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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요한계시록]
X. 대제사장으로서의 인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0~16)
지난 시간에 영원한 왕으로서의 인자에 대해 말씀드렸다. 왜 인자라는 말이 나왔는가 하면 역대 제국들을 짐승으로 비교를 했다. 사자와 곰과 표범과 또 이빨이 날카롭게 생긴 짐승으로 표현했다. 사자는 바벨로니아, 곰은 메데 페르시아, 곰은 희랍 그리스, 그리고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 증명된 사건들인데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들을 짐승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인자라는 말이 나왔는데 세상 왕국을 짐승 왕국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세상 왕국이 짐승으로 표현될 수 있는 왕국이라면,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은 인자로 표현된 왕국이라는 말로 인자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 짐승이라는 개념이 계시록 13장에 가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나온다. 이 두 짐승이 나와서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데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라는 여자가 나오는데 이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옛날 한 때 말이 많았던 666은 짐승의 수이다. 다니엘서에 있는 네 짐승과 계시록에 있는 두 짐승과 666이라는 것은 다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세상 왕국을 짐승의 제국이라 생각했고, 하나님의 왕국을 인자의 제국이라 말하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인자이신 영원한 왕을 말씀드렸는데, 이 땅위에 영원한 제국은 없다. 바벨로니아도 망하고 메데 바사도 망하고 그리스 로마가 다 망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제국이 있다. 대영 제국할 때 영국도 한 때 제국이었고 불란서가 세상을 지배할 때도 있었고 지금은 미국이 지배하고 있고 앞으로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제국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제국들을 전부 성경에서는 짐승의 제국이라 생각했다. 대단히 기분 나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구별이 그리스도 왕국과 구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개념이다. 인자의 왕국과 짐승의 왕국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앞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것이다 할 때는 인자의 왕국을 의미한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 우리가 모르는 하늘 높은 곳이나 구름 뒤에서 어떤 이상한 것이나 심지어 ET들의 나라들이 갑자기 세상에 내려온다는 뜻이 아니고 이 땅위에 세워질 영원한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통치되어지는 그런 영원한 왕국을 의미한다. 이 나라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신다, 홀연히 임한다는 모든 말들을 잘못 생각하여 큰 이적 같은 것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이 땅위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되게 될 것이며, 그 나라가 오기 위해 우리는 오늘 교회로 부름 받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와 앞으로 나타날 왕국과는 하나이다. 바벨로니아가 메데 바사가 되고 메데 바사가 그리스가 되고 로마가 된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는 또 천년왕국을 지나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어린양의 왕국으로 이어져 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도 두 짐승이 나온 다음에 14장에서는 시온산에 선 어린양의 왕국이 등장한다. 시온산에 선 어린양의 왕국은 곧 인자의 왕국이다. 그러니 결코 신이 내려와서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인자가 다스리는 왕국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인자라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아야 한다.
A. 끌리는 옷을 입으신 인자 - 석류와 금방울이 격하여 달린 긴 옷 & 성전에 가득한 옷자락
등대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다. 오늘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인자이다. 왕으로서의 인자와 대제사장으로서의 인자!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하는데 한편으로는 왕이고 한편으로는 제사장이라는 말이다. 이 제사장은 끌리는 옷을 입은 인자라고 말했는데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발에 끌리는 옷, 발이 덮히는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성전에 가득한 옷(사6:1)이라고 되어있다. 옷을 표현할 때 그 옷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의 신성한 미덕이 충만하다는 뜻이다. 어떤 신기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신성한 미덕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충만하다는 것을 출애굽기에서는 발에 끌린다로 표현하고 있고, 이사야 6장에서는 성전에 가득하다로 표현하고 있다.
