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시간이 넘도록
내 몸에서 고기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에 익은 피, 연기가 된 살이
내 땀구멍마다 주름과 지문마다 가득 차 있다.
배고플 때 허겁지겁 먹었던
고소한 향은 사라지고
도살 직전의 독한 노린내만 남아
배부른 내 콧구멍을 솜뭉치처럼 틀어막고 있다.
고기냄새를 성인(聖人)의 후광처럼 쓰고
나는 지하철에서 내린다.
지하철 안,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모습의 허공을 덮고 있는 고기냄새의 거푸집이
아직도 손잡이를 잡은 채
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상쾌한 바람이 한꺼번에 고기냄새를 날려보낸다.
시원한 공기를 크게 들이쉬는 사이
고기냄새는 잠깐 파리떼처럼 날아올랐다가
바로 끈적끈적한 발을 내 몸에 찰싹 붙인다.
제 몸을 지글지글 지진 손을
제 몸을 짓이긴 이빨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아직도 비명과 발악이 남아 있는 비린내가
제 시신이 묻혀 있는 내 몸속으로
끈질기게 스며들고 있다. 외투를 벗어놓고 먹을 걸 그랬나. 아하, 그래서 신세대들은 냄새나지 않는
퓨전 삼겹살을 먹는구나. 늘 얕은 후회로 지워버리던 삼겹살 냄새. 그 냄새를 끈질기고 세밀하게 관찰해 이리 멋진 시를 써놓았네요.
삼겹살이 통과하고 있을 내장 같은 지하철.
고기 냄새의
거푸집이
손잡이를 잡고 차창으로 나를 내다보고 있다는 극사실적
묘사가 압권이네요. 고기 냄새는 끈덕지게 고기를 향해 달라붙고 고기를 취한 나는 냄새를 끊어버리고 싶고. 어쩌지요, 연이란 대체 무엇이죠? 생명체를 먹어 생명을 연명하는, 생명체의 비애를 느낀 나는 고기와 고기 냄새 속에 갇혀 또 삼겹이 되네요.
진리와
지혜를 상징한다는 광배를 지닌 부처가 아닌, 삼겹살 냄새 후광 뒤집어쓴 너무나 서민적인 시(詩)부처 만나, '고소한 향'과 '노린내'의 경계는 무엇인가란
화두 하나 얻었네요.
그리움엔 길이 없어
그리움엔 길이 없어 - 박태일(1954~ )
그리움엔 길이 없어
온 하루 재갈매기 하늘 너비를 재는 날
그대 돌아오라 자란자란
물소리 감고
홀로 주저앉은 둑길 한 끝
소리가 도르르 보이는 시이다. ‘그리움엔 길이 없어’라는 성찰이 ‘자란자란 물소리 감고’라는 소리길 속에 전이되어 흐른다. 한국어, 그것이 이렇게 아름다운가, 하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게 하는 시, 그의 다른 시 어딘가에는 ‘달빛 자락자락 삼줄 가르는 밤/당각시 겨드랑이 아득한 벼랑’(‘당각시’ 부분)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언젠가 몽골에서 그를 만났었다. 몽골의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과연 어떤 소리들을 보았을까. 유성 떨어지는 소리? 바람, 삼줄을 가르는 소리? 소리가 보이는 시, 그립다. 세상 변하여 소리길이 시에서 사라지고 있기에 그의 시 더 귀하다. 시인은 보이지 않으나 그 객관화된 사진틀 속에서 출렁거리는 시인의 심장 소리길은 보이는 시, 그런 시 하나 오늘 당신의 가방에 넣기를. <강은교·시인>
깊이 들여다보다가
홍 순 갑
골목길 누군가 찍어놓은 발자국에 숱한 별들 잠겨있더
별들 들여다보다가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것은 생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아
깊이 들여다보면 웅덩이나 저수지나 우물이나 깊이가 같아서 하늘만한 슬픔도 별이 되고
깊이 들여다 본다는것은 목숨 또한 덧없어 호밀밭 위를 흐르는 달그림자 같기도 하고
나무도 제 마음을 그토록 오랫동안 들여다 본 후에야 조금씩 뿌리를 땅 속으로 뻗어 가는데
밤 깊어 아픈 시 한 줄 쓰려 생을 깊이깊이 들여다 보면
제 마음을 잃고 떠돌던 말들이 빈손으로 돌아와
뿌리도 없이 극빈의 울음을 새처럼 울다가 잠들기도 한다.
