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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방 도둑
김 익 하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고갯마루에 이르자 숨이 차고 오금도 당겼다. 마치 누가 쫓듯 바삐 떼어놓았던 발걸음이다. 서울에서 밀어낸 몸을 고향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걸까. 안달수(安達水)의 마음은 몸보다 앞서 귀향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잠깐 숨을 고르려고, 그동안 몸피가 불어나고 키가 훌쩍 높아진 신갈나무 밑 그늘로 찾아들었다. 주위로 도토리와 각두(殼斗)가 어지러이 떨어져 있어 가을이 그곳에 와 머묾을 일러주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갯마루를 넘는 사람들에게 쉼터 구실을 하는 그늘이다.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일상 그곳에서 오름의 숨참은 물론 떠난 곳에 매인 미련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내디디기 전에 품은 의지에 대한 각오를 심호흡으로 한 번 더 다짐하고 몸을 일으키던 곳이다. 그가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향할 때도 이곳에서 의식을 치러내듯 그런 전례를 밟았다.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저편으로 지나갔다.
안달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로 향하여 솟구쳐 오른 신갈나무 끝을 따라가자, 뭉게구름으로 청명하게 정돈된 가을 하늘이 가슴을 열어 보였다. 서울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하늘빛이다. 비로소 그곳에서 떠나 먼 길을 왔다는 걸 실감케 했다.
안달수는 고개를 돌려 마을 동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개천을 따라 열린 마을 동구를 찾아 들어가면, 그의 예전 생활터전이었던 집과 토지를 마주할 것이다. 그곳은 그가 고향을 떠날 때,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을 작심한 채 내팽개치다시피 버렸던 삶의 터전이다. 그는 마을 길을 따라 눈길로 더 깊숙한 곳까지 더듬어나갔다. 굽었던 길이 많이 펴져 있었고, 가옥들이 개량주택으로 바뀐 채 알록달록 도색되어 있어 오랜만의 귀향길을 낯설게 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시멘트포장도로가 햇볕에 하얗게 빛나는데, 그 길을 따라 펼쳐진 논밭들은 알곡들이 익어 누런 캐시밀론 담요를 펼쳐놓은 듯 가득 차 보였다. 거지도 눈치 보지 않고 뜨거운 밥을 얻어먹는다는 가을의 뜰이다. 태풍이 한 번도 지나가지 않은 올해 가을 들판은 조금 이르긴 해도 대풍이 들 조짐이 분명해 보였다. 허리를 구부려 뿌린 자가 아니더라도 누런 들녘에 나서면 저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데, 지금 눈앞의 풍경이 서울에서 떠돌다 귀향하는 그의 마음마저 넉넉하니 안아 들이고 있었다.
안달수는 부동산문제가 얽힌 매듭처럼 잘 풀려 지지 않았을 때, 남산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다. 도대체 파고들면 들수록 자신의 의지와 달리 어긋난 채 겉돌고 있는 서울이란 도시를 한 눈으로 속 시원하도록 굽어보고 싶다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갑자기 머리에 떠올라서다. 그렇게 충동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그곳으로 다녀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부동산중개업자 임광일(林光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어왔다.
“ 울 바닥 사람도 못 가보는 남산타워에 갔다 왔다면서?! 오래 살다 보니 참으로 별일이네. 그래 갔다가 소원이나 풀고 왔어?”
“하도 답답해 서울을 한 눈으로 보려고 가긴 갔었는데…….”
“갔었는데? 너무 넓어서 한 눈으로 못 봤다. 그건가? 또 한 눈으로 봐서 뭐하게?”
“우리나라에서 돈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산다는 곳이고, 제각기 잘 살아보겠다고 찾아든 곳이니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롭게 보일까 하고 갔었는데…….”
“그렇게 할 일이 없었어? 물론 답답해 가겠지만 그랬더니?”
“오히려 건물로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모습을 보고 그만 숨이 탁 막히고, 눈앞이 어지러워 미처 내려오기 바빴다네. 도대체 건물들만 에워싸 살벌할 뿐이지 풍요라고는 한구석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행복한 그림자도 없었네.”
“서울이 그런 곳이었다는 걸 여태 몰랐단 말인가? 사람하고는, 자네 혹 바보 멍청이가 아닌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모든 분야에 뛰고 날고 한다는 전문가들이 기회만 있다 하면, 쌍심지 켜 핏대를 올리며 이것이 옳다 그건 그르다 하는 데도 왜 그 모양 그 꼴일까? 쩝-.”
안달수는 고향인 전곡리(田谷里)에서 떠난 뒤 새치랄 수 없는 머리카락이 반백(斑白)을 넘었고, 잇닿아 차오르는 나이 또한 반백(半百)을 뒤미처 따라 가파르게 지나갔다. 서울생활 10년에 더 보태진 변모다. 그러나 겉모습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모였으나, 마음은 가뭄 탄 저수지 바닥처럼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다. 폭우가 내리더라도 물기가 고이지 않고 슬쩍 새버릴 만큼 거칠게 조각나있었다. 그리 갈라진 마음을 안고 지금 고향으로 찾아 들어가는 길이다.