그 제사장의 옷은 세마포와 금과 보석과 석류로 되어 있다. 석류와 금방울이 맨 밑의 격으로 있어(석류 하나에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에 금방울 하나로 되어 있음) 제사장이 지나가면 금방울이 울리게 되어 있다(출28:33-35). 이는 생명의 풍성을 상징하는 옷이다. 그리고 성전에 가득한 옷자락은 거룩이 충만하다는 뜻이다. 세마포는 정결한 것을 상징한다. 어떻게 정결하게 되는가? 모든 것을 다 제하고 난, 마지막 줄기만 남은 섬유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모든 것에서 완전하게 심판 받고 더 이상 심판받을 수 없는 그렇게 깨끗하게 된 인성을 의미하고, 보석과 흉패와 견대 이런 것들은 연단되어진 인격을 의미한다. 이 연단되어진 인격을 가지고 백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의 옷 자체에서 그분이 우리 인격의 보증인이라는 것을, 우리 인격은 이렇게 되기 위해서 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B. 가슴에 금띠를 띠신 인자
그리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다고 말했는데, 가슴은 생명과 사랑을 상징한다. 허리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면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아이들을 가슴으로 품는다,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젖을 먹여서 키운다는 모두 가슴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의 표현이기도 하다. 금띠를 허리에 띠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 띠고 있다는 말은 생명과 사랑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가슴에 금띠가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그 가슴에는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돌보심에 있어서 힘과 능력으로 교회를 돌보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생명과 사랑으로 교회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방세계에 들어오면서 능력을 찾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도 하나님이 증명이 안되니까 안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명하려면 능력을 한 방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이방세계에 들어온 기독교는 다시 또 능력을 찾게 되었다. 유태인들이 경험해 온 역사를 다시 반복하고 되풀이한 셈이다. 안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모르고 무시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려니까 한방 쳐야 아~ 하나님이 있구나 하고 믿을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과 사랑으로 교회를 기르시는 분이다.
C. 머리와 털이 흰 인자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랬는데, 희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이고 흠이 없다는 말이고 밝다는 말이다. 머리는 통제하는 기관이다. 온 몸을 통제하는 곳이다. 그의 몸의 통제, 그의 표시, 그의 지혜는 희다는 말이니까 깨끗하고 흠이 없고 밝다는 뜻이다. 양털은 부드럽고도 깨끗한 것이고 눈은 차고도 빛난 것이 눈이다. 양털 같고 이 말은 부드럽고 깨끗하다는 말이니까 이것은 우리를 양육하는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눈 같다는 차고도 빛난 것이니까 통제를 의미한다. 가슴은 뜨거워야 되지만 머리는 차야 된다. 머리까지 뜨거우면 안된다. 머리가 뜨거운 사람은 사고를 친다. 가슴은 뜨거워야 되지만 머리는 차야 한다. 이성은 냉정하고 냉철해야 된다. 세상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가슴보다 머리가 더 뜨거운 사람들이다. 하다보면 천방지축이 되고 기분이 날 때는 확 했다가 또 안 해버리니까 뒤죽박죽되어 버린다. 이것은 연극을 한다든지 춤을 춘다든지 할 때는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야 된다. 오늘 이 약을 한 접시 드시고 가서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찬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그리스도 인격의 표시이다. 십자가 안에서 그는 깨끗하고 흠 없고 밝은 분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의 모든 부정이 다 씻어지는(청산하는) 분으로 드러났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머리는 차게 된다. 눈처럼 차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어떤 것이 없기 때문에 가슴은 뜨거운데도 머리는 차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다.