=대전 문학시대 2010.7월호에서=
빈집
김광열(광주 제일고)
인적 드물어 보이는 골목길에
짱짱하게 펴진 노란테이프로 울타리치고
낡은 시멘트벽은 사이사이 금을 갖고 있다
하나 둘씩 포크레인이 벽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소음 뒤집어쓰고 자리를 지키고 앉은 한 노파는
우리 안에 갇힌 힘없는 동물처럼 보인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검은양복 입은 젊은 남자
한손으로 구겨진 종이를 쥐고 있다
감나무는 허리를 굽혀 무너질 벽에 기대어 있고
마당 구석에 자리잡은 텃밭엔 배추들 엉거주춤 땅에 붙었다
터진 배수관은 이끼를 품고 있고
빨간 깃발은 힘없이 땅만 보고 있다
깃발 묶인 가느다란 묘목엔 작은 벌레 하나 오지 않는다
까딱하면 무너질 것 같은 처마
깨진 이 같은 유리창엔 찬바람만 드나들어 시리다
담배꽁초처럼 쭈그려 앉은 노파 앞에서
젊은 사내는 담배 하나 입에 물고 불붙인다
옆집은 먼지가 뿌옇게 이고 있다
똬리를 튼 뱀 같은 호수를 잡고 물을 뿌려보지만
연기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심사평
담담하면서도 적확한 묘사가 주는 시적 환기력을 '빈집'은 가지고 있다. 철거지역의 우울하고 스산한 풍경을 눈썰미 좋게 묘파해내는 그는 '깃발 묶인 가느다란 묘목'에서도 개발의 불모성을 발견한다. 풍경의 겉인가 했는데, 눈길은 이미 웅숭깊은 속에 가 닿아있다.
유종인ㆍ시인
교행(交行) /류인서
조치원이나 대전역사 지나친 어디쯤
상하행 밤 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네 눈동자에 침전돼 있던 고요의 밑면을 훑고 가는
서느런 날개바람 같은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과
네가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 줄의 필름
흐린 잔상들을 재빨리 빛의 얼굴로 바꿔 읽는
네 눈 속 깊은 어둠
실선의 선로 사이를 높이 흐르는
가상의 선로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표면을
끝내 인화되지 못한 빛이 젖은 날개로 스쳐가고 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당신의 평범한 날은 1,440분이고, 이것은 다시 8만6,400초로 구성되어 있다.
한 달을 평균 30일로 잡을 때 이것은 259만2,200초이고,
다시 한 해를 30일이 12번 반복되는 것으로 할 때 이것은 3,110만4,000초다.
이제 내 36세 생일이 다가옴에 따라 나는 실은 단지 10억8,864만 초를 살아온 것이다.
" 매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렇게 한 해 우리에게는 3,110만4,000번 새로운 삶을 향한 기회가 찾아오지요.
한 번에 하나씩.
지금까지의 삶과 새로운 삶이 교행하는 순간. 우리에겐 유일한 순간.
참 어지러운 세상
봄은 왔건만
땅과 바다와 인간세상에 어지러운 일들이 터지고 있다.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아래 시가 위안이 된다.
**********************************************************************************
세상의 친절
1
차가운 바람 가득한 이 세상에
너희들은 발가벗은 아이로 태어났다.
한 여자가 너희들에게 기저귀를 채워줄 때
너희들은 가진 것 하나도 없이 떨면서 누워 있었다.
2
아무도 너희들에게 환호를 보내지 않았고, 너희들을 바라지 않았으며,
너희들을 차에 태워 데리고 가지 않앗다.
한 남자가 너희들의 손을 잡았을 때
이 세상에서 너희들은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3
차가운 바람 가득한 이 세상을
너희들은 온통 딱지와 흠집으로 뒤덮여서 떠나간다.
두줌의 흙이 던져질 때는
거의 누구나 이 세상을 사랑했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
온통 딱지와 흠집으로 뒤덮여 떠나가지만
거의 누구나 세상을 사랑했었다는...
만약
이 부분이 없었다면
브레히트가 굉장히 차갑고 냉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성적이고 존경할 만한 선생님과의
악수와 같이 느껴진다.
따듯하게 느껴지는 그 손...
호수나 강에서 헤엄치기
1
창백한 여름에는, 바람이 저 위의
커다란 나무들 잎 속에서만 살랑거릴 때는
강이나 못 속에 누워 있어야 한다.
헤히트가 서식하는 수초처럼.
몸은 물 속에서 가벼워진다. 팔을
물에서부터 하늘 쪽으로 가볍게 떨어뜨리면
산들바람은 팔을 갈색의 나뭇가지인 줄로
잘못 알고 흔들어 준다.
