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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요한복음]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2019. 4. 19. 이현래 목사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5)
아주 유명한 말씀이라서 내가 대강 이야기하더라도 모두 깊게 이해하시리라고 생각된다. 성경이 다 그렇지만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다. 어떤 기사를 보도하려고 쓴 것이 아니고,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도 로고스가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예수를 전하려니까 가장 적절한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이 로고스는 희랍인들의 사상이다.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언어가 이 로고스라는 말이다. 절대적인 무엇, 그래서 신이 절대적이면 신이 로고스고 말씀이 절대적이면 말씀이 로고스고 로고스라는 것 속에 모든 절대적인 표현을 다 함축하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와 그리스도를 어떻게 연결시켜서 표현을 하는가? 이 고민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말해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으로 내용을 받아들인다. 내가 어떻게 말하더라도 상대방이 받는 쪽이 어떤 개념을 갖고 받느냐에 따라서 아주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지금 스카이프 방송을 해봐도 대구에서는 잘 나가고 있고 그쪽 말도 잘 들리는데, 서울에서는 잘 안 들린다고 한다. 수신하는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자기 자신을 표현을 하더라도 받는 쪽에서 어떤 상태냐에 따라서 굉장히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 우주 안에서 가장 독특한 사람으로, 우리의 구세주로 표현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각 문화권에 갈 때마다 고민이다. 우리 한국에 들어와서는 ‘하나님’은 쉽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하늘님’ 사상이 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기독교가 쉽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쉽게는 받아들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하늘님과 우리가 ‘하나님’하는 것은 아주 개념이 다르다. 일본에 가면 가미사마, 중국에 가면 천, 상재 등으로 표현된다. 인도사람에게 가면 무혹, 지혜 등이 된다. 우리가 뭐라 말했든지 간에 듣기는 그렇게 듣는다. 희랍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려니까 항상 가장 보편적인 단어가 로고스였던 것 같다. 그래서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므로 꼭 같은 말이 아니다. 꼭 같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고 시작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들으면 자기들 이야기 같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니까 자기들 족보 이야기 같다. 그래서 쉽게 접하기는 쉬운데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와 마태가 이것을 전하려는 세계는 아주 다른 세계이다. 어디서 갈라지는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형제를 낳고, 가다가 다말에 와서 갈라진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이렇게 갈라진다. 그리고 다섯 여자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족보이다. 그 족보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족보의 마지막에 예수가 나온다. 시작은 아주 유대인답게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서는 영 다른 사람이 나오게 된다. 요한복음도 역시 그렇다. 헬라인들이 들으면 자기들 말 같이 들리는데 뒤로 가면 다른 사람이 나온다. 창세기도 그렇다. 아담의 역사가 쭉 내려가다가 갑자기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는다. 거기서 갈라진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역사가 지금 성경에 들어온 역사이다. 나머지는 바벨론으로 가버렸다. 인류의 역사 같은데 다른 역사이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또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이 구별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어차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개념이 다 비슷한데 여기서 그것이 전혀 아닌 다른 세계를 우리가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신학적인 고민들이 많은 것 같다.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문화가 바뀌든지 간에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화와 관계되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다. 인간 문화와 관계되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전혀 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 방식으로 갈라져 나오고,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복음대로 다말로부터 다른 역사가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은 희랍인들의 로고스 사상으로 시작하는데, 뒤로 가보면 전혀 다른, 로고스가 아닌 다른 한 사람이 제시된다. 로고스 안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절대적인 것이 다 거기 포함되어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렇게 되는가? 안 된다. 자기들이 볼 때는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다. 아주 영 다른 사람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왜 이것이 복음이라고 하는가? 문화나 역사나 철학이나 이런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다. 거기서 해결하지 못한 다른 세계인데, 그 다른 세계를 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가? 그것도 아니고 아주 노선이 다르다. 이것을 어디 좀 고쳐야 되느냐, 고치지 말아야 되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다. 뭐가 좀 틀렸으니까 고쳐야 된다는 문제가 아니고 길이 완전히 다른 길이다. 대전에 오면 호남선과 경부선이 갈라진다. 그러면 분위기가 바뀐다. 호남선을 타면 대전까지는 참고 있다가 전라도 사투리가 막 터져 나온다. 그런데 경부선을 타면 경상도 사투리가 막 터져 나온다. 대전까지는 서로 지방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아주 점잖게 서울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대전에서 갈라지면 아주 완전히 말이 달라진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과는 아주 다르다. 비슷한 것 같은데 아주 완전히 다르다. 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주 다른 일이다. 창세기 2장에 이미 그 노선이 갈라져 있다. 생명나무 노선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노선이 갈라져 있다. 두 노선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간 인류의 길은 정해져 있고, 생명나무의 길을 또 따로 정해져 있다. 