겠어."
계장이 자기 차에 오르며 말했다.
계장이 떠나자 마형사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와 있는 경찰 퍼트롤카의 순찰대원에게
두 차의 차적을 조회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순찰대원은 사고차와 베이지색 소형 승용차의 차번호를 수첩에다 적은 다음
순찰차로 돌아가 무선전화로 본부를 불렀다.
모든 것들이 다 타버렸지만 그래도 번호판만은 뚜렷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차적을 조회하는 것으로 이미 수사는 시작되고 있는 셈이었다.
퍼트롤카의 순찰대원은 5분도 못 돼 마형사 앞에 조회 결과를 적은 메모지를
들고 왔다. 마형사는 메모지를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들여다보았다.
1. 서울1라 509X=차주 황개. 주민등록번호 541021-106552X.
서울 강남구 S동 126 P아파트 212동 1205호. 88년 6월 16일 등록.
2. 서울1다 854X=차주 김동우. 주민등록번호 470825-102486X.
서울 영등포구 Y동 179의 8번지. 85년 5월 8일 등록.
"김동우 씨 차는 도난 차량입니다. 이틀 전에 신고가 들어왔답니다."
순찰대원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쪽으로 쏠렸다.
"제기랄......." 남형사가 맥빠진다는 듯 투덜거렸다.
"사고차는 한 달밖에 안 된 새 차인 모양입니다."
순찰대원이 말했다.
"양쪽 주소지에 빨리 가봐. 난 여기서 이 차를 지킬 테니까."
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