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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장)
51. 베다니의 전환(10:40-42)
2012년 05월 20일(일,가창)
(요10:40~42)
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생명의 번식을 위한 한 알의 밀’이라는 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다.
‘베다니의 전환’ 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베다니의 전환’이라고 그렇게 기억하자.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요단강 저편 베다니로 가셨다.
1장 28절에 보면 베다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 곳은 세례 요한이 맨 처음에 세례를 주던 곳이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곳이다. 베다니는 두 군데가 있다.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가 있고, 여기에서 말하는 베다니가 있는데 이 곳은 요단강 저편이니까 본토에서 조금 떨어진 베레아 지방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 사는 곳이다. 유대인들만 있는 본토인 예루살렘에서는 배척을 받으시고 이렇게 잡종이 섞여 사는 그런 세계로 피란을 가신 셈이다. 10장 마지막에 보면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가시니라.’ 했듯이 핍박을 피해서 가신 곳이 베다니다.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는 강을 건너서 베다니로 가셨다.
베다니는 요한이 처음으로 침례를 주던 곳이며 예수께서 침례 받으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셨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나는 그의 신 들메도 감당치 못 한다”,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는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다.” 라고 하는 침례요한의 증거를 받았던 곳이다.
베다니는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던 곳이고, 예수께서도 거기서 침례를 받으셨던 그런 곳인데 거기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증거를 받으셨다.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나는 그의 신들매도 감당치 못하겠다.’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는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다.’ 이렇게 세례 요한이 증거를 했던 곳인데 여기서 4개월 정도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침례요한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전에 반드시 다시 올 것이라 믿어졌었고, 예수께서도 친히 그렇게 증거 하셨다. (말4:5,마11:10) 그러므로 그의 증거는 예수의 사역을 크게 고무시켰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누군가 하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엘리야가 올 것이다. 엘리야가 온 후에 그리스도가 올 것이다.’ 이렇게 예언되었던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하는 사람이다. 죽지 않고 승천했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렇게 증거했다. ‘너희가 믿는다면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엘리야가 바로 이 사람이다.’ 그렇게 증거했던 그런 사람이다. 그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증거는 처음 사역을 출발할 때 예수의 사역을 크게 고무시켰을 것이다.
또한 하늘 아버지의 증거는 성령이 그 위에 비둘기처럼 머무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확인하신 것이었다.(마3:16) 이것은 공식적인 기름부음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이 증거를 받고 메시야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베다니는 예수의 사역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증거는 성령이 그 위에 비둘기처럼 머물렀다.’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렇게 말씀했다는데 이것 역시 아들로서 확인을 받으신 그런 말씀이고 공식적인 기름부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똑 같은 사람인데 이 때 소명(召命)을 받고 자기가 비로소 메시야라는 자의식(自意識)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물론 이것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만큼 중요한 장소이고 때고 그렇다. 베다니는 예수 사역의 시발점(始發点)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면초가가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선지자의 격려를 받았던 사역의 시발점인 베다니로 가신 것 같다. 다시 격려를 받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의외로 침례요한의 증거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는 것이다. 핍박을 받으시던 예수께서는 잠시나마 큰 위로와 격려를 받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 때 사면초가가 된 셈이다. 사방에서 죽이려고 하니까 사면초가가 되신 예수는 하나님과 선지자들의 격려를 받았던 사역의 시발점인 베다니로 가신 것 같다. 우리도 그럴 것인데 만약 우리가 핍박을 받는다면 우리를 환영했던 그리고 뭔가 우리의 사역을 고무시켰던 그런 곳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발점인 베다니로 가셨던 것이고 거기서 다시 격려를 받고 힘을 다시 보충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의외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았던 사람들이 와서 믿었다는 것이 지금 여기의 내용이다. 이렇게 볼 때 핍박을 받았던 예수는 거기서 크게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추측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주님을 접한 사람들 중에는 믿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있다 해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육체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믿고 영접한다 해도 생명은 하나 되지 않는다. 생명이 하나 되지 않으면 여전히 물과 기름이다. 반대는 더욱 심해갔고 이제는 영접하기는 커녕 죽여 없애려고 모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주님을 접하는 사람들 중에는 믿는 사람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육체가 된다고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요지다. 그래서 전환(轉換)이 필요하다. ‘인간이 아무리 믿고 영접한다고 해도 생명은 하나가 되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경험하고 있다. 아까 뉴욕에서 오신 형제님이 말씀하신 내용도 바로 그것이다. 분명히 믿고 영접해도 뭔가 안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생명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새를 보고 내가 믿고 영접하고 존경하고 아무리 해도 내가 날 수는 없다. 행글라이더를 만들어서 흉내도 내 보고 이렇게도 하지만 역시 새는 아니다. 생명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여전히 물과 기름이다. 이것이 종교의 문제이고 한계점이다.
