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曺雲)의 「石榴(석류)」 조 동 화(시인)
조운은 1900년 6월 26일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면 도동리 136번지에서 아버지 창녕조씨(昌寧曺氏) 희섭(喜燮)과 어머니 광산김씨(光山金氏)의 1남 6녀 중 다섯 번째로 출생했다. 본명은 주현(柱鉉)이었으며, 1940년에 필명인 운(雲)을 본명으로 개명했다. 생모인 광산김씨는 소실이었고, 본처의 소생으로 2남이 더 있었다고 한다. 1917년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립목포상업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동갑내기인 김공주(金公珠)와 결혼했다. 1919년 1월 6일 장녀 옥형(玉馨)을 낳았고, 이어서 공립목포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이해에 3․1독립운동에 가담했는데, 『전라남도지』‘영광의 독립운동’ 편에 보면, 당시의 지도인물로 조운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4일 5백 명, 15일 1천 오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 후 일경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고, 설상가상으로 5월 21일에 장녀 옥형이 사망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뜻밖에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을 만났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문단 활동에 중대한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후 둘은 줄곧 의기투합하여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더불어 떠돌았고, 금강산과 황해도 해주, 개성 등지의 고적도 함께 답사하였다. 1921년 귀향하여 이듬해 차녀 나나(那那)를 얻었고, 매부 위계후(魏啓厚)를 중심으로 영광의 지도자들이 설립한 사립영광학원 국어교사로 취임했다. 이때 『자유예원(自由藝苑)』이라는 향토문예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지방문예부흥운동의 선구이자 효시였다. 1922년 10월에 시조동호회인 추인회(秋蚓會)를 창립했다. 회원 30명이 월 1회 창작시조를 발표하여 등사판 시조집을 간행하는 한편,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문맹퇴치, 물산장려, 외화배척 등의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신재효(申在孝)의 판소리 여섯 마당의 발굴 및 복원에도 힘썼다. 이 무렵 추인회의 초청으로 가람 이병기가 종종 영광을 내왕했는데, 이처럼 모임이 활성화되자 일경의 탄압을 받게되어 결국 이듬해 해체되고 말았다. 1924년 『조선문단』서 일하고 있던 서해 최학송과의 우정이 계기가 되어 동지에「초승달이 재 넘을 때」등 3편의 자유시를 발표했고, 이 해 11월에 부인 김공주와 협의이혼을 했다. 1925년 3월에 근무하고 있던 영광중학교가 폐쇄되고, 9월에는 와병으로 고창 선운사에서 요양하다가 향리 구름다리(도동리)로 돌아와 투병생활을 계속했다. 1927년 그 동안의 오랜 우정의 결실이라 할 서해 최학송과 그의 한 터울 밑 누이인 조분려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 해에 가람 이병기를 초청하여 5일간에 걸쳐 한글강습회와 시조강좌를 개최했고, 가람과 더불어 불갑사 해불암, 선운사를 돌아보았으며, 부안 변산 등지를 돌며 매창의 묘와 문화유적지를 답사하기도 했다. 1928년에 영광보통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던 두 살 연하인 27세의 노함풍(魯咸豊)과 재혼을 하여 고른 터울로 장남 홍재(泓載)를 비롯하여 차남 청재(淸載), 3남 명재(溟載)를 얻었다. 1934년 2월 영광에서 항일민족자각운동의 일환으로 독서회인 갑술구락부(甲戌俱樂部)를 결성하여 그 회장에 취임했다. 이 회는 고서화전람회, 문학강연회, 무용의 밤, 고전음악의 밤, 소인극회 등을 열어 민족문화운동을 주도했다. 1937년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는 당시 영광의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된 영광체육단이 장성, 고창, 정읍 등 이웃 군과 연합운동회로 확산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할 기미를 보이자 ‘동방 약소민족 옹호’와 ‘대한독립만세’라는 전단을 거리에 붙였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그 주동인물들을 구속한 사건이었다. 1941년 조선식량단 영광출장소 서무계장으로 재직했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영광민립중학교(영광종합고등학교) 설립 전 기구인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를 결성하고 그 회장에 취임했다. 1947년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하여 그 해 5월에 『조운시조집』(조선사)을 간행하는 한편, 동국대학에 출강하여 시조론 및 시조사를 강의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49년 가족과 함께 월북(越北)한 것을 끝으로 그의 연보(年譜)는 더 이상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의 뇌리 속을 강하게 스치는 의문은 그가 왜 남쪽을 등지고 월북했는가 하는 점이다. 연보를 일별(一瞥)해 보면 그는 누가 뭐래도 이 땅의 선각자(先覺者)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였음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리고 그의 정신의 소산물인 작품 어디를 보아도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로서의 면모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족과 함께 월북(越北)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니, 반세기 저 편의 이 미스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194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대로 이 시기는 찬탁(贊託)과 반탁(反託),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의 대립, 여러 민족지도자들의 암살(暗殺) 등으로 대변되는 혼란기(混亂期)였다. 