D. 눈이 불 꽃 같은 인자
눈이 불꽃같다고 했는데, 불꽃같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불꽃같은 눈으로 살핀다는 말을 많이 한다. 너무 눈이 밝으니까 부정의 여지가 없다, 안보이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오면 일곱 눈(5:6), 일곱 등불(4:5)로 묘사가 된다. 이것은 7배로 강화된 눈이다, 7배로 강화된 등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교회를 보살피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1) 교회를 위한 보살피는 눈(불꽃같은 눈으로)
그리스도의 눈은 첫째로 교회를 보살피는 눈이다. 불꽃같은 눈으로 부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탄이 침노하지 못하도록 살피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살펴지지 않으면 교회 안에 무엇이 들어오는지 모른다. 울타리를 쳐놓고 무엇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리 울타리를 잘 쳐놓았다 하더라도 눈이 동태눈깔 같으면 토끼가 들어오는지 사슴이 들어오는지를 모른다. 교회를 감시하는 눈은 불꽃같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은 백일하에 드러난다. 왜냐하면 한 번 죽고 다시 난 눈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의 세계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 조그마한 사망이라도 들어오면 금방 안다는 것이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담배 연기를 맡으면 금방 아는데 담배를 늘 피우는 사람은 모른다. 제주 공항에 가면 흡연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아 전 대합실에 담배연기가 은은하게 깔려있다. 그래서 한번은 제주 공항 투서함에 써놓았는데 고치치 않았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모른다. 항상 구정물에 살았으니 구정물인줄 알겠는가. 그런데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들은 금방 안다. 일부러 한번 흡연실을 들여다보았는데 내 눈으로 보아서는 아무 곳도 연기 나가는 곳이 없었다. 어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기가 안날수가 없게 되어있다. 그것을 감시할 사람은 나 같이 담배를 안 피는 사람인데 담배 피는 사람에게 감시를 하라고 했으니 연기가 나는지 안 나는지 모르는 것이다. 교회를 보살피는 주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이다.
2) 세상을 심판하는 눈
세상을 심판함에 있어서 불꽃같은 눈이다. 다니엘서 7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였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왕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단7:9-10) 이런 말이 나오는데 다니엘서에 있는 말을 계시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보살피고 심판한다. 교회를 보호하고 세상을 심판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교회는 보호하고 세상은 심판하는 눈이 필요하다. 영원한 생명은 보호하고 죽을 생명은 심판한다. 심판하는 그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교회 안에 들어왔으니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도 계속해서 세상의 것을 묻히고 살고 있으면 교회생활에서 빛이 나올 수 없다. 부정은 심판할 수 있어야 되고 긍정은 살려내고 옹호할 수 있어야 된다. 무엇을 살려낼 것이며 무엇을 없앨 것인가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내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내 인생에서 그리고 내 속에서 무엇을 살려야 하고 무엇을 없애야 할 것인지를 모르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이다. 공부하는 학생이 무엇이 답에 나올 것인지 무엇이 안 나올 것인지를 모르면 답에 나오지 않을 것만 밤새도록 공부하다가 다음날가면 자기가 공부한 것은 하나도 안 나오고 자기가 공부 안한 것만 다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딱한 사람이다. 자기 공부한 것은 안 나오고 자기 공부안한 것만 나오니 선생님하고 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잘 할 수가 없다. 공부를 잘하려면 자기가 공부한 것이 딱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건 선생님하고 마음이 똑 같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마음이 된다면 우리는 교회를 보살피고 세상을 심판하는 눈이 그와 같아지게 될 것이다.
E. 발이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은 인자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단10:6, 겔1:7참조). 이 주석은 놋을 의미한다.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그리고 발은 걸어가는 것이니까 시행하는 것, 행보하는 것을 말한다. 연단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내가 남을 심판하려면 내가 먼저 심판을 받은 사람이어야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남을 심판하려고 하기 때문에 “비판하지 말아라 비판하면 그 비판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하는 말이 나왔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자기를 모르고 남을 판단한다는 말이다. 판단을 하는데 알고 보면 그 판단이 자기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판단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자기는 남을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기를 판단하고 있다. “비판하지 말아라 비판하면 그 비판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자기가 판단을 받아버린 사람은, 판단을 받아서 고쳐진 사람은 남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판단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를 판단하고 있다. 그것만 안다해도 우리 인생이 얼마나 조용해지겠는가. 내가 누구를 판단할 때는 나를 판단하고 있구나 그렇게만 알면 판단하다가도 안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참 자기 일을 모르는 것 같고, 다 아는데 자기를 모르는 것 같다. 참 이상하다. 남을 판단하는데 그것을 자세히 듣고 있으면 그것이 자기인데 자기만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이 정말 안다고 할 것이 없는 것이 등하불명이라고 자기를 모르는 것이 사람인 것 같다.