믿음이 없어서, 영접하지 않아서 하는 것은 아주 초보적인 이야기이다. 정말로 믿고 정말로 영접해도 안 되는 데가 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해도 반대는 더욱 심해져 가서 이제는 영접하기는 커녕 죽이려고 모의를 하게 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믿고 영접한다’는 거기서 끝나면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더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안 되는 것이 생겨서 믿음의 한계가 생긴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여호와께 대한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강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은총 위에 또 은총을 베푸시고 천하에 없는 선지자를 보내서 더 없는 증거와 말씀을 주었어도 그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변질시키고 자기방식으로 받음으로써 왜곡(歪曲)시켜 버렸던 것이다. 한 생명이 아닌 한, 인간의 믿음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세계 어느 민족보다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유대인들은 나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많이 받아왔는데 사실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아주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강한 사람들로 이 사람들을 따라갈 사람들이 없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이 사람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했어도 그들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은총 위에 또 은총을 주고 또 베푸시고, 천하에 없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 말씀을 주고 했어도, 믿기는 믿었지만 듣기는 들었지만 자기를 위해서 변질시켜 버렸다. 그들에게 들어가면 다른 것이 되어 나왔다. 다시 말하면 원래의 것을 왜곡시켜 버렸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주었어도 자기들대로 믿어버렸고 자기들대로 소망을 가져버렸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한 생명이 아니면 믿음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기초적으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기초적으로는 그를 환영하고 영접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까지 오고 말아버리면 미성숙아가 되고 마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다. 오늘날 기독교는 믿음도 있고 영접도 있고 충성도 있고 다 있는데 어떤 한계에 걸려 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크신 일을 친히 본 백성이었으나 그의 영원한 나라가 되지 못했다. 예수님 역시 그가 많은 일을 행하셨으나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는 믿지 않았다. 혹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열광적으로 믿었다 해도 그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건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크신 일을 친히 본 백성이다. 그들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역사다. 우리 한국과는 아주 다르다. 아마 유태인들이 우리처럼 8.15해방을 받았다면 그들은 우리처럼 해석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해방시켰다고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와가 없으니까 그 날에는 분명히 감격을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8.15해방 기념식도 두 군데서 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과는 질이 다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 밖에 없는 사람들 여호와 외에는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던 그런 백성이었다. 여호와의 큰 일을 본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영원한 나라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이고 충성을 다하고 죽음으로 계명을 지킨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영원한 나라가 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님 역시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행했고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줬지만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열광적으로 더 열심히 믿었다고 해도 그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건축할 수는 없는 믿음이다.
오늘 기독교 안에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대단한 역사가 많이 있다. 조지 뮐러 한 사람이 걸어간 길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책이 있는데 굉장히 두껍다. 한 사람인데 그 정도니까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능력과 역사가 일어났겠는가! 엄청난 일이 일이 일어났다. 그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큰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연합(聯合)이나 건축(建築)은 안 된다. 여기에 한계(限界)가 있다. 믿음도 있고 능력도 있고 역사도 있고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건축은 안 된다.
그런 것에서 유명한 사람은 너무 많다. 빛을 남긴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 유산 속에 너무 너무 많다. 너무 놀라운 일들이 많으니까 그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이 안 된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 잘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부분적으로 있어도 연합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꼭 주의해야 한다.
믿고 받아들임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계가 있었다. 또한 믿음의 세계에는 통일이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찬성과 반대 두 편으로 갈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하나다. 그러므로 건축을 위해서는 믿음보다 생명이 더 온전하다.
믿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계가 있다. 얼마나 믿어서 온 세계 인류가 다 믿겠는가? 또 얼마나 잘 믿어서 하나님이 원하는 만큼의 그 질적인 믿음이 되겠는가? 둘 다 한계가 있다. 아무리 예수를 전파해도 전 인류가 기독교를 다 믿지 않는다. 다 죽여 버리고 없애버리고 기독교만 남겨 놓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질적(質的)으로도 한계가 있지만 양적(量的)으로도 역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온 세계를 덮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또한 믿음이라는 세계는 통일(統一)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 통일이 불가능한가 하면 믿음에도 다 차별이 있고 등급이 있고 다름이 있고 각 종교마다 믿음이 다르니까 그 믿음이라는 것에는 통일성이 없어서 어차피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언제 어떤 믿음이 하나 생기게 되면 찬성과 반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면 안 믿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믿어라!”하면 “못 믿겠다.”는 반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100%가 다 믿겠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100%가 다 안 믿겠냐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믿지만 어느 부분은 안 믿는다. 항상 찬성과 반대가 갈라지게 마련이다. 예수님 자신이 와서도 그런데 우리가 하면 더군다나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하나다. 이 하나의 세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제 우리에게는 믿음의 세계도 영접의 세계도 다 지나왔다. 우리 스스로가 다 그렇게 해봤다는 것이 아니라 해본 분도 계시고 안 해본 분도 계시겠지만 시대(時代)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너본 것이 아니지만 그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 태어난 사람은 홍해를 건너볼 수가 없지만 이미 벌써 그 시대는 지나갔다. 짚세기 신었던 것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었지만 지나갔으니까 지금 다시 짚세기 신고 다닐 수는 없다.