이런 와중에서 이 땅의 선각자였던 그로서는 민주주의(民主主義)를 표방하는 남쪽이 구제불능(救濟不能)의 진흙탕 속으로 보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반면 공산주의(共産主義)를 표방하는 북쪽이야말로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한 미래의 천국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그에게 있어 월북은 한 필연적 운명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 선택은 그의 개인적으로나 그의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공히 크나큰 불행이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고향에 안주하고자 했던 백석(白石)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개성(個性)의 발현(發顯)을 거부하는 북쪽에서는 그의 참 문학을 더 이상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또 한국 현대시조사(現代時調史)에 굵은 획을 그은 『조운시조집』이후로는 더 이상의 시조집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石榴(석류)」전문
보는 바대로 이 작품은 단수다. 조운의 작품 가운데서 만인이 한결같이 칭송하여 마지않는 「구룡폭포」 대신 굳이 이 작품을 택한 이유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구룡폭포」가 시조의 변격(變格)이라 할 수 있는 사설시조(辭說時調)인데 반해 이 작품은 시조의 정격에 해당하는 평시조라는 점이고, 둘째는 짧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보법(步法)이 산처럼 장중(莊重)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마치 활화산의 분화구에서 치솟는 용암을 목격하는 듯 강렬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장중한 보법과 강렬한 이미지는 아무 시인의 작품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바는 아니다. 그의 「時調 한 章」이라는 작품을 보면, ‘손가락 모돠 쥐고 / 비비다 꼬다 못해 ∥ 질항을 버쩍 들어 / 메부치는 마음으로 ∥훤한 들 바라다보며 / 시조 한 장 / 부른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시조 한 수를 지음에 있어서도 질항아리를 번쩍 들어 메다꽂는, 다부진 마음으로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조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당찬 마음이 이루어낸 보석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구성을 편의상 기(초장)-서(중장)-결(종장)로 나누어 살펴보면, 기(起)는 ‘투박한 나의 얼굴 / 두툴한 나의 입술’이라고 하여 석류의 외양을 그린 부분으로 거두절미(去頭截尾) 단도직입(單刀直入)의 단호한 내디딤이다. 이에 비해 이어지는 서(敍)는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라고 하여 보다 완곡하고 부드러운 동양적 겸양(謙讓)의 미덕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급기야 결(結)에 이르러서는 일대 전환을 꾀하는데 ‘보소라 임아 보소라’가 곧 그것이다. 임을 높이면서도 듬뿍 정감이 느껴지는 하오체의 ‘보소라’를 대뜸 도치(倒置)로 놓아 역동적 효과를 내면서 마지막 결구 ‘빠개 젖힌 이 가슴’이라는 할말을 놓치지 않고 배치하고 있다. 요모조모 샅샅이 뜯어보아도 흠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는 실로 오묘하고도 완벽한 짜임새라 하겠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이 작품의 내용을 재구(再構)해 본다면, ‘투박한 나의 얼굴 가운데서 두툴한 입술 사이로 내다보이는 내 속을 보아주십시오. 홍보석처럼 맺힌 이 마음을 거룩한 임 앞에 속된 말로야 어찌 다 이르겠습니까. 알알이 붉게 익어 내다뵈는 그대로가 한 점 거짓도 없는 나의 진실이오니, 참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아는 임께서 직접 보아주십시오. 그리고 내 불타는 마음을 부디 알아주십시오.’라는 정도의 의역(意譯)이 가능할 것이다. 「石榴」를 읽음에 있어 우리가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이 작품의 구조가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수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곧 작품 속의 화자(話者)인 ‘나’가 석류(石榴)이자 시인 자신으로 동일시되어 있는 그것이다. 이 경우, 일차적으로 노래한 사물의 속성이 전편을 통해 한 편의 시로서 승화되어야 하고, 이차적으로는 감정이입된 ‘나’가 또한 그에 어그러짐 없이 포개져야 한다는 사실이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사물과 나의 완전무결한 합일(合一)에 거뜬히 도달해 있고, 그러기에 또한 한국 현대시조에서 둘도 없는 명편(名篇)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감정이입이라는 면에서 보면 그의 작품 「부엉이」도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꾀꼬리 사설 / 두견이 목청 / 좋은 줄을 누가 몰라 ∥ 도지개 지내간 후 / 쪼각달이 걸리며는 ∥ 나는야 / 부엉부엉 울어야만 / 풀어지니 그러지.’