비록 전곡리의 땅은 그에게 자나 깨나 육체적인 고단함을 안기긴 하였으나, 부지런한 열성으로 마주 서면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별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그곳의 너르고 비옥한 농토를 버리고 불시에 서울로 떠난 건, 두말할 나위 없이 이웃마을 출신 윤대삼(尹大三)- 더군다나 그 언제쯤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려니 여겨 숫제 덜떨어진 아이로 취급했던 윤대삼이 때문이다. 집안의 살림형세가 워낙 어려워 남의 집 허드렛일을 거들어주고 끼니를 연명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윤대삼은 월사금 때문에 숱한 수업을 접으면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여 문맹을 가까스로 면했다. 아비의 살림형세가 그러하니 윤대삼은, 그 또래들보다 늘 처진 위치에서 힘든 소년기를 전곡리 이웃 산골 마을인 한내실에서 보냈다. 그는 안달수의 또래들에게는 콩나물시루 바닥에 쳐진 콩 짜개 같은 존재였다.
그런 윤대삼이 서울로 떠났다가 10년 만에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 땅을 밟았다. 일가친척도 없는 처지, 해마다 인터넷으로 조상 무덤의 벌초를 하다가, 그해는 몇 사람을 직접 데리고 왔다 갔다. 전곡리에 계절마다 어쩌다 미친바람이 한차례 불어가듯 한나절 머물다간 윤대삼인데, 남겨놓은 뒷바람이 워낙 거세게 마을 인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가 떠나간 뒤, 동네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전에 기억으로 챙겨두려는 듯 입을 모았다.
“한내실에 살던 윤재남이 둘째, 그 대삼이. 갸가 옛날 찌질이었던 갸가 아니더라니까.”
“하모, 지금 가진 재산이면, 이 동네 땅을 몽땅 사도 남는다고 그러대.”
“에이 푸달스럽긴……, 허풍도 적당히 놓으소. 허긴 꽤나 벌긴 벌은 것만 확실해.”
“개천에서 용 난다더니, 한내실에서 만석꾼이 태어난 격이네그려.”
“얼싸, 만석꾼은 무슨 놈의 만석, 뼈 빠지게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런 분위기를 뒷받침하듯 윤대삼은 마을회관으로 모여든 마을 사람에게 술을 질펀하게 사면서 궁금증에 불길을 확확 들붙였다. 재산이 늘어나면 말도 덩달아 느는가. 예전 모임 자리에서 어눌한 어투에 주눅까지 들어 마땅히 말할 차례임에도 얼굴을 붉힌 채 뒤꽁무니를 빼곤 했던 윤대삼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제 재물을 일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에 넘쳐나는 당당한 목소리 또한 막힘도 없었다.
“자, 자, 자. 한 잔들 쭉 드십시오. 안주가 이곳에선 이것뿐이어서 죄송합니다. 시간이 있다면 시내 좋은 음식점으로 모셔 푸짐하게 대접할 것인데, 다음번에는 아예 준비해 오든가, 제가 그리로 모실 테니 이번에는 용서해 주십시오.”
시골이라 가까운 곳인 전곡리와 한내실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윤대삼의 목소리는 고을 원님의 언동처럼 뜨악 높아져 있었다. 마치 예전의 처지를 내세워 한을 풀 듯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그리 돈을 많이 벌었는가? 나쁜 짓을 안 저지르고 그랬다니 내가 당최 믿기지 않아서 이리 묻네. 정말 재주 하나는 아주 용하네그려.”
마을 웃어른인 박행수(朴行守) 노인이 먼저 나서며 궁금증을 풀어내고자 했다. 마을에 일이 벌어지면 들뜨는 마을의 인심을 가라앉혀가며 늘 차분한 모양새로 원만하게 이끌어내던 사람이다. 그는 지금 윤대삼이 마을 젊은이들에게 바람을 불어넣어 이농(離農)을 부추긴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내심 속을 끓이는 참이다.
“저 같은 시골 놈이 뭘 알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워낙 땅에 포한이 졌기에 그걸 가지려 했던 게 부동산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부동산 쪽으로 눈을 돌린다고 모두 자네와 같이 돈을 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에겐 정말 할 만했습니다. 아, 5년 일찍 이곳에서 떠났어도 더 큰 걸 움켜쥘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곳에서 남의 토지나 얻어 살아가려고 했던 게 참으로 어리석다고 여겼습니다. 여러 어르신도 잘 아시다시피 이곳에서 살아보면, 산 높고 골 깊으니 바깥 세상일은 아예 까막눈이 아닙니까?”
“허 어-. 그럴 수도 있겠네. 우리에겐 그곳이 딴 세상이 아닌가? 허지만 이제 이곳도 텔레비전으로 알만한 것은 죄다 알면서 살아가네. 아예 까막눈이가 아니니 오해를 말게.”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서울에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아직도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지금도 아직 늦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약아빠지는 데도 몇 년 수월찮이 걸릴 게 아닌가?”