많은 기독교인 가운데서 잘 믿었던지 못 믿었던지, 어떤 사람은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 믿음도 무엇도 아닌 것을 한 사람도 있고 빌빌한 사람도 많지만 이미 시대는 지나갔다. 일제 시대 안에서 친일파도 있고 애국자도 있었지만 그 시대는 이미 벌써 지나갔다. 지금 그 소리를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역사는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믿음의 시대를 다시 또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다 해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 온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유대인들의 충성 이상으로 할 수 없다. 최고의 절정에 도달한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만큼 충성스럽고 그 사람들만큼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을 백성은 이 지구상에는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나타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은 그 세계로서는 하나가 안 되고 건축이 불가능하다. 믿고 받아들임에는 한계가 있어서 통일이 안 되고 건축이 불가능하니까 믿음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나빠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으로는 건축은 안 된다.
어린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단계가 있는데 그 단계들은 다 중요한 것이라서 없으면 안 될 단계들이다. 그렇지만 그 단계에서 머무르면 안 되고 거기서 앞으로 더 전진해서 성장을 해야 한다. 어떤 아이는 기지 않고 서는 아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린 아이가 기지 않고 설 수는 없으니까 기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기지 않고 설수는 없는데 기는 행동이 나쁜 행동이냐 하면 나쁜 행동이 아니고 하나의 단계다. 기는 단계, 앉는 단계, 그 다음에 서는 단계, 뛰는 단계다. 우리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경륜의 세계도 단계가 있다. 한 단계에서 믿음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는 그 믿음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러면 인간 가운데 어떤 사람이었든지 간에 그 중에서 누군가가 그것을 최대한으로 받아들여서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고 그 사람을 통해서 최대한 발휘되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모든 민족이 다 거기까지 가도록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왜 끝까지 다 하지 않고 하고 말고 하고 말고 하느냐’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모든 백성이 다 믿음이 100%가 될 수 없다. 그 중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의 한계가 있다. 그 한계가 누구한테 차면 그 다음에는 통과하여 전 인류가 그 속에서 통과된다.
우리 교회도 어느 단계에 가는데 거기서 빌빌거리고 있으면 참예 못하고 느껴보지 못한 채로 따라가야 하니까 제 밥그릇 제대로 못 얻어먹고 가야한다. 왜냐하면 행군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나 혼자 그 밥을 다 찾아먹고 갈 수 없다. 계속 가야하기 때문에,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다 찾아먹도록 기다릴 수 없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하지 그렇지 않으면 가면서 다른 사람은 쌀밥 먹고 있는데 나는 보리밥 먹고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진행을 하여 해방 이후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데 이 변화 속에서 최첨단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고 저 밑에서 아직 조선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가기는 간다. 시골의 할머니도 고무신 신고 다니지 짚세기 신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가기는 가는데 어떤 사람은 최첨단의 것을 누리고 가고 어떤 사람은 최하위의 것을 누리고 간다. 개별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떠밀려간다.
그래서 이제는 건축을 향해서 가는 시대가 왔다. 그러면 이제는 건축이 되어야 하지 안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최종적인 목표가 보이기 때문에 그 전에는 믿음도 참 중요했고 영접하는 것도 참 중요했고 다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만나를 받아먹으러 나가려면 지금 같으면 고무다라이 같은 소쿠리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유대인들이 소쿠리 가지고 나가서 만나 담아서 왔다고 지금도 그것을 준비하고 있으면 안 된다. 지금은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 지금 내리는 것을 받아 먹으려면 그 그릇을 가지고는 안 된다.
막걸리 먹을 때 뚝배기는 아주 좋았고 운치가 있었지만 지금 양주시대가 왔다면 뚝배기를 가지고는 얻어먹지도 못한다. 얻어먹으려면 그래도 양주잔을 가지고 가야 줄 것이다. 시대가 지금 그렇게 바꿔지고 있다.
믿음이 아니어서라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 단계에서만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계속 필요한 것은 아니다. 건축을 위해서는 건축을 위한 경륜이 필요하다. 믿음이나 영접은 기초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시대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것을 다 보지 못하고 간 사람이 수없이 많다.
물론 그렇게 되면 열매를 맺을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충실히 다 먹고 가는 놈하고 그냥 못 먹고 간 놈하고 마지막에 차별이 생길지 안 생길지 그건 내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대추나무를 보면 마지막에 가면 다 똑같이 익는데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대추나무는 대추가 이만큼 열렸는데 이제 꽃 피는 놈이 있어서 그것이 언제 따라 갈지 싶은데 가을 가면 다 빨갛게 다 익어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기하고 다 모르지만 우리로써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빌빌거리다가 ‘가을에 가면 익을 텐데 뭐! 죽을 때 가서 믿으면 되지 뭐!’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건축을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행하심의 사역에서 생명의 번식의 사역으로,
보여주고 함께 하는 사역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역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생명은 믿어질 뿐 아니라 연합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번식은 믿음을 완성한다.
그러므로 ‘행하심의 사역’ 즉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보여주고 믿게 하고 이런 사역을 행하셨는데 여기에서 ‘생명의 번식의 사역’으로 사역을 옮겨야 한다. ‘보여줘서 믿게 하는 사역’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역’으로 바꿔져야 된다. 이것이 전환이다.
생명은 믿어질 뿐만 아니라 연합이다. 생명 아닌 것도 우리가 믿을 수는 있다. 갓바위 부처님도 열심히 믿는 사람은 너무나 열심히 잘 믿지만 연합하고는 다르다. 생명은 연합이 되기 때문에 믿어진다. 생명의 번식은 믿음을 완성한다! 이렇게 볼 수 있다.