핍박과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단련되셨다. 불속에서 연단되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심판받고 완전하게 검증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이 걸어가면 곧 그것이 심판이 되어 버린다. 진실이 있으면 거짓이 저절로 심판된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심판해서 심판이 되는 것은 심판이 안 된다. 내가 심판자로 있어 심판이 되는 것이 심판이다. 정말로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서 있으면 심판이 되는 것이다. 입으로 심판하는 것은 심판이 안 된다. 그러니 우리가 입으로 심판하는 일은 헛일이다. 왜냐하면 심판이 안 되니까. 내 행보자체가 심판이 되어야 심판이 되는 것이다.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으면 그것이 심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만을 나타내고 있으면 저절로 심판이 된다. 어떤 사람은 이를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할렐루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보고 뭐라 한 것도 아니고 저 사람보고 칭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좋다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보고 뭐라고 한 것처럼 욕한 것처럼 생각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런 일을 많이 당했다. 꼭 자기보고 뭐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기보고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도 자기보고 뭐라 한다고 한다. 이것이 심판이다. 우리가 심판이 검증된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또 어떤 발이 걸어가든지 거기서 더 이상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F.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은 인자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은 인자도 역시 에스겔서에서 인용한 말이다. 에스겔서 1장 24절을 보면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 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을 계시록 1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서 43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성경에서 많은 물소리 같다는 표현을 하나님의 음성을 표현할 때 그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전능자의 음성이고 이는 주로 심판할 때 사용했다. 그 많은 물소리가 들리면 다른 소리는 다 잠잠해져 버린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처음 가보니 그 소리가 너무너무 웅장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인지 골짜기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얼마나 웅장한지 주변의 모든 소리가 다 없어져 버린다. 완전한 심판이다. 이것은 전능자의 음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군대 같다고 하는데 이는 승리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조용했지만 그의 능력은 물소리 같았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뭔가 한다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지킨다는 사람들이 하나님 음성 앞에서 큰 물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들이 놀랬고 그들이 할 말이 없으니까 헛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은 그런 음성이었다.
G. 교회의 사자들을 쥐고 계신 인자
그리고 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있고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신 분이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이다. 이 일곱 교회의 사자들은 예수의 간증에 대한 책임자들이다. 보증인들이다. 예수님 자신이 이런 분이라는 것에 대한 보증인들이다. 오늘은 우리가 또 그분에 대한 보증인이다. 2000년 전에 예수님에 대한 보증인들은 사도들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만일 보증인이 없으면 예수님은 하나의 사형수로 끝나고 만다. 그는 보증인들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보증인이 되지 않는다면 그분은 또 사도들에 의해 증거되다만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분의 간증에 대해 책임을 지는 보증인들이 그분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그 말은 그분의 손에 항상 그분의 보증인들이 있다는 말이다. 내 손에 항상 돈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 통장에 항상 돈이 있으니까 그러면 절대로 안심이 된다. 그의 전능으로 증인들을 쥐고 있다. 보증으로서, 보증인으로서.