“보십시오. 이곳에는 땅에서 곡식을 심어 돈을 얻어 겨우 목숨만 부지하지만, 서울에서는 돈이 돈을 버니 돈만 있으면 금방 떼돈을 벌 수 있습니다. 애당초 게임이 안 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서울 가자고 하는 게 아닙니까? 자, 자, 자. 어서 잔들을 비우시면서 많이들 드세요.”
“허 그것참, 어찌 술맛이 쓰네. 공술이라서 그런가…….”
그러나 윤대삼의 말에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안달수는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앞만 보고 걸어가다가 돌로 뒤통수를 얀정 없이 얻어맞은 듯 두 눈이 휘딱 뒤집혔다. 사실이 그렇다면 잠결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라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지 않는가. 제 딴에는 이곳에서 제때에 나는 물산에 풍족함을 누리면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간다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윤대삼의 얘기를 곱씹어 새길수록 자기는 농촌생활에 손발이 묶인 채 살아남기에만 버둥거린 꼬락서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입장에서 가만히 따져보면 윤대삼이 금전 자동출납기 앞에서 손가락 끝만 움직여 통장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그저 무지막지하게 돈을 긁어모을 때, 자기는 흙이 묻은 손톱을 모가 닳아빠진 칫솔로 파내면서, 그것이 행복 모두인 줄 알고 밤이면 아내와 희희낙락 몸을 섞으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결과 윤대삼은 재력가로 우뚝 올라섰지만, 자신의 처지는 그의 안중에서 벗어나 맨바닥에 패대기쳐진 채 꼬나 박힌 형세로 내려앉은 것이다.
안달수로선 그게 분했다. 그는 그건 누가 따져보아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불이익을 당했다는 억울함을 머릿속에서 쉬이 지워내지 못했다. 이제는 윤대삼이 가지고 있는 부유함은 쉬이 넘볼 수 없는, 저쪽 멀찍이 있는 동경의 것이 되고 말았다. 윤대삼보다 게을러서 차하(差下)가 진 게 아니다. 나름대로 정신없이 밭고랑을 갈아엎고, 또 갈아엎어 가면서 샛별을 보고 대문을 나섰다가, 저녁별을 보며 흙 묻은 손발을 씻었다. 그뿐만 아니다. 일반작물보다 수익성이 낫다는 특용작물의 재배법을 배우려고, 인터넷을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뒤졌고, 판로를 찾아 카페를 개설한 뒤, 무 한 뿌리, 배추 한 포기라도 일일이 포장하여 택배로 부치느라 밤 시간을 소비했다. 주문자야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손가락 튀김으로 목적을 이루지만, 택배는 오백 리, 칠백 리 길을 가야 하기에 표장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애성을 되뇌어 비교해보면 참으로 분하고 서러워 정신마저 핑 돌 참이다. 지켜내야 할 제도가 잘못이라면 군청 앞마당에다 멍석자리를 펴고 몇 며칠을 누운 채, 구의원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싹싹 빌 때까지 목청껏 악을 써대고 싶었다.
안달수의 입장에서는 일손이 잡힐 리가 없었다. 그는 속에서 꼬양꼬양 소리가 나도록 속앓이를 했다. 맨손바닥으로 고향에서 떠나간 윤대삼이 오만 원 권이 꽉 찬 가방을 들고 저만치 달아나는 걸음을 그냥 뒤짐 진 채 방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전곡리에서 떠나야 그것을 추월하지는 못하더라도 근처에나마 근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아무런 밑천 없이도 그만큼 재산을 일궈놓았다면, 그래도 밑천 마련이 손쉬운 자기로선 그것을 짧은 시간 안에, 더 능가할 여지가 충분히 있어야 사리에 합당하다고 여겼다. 그도 어떤 일에든 항상 윤대삼보다는 낫다고 자부해왔던 처지기에 용기와 자신이 붙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들자, 안달수는 더는 전곡리에 머물러 살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아직도 기회는 충분히 있다고 윤대삼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몸에 나이가 하나라도 더 얹혀지기 전에 전곡리를 떠나는 게, 상책 중의 상책이라 여겼다. 그는 집과 집이 달린 전답만 남기고, 가산을 돈으로 환급하여 미련 없이 치부(致富)의 꿈을 머릿속에 가득 넣고 서울로 서둘러 떠나갔다.
마음을 넉넉히 식힌 안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마을로 향하여 내리막길을 걸었다. 동구에 들어서자 누렇게 영글어 고개를 꺾은 벼포기가 논둑을 타고 넘었는데, 그 사이로 풀풀 날아오르는 벼메뚜기도 살 오른 뱃바닥이 노랗게 익었다. 이곳 땅은 가을의 풍요를 외면하지 않았다. 곡식이 영근 뜰은 눈이 시릴 만큼 푸만하다. 저쯤에서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다가오는데, 햇볕을 등에 졌어도 금시 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서리 맞은 늦가을 고욤처럼 얼굴 갈피마다 주름을 안은 박행수 노인이다.