믿음이 왜 완성이 안 되나?
믿고 영접하고 기도하고 충성하고 했는데 왜 결론이 안 나고 왜 열매가 안 맺어지나?
그것이 모든 종교의 고민이고 기독교의 고민이다. 생명이 올 때 그것이 완성된다. 그 때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모두 완성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약의 잠자던 성도들이 다 일어난다’고 되어 있다. 왜 그런가? 무엇인가 완성될 때 한꺼번에 다 살아난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하던 일이 박사 학위를 받을 때 다 완성된다. 초등학교 1학년 공부하고 그만두면 그것을 왜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 소용이 없다. 초등학교 공부 끝내고 나와서 아무것도 공부 안 해 버리면 더군다나 우리나라 같으면 뭐 때문에 6년 동안 가방 들고 돌아 다녔는지 모른다. 완성점에 가야 이제 ‘아~ 이래서 그것이 필요했구나!’하게 된다.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하는데, 초등학교 1학년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받겠는가? 못 받는다.
그러니까 자꾸자꾸 단계를 전환해야 완성에 이르는 것인데 믿음은 언제 완성될 것인가? 생명의 건축이 이루어질 때 그 때 완성되어진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믿음의 과정에서는 믿음이 있어야 되고, 영접의 과정에서는 영접이 있어야 되고, 과정 과정을 다 이수해야 되는 것이지 이수 안 하고 건너뛰어서는 대학원에 갈 수 없으니까 사역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 사역의 전환을 위해서 사역의 시발점이었던 베다니를 다시 찾으신 것 같다.
이 사역의 전환의 시발점인 베다니를 찾았던 것이다. 이것도 내 생각이다. 예수님은 핍박이 오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뭔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 때 뭔가 고민이 안 생겼겠는가? 그냥 하늘에서 쭉~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예수님도 ‘왜 이렇게 안 되는가?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는가?’라는 인간적인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발점을 위해서, 다시 재충전을 위해서, 다시 격려를 받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고 또 거기 가서 뭔가 새로운 구상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대통령 같은 사람이 일을 한참 하다보면 일이 헝클려져서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진해에 있는 대통령 별장(別莊)으로 간다. 제주도 가면 이승만 별장이나 박정희 별장 이런 것이 있는데 왜 만들어 놨냐 하면 괜히 놀려고 만든 것이 아니고 조용한 곳에 가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미국 대통령도 여러 군데 별장이 많은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번씩 갔다 온다. 거기서 조용히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마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재미가 있다! ‘그냥 막 각본대로 쭉 갔다’하면 재미가 없고 ‘예수님도 고민도 하고 쉬었다 갔다’해야 재미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에게 그 생명을 분배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씨)이시다. 육체가 되심은 단순히 장막이 되어 보여주고 만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독생자는 부활생명의 씨가 되어야 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시려고 오신 분이다. 믿음 이것은 구약시대에 다 있다. 여호와를 믿고 그들은 놀라운 일을 봤다. 더 이상 무엇을 더 경험하겠는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믿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가! 그런데 뭘 또 경험하려고 하는가! 앞의 사람이 다 경험한 것이면 된 것이지 모든 인류가 다 그것을 다시 경험할 이유는 아니다. ‘믿음은 여기까지다. 믿으므로 여기까지 경험했다’ 거기까지 왔으면 된 것이다.
어디 한 곳에서라도 아이폰이 발명되면 되는 것이지 이제 중소기업에서 ‘나도 스마트폰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되겠는가?! 이미 벌써 그 스마트폰 시장이 나와버렸다. 그래서 선두를 점령하는 사람이 앞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삼성그룹에서 그것을 따라잡았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물론 삼성에서 만드는 폰이 아이폰보다 못한 지는 모르겠지만 시장점유률이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우리 같은 나라로서는 보통 일이 아니라 대단한 일이다. 미국과 우리 나라가 비교가 되겠는가?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데 한 가지라도 어깨를 겨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다. 지금까지는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는 말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예수를 보고 비로소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 하나로 역사가 바꿔진 것이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스마트폰을 알겠는가? 앞으로 100년가도 만들지 못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벌써 우리 삼성에서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해버리면 저 아프리카 땅끝까지 다 통일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게 그것을 그대로 사서 써야되지 이제와서 스스로 기술개발해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불가능한 일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 는 이 역사적인 사건이 벌써 와버린 것이다. ‘내가 되냐 안 되냐’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저나 여러분이 스마트폰을 만들겠는가? 그냥 사서 쓰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왔다’ 이것은 뭐하러 왔냐? 생명을 분배하러 오신 것이다. 새롭게 믿고, 새롭게 요단강 건너고, 홍해바다 건너고, 그럴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래봤자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로 연합이) 안 되니까 생명을 분배하려고 오신 것이다.
신약에 대한 예언은 예레미아서 31장 31절에 되어 있는데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는 그 말이다. 그 때 예언되었던 것이 ‘예수님이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는 것으로 성취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 성취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 사람에게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그것을 분배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에는 그 스마튼폰으로 시장을 점유하는 것이지 또 만드는 것이 아니다. 딴 사람이 또 만들어봐야 소용이 없다. 생명을 분배하러 왔다!