장로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요즘도 많이 쓰고 있다. 장로라는 말은 다소 법적이고 제도적인 말이다. 장로하면 영적인 생명에 관계된 이름이라기보다 법적이고 제도적인 이름이다. 그런데 별들이라 할 때는 전혀 법적이나 제도적인 개념이 없고 완전히 순수하게 그 어떤 성질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별들이라고 되어있다. 서신들에서는 장로, 감독, 집사,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요한계시록에 오면 장로, 감독, 집사, 이런 말들은 다 없어져 버리고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잡고 있다. 그 모든 것의 실재는 별이라는 그 말이다. 어쩌면 처음에 장로라는 말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장로도 빛나는 별이 아니면 섞어빠진 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별들이 실재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오늘 이 시대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법적인 제도적인 장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실재적인 별이 필요하다.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별이 필요하다. 지금 기독교 안에는 바로 그런 별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장로 되려고 선거니 투표니 하니까 언제나 별이 뜨려는지 암담한 현 실정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새벽별이시다. 그래서 어둠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은 어둠을 밝히는 별이 필요하지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장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H. 입이 이한 검이신 인자
입이 이한 검과 같다. 날선 검, 이한 검은 분별하고 심판하는 기능이다. 제사장이 제물을 다루려면 칼이 좋아야 한다. 칼로 살을 뜨고 뼈와 살을 완전히 갈라내어야 한다. 옛날에 고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 백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정말로 칼 다루는 것을 보면 뼈에 살이 하나도 붙지 않는다. 개가 발라먹으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다. 깨끗하게 한다. 바로 이한 칼이다. 아가서 5장 6절에는 “달콤한 입술이다 그 입에서 꿀방울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랑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4장 22절에는 “은혜로운 말씀이 그 입에서 나오더라” 이것은 은혜로운 공급을 의미한다.
계시록 1장에서는 “날선 검이다” 할 때는 심판을 의미한다. 소극적인 것들을 갈라내고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극적인 것들을 갈라냄으로써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교회에서 이런 소극적인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처리해서 갈라내는 것이 필요하다. 계시록 19장 15절에 보면 만국을 다스리는, 만국을 치는 이한 검이라는 것이 나온다. 그래야만 우리가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다. 우리 안에서 살인지 뼈인지 모르고 살면 세상에 나가 세상을 다스릴 수가 없다. 살과 뼈가 분명하게 갈라져야, 이한 검으로 갈라져야 내가 세상에 나갈 때 세상에 대해 통치자로 나가게 된다. 여러분이 직장에 나갔을 때 직장 안에서 여러분들은 제사장이다. 그 안에 부서장도 있고 과장도 있고 서열별로 다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들어갈 때 제사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제사장으로 인정해주어서가 아니라 나 밖에는 제사장이 없다. 아무리 봐도 직장에서는 제사장이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제사장 말단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가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내가 안하면 안되는데 어찌하겠는가.
거기서 내가 제사장 노릇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이한 칼이 되어서 나와야 분별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는 그냥 살아도 된다. 교회 안에서는 그럭저럭 묻혀 살아도 되고 따라 다니면서 살아도 되는데 내가 거기에 야전군 사령관으로 배치되어 섰을 때는 그래서는 전쟁이 안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들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 사람들의 구원의 기회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구원의 기회를 뺏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이한 검으로 오신 인자를 경험해야 된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 나갔을 때 제사장의 역할을 친히 감당하게 될 것이다.
I.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인자
얼굴이 해같이 빛나더라.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더라”. 아가서 5장 10절에는 얼굴이 “희고도 붉다”고 말했다. 생명이 넘치고 있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이런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 영광을 반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니엘서 10장 6절에는 “번개 빛 같다”고 말한다. 계시록 1장에는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더라” 이렇게 이야기한다. 마태복음 17장 2절에 가면 “그 얼굴에 해 같이 빛나더라” 하는 것이 나온다.