“어르신! 어디로 그리 가십니까? 저 달수입니다.”
옆으로 스쳐 지나갈 듯하던 경운기가 바로 옆에서 멈춰 서며 시동을 껐다.
“어?! 자넨 달수 아닌가? 어쩐지 걸어 들어오는 걸음새가 눈에 익다했더니. 내, 자네 소식 조금은 들었네. 그래 완전히 돌아올 건가?”
“아,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건강은 여전하시지요?”
“보게. 내 팔다리가 아직도 이리 멀쩡하게 제자리 붙어있지 않는가? 세끼 밥 잘 먹고, 하루도 빠짐없이 뒷간에 가고, 또 욕심 버리고 여태껏 살아왔는데, 뭣에 급해 빨리 늙겠나. 그런데 암튼 생각 잘했네.”
“예?”
“땅도 산 땅이 있고, 죽은 땅도 있는 법이네. 돈을 먹고 개발에 묶여있는 땅은 죽은 땅이고, 해마다 가을이면 한 줌의 곡식이라도 맺어주는 땅이 산 땅이지. 그게 진정한 땅이네. 안 그런가? 이 사람.”
“예, 어르신 일리가 있으신 말씀입니다.”
“자네가 두고 간 그 땅 있잖은가? 전곡리뿐만 아니라 요가근방에서는 그만한 땅은 없을 거야. 땅이 기름질뿐더러 가뭄을 모르는 땅이 아닌가? 아무리 가물어도 가뭄을 타지 않고, 또 씨곡을 열 개 넣으면 스물을 얻는 게 아니라 백 아니 이 백도 얻을 수 있는 땅이지. 그러고 주인을 쉬이 바꾸지 않는 땅이니 복토(福土)긴 복토가 분명해. 그러니 명심하게. 이제 꽉 붙들고 있겠다고……. 땅에 대해 서러움을 자네도 겪었지 않았는가? 그리고 땅이란 게 흙뿐이 아니란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풀포기나 나무뿐 아니라 사람의 정도 담겨 있다는 것을 말일세.”
“제가 마을에서 처음 떠날 때, 왜 그런 말씀을 제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말리지 않았다고? 지난 일이니 이제야 하는 소리지만, 그땐 발정냄새를 맡고 앞뒤 가리지 않고 내닫는 수캐의 기세 앞에 누가 뭔 수로 그걸 막아선단 말인가. 안 그런가? 이 사람.”
“아예, 하, 하, 하. 어르신도 참…….”
“암튼 잘 왔네. 얼른 가보시게나.”
“아예 또 뵙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경운기를 손수 모십니까?”
“이거 말인가? 이거 손만 저으면 그냥 움직이는 기계가 아닌가?”
“제가 떠날 때만 해도 네팔에서 왔다는 리따라나 뭐라는 친구가 경운기를 운전했잖습니까?”
“허, 그일? 그야 이국에서 살아가려는 마당이니 말로야 못한다는 일이 없었지. 그도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한 일주일 견디었나, 그만 잡혀갔다네. 지금 본국으로 갔는지, 아직 이 나라에 떠돌고 있는지…….”
안달수가 고향에서 떠나기 전의 일이다. 부지런한 박행수가 아침 어둑할 무렵 논가로 나갔는데, 마을로 찾아드는 한 사내를 만났다. 어둑해서 가까이 와서야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외국인임을 알았다. 어둑해도 늘 혼자 다니던 마을길이지만 낯선 외국인을 만났다는 게 섬뜩했다. 그가 뭐라 뱉어내지 못한 채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아저씨! 나 죽어. 밥 없어?”
토막토막 이어지는 절박한 목소리가 지친 육신을 떠받치고 있었다. 부축하면 오히려 육신이 땅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려앉을 것 같았다. 밤이슬에 옷이 후줄근히 젖은 걸 보면 밤새 먼 길을 무작정 걸어온 듯했다. 그는 어렴풋이 상황을 짐작했다. 가근방이 아니라 훨씬 더 먼 곳에 위치한 집단양돈 사육장이 있는데, 그곳에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필시 저녁녘에 들이닥친 불법체류 검열의 단속을 피해 도망친 듯했다. 그런 일은 전에도 두어 번 있었다. 박행수로부터 반응이 없자 사내는 더욱 다급해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 네팔사람. 잡히면 가야 해.”
사내의 목울대를 타고 오르는 숨결의 흐름이 제일 먼저 박행수의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던 것이, 이 사내의 몸에서는 너무나 벅차고 힘겨워 보였다. 박행수는 손짓을 먼저 하고 난 뒤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그리고 의사소통을 위해 집 방향 쪽으로 가리키며 분주하게 손짓만 앞뒤로 저어 보였다. 집안에 데리고 들어가 마른 옷가지로 갈아입힌 다음, 먹을 것부터 넉넉하게 내놓았다. 사내는 앞뒤 가리지 않고 굶주렸던 허기를 채웠다. 그러더니 그릇이 비기도 전에 사내는 쓰러져 눈을 감았다. 공포와 허기를 안은 채, 살길을 찾아 나선 사내는 포식에 뒤따른 식곤증으로 곯아떨어진 것이다. 감긴 아래위 눈꺼풀 사이에 흐르다 만 눈물이 끼어있었고, 바지 밖으로 드러난 종아리의 가냘픔과 모짊이 손때 오른 박달나무 다듬잇방망이를 연상시켰다.