이것을 씨라고 할 수 있다. 생명세계로 말한다면 하나의 씨가 만들어졌다면 그 다음부터는 씨를 번성(번식)시키는 것이다.
(요즘은 국광사과를 못 먹어 본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옛날 우리 세대에는 우리 나라에서 국광(國光)사과가 최고의 사과였다. 어느 날 일본에서 가져온 부사사과(富士;후지)가 시장에 나오니까 국광이 어디로 싸~악 가버리고 없어져서 지금은 먹어 보고 싶어도 못먹어 본다. 국광사과 맛에 대한 향수가 있던 차에 지난번에 누가 조그마하게 생긴 사과를 사와서 먹어보니까 그것과 비슷한 맛이 나던데 아주 별미였다. 단 맛이 강한 후지만 먹다가 심심한데 단백하고 옛날에 먹던 그~ 맛이 있다. ^^ 그런 사과가 나온다면 사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지금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신선하다.
하나의 씨가 완성(完成)되면 그 다음부터는 번식(繁殖)이다. 새로운 씨가 나왔으면 빨리 가져다가 재배하는 사람이 돈을 번다. 딴 사람들이 다 하는 것 보고 뒤따라서 재배하는 사람은 돈 못 번다!!!(×7). 남이 안할 때 해야지 남이 다 해버리고 나서 스마트폰 만들어서 돈 벌겠는가!
육체가 되신 것은 단순하게 장막으로써 보여줄려는 것이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요1:14) 왜 이 말을 했냐하면 구약시대에 여호와는 백성을 만나기 위해서 장막을 만들었다. 여호와께서 거하신다는 입장에서는 성막(聖幕)이고 백성을 만난다는 입장에서는 회막(會幕)이다. 그것을 따서 ‘장막이 되시매~’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만나기 위함만이 아니고 더 깊은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구약시대에는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성막 속에서 그 분을 만났던 것인데 구약시대의 만나는 것 보다 더 깊은 만남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을 보고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면서 만나는 것도 물론 옛날 장막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차원이 더 높지만 그것은 참된 만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만남은 남녀로 말한다면 결혼(結婚)을 하는 것이다.
우러러 보고 좋다고 하는, 예를 들어 탈렌트나 배우들이 공항에 오면 중학생 고등학생의 아이들이 떼로 몰려와서 난리를 치는 그것이 다 만나러 오는 것인데 그것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혼자 좋아서 그러는 것뿐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렇게 만나는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수님 때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따라 다녔는데 이것은 구약시대의 만남보다는 낫지만 참된 만남 진짜 만남은 아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만남’ 이것이 진짜 만남이고 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한 생명이 되는 것이 진짜 만남이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지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 즉 독생자, 아들은 씨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부활생명의 씨가 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제자들하고 같이 있어도 아직은 하나가 아니었다. 얼마나 예수를 좋아하고 따랐겠는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이라고 해야 별것도 없지만) 왔다는 것이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사람들이 버리고 왔으면 얼마나 버리고 왔겠는가만 자기로서는 전부인 그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인데도 하나가 안 된 것이다.
한 알의 씨는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의 번식이 일어난다.
번식은 아무리 많아도 한 생명이며 한 생명은 한 길, 한 생각, 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완전한 건축을 위해서는 아들의 생명이 번식되어야 한다.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번식이 일어나는데 번식은 아무리 많아도 한 생명이다. 한 생명은 한 길, 한 마음, 한 생각, 물어볼 것도 없이 다 똑같다. 그러므로 완전한 건축(연합)을 위해서는 아들의 생명이 번식되어야 된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왔던 것이다.
믿어서 복을 받고 응답을 받는 이런 것은 종점이 아니고 중간과정이기에 이것을 위해서는 죠지뮬러 한사람만 있어도 된다. ‘믿으면 이렇게 된다.’ 그것 하나만 알면 되니까 그러면 그 단계를 넘어가야 된다. 그것을 자기도 또 해보겠다고 하는데 죠지뮬러 만큼 할 사람이 있겠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오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전해 온다. 고아의 아버지라는 사람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밥을 먹이려고 하는데 밥이 없어서 ‘하나님’하고 손을 딱 들면 밥그릇이 딱 들어오는 이런 식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밥은 먹여야 하는데 밥이 없으니 엎드려 기도를 하면 누군가가 쌀을 한 말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경험을 해서 오만번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생명의 번식하고는 다르고 건축하고는 관계가 없으니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여호와는 성막에서 백성을 만나셨다. 이와 같이 말씀은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러 방면으로 그를 만났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잔치집의 신랑으로, 거듭나게 하는 독생자로, 참된 예배의 본으로, 천사숭배에서 해방시키는 분으로, 허망한 명절에서 생수로,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시는 분으로, 어둠에서 광명을 주시는 분으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선한 목자로, 그를 보고 그리고 그를 믿었다.