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뜻이다. 얼굴에 해 같이 빛난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무엇을 보고 왔는가? 얼굴이 해 같이 비추는 것을 보고 왔다.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은 것을 보고 교회로 온 것이다. 이 표현된 인격 이것이 땅을 정복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 가서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처럼 비췰 때, 그 때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과 우리가 처해있는 위치가 정복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세에 정복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영광에 정복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근심이나 하고 있고 이런 걱정 저런 걱정 하고 있고 기웃거리고 있으면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시커멓게 먹구름이 져서 해가 떴는지 안 떴는지 모르는 그런 날이 되고 말 것이다. 설사 속에 그런 것이 있다하더라도 세상에 나가서는 절대로 그런 척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해가 힘 있게 비추는 분을 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먹구름을 끼고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방금 나올 때 집안에서는 먹구름이 있었을지라도 밖에 딱 나오면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으로 나와야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진실하게 산다고 집안에서 먹구름이었는데 집안에서 나가면서 해가 비추는 것처럼 살면 가식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진실을 좋아하면 안된다. 바꿀 때는 바꾸어야 한다. 내가 전쟁할 때하고 집안에 있을 때하고는 얼굴을 바꾸어야 한다. 집안에 있을 때의 얼굴을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다음에 어찌되었든 간에 대상이 바꾸어졌을 때는 내 얼굴이 바꾸어져야 된다.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처럼!
J. 시작과 끝이신 인자
시작과 끝이신 분이고 처음과 나중이신 분이다. 이것은 처음에서 나중까지라는 뜻이다.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시작만 해놓고 끝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시작만 있고 끝만 있다는 이런 말도 아니고 시작에서 끝가지, “알파와 오메가요” 이 말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라는 말이다. A에서 Z까지라는 뜻이다. A에서 Z까지 하면 그 안에 B, C, D, E 등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나오기 위해서 얼마나 긴 A, B, C, D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이삭이 나오고 모세가 나오고 그 모두가 A, B, C, D이다. 그런 과정을 지나서 예수가 왔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 한 분을 볼 때 하나님은 정말로 처음과 나중이시구나.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누가 거기서 예수를 알 사람이 있겠는가. 아담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모양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했을 때 그것을 보고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겠는가? A를 배우면서 누가 Z까지 알았겠는가? 몰랐다. 그분은 A에서 끝나지 않고 B, C, D, E, F, G로 나가는 분이니까 결국 마지막에 Z까지 오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아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신 분이다. 무엇이든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없다. 과정이 있어 그런 과정을 거쳐서 되는 것이지 갑자기 무엇이 되는 법은 절대로 없다. 오늘 아침에도 어떤 학생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학생이 지금 많은 의문에 생겨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만 선생님도 대답을 다 못해주고 부모도 대답을 다 못해주어 의문이 풀려야 전진을 하겠는데 의문을 풀지 못해 전진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문이 하루아침에 풀리는 것이 아니고 그 의문이 풀릴려면 기초를 많이 쌓아서 마지막에 가서 의문이 풀리는 것이고 지금 기초를 공부하는 것은 그 의문을 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도 하지 않고 의문부터 풀려고 하면 안된다.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초적인 자료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어느 날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업적을 따게 되면 그 때야 풀릴 의문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해답이 없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 자기가 연구해야할 일이다.
오늘 우리가 처음이시고 나중이신 분을 자세히 보면 처음에 시작할 때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하고 시작하더니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가 딱 오더라는 것이다. 성경은 얼마나 앞과 뒤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성경은 한 사람이 기획하고 계획해서 쓴 책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나온 유산인데 이 유산이 한 줄기로 A에서 Z까지 왔다. 그것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성경이 귀한 책인 것을 알 수 있고, 이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길을 따라 간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 시작하는 것이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것이 반드시 마지막에 Z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 보여진다.