3일이 지나도 사내는 떠날 생각을 접고 있었다. 박행수가 논이나 밭으로 나서면, 검고 깊은 눈을 반뜩이며 자기도 일한다면서 뒤따라 나서곤 했다. 손사래를 쳐서 말려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농기구를 둘러메며 앞장치고 나서기도 했고, 경운기를 운전한다면서 운전대를 잡고 말뚝처럼 버티기까지 했다.
“나 이거 할 수 있어.”
못 하는 일이 없다고 우겨대는 것도 딱한 일이었다. 그때면 박행수는 손짓 발짓해가며 눈빛으로 의사를 건네곤 했다. 속내의 안타까움을 간절히 전하고 싶었다.
“우리 집에서는 돈이 없어서, 너에게 월급을 줄 수 없어.”
그러나 사내는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짓 으름장으로 채마밭에서 쫓아낸 멧비둘기처럼 떠날 생각 없이 붙박여있었다. 아니 차라리 멧비둘기라면 돌멩이질을 해서라도 채마밭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르랴 일주일째 되는 날, 단속반이 정보를 입수하고 박행수 집으로 새벽같이 들이닥쳤다. 골방에서 잠을 자던 사내가 옷가지를 허둥지둥 몸에다 걸치며 단속반에 잡혀 나왔다. 단속반의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박행수 앞으로 썩 나서며 따졌다.
“어르신! 범법자를 숨겨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법을 지키셔야 합니다.”
“지금 나한테 법이라 했소? 지체 높은 사람도 지키지 않는 이 나라 법을 농사나 짓는 무지렁이가 어찌 그런 것을 지킬 힘이 있겠소? 다만 분명한 것은 그도 목숨이 구차하게 붙은 인간이 아니오?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조금 도와준 것뿐인데, 그게 그리 크게 죄가 되는 기오? 그게 죄라면 이 나라에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소?”
“고의적이 아니란 건 알겠습니다. 그리고 연세도 있으시고, 또 처음이니 문제로 삼지는 않겠습니다만, 두 번 다시 이러시면 그땐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마을에서 떠난 뒤, 마을 사람들이 박행수의 거침없는 대응을 탓했다.
“이 사람아 어쩌자고 그런 사람을 숨겼는가? 불법 체류자를 숨겨놓으면 안 된다고 이장이 전달사항으로 이미 방송까지 했잖은가?”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네. 처음 논가에서 딱 마주쳤는데, 걸렸던 덫에서 겨우 벗어나 쫓기는 고라니 새끼 몰골이었네. 얼굴형상과 말만 나와 다를 뿐 얼굴색은 농사를 짓는 나나 저나 같아서 처음에는 옆집 성봉인 줄 알았네. 그런데 목 밑에서 팔딱이는 숨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것도 사람인가 싶어 내 마음이 그리 아플 수밖에 없었다네.”
“법을 어겼지 않았는가?”
“그 친구가 그런 법을 제 나라에서라면 어겼겠는가? 그리고 제 나라가 잘 살면 이리로 오겠는가? 목숨을 이어가며 살자는데, 살자고 찾아온 곳에서 그 행위가 죄가 되다니……. 오죽했으면 낯선 산천으로 향하여 무작정 뛰쳐나왔겠는가. 그 절박함을 어찌 말로 할 텐가? 어디 목숨을 부지하느라 제 살던 고향 땅을 그리워할 여유나 있었겠는가?”
서울에 도착한 안달수는 부동산중개업소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하여 개발을 눈앞에 두었다는 땅에다 야심만만하게 돈을 묻었다. 서울생활권역에서 개발의 마지막 땅이라고 신문들도 부추겨 부풀려놓은 땅이었다. 자고새면 불어나는 소문에 땅에 묻은 돈도 배수(倍數)로 뛰어오른다고 부동산을 소개한 임광일이 칸막이 고급술집에서 양주에 질척하게 젖은 목소리로 귀띔했다. 안달수도 이제 금전 자동출납기 앞에서 통장을 집어넣었다 뺐다 하는 일만 남은 듯했다. 그러나 부동산소개업자 사이에 설왕설래하던 땅에 대한 소문이 찬물을 끼얹듯 잠잠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달수는 내막을 알아차렸다. 그 땅에다 화장장을 건설하기로 계획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혐오시설이라 지적하며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시(市)에서도 만만히 물러서지 않았으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들고, 외세까지 세(勢) 불림으로 한탕 하자고 달려드니, 돈을 삼킨 땅이 그것을 더욱 크게 불려서 뱉어내지 못했다. 이를테면 돈을 삼키고 부풀려 내뱉지 못하니 하루아침에 숫제 죽은 땅으로 바뀐 것이다.