여호와는 성막에서 백성을 만나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육체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었다. 둘 다 장막이다. 여호와께서는 돌판을 가지고 와서 돌판으로 장막을 만드셨으니 장막의 핵심은 돌판이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영원하신 말씀은 육체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방면으로 그를 만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닷가에서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분으로 만났고, 어떤 사람은 물위를 걸어가는 분으로,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만드시는 분으로, 여러 방면으로 모두 만난 것이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 분으로, 잔치집의 신랑으로, 거듭나게 하는 독생자로, 참된 예배의 본으로, 천사숭배에서 해방시키는 분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구경을 하면서 봐왔던 것이다. 허망한 명절에서 생수로,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는 분으로, 어둠에서 광명을 주시는 분으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선한 목자로 이렇게 우리가 그를 봐 오고 그를 만나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우리가 보고 와야지 전혀 안보고 그냥 지나가 버리면 사실은 허망하다. 이렇게 좋은 영화가 막 돌아가고 있는데 못 보면 억울하다. 이게 어디 세상에 있는 영화인가? 이것은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인데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봐라” 했을 때 ‘내 죄가 사라졌구나!’ 이런 경험을 했어야 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할 때 ‘아~ 이 맹물같은 인생이 포도주가 되다니!’ 이런 경험을 했어야 한다. 지금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여러분이 스타디움에 가서 경기를 구경하는데 남이 달리고 치고 하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고 이러지 않는가? 그런데 내 속에서 이 광경을 다시 내가 경험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허망한 명절, 떠들썩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명절 끝 날에 “내가 너희에게 주는 물을 마시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했으면 흘러넘치기는 못해도 목을 축이기라도 해봤어야 한다. 이런 놀라운 길을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요한복음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다시 재검토해 보시길 바란다. 말씀을 읽으면서 ‘아~ 나는 여기서 무엇을 경험했는가? 생명을 주시려는 선한 목자 그러면 나에게는 어떤 선한 목자가 되었는가’ 이것을 우리가 다시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육체가 되셨으므로 우리가 보고 만나고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를 보고 믿었다’는 것은 그가 육체가 되셨음으로 우리가 보고 만나고 누리기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것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하나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누린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 되는 것은 않는다. 내가 죄사함의 경험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내 문제가 해결 된 것이지 그와 하나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알의 밀은 본 바요 들은 바가 되었으나 똑 같은 밀로 번식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핍박하는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믿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어느 날이 오면 다들 달아나고 저주할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알고 계셨다. 이것이 믿음의 한계다.
한 알의 밀은 본 바요 들은 바가 됐지만 똑같은 밀로 번식되진 않는다. 잘못 봐 버리면 오히려 멀어져서 그냥 숭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광경을 보기는 봤는데 자기하고는 무관한 광경을 봐버렸다. 자기하고 무관해도 너무 놀라운 광경이었다고 하면 거기서 그냥 ‘신이다!’라고 숭배를 하게 된다. 지금 이것이 현실이다. 이런 것을 봤기 때문에 숭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사람이라고 했다가는 큰일이 나버린다. 숭배하고 있는데 가서 사람이라고 하면 되겠는가? ‘사람은 절대로 숭배하면 안 된다’는 판에 가서 ‘예수는 사람이다’ 이러면 큰 일 난다. ‘보기는 봤는데 번식은 안 되더라. 감동도 받았는데 번식은 안 되더라’ 그래도 속에서 감동을 받았는데 그렇게 번식이 안 되면 숭배의 대상이 되버리고 만다. 전혀 나하고 무관한데 일은 벌어지면 내가 숭배하게 된다.
번식이 안 되면 핍박하는 자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핍박하는 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도 상당히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느 날이 오면 달아나고 저주할 사람들이었다. 왜? 그것은 자기가 아니니까! 그래도 생수를 조금 먹어본 사람은 저주까지는 안 갈 것인데 생수도 안 먹어보고 자유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광명을 보지도 못한 사람은 그냥 구경만 하다가 어느 날 가면 달아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형편이 바꿔져서 저주할 형편이 되면 저주해 버리고 마는 것이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고 심지어는 베드로가 자기를 버릴 것까지 알고 계셨다. 이것이 믿음의 한계다. 꼭 사람들이 잘못하고 잘한 문제가 아니고 이것이 믿음의 한계다. 아직까지 믿음의 한계 밖에는 안 나타났기 때문이다.
개구리와 도룡뇽은 한때, 한 연못에 아주 비슷한 모양의 알을 낳지만 자기들의 날이 오면 각각의 길로 갈라진다. 씨가 다른 것은 갈라진다. 건축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씨가 같은 것은 결국 함께 건축된다.
개구리와 도룡뇽은 한 때 한 연못에다 알을 까니까 개구리 알인지 도룡뇽 알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비슷한 모양으로 알을 낳지만 자기의 때가 오면 각자의 길로 갈라져 버린다. 하나는 도룡뇽이 되어서 나오고 하나는 개구리가 되어서 나온다. 씨가 다른 것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더 갈라지고 건축이 되지 못한다. 씨가 같은 것은 결국 함께 건축된다. 씨가 같아야 함께 건축된다.
사역은 전환 되어야 했다.