2
하늘은 한낮이면 굉장한 고요함을 마련해 준다.
제비들이 날아오면, 눈을 감는다.
바닥의 진흙은 따스하다. 서늘한 물거품이 방울방울 솟아 올라오면
물고기가 우리들 사이로 지나간 것을 알게 된다.
나의 몸, 다리와 가만히 있는 팔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우리는 물 속에 꼼짝않고 누워 있다.
서늘한 물고기들이 우리들 사이로 지나갈 때만
나는 웅덩이 위로 햇빛이 비치는 것을 느낀다.
3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저녁 때
사지가 쑤시고, 아주 게을러지면
흘러가는 푸른 강물 속에 철퍼덕거리면서
모든 것을 거리낌없이 던져 버려야 한다.
저녁때까지 버티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면 강과 수풀 위로 창백한 상어와 같은 하늘이
심술궂고 탐욕스럽게 나타나고
모든 사물이 그에 알맞게 되기 때문이다.
4
물론 흔히 그렇듯이 등을 밑으로 하여
누워야 한다. 그리고 떠내려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헤엄을 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 그저 그렇게 하고 있으면 된다.
마치 조약돌 더미의 한 부분인 것처럼 말이다.
여편네가 안고 있는 아이와 같은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된다.
저녁에 하느님이 자기의 강물에서 헤엄칠 때
그러는 것처럼, 전혀 큰 활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 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례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어려운 시대 상황이
위대한 혁명가들과 예술가들을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또다시
비극적이지만
시를 쓰기 좋은 시대가 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일까...
강하기때문에 살아남은 것일까...
상대적으로 평온했던
36년의 시간뒤에
작년부터 밀어닥치는 죽음의 러쉬를 목도하며
나는 그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먼저 간 이들에게 미안 할 뿐이다.
더이상
나의 게으름이 시적허용이 될수는 없지만
서사극적 삶을 살고있다는 느낌은
더욱 강하게 든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포도주 속에 부은 물을 당신은
다시 퍼낼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당신이
포도주 속에 부은 물을 당신은
다시 퍼낼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화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며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또다시
브레히트를 읽기에 좋은 계절이 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한마당 브레히트 시선 1 1985 4,000원
어쩌면 이런 것이 시인의 시선일 것입니다.
어떻게 잘 익은 딸기를 먹으면서 딸기를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원들의 혀라고 연상할 수 있을까요.
비약적인 비유지요.
세심한 여류 시인으로서의 관찰의 결과일 것입니다.
비유에도 여러가지가 있지요.
이런 것이 또 시를 읽는 맛일겁니다.
모네는 겨울 눈의 제 빛깔을 그리기 위해 그 추운 거리에서 1시간 넘게
마차가 지나가는 눈을 관찰하고는
눈은 파란색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고 제대로 눈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동리 선생님한테 문순태 소설가가 글을 배울 때
"들판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다."라는 글을 써가자
이름 모를 꽃은 너만 모르지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느냐며 혼이 났다고 합니다.
어느 화가는 스승을 찾아가 그림 공부를 청하자 동물원에 가서 낙타를 그려오라는데
수개월에 걸쳐 그린 후 낙타의 속성을 알고 제대로 그릴 줄 알았다고도 합니다.
또 어느 사진가는 사진을 배우러 스승을 찾아 갔는데
달걀을 내놓고 찍으라해서 자존심 상하고, 의아했지만
계속 찍다보니 달걀이 숨쉬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훈련과 노력이 이런 눈을 키웠는지 생각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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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김혜순
접시에 붉은 혀들이 가득 담겨 왔다
찬송 부르는 성가대원 입속의 혀처럼 가늘게 떨고 있었다
네 혀가 내 혀 위에 얹혀졌다
두 개의 혀에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세상의 온갖 맛을 음미하다 이제 돌아와 우리는 좁쌀 같은 돌기들을 다소곳이 맞대었다
너는 입속에 혀만 있고 이빨이 없는 사람 같았다
몸 저린 뿌리가 내장 사이로 번개처럼 뻗어내리고, 전기처럼 차디찬 시냇물이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깨물면 붉은 물이 돋을까 봐, 나는 얼굴이 한정없이 게워낸 붉은 것들을 가만히 물고만 있었다
눈 맞은 나뭇가지처럼 포근한 네 개의 팔이 얽히고, 접시 가득 이 키스를 거두어들였다!