시작과 끝이신 분! 처음과 나중이신 분! 성취하시는 분!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있는 분이다. 전에 죽었었노라. 죽음(사망)을 정복한 생명이니까 이제 더 이상 죽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생명의 충만, 생명의 완전함(완성)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에 있다. 언제든지 항상 죽고 다시 산 것에서 완전함이 나온다. 창조가 그렇게 되어있다.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산 혼이 되게 했다”는 것이 끝이 아니다. 생명나무를 먹어야 동산을 지키고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또 다음 단계로 자꾸 넘어가야 된다.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 된다. 변화의 과정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옛것을 한편으로는 버린다고 생각을 해야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앞으로 전진을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도 지금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변화에 적응을 못하면 뒤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대구에 경기가 아주 좋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섬유산업이 주도하고 있던 사회인데 섬유산업이 중국이 밀려들어 오면서 하향 길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미 그 정보는 오래전부터 왔는데 설마 설마, 그래도 우선 우선 괜찮은데 하다가 마지막까지 미적거리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변화에 늦어버렸다. 딴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변화해 버렸는데 이제 있는 것 가지고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방법은 중국에 가서 헌 공장을 파는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세상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도 그렇고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세상이 급격히 변화한다고만 생각하지 하나님 나라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구멍이 뻥 뚫어져 내려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도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K.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제압하는 인자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제압하고 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했다. 사망과 음부는 사탄의 마지막 거점이고 사탄의 마지막 자기 집이다. 사망을 쓰레기라고 하면 음부는 쓰레기통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필요했다. 우리 인간에게 유산되어진 사망과 음부, 아담이후로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하던 것, 사람이기 때문에 안 된다 하던 것, 그렇게 했던 모든 것이 사망이 됐다. 음부가 사망의 쓰레기통이다.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 조건을 가지고, 나와 똑 같은 인간 조건을 가지고 이 사망과 음부의 세력을 물리친 것이 십자가이다. 이 부활로 음부의 세력을 제압하고 패하게 되었다. 부활 안에는 사망도 없고 음부도 없다. 부활생명 안에는 이제는 사망도 음부도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사망은 모두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보려고 생각하는 것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에서 왔다. 사람의 자리에 돌아왔을 때, 십자가 앞에 갔을 때 더 이상 사망과 음부는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생길 때 빈통으로 생겼다. 우리는 원래 생길 때 흙으로 생겼다. 사망이고 음부이고 생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해서 사망과 음부가 왔다. 원래 빈손이었는데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니 사망이 왔다. 망하긴 뭐가 망했는가? 원래 빈손으로 왔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을 해서 이렇게 까지 해 놓았는데 이렇게 허물어질 수가 있나? 이렇게 생각 하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이럴 수가 있냐? 이래서 사망이 오는 것이다. 그것 모두 다 자기가 할 만하니까 했지 못할 것은 한 것이 아니다. 사실 사망과 음부도 원천적으로 원인무효이다. 없는데 사탄이 와서 사람 속에 들어온 것이다. 십자가에 가면 다 없어져버리고 원인 무효된다.
인자로서, 사람으로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는 분명하게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증거이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증거이신 분을 봤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을 봤다. 옛날에는 하나님 아들하면 천사를 가리켜 말했다. 창세기 6장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할 때는 천사를 가리켜 말한다. 하나님 아들들 할 때는 천사를 가리켜 말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와 똑 같은 인성으로서, 우리와 똑 같은 인성을 가지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것을 보았다. 여기서 우리 인생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천사들은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너희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너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급에 속해있다, 우리보다 너희는 낮다고 항상 사람들을 유혹했기 때문에 오늘날도 사람들은 천사를 찾아다닌다. 천사같이 되려고. 벽 뒤에 누가 있는지 알려고. 투시를 하는 사람이 되려고 예언하는 사람이 되려고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이것은 모두 천사같이 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그런 것을 폐하고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증거이고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람으로서 신성이 충만하다. 이 생명으로 교회를 기르시는 것이다. 교회는 인성을 기르는 곳이지 결코 신을 접목시키는 곳이 아니다. 신이 돌아다니게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 오면 신이 있는 것처럼 마치 신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꾸며놓고 분위기를 조장해 간다. 이 얼마나 사기꾼들인지 모른다. 교회는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그리스도로서 조성되는 곳이다. 인격으로 조성된 곳이 교회이지 신기가 있으면 그것은 신당이지 교회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한국말로 하면 성황당이다. 예수 성황당이다. 교회는 예수 성황당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 안에서 온전하시다. 신으로 온전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으로서 온전하다. 심판하실 때 신으로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으로서 심판하신다. 신으로 심판하려면 진작하지 왜 지금까지 하지 않았겠는가. 인성의 심판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있는 것이다.