보고 듣고 믿게 하는 사역에서 땅에 떨어져서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사역으로 전환해야 했던 것이다. 주님은 씨를 뿌리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은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보고 듣고 믿게 하는 사역’에서 ‘땅에 함께 떨어져서 죽고 다시 사는 사역’으로 전환이 됐다. 주님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베다니의 전환이 중요한 것은 바로 거기서 자기 자신을 생명의 씨로 주시기로 작정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말은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라고 내가 생각한 말이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지면 번식한다. 말씀은 땅에 떨어져 육체가 되심으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이 되셨다. 이제 이 생명은 다시 땅(사람)에 떨어져 우리 안에서 30배, 60배, 100배로 번식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베다니의 결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지면 번식하는 것이다. 말씀은 ‘땅에 떨어져서’ 육체가 되시므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이 되셨다. 땅에 떨어져서 장막이 된 것이지 하늘에 그냥 있었으면 장막이 안된다. 하늘에 떠다니는 말씀, 하늘에 있는 말씀은 우리에게 장막이 안 되고 땅에 떨어졌고 땅에 왔기 때문에(육체가 됐기 때문에) 장막이 됐다. 이제 이 생명은 다시 또 땅에 떨어져서(사람에게 떨어져서, 사람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30배 60배 100배로 번식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떨어진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와서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죽음이다. 우리로는 영광이지만은 그 분으로서는 죽음이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 미국으로 프랑스로 다 돌아다녀 가지고 세상에 없는 학위를 받고 왔는데 한국에 왔더니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초등학교 선생하라고 발령내주면 죽음이다. 요즘말로 죽을 맛이다. 그 학교에서는 “야~ 우리 학교에 이런 선생님이 왔다” 영광이겠지만 막상 간 사람은 죽을 맛이다. 하나님이 땅에 오신 것은 죽을 맛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렇지 않으면 안되게 됐기 때문에 베다니의 결심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1~10장까지는 보고 듣고 믿어 누리기 위해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 아들을,
11장부터는 생명의 번식을 위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계시한다.
요한은 그 분기점에서 생명을 주려고 오신 선한 목자를 소개하고(10장)
이어서 주님이 베다니를 찾으신 마음을 알고 이 사건을 삽입시켜 두 사역을 연결시키고 있다.
1장부터 10장까지는 보고 듣고 만지고 믿어서 누리기 위해서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 아들, 11장부터는 생명의 번식을 위한 예수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그렇게 연결된다.
요한은 그 분기점(分岐點)에서 ‘생명을 주려고 오신 선한 목자’를 소개했는데 배열을 너무 너무 잘해 놓았다. 10장에 ‘생명의 목자’를 소개한 다음에 11장 들어가는 이유가 ‘생명의 번식을 위한 분기점’이라는 말이다. 주님이 베다니를 찾으신 이 마음을 알고 이 사건을 삽입시켜서 두 사역을 연결시켜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은 예수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 같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예수님 마음을 알고 “아! 이 분이 베다니로 간 것은 이래서 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모르겠다. 맞으면 이것은 굉장히 맞는 것이고 안 맞으면 아주 틀린 것이다.) 거기다가 아주 절묘하게 넣어놓았다.
이 구절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요단강 저 편에 요한이 처음 세례주던 곳으로 갔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자기를 믿더라는 말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그런데 요사이에 딱 넣어놓았다. 어찌 여기다가 이것을 딱 넣어놓았는지 성령이 역사를 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귀신 곡할 일이다.
말씀이 육체(장막)가 되어서 우리가 보고 듣고 믿고 만지게 됐다.
자! 이 육체가 이제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면 연합되고 건축된다.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
여호와는 성막으로 백성을 만나셨고, 말씀은 육체(예수)로 모든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주님이 어디를 가시던지 따라가야 한다. 그 분이 갈 때 가는 길로 따라가야지, 1장 가는데 나는 2장 가고, 2장 가는데 나는 3장 가고 이러면 안된다. 1장 갈 때는 1장 가고, 2장 갈 때는 2장 가고, 하여튼 가는대로 따라가야 한다. 관광지로 가면 가이드가 가자는 대로 가야 코스 맞춰서 관광을 할 수 있지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다가는 아무 것도 못본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던지 그 분의 경륜이 어디로 흐르던지 거기 내가 맞춰 가야지 자기 혼자 잘났다고 가다가는 미아되고 만다.
대부분 길 잃은 아이들을 보면 주의력이 산만한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은 따라다니지 않고 자기 멋대로 가다보면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지금 신비로운 길을 가고 있는 건데 내가 내 생각으로 갈 수 없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대로 간다고 하다보면 안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 때 그 때 흘러가는 흐름이 있는데 그 흐름에 내가 동참해야지 자기만 별도로 생각하고 있으면 그 과정을 못 참여하는 것이니까 낙오자(落伍者) 아니면 미아(迷兒)다.