그 작은 돌기들이 모두 네 씨앗들이었다는 말은 내가 네 혀를 다 짓이긴 후에야 들었다
8월의 엽서
김 정 임
바람이 파랗게 익힌 깻잎 오백 장을 건네받았다
한 장씩 잎사귀를 넘기는 동안
잎맥 사이 얼핏얼핏 비치는 손자국
그의 야윈 뼈와 지문들이 아프게 만져졌다
이.번.생.은.틀.렸,어
잎갈피 사이에서 툭툭 부러지는 글자들
뒤척이다 돌아누운 밤이 마른 비늘같이 날렸다
내게 전하려는 기별을 다 알지 못하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금 멀리 있는데 더 이상 그를 알지 못한다
그가 보낸 깻잎 엽서 위에
푸르고 시린 침묵을 올려놓았다
오백 장의 이별이 동시에 입을 다문다
안씨의 공부
윤제림
기해생 안씨 할머니가 이제 와서 한글을 깨우쳐 보겠다고 검정고시 학원에
딸린 한글반 학생이 된 까닭은 전주 가는 버스를 탔는데 진주에 부려지고 싶
지 않아서다. 아니, 어느 날 저승에 가서도 그럴까 더럭 겁이 나서다. 거기선
글자 하나 잘못 읽으면 영판 엉뚱한 세상으로 간다지 않는가. 길한번 잘못 들
면 한 칠만 팔천리쯤 엇가가서, 고쳐 잡자면 이천삼백년쯤 걸린다지 않는가.
한글공부가 쉬이 끝나면, 한자도 조금 익혀 볼 생각이다. 그 나라 공문서는
아무래도 한자가 많이 섞여 있을 것 같아서다.
직 유 로 부 터 부 처 찾 기
김 봉 식
낚시터엔 선승이 많네 부처처럼 처자식 버려두고 저수지를 벽 삼아
동안거에 드시네 깨달음은 담배 몇 갑 째 분의 명상에도 말뚝 찌처럼
꿈쩍 않고, 치어같은 번뇌들만 화두를 슬쩍슬쩍 건드릴 뿐이네 낚시
바늘에 꿰인 지렁이를 부처님께 공양하네 선승들, 참선의 시간 지날
수록 물음표처럼 꼬부라지네 물음표가 물음표를 캄캄한 마음 바닦에
던져 놓고 물음을 기다리네 문득! 법열인 듯 찌가 솟구치네 수면 위에
큰 느낌표 하나 찍네
황급한 챔질에 끌려나온 월척같이 눈부신 부처님, 낚시바늘 끊고
유유히 도망가시네
다음은 우리를 취하게 하는 것들을 위한 시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력들을 위해 몰입, 함몰하자는 거 같습니다.
이제 년말이면 많은 망년회들이 열릴 터인데 이 시를 외웠다가
(다 외우기 어려우면 앞과 뒤 몇 부분을 이어서 만들어)
취해야 하는 대상을 동창회면 동창회, 마누라면 마누라, 로타리면 로타리를
넣어 낭송하면 공감과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낭송, 좋은 레파토리가 될 수 있습니다.
-------- 송 세 헌
++++++++++++++++++++++++++++++++++++++++++++++++++++++++++++++++++++++++++
취 하 시 요
보 들 레 르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또 취해야 한다.
취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당신의 허리를 구부리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쉬지 않고 취해야 한다.
무엇으로냐고?
술, 시, 일 혹은 도덕, 당신의 취향에따라 하여간 취하라.
그로 인해 때로 당신이 고궁의 계단에서, 도랑의 푸른 잔디에서,
당신 방의 삭막한 고독 속에서 이미 취기가 줄었다든가,
아주 가버린 상태에서 깨어난다면 물으시오.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벽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 탄식하는 모든 것, 구르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으시오.
지금 몇시냐고.
그러면 바람은, 물결은, 별은, 새는, 벽시계는 대답하리다.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당신이 시간의 학대 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시오.
쉬지 않고 취하시오.
술로, 시로, 일로, 또는 도덕으로, 당신의 취향에 따라.......