라고 되어 있는 이 단수 역시 「석류」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부엉이이면서 곧 시인 자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에 볼 것은 이 단수에 단 한 번 등장하고 있는 ‘임’의 정체(正體)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서문 「군말」에 보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평자들은 진작에 그의 시 도처에 보이는 님을 조국, 민족, 부처, 절대자 등으로 가닥을 지은 바 있지만, 이 「석류」에 나오는 ‘임’이 비록 그처럼 포괄적(包括的)이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조국이나 민족 정도의 의미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월북하기 전까지의 행적을 보면 당시 영광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민족주의자요 또한 애국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자신의 충정(衷情)을 몰라주는 경우도 적잖이 겪었을 터, 그 더없이 억울한 상황에서 익어서 터진 석류를 보는 순간 이 빛나는 작품은 마침내 세상에 황홀한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石榴」 속의 ‘임’은 곧 민족 내지 겨레일 개연성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石榴」가 보여주는 감정의 추이(推移)는 결국 답답한 마음의 하소연이다. 이러한 감정의 처리는 고시조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가령 작자 미상의 사설 시조에 “개야미 불개야미 잔등 부러진 불개야미 앞발에 정종(疔腫) 나고 뒷발에 종기 난 불개야미 / 광릉 샘재 너머 드러 가람의 허리를 가르 무러 추혀들고 북해(北海)를 건너닷 말이 이셔이다 님아 님아 /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님이 짐작하소서”라 한 것이 있다. 이것을「석류」와 비교해 보면, 저것이 진지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인데 반해 이것은 해학적(諧謔的)인 과장(誇張)이라는 점이 다를 뿐 나의 진실을 알아 달라는 감정만은 거의 동일하다고 하겠다. 조운의 시조는 그 평가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미완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자진 월북한 탓으로 그의 작품들이 뒤늦게 해금의 햇살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구룡폭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시조이나 그의 작품에서는 유일무이한 사설시조이니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의 면목을 약여하게 보여주고 있는 단수를 중심으로 두어 가지 특징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선 조운 시조의 장기(長技)는 절묘한 장면(場面)의 포착(捕捉)에 있다고 하겠다. 그의「상치쌈」이라는 작품을 보면, “ 쥘상치 두 손 받쳐 / 한입에 우겨 넣다 ∥ 희뜩 /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 흩는 꽃 쫓이던 나비 / 울 너머로 가더라” 라고 되어 있는데 이 얼마나 리얼하고 극적인 장면의 포착인가! 이런 점은 “무꽃에 번득이든 / 흰나비 한 자웅이 ∥ 쫓거니 쫓기거니 한없이 / 올라간다 ∥ 바래다 / 바래다 놓쳐 / 도로 꽃을 보누나”라 한 「무꽃」, “梅花 늙은 등걸 / 성글고 거친 가지 ∥ 꽃도 드문드문 / 여기 하나 / 저기 둘씩 ∥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이라 한 「古梅」, “빈 방만 여기고서 / 함부로 수뚸리든 ∥ 처마에 새 두 마리 / 기침에 달아난다 ∥ 열적어 / 나려지는 먼지만 / 물끄러미 보노라.”라 한 「獨居」, “잠꼬대 하는 설레에 보던 글줄 / 놓치고서 ∥ 책을 방바닥에 / 편 채로 엎어놓고 ∥ 이불을 따둑거렸다 / 빨간 볼이 예쁘다.”라 한 「잠든 아기」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눈에 띈다. 이런 시조들을 곰곰이 읽어 가노라면 그는 참 빼어난 사진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극적인 장면들의 포착이 어쩌면 이렇게도 멋들어지단 말인가! 또 하나 조운 시조의 장기는 그 탁월하고도 예리한 감각일 것이다. 흔히 자유시에서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로 정지용을 꼽고, 그의 「春雪」이라는 시에 나오는 “문 열자 선뜻 / 먼 산이 이마에 차라.”는 구절을 예로 들지만, 우리는 조운의 시조에서도 실로 예리한 감각을 접하게 된다. 먼저 그의 작품 「菜松花」를 보자. “불볕이 호도독호독 / 내려쬐는 담머리에 ∥ 한 올기 菜松花 / 발돋움 하고 서서 ∥ 드높은 하늘 우러러 / 빨가장히 피었다.”에서 절로 눈이 아려오는 초장의 표현은 정말 대단한 감각이다. 이것은 이른바 ‘불볕’이라는 시각을 ‘호도독호독’이라는 의성어로 청각화한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이지만, 우리나라 신문학의 초창기에, 그것도 일반적으로 고루하리라는 선입견이 강하던 당시의 시조에서, 이런 발군(拔群)의 감각을 구사했다는 것은 직접 보았기에 망정이지 보지 못한다면 누구도 믿기 힘든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이런 탁월한 감각은 그의 작품 「눈」에서 다시 한 번 목격된다. “뺨에는 이슬이오 / 가지에는 꽃이로다 ∥곱게 쌓여 노니 미인의 살결일다 ∥ 비단이 밟히는 양 하이 / 소리조차 희고나.”에서 종장을 보라. 「菜松花」의 초장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시각을 청각화한 공감각적 표현으로 싱싱하기 이를 데 없는 가구(佳句)다. 1947년에 『조운 시조집』을 펴내, 이 한 권의 시조집을 우리에게 남기고 그로부터 2년 뒤 산 채로 영이별을 고했지만, 그는 우리 현대시조의 탑에 누구보다도 빛나는 보석들을 쌓아놓고 갔다는 사족(蛇足) 하나를 첨기(添記)하며 이만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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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십년전에 이런 어휘를 구사하며 시조를 쓰신 조운 선생님의 필력이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