“야, 임 사장! 이거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다!”
“좀 더 기다려 봐.”
“이거 언제까지 기대려야 해? 하루 이자가 오만 원짜리로 눈앞에서 획획 사라지는 판인데?”
“하 참, 조급하긴. 그래서 무슨 부동산을 한다고 그려? 투자한 돈을 땅에 묻는다는 의미는 뭔지 알기나 알고 있는 거야? 금방 잊어버린다는 감으로 기다려야 하는 게 정석이야.”
“이래서 언제, 아유 이제 터질 속도 없네!”
안달수는 조급증 탓에 부동산 중개업자 임광일을 만날 때마다 숨 멎는 시늉을 하며 들볶았다. 사나흘이 멀다지 않고 매달린 끝에 투자한 값보다 훨씬 내려간 시세로 땅을 팔아치우고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러다 신개발지역이란 정보를 믿고 다른 중개업자의 소개로 땅을 사들였다가, 땅 브로커의 말재간에 속아 소송이 진행 중인 땅임을 알았을 때는, 시기를 놓쳐도 한참이나 놓친 뒤였다.
“야, 이거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언제나 그랬다. 돈벼락을 안기는 땅은 손을 벌리고 있는 안달수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수챗구멍에 허섭스레기가 걸리듯 언제나 말썽이 붙은 땅이 그를 향하여 손짓하며 다가들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안달수로 이름이 박힌 은행통장의 금액이 숫자 자리를 바꿔가면서 거침없이 줄어들었다. 이제는 은행통장의 잔액을 확인하는 일마저 두려웠다.
“야, 이거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여러 번의 투자실패는 안달수의 사고를 대마 덤불처럼 뒤헝클어 놓았다. 툭하면 그의 입에서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자신이 끊임없이 수렁에 미끄러져 가고 있다는 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갖은 것들이 그 앞으로 다가오는 행운을 가로막아 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리 소문도 내지 않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재물을 야금야금 낚아채어 간다고 여겼다.
정보에 밝지 못한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것이 빼앗긴다고 생각할 때, 솟구쳐 오르는 분함에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시기까지 했다. 그는 그것은 정당한 게임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보다 돈을 쉽게 벌어들이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중간에서 부당한 수단으로 낚아채 가고 있다면서 야속하게 생각했다.
안달수는 그것을 마치 고스톱 판에서 속임수를 써가며 판돈을 끌어모으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치부했다. 하기야 그는 세상살이를 곧잘 고스톱 판으로 비유하긴 했다. 일상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은 대박이란 말이 늘 귀가로 맴돌았다. 그렇게 보면 안달수는 노름판에서 돈을 딴 사람으로부터 개평을 떼어 얻듯, 그들의 것 일부를 부당하게 취해도 윤리적인 측면에서 무방하다는 섣부른 충동마저 느꼈다.
그런 생각의 근원에는 임광일의 지론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화투를 정정당당하게 치면 되는데, 왜 속임수를 쓰는지 모르겠어?”
“화투의 속임수? 속이면 재밌잖아?”
“남 속여 가며 돈을 빼앗는 게 재미가 있다고?”
“어차피 화투는 노동하여 돈을 취하는 게 아니고, 재미로 쳐 돈을 따니까. 재미로 치는 게 육체적으로 편하잖아. 재미로 치는 마당에 속이는 재미가 으뜸이 아니겠어?”
“돈 잃은 사람도 으뜸 재미를 느낄까?”
“돈 따먹기 경쟁에서 밀린 사람은 딱 하나의 방법을 선택하지. 목숨을 내놓고 떼를 써대는 거야. 과자를 쥔 아이 것을 빼앗자면 어린애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떼뿐이 더 있어? 마찬가지야. 그도 떼를 지어 써대는 막떼라야 먹혀들지.”
“막떼는 또 뭐야?”
“경우고 염치도 없이 날 잡아라 먹어라 하는 떼가 아니겠어? 과부 신세 홀아비가 안다고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는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기웃거리다 떼 숲으로 들어가 같이 떼를 쓰는 흐름이지. 아마도 앞으로 더 크게 벌어지는 빈부격차 때문에 일꾼이 아닌 떼꾼들이 날로 늘어날걸.”
오직 어떤 방법으로든 무엇이건 먼저 취하여야만 자기의 소유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날, 안달수는 우연히 거리에서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과 마주 스쳐 지나치게 되었다. 그때 불현듯 뇌물공여 사건이 터질 때마다 화면에 비추는 오만 원 권 다발로 가득 채워진 큰 가방이 눈앞에 알찐거렸다. 큰 가방만 눈에 띄면, 그 속은 허리를 묶은 오만 원 권 돈다발일 거란 연상이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해도 분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연상은 곧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것을 들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몫마저 부지런히 그것으로 퍼 나르고 있듯이 보였다.