악기들의 공동주택
신 용 목
저 비 내린 길 모두 현이라면
저 비 그은 곳 모두
음악이여 새벽 복도의 바닥을 치며 우는 노구의 악기가
굽은 현을 튕기며 부르는
구름의 본적이여 바람이 쳐놓은 허공의 오선지마다
십육분음표의 단풍들
우우우웅 울음의 공명이 시절을 닮아 현관 등의 수염이 하얗게 세고
퇴역 가수의 노래는 가사를 잃고
쓰러질 그대가 쓰러진 그대에게
창을 딛고 잠든 청중에게
쓰러진 그대가 쓰러질 그대에게
젖은 잎의 귀를 달아주는 우우우웅 음표의 흰 꼬리를 선물하는
저 비 지난 길 모두 음이라면
저 비 고인 곳 모두
음계의 계단이 끝나는 높이에서 울음으로 고이는 복도에 악기여
파인 바닥 웅덩이에 비춰보면
바람에 넘어가는 젖은 악보들
아침이면
눈부신 예감으로 눈을 뜬다
그대 오리라
바람 속 푸른 날개의 새처럼
오늘은 그대 오리라
꽃의 숨결처럼 고요히 와서
환희의 폭풍으로
내 운명을 뒤흔드리라
아 헛되고 헛되고 헛된 한 생애를
절망의 늪에서 일으켜 세우는
이 눈부신 예감이여
시의 팔뚝이여
(강 만「눈부신 예감」전문)
꽃 잎
복 효 근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다시 옆걸음으로 기어서 나올 것 같은
새끼손톱만한 어린 게가 묻어 있다.
제 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소끔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 밤 바다의 사연을 다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어 놓은 꽃잎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전 갈
류 인 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 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 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 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르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여승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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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알베르-칸(1860~1940)이라는 프랑스의 대부호는
재산을 문화사업을 하는 데 쓴 사람이다. 그는 20세기 초에 사진사들을 전 세계로 보냈다. 그 당시 새로 개발된 오토크롬 기술로 무장했던 캉의 사진사들은 세계 구석구석을 헤매며 사람들과 자연을
컬러로 찍었다.
그 사진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미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의상과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 세계가 서구형으로 평준화되기 이전, 이 세계가 어떤 같은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 각각 다른 옷, 다른 집, 다른 삶의 표정을 하고 그들은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백석
선생의 시를 읽으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떠오른다. 위의 시에 나오는 '가지취' 냄새가 나는 여승,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가버린 어린 딸, 옥수수를 파는 평안도 어느 산의 여인. 만일 캉의 사진사들이 그때 조선으로 왔더라면 이런 모습을 담았으리, 그리고 백석 선생처럼 '불경처럼 서러워'졌을지도 모르리라.
<허수경>
달은 계속 둥글어지고 /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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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View('http://photo.hankooki.com/newsphoto/2008/12/14/behermes200812142107390.jpg','GisaImgNum_1','default','260');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굽이굽이 막힘없는 가락이 거부할 수 없는 유장한 물결을 이루었다. ‘백정집 칼잽이’, ‘허벅살 선지피’ 처럼 섬뜩하게 날이 선 말들도 이 거침없는 노래 속에서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생선 배따는 것만 봐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몸서리를 칠 그녀를 서슴없이 백정집 칼잽이가 되게 하는 것은 모전여전의 하염없는 연민이다. 연민을 뗏목 삼아 우리는 더러 섬처럼 고립된 타자에게로 건너가 ‘슬픔만한 거름이 없음’을 발견하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갈 데인 잎차같이’ 달래주고 싶은 것은 사내만이 아니라 나의 눈빛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그 눈빛이 병든 사내와 나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아픔들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모든 여성적인 것들이 우리를 이끌어간다고 했던가. 마른 대지를 적시듯 흐르는 모전여전의 이 도저한 모음을 달여 만든 진국 한 사발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폐병쟁이 내 사내/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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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굽이굽이 막힘없는 가락이 거부할 수 없는 유장한 물결을 이루었다. ‘백정집 칼잽이’, ‘허벅살 선지피’ 처럼 섬뜩하게 날이 선 말들도 이 거침없는 노래 속에서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생선 배따는 것만 봐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몸서리를 칠 그녀를 서슴없이 백정집 칼잽이가 되게 하는 것은 모전여전의 하염없는 연민이다. 연민을 뗏목 삼아 우리는 더러 섬처럼 고립된 타자에게로 건너가 ‘슬픔만한 거름이 없음’을 발견하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갈 데인 잎차같이’ 달래주고 싶은 것은 사내만이 아니라 나의 눈빛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그 눈빛이 병든 사내와 나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아픔들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모든 여성적인 것들이 우리를 이끌어간다고 했던가. 마른 대지를 적시듯 흐르는 모전여전의 이 도저한 모음을 달여 만든 진국 한 사발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뒤 편
천 양 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무인도
박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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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그 외로움의 성분에 곰팡이가 끼고 누룩 뜰 때쯤
어느 멀리서는 이기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횃불을 피우고
더 먼 곳에서는 유해들이 배를 깔고 탄식하는 소리로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을 채우기도 하니까
바깥에서, 높은 곳에서, 운명이 비웃으며
우리들에게 약속의 증서를 써주었던 손으로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창문으로부터는 봄에 머물렀던
나뭇가지들이 기어올라온다. 어리석게도
껍질이 벗겨지는 곳에서 강이 태어나고
기념비적인 죽음도 생겨나리라. 서서히 묘역에서는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이 먹다 남은 빵이 노래에 싸여
굳어지는 것을 본다
이별을 하고 난 뒤 며칠
몸살이 나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일터로 가서 일을 하고 그리고 몇 달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몇 달 혹은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이 시를 읽어보시라고 이별을 한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다.