신으로서 전능하신 것이 아니고 인성으로서 전능하시다. 이 힘이 교회를 붙드는 것이다. 이 힘이 만국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 힘으로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 힘으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완성하는 것이다. 절대로 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그 육체 안에서 교회를 붙들고 만국을 정복하고 땅을 정복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완성한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보여진 소망이다. 예수를 믿으려면 그렇게 믿어야 된다. 예수를 귀신으로 믿으면 성황당을 찾아가는 것과 똑 같다. 예배당 찾아가는 것이 성황당 찾아가는 것처럼 으스스할 것이다.
세세토록 살아있는 분이다. 그 때도 인자이시고 지금도 인자이시고 장차 오실 때도 인자이시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더라고 했다. 인자가 오시더라고 되어있지 신이 오시더라고 되어있지 않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이 있다고 말했지 신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 없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은 인자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너무 소중한 일일 뿐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이 시간을 이 기간을 이 세대를 가장 귀중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한다는 것은 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으로 만들었지 영혼으로 만들어놓았는가.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이것이 가장 값지게 하나님의 목적대로 완전하게 살아져야 한다. 죽은 후에 영이 빠져 나가는지 안 빠져 나가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설사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목적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죽어서 영과 혼이 분리되어 영은 하늘로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다른 것이다. 거기에다 무슨 축복을 해 놓았다는 말이 없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거기에 대한 축복이 없다. 모든 축복은 인성 안에 있다. 사람 안에 축복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버리게 만들고 죽은 후의 내세, 천당을 찾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질문이 제일 많은 것이 천당이다. 천당이 있느냐 없느냐는 이 말은 죽은 후에도 내세가 있느냐 없느냐는 이 말이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영이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말도 들어있다. 답답한 질문을 계속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놓았다고 했는데도 계속 그것만 찾고 있다. 하나님이 지어놓은 것은 버리고 하나님이 안 지어놓은 것만 찾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살아서 영원이 안 죽고 있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할 때 거기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자로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약속이 있다.
영원한 왕이신 인자! 영원한 제사장이신 인자! 왕 같은 제사장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구속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살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로 성취될 것이고 그분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분에 의해서 모든 것은 해답이 되어질 것이고 그분 안에 모든 축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등대 사이에, 교회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왔다 갔다 하시더라. 오늘도 우리 교회 안에는 바로 인자가 계시지 결코 여기는 유령이 없다. 절대로 유령이 없다. 절대로 여기는 유령 돌아다니는 곳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발도 뻗고 있지 유령이 있는 곳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큰일 난다. 귀신이 여기 있으면 함부로 앉아있으면 되겠는가. 그냥 앉아 있다가 가면 되겠는가. 큰일 난다. 귀신 있는 곳에 왔으면 나갈 때도 조심해야 되고 들어갈 때도 조심해야 된다. 정말 조심 많이 해야 된다. 우리 영광이가 으스스하다는 말을 배워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왠지 으스스해진다는 그런 동화가 있다. 그럴 때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최고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바깥에서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나서 문틈으로 내다봤더니 도깨비들이 오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동화나라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항상 예배당에 가면 으스스한 것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로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고 교회이다. 교회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절대로 으스스한 곳이 아니고 도깨비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정말 사람이 있는 곳이다.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이 완성되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지켜야 되고 우리는 이것을 전파해야 된다. 그래서 이 사람을 구원해야 된다. 이 세계를 조성해가야 된다. 이 세계를 펼쳐나가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