지금 가고 있는 과정을 자기 혼자로서는 참여할 수 없다. 우리가 교회 오는 것은 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에 의해서 흘러가는 것이다. 그 흐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누가 마음대로 만든다고 되겠는가? 더군다나 대구교회에서 누가 마음대로 하면 절대로 안 되고 다 말 안 듣는다. ‘흘러 간다’는 것은 누구 한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서 나도 참여해서 가야지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하면 그건 빗나가거나 아니면 낙오자 되거나 아니면 지진아(遲進兒) 되거나 그렇다. 남들은 다 경험하는데 자기는 못하고 있는 것이고 남들 다 가는데 자기 혼자 못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보상해 주겠는가? 아무도 보상해 주지 못한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가야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큰 대열이 가는데 같이 따라 가야 홍해를 건너지 자기 혼자 어떻게 하다가는 어떻게 홍해를 건너 가겠나! 자기 혼자를 위해서 홍해가 갈라지겠나? 백성을 위해서 갈라진 것이지 개인을 위해서 갈라지겠나? 모세가 손을 들고 ‘봐라!’ 할 때 다같이 지팡이를 봐야지 물이 갈라질 때 가는거지 자기 혼자 딴 짓하다가 물 다 덮인 다음에 이제 갈려는 사람은 버스 간 뒤에 손드는 사람이다. 피난갈 때도 남들 갈 때 딸려 가야지 자기 혼자 간다고 하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 군대도 갈 때 같이 가야지 혼자 떨어지면 동서남북 분간 못하고 깊은 산 속에 들어 가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낙오병이 되어가지고 적군 속에 들어가서 거기가 자기 부대인 줄 알고 따라 다니게 된다.
혼자 잘 나서는 안 된다. 잘 몰라도 모르면 모르는대로 가야 되지 다 알고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교회가 ‘이렇게 흘러 가고 있구나!’ 흐르는 것을 자세히 본다. 그렇다고 내가 미래까지 다 아느냐? 모른다! 모르지만 흐르니까 그냥 흐르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것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다. 여호와는 성막으로 백성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제 육체는 죽으심으로 만민을 구속하여 자기 안에 포함하고, 부활하여 번식함으로 그의 나라를 이룰 것이다.
말씀은 육체가 되어 모든 것을 보여 줬다. 이제는 그 죽으심으로 만민을 구속해서 자기 안에 포함해서 부활하여 번식함으로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우리가 이 목표를 알고 있어야 어디로 가는건지 알지 최소한도로 단체가 출발할 때는 목표점이 어딘지는 알고 있어야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가다가는 안된다. 혹시 대열 못 낄지라도 ‘어디로 간다더라’ 이것은 알고 있어야 한다. 용문사라든가 팔공산이라든가 알고 있어야지 그것도 모르고 있으면 곤란하다.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는데 천당천당 하다가 요즘 사람들은 천당을 못 믿으니 기독교인들이 급감한다. 천당천당 했는데 천당 믿을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목표설정이 잘못됐다. 원시적인 설정이니까 자연히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어떤 분이 하는 말이 기독교인들이 사실인지 잘 모르지만 천이백만인에서 팔백만인으로 감소했단다. 목표설정이 분명하지 못했다.
우리의 목표는 확실하다. ‘그 나라를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다.
어떻게 이룰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다. 그러나 ‘부활해서 번식하여 나라를 이루는 것’ 이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직이나 제도나 이런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생명이 죽고 다시 나서 부활해서 번식해서 나라를 이루는 것! 그래야 영원한 나라가 된다.
전환점의 대목마다 함께 있어야 한다. 부대가 이동할 때 이동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 지점에는 함께 있어야 한다. 어느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인지 지점을 보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죽고 부활해서 번식해서 그 나라를 이룰 목표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모든 초점을 맞춰보면 왜 선악과을 먹으면 안되었던가를 알게 된다. 지금 와서 보면 왜 그것이 안되었던가? 선악과에서는 연합이 안 된다. ‘아하~ 연합이라는 목표 안에서 해석해 보니까 창세기에서 이래서 먹지 말라했구나!’ 그전에는 그 이유를 모른다. 연합이라는 목표가 없으면 선악과는 나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선악과가 많을수록 똑똑한 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선악과가 충실한 사람이다. 절대로 나쁜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볼 것이고, 신기한 사람들이 될 것이며, 신기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생명의 번식이니까 신기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의 사건의 기록을 보면 뭔지 잘 모르지만 하여간 신기하다. 신기한 일을 볼 것이고 또 신기한 사람이 될 것이고 신기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먼저 경험하는 것이다. 전 세계가 다는 아니지만 교회를 통해서 경험하는데 교회에서 경험하는 것은 특수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특수한 민족이라는 이유는 온 인류 속에서 이스라엘이 특수하다는 것이다. 왜인가? 여호와를 경험함에 있어서 특수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에서 교회가 그 중심에 있고 아직 저 변두리는 모르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나와서 우리가 지금 난리치지만 저 아프리카는 스마트폰을 모르고 아직 소식도 못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집회시간만 아니면 다 폰을 만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편화 되어있는 것을 어떤 나라에서는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뭔지 모르고 생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고 하나 가지고 와서 누가 보여주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기한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우리 일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자랑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바벨을 쌓고 있을 때 우리를 부르셔서 주님의 가신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당신을 따라다니도록 축복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주께서 가신 길을 따르기를 원하고, 어디로 흐를지 모르지만 주님 흐르시는 대로 우리가 흘러가기를 원하고, 주님의 세우신 목표 안으로 우리가 가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삶에도 함께 하고, 죽음에도 함께하고, 부활도 함께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