‘사랑했지만 이별한 사람이 먹다 남은 빵’, 그 빵을 포장할 수 있는 포장용기는 무엇인가? 당연히
노래다. ‘껍질이 벗겨지는 곳에서 강이 태어나’게 하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 무엇들조차 다 포장할 수 있는 것은 노래뿐. 그 포장지에 싸인 내용물이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노래는 노래한다, 짧막한 후렴구와, 말이 될 수 없어서, 우우, 아니면 랄라, 라고
마음만을 실어나르는 순간의 축복. 그 축복 속에 이별을 한 이들은 한없는 무인도에에서 굳어가는 빵을 바라보는 시간. 그러나 즐겁지 않은가, 우리 모두 잃어버릴 것이 있어서 마음 속에 무인도,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성찬경
자꾸 쓰다듬어야
자꾸자꾸 한 만 번 쯤 쓰다듬어야
사람이건 물건이건
병이 낫고 윤이 난다.
한 번 쓰다듬을 때마다
손바닥의 주문으로
혼의 진기를 조금씩 풀어 스미게 해야
빛이 나고 행복한 무리가 선다.
그런 때 쯤이면
요소와 요소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동서남북 정거장에 파란 불이 켜진다.
벼락치기로는 탑이 흔들릴 뿐이다.
깨달음의 일환으로 순간의 영원에서
끝도 없이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야 한다.
江, 꿈
김 근
꿈에, 누이야, 살랑거리는 물주름도 없이, 江인데,
이따금씩 튀어 오르는 피래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푸르스름한 대기 살짝 들떠, 未明인지 저녁 어스름인지,
간유리처럼 커다만 형광체처럼, 보일 듯 말 듯
제 꼬락서니 드러내는 나무와 풀과 길과 마을을 품고,
가벼이 얽은 얼굴에 드러나는 마마 자국마냥,서툴게시리
산과 들과 세상이 밝음과 어둠의 바깥에, 흐르지 않고
江인데, 누이야, 허옇게 물안개만 피어올라 몽글몽글,
자울거리는 시간하고 노닥노닥, 안개에 싸여 오두마니,나,
어디 기척이나, 배 곯는 밤부엉이 소리나 어디,
그저 한참을 앉아만, 나, 내가 참말 나인지도 모르게 앉아만,
혹 바람이라도 불었던지 누구의 입김이라도,
배 한 척, 깜깜한 안개 사이로, 삐걱거리며 빈 나룻배,
나한테로 헤적헤적 안개 헤치며 강 저 편에서,
없더니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빈 나룻배
도로 가는데, 강 저 편에서 흑흑대는 소리, 헌 광목치마
찢어발기듯 소리, 온 몸의 힘줄이란 힘줄 다 불거져 툭,
툭, 터지는 소리, 소리에 비늘을 세우고 한꺼번에, 안개가, 나를, 나를,
그제서야 보여, 파르르 흔들리는 거, 강가의 사시나무 이파리 하나
그 흔들림 속으로 江도 안개도 산도 들도
나무도 풀도 길도 마을도 대기도 어둠도 밝음도
나도 시간도 한가지로 흔들림 속으로, 꿈에 누이야
그만, 夢精을, 나, 너를 보듯,
들 깻 단
정 진 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
정이 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
게 누운 그에게서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
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
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
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 可 人 >
*시모니데스(그리스 시인)*
"그림은 말 없는 시, 시는 말하는 그림"
| | |
눈 물
자작나무 여자
최 창 균
그의 슬픔이 걷는다
슬픔이 아주 긴 종아리의 그,
먼 계곡에서 물 길어올리는지
저물녘 자작나무 숲
더욱더 하얘진 종아리 걸어가고 걸어온다
그가 인 물동이 찔끔,
저 엎질러지는 생각이 자욱 종아리 적신다
웃자라는 생각을 다 걷지 못하는
종아리의 슬픔이 너무나 눈부실 때
그도 검은 땅 털썩 주저앉고 싶었을 게다
생의 횃대에 아주 오르고 싶었을 게다
참았던 숲살이 벗어나기 위해
또는 흰 새가 나는 달빛의 길을 걸어는 보려
하얀 침묵의 껍질 한 꺼풀씩 벗기는,
그도 누군가에게 기대어보듯 종아리 종아리 올려놓은 밤
거기 외려 잠들지 못하는 어둠
그의 종아리께 환하게 먹기름으로 탄다
그래, 그래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종아리가 슬픈 여자,
그 흰 종아리의 슬픔이 다시 길게 걷는다
*樺;자작나무 화
도마에 오르다
|
- 길상호
꿈속에서도 서류 뒤적이다
종이 날에 손가락 베이곤 하는
당신의 아늑한 침대,
상부에 제출한 결재서류는
오늘도 어김없이 난도질