그런 안달수는 불현듯 같은 시대, 같은 환경조건에서 차하진 삶을 살아가야할 이유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버스를 기다릴 때, 옆의 사람의 키 그림자가 자기의 그림자보다 길게 누워있는 것마저 싫어 서 있던 자리를 옮기는 버릇까지 생겼다.
돌아가는 화투패의 질서를 예리하게 쫓는 눈길로 부동산 투자에 매달려도 노상 피박만 잔뜩 뒤집어쓰고 파김치가 되어있는데, 뒤미처 그 땅에서 '대박'이 터졌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날, 안달수의 속은 구석구석 갈피갈피 새카맣게 타들었다. 또다시 목돈은 손바닥의 물처럼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흔적 없이 빠져나간 것이다. 재물을 손아귀에 움켜쥐려는 찰라, 바로 면전에서 다른 손이 약삭빠르게 채어갔다는 억울함이 마음에서 다시 그득 끓어올랐다. 그는 허전해진 빈손으로 무엇인가 움켜쥐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부피가 작으나마 악력(握力)을 느낄 수 있는 물체를 움켜잡고 싶었다. 꼭 자기만 타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세상살이하는 멍청이 대열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달리 맨 마음, 빈손으로는 귀가할 수 없었다. 안달수가 제 의지로 분명히 할 수 있는 짓은 맨 마음에다 술을 부어 만사를 잊으려는 일뿐이었다. 개발예정지 부동산중개소 인근 포장마차에 그날은 혼자 앉았다. 소주를 마시면서 비 오는 거리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새끼를 치고 있었다. 뼈 없는 닭발구이의 매운맛을 입가에 가득 칠해도 매운 맛이 혀끝에 잡히지도 않았다. 시골 논가에서 비를 맞고 들어와 추녀 밑에 앉아 어슬한 한기 속에 호박전을 안주로 마시는 술맛과는 판이하다. 그런데 귓가에다 시끄러운 소리를 집어넣으며 쏟아져 내리는 세찬 비가 가슴속을 논바닥처럼 질척여놓는다.
소나기가 그치자, 귀갓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만큼 소주를 마셨다고 자신만만히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데, 발걸음 디뎌내는 높낮이가 달랐다. 그러나 안달수는 술기운이 과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길을 잘 더듬어 나가고 있다고 자신을 하면서 먼발치에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앞에 큰 가방을 들고 가는 사내가 눈에 띄었다. 그는 히죽이 한 번 입가에 웃음을 칠했다. 그리고 작심해서 사내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큰 가방을 든 사내는 뒤따르는 안달수의 인기척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하철 출찰구를 빠져나가 하향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도 뒤질세라 사내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사내는 큰 가방을 지하철 구석에다 소중히 놓고 선 채 신문을 펼쳐 들고 거기에다 시선을 박았다. 안달수는 사내와 두어 사람 거리에 서서, 사내를 바라보지 않고 큰 가방에다 시선을 두고 있었다. 굳게 다문 지퍼를 내리면 자기에게서 가로채어간 돈들이 마땅한 주인을 찾아 허리가 묶인 채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것들이 엄연히 자기가 취해야 할 것들임을 지하철 안으로 꽉 들어찬 승객들에게 목청을 더 높여 고발하고 싶었다. 사내가 내릴 역에 이르면 그 큰 가방은 분명 자기의 손에 들려 내려 할 몫이라 여겼다.
사내가 여섯 역을 지나서야 내릴 채비를 하려는지 출입문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까지 안달수는 큰 가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내가 성큼성큼 가방이 놓인 구석으로 걸어가 그것을 잡았다. 안달수는 미적미적하다가 놓쳐버린 큰 가방에 아쉬운 눈길을 주었다.
안달수도 사내를 따라 역사를 빠져나왔다. 사내는 가까운 아파트단지를 들어섰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주변 조경부터 차별화된 아파트는 부자촌 명색에 걸맞게 그의 시선을 압박했다. 서울 노른자위에 자리한 이 건물은 차곡차곡 쌓아올린 돈의 무게를 이겨내려는 듯 육중하게 지면에다 뿌리박고 있었다. 그리고 오지(奧地)의 산허리에 박혀 뿌리 내렸던 노송들이 눈비음용으로 무더기로 옮겨와 수액주사를 맞아가며, 환기구멍으로 나오는 배기가스 때문에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번갈아가며 힘들게 토해내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내를 잡으려는 듯 안달수는 바싹 따라붙어 걸었다. 그제야 사내는 뒤따르는 인기척에 반응하며, 방어 자세를 취하듯 그를 눈으로 경계했다. 그는 여기가 미행을 끝낼 장소임을 직감했다.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나 참아낼 수 없어 현관 입구로 들어서는 사내에게서 큰 가방을 잽싸게 잡아챘다. 그리고 앞도 살필 겨를도 없이 너른 공간을 찾아 무턱대고 냅다 뛰었다.
"저놈 잡아라!"