풀을 뜯어먹는 소와 뼈다귀를 먹고 사는 개는 전혀 다른 음식을 먹고 살기 때문에 음식 때문에 분쟁이 일어날 일이 전혀 없다. 염소와 소는 혹시 분쟁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개와 소는 전혀 분쟁이 일어날 일이 없다. 우리도 세상 사람이 먹는 양식과 우리가 먹는 양식이 다르다면 전혀 문제로 분쟁이 일어날 일은 없다.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산치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있고, 자본주의 치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겉으로는 당하는 입장이 아주 다르다. 한쪽에서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한쪽에서는 성자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가? 그렇지 않고 상대가 다를 뿐 그리스도는 여전히 동일하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희랍이 지배하던 그 시대나 지금이나 사실은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기독교도 결국 희랍의 로고스 사상 그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선과 악의 사상, 아주 굉장히 많이 받은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도 순수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신학은 지식이니까 지식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있다. 그 범위를 벗어나기 아주 어렵다. 중국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듣는 것과 희랍사람들이 듣는 것은 아주 딴 판이다. 희랍 사람은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아주 명백하게 가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관념 속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디 가든지 그 문제로 싸우는 것이다. 악과 싸운다. 선봉에 서서 기독교가 싸운다. 그런데 사실은 기독교는 악과 싸우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문화 때문에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어떤 정권과 싸우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을 물리치려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선악과 지배하는 세계와 지금 그리스도가 있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이 땅에 있는 악을 제거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고 안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은 아니다. 그분이 그것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들이 선과 악의 문제 때문에 상당히 서로 오해를 하고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뭐하고 있냐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분도 다 아실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뭐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힌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교회는 뭐하고 있는 것이냐고 한다. 그러면 교회의 사명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개선시키자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인간에 대한 대책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지 있는 남의 나라를 가지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온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와야 이 나라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관계가 된다. 이 나라를 개선시킬 방법은 없다. 다른 나라가 와야 해결된다. 도시마다 종말처리장이 있다. 오만 더러운 물을 전부 한군데 모아서 처리를 해서 깨끗한 물로 만드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원래 물처럼 좋아지는가? 모를 일이다. 어려운 일이다. 원천에서 다른 물이 내려오면 아주 쉽다. 원천에서 다른 물만 내려오면 간단하다. 종말처리장을 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오지 않기 때문에 종말처리장을 만드는 것이다. 일본에 가보니 보통의 조그마한 빌딩도 세면을 하는 것에 가보면 그 물이 그냥 수돗물이 아니고 전부 재처리장 물이다. 후쿠오카에 가보니 재 처리소라고 써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물 문제가 심각하다. 우리는 아직 재처리장 물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일본은 재 처리장 물을 사용하고 있다. 인류가 점점 더 나쁜 물을 내놓으면 물이 모라자면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이 풍족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없다. 복음은 새로운 물을 공급하자는 것이지 재처리소를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재처리해서 쓸 수 없다. 생명은 더구나 그렇다. 물은 재처리해서 쓸 수 있지만 개를 소로 바꾸겠는가? 소를 개로 바꾸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공급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예수를 볼 때 저렇게 해가지고 뭐가 되겠는가? 이런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저렇게 가지고 되겠는가 할 것이 아니고 물이 다르니까, 물길이 다르니까 되든지 안 되든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그 물은 그 물이고 저 물은 저 물이다. 안되면 바꾸고 이럴 수가 도저히 없는 길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이 로고스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 그러면 희랍인들이 들으면 우리가 알던 로고스인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는 로고스가 아니다. 예수님에게 실망했던 모든 사람들은,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그 절대적인 모든 개념을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로고스인줄 알고 있다가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다. 교회에 와서 별것을 다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별 것에 다 걸리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복음이 아직 분명치 않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2,3) 아주 묘하게 이것을 맞춰 놓았다. 요한이 그 로고스와 그리스도를 묘하게 조화를 시켜서 이렇게 말해 놓았다. 얼른 생각하면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전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전하기는 어렵다. 요한이 이렇게 써놓았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전해지는가? 그렇지 않다.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염소를 소라 하고, 소를 염소라 하고, 뒤바꿔 놔두면 풀 먹는 것을 보면 비슷할지 모르지만 아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서두에 이 말을 하느라 했는데 굉장히 어려운 말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희랍인들은 이 말을 들으면 ‘그렇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로고스가 자기들은 그런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또 그런 분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알기가 참 어렵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하면 동양 사람들은 ‘하늘님, 상재, 가미사마’라고 생각한다. 