이 갈다 이 빠진 칼이 되어
잠드는 침대, 밤마다
푸른 피 붉은 피 배어들어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살생이 즐거워지는,
당신이 옆에 누운 당신을
토막 내고 회를 떠도
전혀 느낄 수 없는 흔들림,
당신의 곤한 칼잠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침대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통해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현대시동인상, 이육사문학상 신인상, 천상병시상 등 수상 |
Ars Poetica
아치볼드 매클리시
詩는 싱그런 과일처럼
만질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엄지 손가락에 닿는 오래된 메달들처럼
딱딱하고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시는 구체적인 것이지
진실된 것이 아니다.
슬픔의 긴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을 위해서는
비스듬히 기댄 풀잎들과 바다 위 두 개의 불빛
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단지 존재할 뿐이다.
< 可 人 > |
|
생 인 손
김 승 희
손가락 하나를 앓으면서부터
다른 것들은 다 배경으로 물러선다,
시퍼렇게 파도를 몰고 달려오는
한 고통의 기세등등, 의기양양 아래
달도 달빛을 잃고 장미꽃도 영혼조차 없어졌다,
생인손도 아프지만
하나의 고통이
다른 모든 고통을 지배하는 것은 더 무서워,
그렇게 당신은 나의 생인손이다
세상에는 당신 밖에 보이지 않고
다른 생의 가치들은, 뼈들이 녹는 비누의 시간이다,
하늘 아래 홀로 번쩍이는
시퍼런 생인손 아래
연보라색, 진보라색, 흰 보라색, 노랑 보라색
제비꽃들이 한 송이 한 송이 거짓말처럼 피어났다 스러진다
< 可 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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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산
이 재 무
사람들이 무서워
산은 마을 빠져나와 절뚝절뚝,
온갖 질병 앓는 몸으로 도망가네
담장이 무릎 아래 잔풀 품어 키우듯
으스러지게 마을 끌어안고
억척스럽게 온정 피워내더니
허리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독 오른 욕망의 삽날 무서워
품속 가득 껴안은 것들,
나무와 새와 벌레와 해충과 독버섯과 쥐와
뱀과 바람과 어둠과 구름과 별과 달과 해
한때의 푸른 추억 풀어 먼저 챙겨 보내고
그렁그렁, 눈에 밟히는 듯 거듭
되돌아보며 쩔뚝쩔뚝 유배의 먼 길 가네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계간 <시작> 편집주간
▦1983년 <삶의문학> 통해 등단
▦시집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저녁 6시> 등
< 可 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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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양귀헌 (필명 양귀)
이사를 하고 못을 벽에 옮겨 심는다
허공에 적을 내리고 있던 뿌리가
일순간 동화 속 콩나무처럼 잎을 틔우고
눈 깜짝할 새 수많은 가지들이
어머니 기지개처럼 방 안을 뻗어간다
옹이에 걸린 오래 된 꽃다발에서
바싹 마른 파편들이 하나 둘 떨어지자 마자
낙화를 바라보던 사공의 눈에서
싱싱해진 연분홍 꽃잎 뒤로
우람한 산맥이 연달아 들썩이며
넝쿨처럼 숫한 거리로 제 어깨를
이어 보낸다, 그 물관의 한 갈래
낑낑대며 짐을 나르는 내가
겹쳐져 솟아나는 사이 우듬지 끝
벌써 빽빽이 자란 거울 속 풍경에선
어머니 쌀을 씻는 모습이 피어난다
올해로 중학생이 된 동생이
아기새 소리처럼 덜 여문 노래를 부르며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그 손가락에서 함께 딸려 온 햇빛이
바닥에 살갑게 내려앉는다
방금 전까지 썰렁하던 방 안으로
달콤한 밥 냄새가 주렁주렁 열린다
▦심사평
양귀의 <못>은 일상생활 속에서 시적인 것을 찾아내는 과정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하여 처음 못을 박을 때의 느낌이 자연스럽게
가정의 일상생활 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인식의 전환이 인상적입니다.