사내가 뒤쫓으며 소리를 지르자, 그곳 주변에서 택배기사와 얘기하던 아파트경비원이 합세하여 뒤따랐다. 안달수는 끌다시피 가져가던 큰 가방의 지퍼를 쭉 열었다. 그곳에는 마땅히 부정적인 유통을 우려했던 대로 발권(發券)하자마자 시중에서 잠적해버린 오만 원 권 지폐뭉치가 검은 손으로 통하여 들어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예견한 대로 허리가 묶인 채 쏟아져 나와야 설정상황에 맞았다. 그러나 돈다발 대신 몸때가 묻었을 옷가지들이 구겨진 채 가방 안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와 채터바를 나타내는 표식을 감추듯 덮어씌웠다. 모가 닳아 벌어진 칫솔대도 하나 보였다.
왜소한 안달수는 도망이란 말이 무색하게 이미 경비원과 사내에게 간단히 잡힌 몸이라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캑캑대고 있었다. 사내가 매우 서툰 그의 짓거리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숨을 고르면서 입을 열어 점잖게 나무랐다.
“이 양반아, 술을 자셨으면 조용히 집으로 가서 곱게 잠을 자든지. 덩치도 작은 양반이 끌고 가기도 힘든 이 큰 가방을……, 아,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해요? 취미치곤 아주 고약하네.”
“제 것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줄 알았소.”
희떠운 안달수의 대거리에 사내는 그의 행색을 한 번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 양반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니야. 내 가방에 당신 것이 들어 있다니, 허 참 기도 안 차네.”
“당연히 내게 돌아와야 할 것이 그 안에 있을 것 같았단 말이오.”
“이거 완전히 정신이상자가 아니야? 경비원 아저씨, 이 양반이 횡설수설하는 거 보니 경찰에 알릴 것도 없이 멀쩡한 사람이 사는 아파트단지에서 그냥 밖으로 쫓아내요. 원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어야 시비를 가리지.”
사내는 괜한 시비가 귀찮다는 듯 씁쓸하게 웃고 몸을 숙여 채터바 위로 흩어진 때 묻은 옷가지를 큰 가방에다 욱여넣었다. 안달수는 취객으로 낙인이 찍혀 아파트단지 밖으로 경비원에 의해 질질 끌려가 내팽개쳐지듯 버려졌다. 담 너머에 아파트 폐품 하치장에서 음식물 찌꺼기가 썩어가는 냄새가 넘어왔다.
안달수는 큰 가방 훔치기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는 평균치에서 부족한 것을 더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도시로 나와 부동산 시장에다 돈을 뿌린 지 10년에 얻어 들인 경험이다. 그것을 메우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더욱 간극(間隙)이 벌어짐도 깨우치게 되었다. 그때 불현듯 10년간 버렸던 집과 전답이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부동산투기에 눈독을 들이다가 서울에서 쫓겨날 처지에서는 이제나마 그것을 다시 움켜잡아야했다.
안달수는, 박행수가 ‘복토’라고 평가를 한 옛 터전에 도착했다. 땅이 지금은 곡식을 길러내는 운기를 잃은 채 잡초 씨가 내려앉기를 거듭해 무성한 잡초밭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씨앗을 뿌려도 수확을 거두어들이기는 어려운 전답으로 보였다. 아마도 예전의 그만한 땅으로 만들려면 수삼 년이 더 걸려야 할 만큼, 안달수 앞에 그 땅은 예전의, 그 옥토라는 이름마저 이미 지워져 있었다.
대지로 들어서자 썩은 잡초냄새가 발걸음을 옮겨 디딜 때마다 묻어났다. 그러나 이제 씨앗을 묻어야 할 땅인 만큼 죽은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린 뒤, 몸을 풀고 마음도 내려놓아야 하는 곳이다. 안달수는 작심한 듯 웃통을 벗어젖힌 다음,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곳간에서 흙과 녹으로 뒤덮인 삽을 찾아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땅 한 귀퉁이의 흙을 얕이 드러냈다. 붉은 흙의 속살이 드러나자, 그는 혼자서 열없도록 씩 웃었다. 망설이지 않고 큰 가방의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들어냈다. 서울에서 동행한 큰 가방이 속을 털어낸 것이다. 큰 가방에 얼마나 목숨을 걸고 연연했던가. 불쏘시개거리를 큰 가방 안으로 반쯤 집어넣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또 잊어버린 것을 찾아내듯 다시 씩 웃었지만 웃음은 입꼬리 한쪽에서 묻혔다. 고갯마루를 타 넘어오면서 오금이 저렸던 다리에서 힘이 풀어져 내렸다.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서 있었다. 마른 불쏘시개 탓인지 큰 가방 형체는 연기와 함께 눈앞에서 금시 사라졌다. 안달수는 재만 남은 구덩이에 흙을 밀어 넣고 나서, 삽등으로 두들겨가며 다지고, 또 다졌다. 절대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찾아왔건만, 고개를 꺾자 후드득 떨어진 눈물이 삽날에 묻었다.[끝] [계절문학 2014년 겨울호 29 게재작]
첫댓글 계절문학 12월호에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