벽에 심은 못이 콩나무처럼 잎을 틔우고 어머니의 기지개처럼 수많은 가지를 뻗쳐
달콤한 밥을 만들어내는 직조력이 시의 매력을 한층 더해주고 있습니다.
김경주ㆍ시인
1990년 1월 1일
손 진 은
돈 몇 만원이 늘상 문제였다
쇠고기 몇 근과 정종 한 병의 남편 자존심에 매달려
새해 첫날부터 우린 처가행에서 그렇게 언성을 높이고
멀어진 마음 비인 행간 위에 눈발이 퍼붓고
눈은 내려 우리들 시야까지 흐려 놓았다
길은 어디에서 끝나며 어디서부터 시작될 것인가
이제는 평지와 개울 바닥 구별할 수도 없게 된 언덕길
미끄러져 버둥거리는 차량이 보였고
조심조심 그 길 더듬고 가는 버스에 실려
투덜거리는 엔진처럼
우리들 마음 속의 한 부분도 고장이 나 있었을까
버스에 내렸을 때
앞선 아내와 어린것 어깨 위로
어둠과 함께 몰려와 내려 쌓이는 흰 눈
멀리 가물거리는 마을 불빛은 우리들 불안을 다독거리는데
안쓰러이 아내와 어린것 어깰 보듬어 주면
그들에게 작은 어깨 하나 돼 주지 못한 지난 시절의 회오가
눈발이 되어 내 앙가슴을 파고들고
길을 끌어안고 내려올 것도 같은 마을 불빛은 아직 멀고
그래도 산등성이 길가의 가문비나무 고로쇠나무 같은 것들
처가댁 식구들처럼 손 벌려
축복처럼 눈덩일 풀썩 던져 주는데
첫날 첫길을 우린 그렇게 갔다
이제는 가천(假川)이 되어 버린 가천(佳川)바닥을
조심스레 내어 디디면서
더러 엎어지는 아내의 손목을 끌어당겨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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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을 의 노 래
보들레르
1.
머잖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라.
잘 가거라, 너무도 짧았던 우리들 여름 날의 찬란했던 빛이여!
벌써 나는 듣는다, 음산한 소리 울리며
앞마당 포도 위에 부려지는 장작개비 소리를.
노여움, 미움, 떨림과 두려움, 그리고 강요된 고역,
그 모든 겨울이 이제 막 내 존재 속으로 파고들려고 하는구나.
내 마음은 극지의 지옥에 떠 있는 태양처럼
얼어붙은 붉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리라.
나는 듣는다, 몸을 떨며, 장작개비 부려지는 소리를.
교수대 세우는 소리인들 이보다 더 음산하지는 않으리라.
내 마음은 지칠 줄 모르는 무거은 파성(破城)망치에
허물어지는 탑과도 같다.
이 단조로운 충격 소리에 흔들려
나는 어디선가 급히 관에 못 박는 소리를 듣는 것 같구나.
누구를 위해선가?- 어제는 여름이었는데, 이제 가을이구나!
저 신비한 소리는 출발의 신호처럼 울린다.
2.
나는 사랑하노라, 갸름한 당신 눈의 푸르스름한 빛을,
다정한 님이여,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쓰디쓰오.
그 무엇도, 당신의 사랑도, 규방도, 난롯불도
내겐 바다 위에 빛나는 태양만도 못하오.
그렇지만 사랑해 주오, 정다운 님이여! 어머니가 되어 주오.
은혜를 모르는 사람, 심술궂은 사람일지라도
애인이거나 누님이거나 찬란한 가을의
아니면 지는 해의 덧없는 감미로움이 되어 주오.
짧은 노고의 인생이여! 무덤은 기다린다, 무덤은 굶주려 있다!
아!제발 내 이마 당신 무릎에 파묻고
작열하던 눈부신 여름을 아쉬워하며
늦가을의 노란 다사로운 빛을 맛보게 해 주오!
< 可 人 >
| | |
아름다운 여인 |
< 헤르만 헤세 >
장난감을 받고서
그 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서
기어이 부셔버리고
다음날엔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고 있는
아이와 같이
당신은 내가 드린 내 마음을
고운 장난감 같이 조그만 손으로 장난을 하며
내 마음이 고락(苦樂)에 떠는 것을 돌보지도
않습니다.
|
<可 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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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언제 다 다시 감상할거나...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