십계명 맨 처음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우상)을 네게 두지 말라.”(출20:2,3) 이렇게 구별하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신관과는 아주 다르다. 희랍인들이 생각하는 신은 추상적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추상적인 신이 없다. 아주 경험적이고 역사적이다. 희랍인들처럼 생각 속에서 신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역사적이다. 분명히 역사적이고 또 역사적인 것이 체험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와서 이것이 체험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십계명에 있는 첫째 계명을 모르는 셈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이라고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학에서 역사적이라고 하고 역사신학이라고 하지만 나한테 체험이 되지 않으면 역시 또 그것이 실감이 안 난다. 내가 애급에서 이끌어 나온 경험이 있어야 되고, 내게도 홍해를 건너온 경험이 있어야 되고, 내게도 광야를 거쳐 간 경험이 있어야 된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모양은 다르지만 그런 경험이 있어야 그 첫째 계명에 우리도 들어가는 셈이다. 그것은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추상적인 인물은 아니고, 역사적인 인물이다. 역사적인 인물인데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지 못하니까 다른 길로 빠진다. 심지어는 한쪽에서는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바울의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 대한 체험이 없다. 그러면 신화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신화적인 인물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을 전한다. 단순히 역사적인 인물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인물이 내 안에 와서 체험되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체험된 사람은 영원히 똑같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다. 역사적인 사람은 한 번 지나갔으니까 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체험된 사람은 똑같다. 언제든지 마찬가지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을 전한다는 말은 같은 성경을 전한다는 뜻이 아니고, 같은 지식을 전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같은 체험 안에서 공감하는 그런 예수를 전한다는 뜻이다. 오늘이나 어제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다. 내가 생각해보면 옛날에도 분명히 예수를 전한다고 했다. 설교도 많이 하고 했는데, 그때 그분에 대한 체험이 없으니까 나는 그냥 지식을 전한 것 같다. 그래서 체험을 하려고 좀 해보았다. 왜냐하면 소위 체험적 신앙이라고 하는 사람들, 방언도 하고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체험해서 저런가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도저히 그것이 체험이 안 되었다. 아마 방언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생각에 그것이 예수 체험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예수체험이니까 밤을 새워 못 알아듣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방언하는 사람을 보면 예배당에 오서 밤새도록 기도를 한다. 한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계속 똑같은 소리를 하는데 황홀해서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예수를 체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예수체험은 아니다.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다른 것이다. 다른 종류의 어떤 것이다. 은사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다른 종류이지 예수가 아니다. 예수의 삶을 예수의 생명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예수 체험이지 우리가 방언을 한다고 해서 예수 체험이 되겠는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역사적인 예수를 우리가 체험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냥 헛된 지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체험적으로 모르는 이야기는 성경에 있더라도 하지 않았다. 성경에 있더라도 내가 안 했다고 해서 우리가 죄 지을 것은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 있다고 해서 전한 것은 잘못 될 수 있다. 성경에 있으니까 내가 전한다고 해서는 안 될 수도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라는 말도 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했는데, 막상 주님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한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몰라서 안 한 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모르면서 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모르면서 절대로 말할 일이 아니다.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모르는 것은 말 안 해도 된다. 그리고 한 가지라도 확실히 알면 아무리 그 말을 해도 내가 거리끼지 않는다. 그런데 모르는 것은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옹색해지게 된다. 남도 곤란하게 만들고 자기도 곤란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을 무조건 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큰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분이 설교를 하는데 성경만 읽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경만 읽고 들어가니까 인간의 소리는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직접 실행은 못했지만 그것이 진실하겠다고 한때 생각했다. 그래서 설교 시험을 보는데 한 번은 선생님이 안 계셨던 것이 천만 다행인 것 같은데 성경구절을 연속해서 찾아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렇게 하면 성경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만일 그 목사님이 들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마침 그날 오시지 않아서 내가 회초리를 맞지 않았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성경대로만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는 것을 말해야 된다. 예수님도 말한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과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 아는 것이 뭐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가? 전에는 그런 것을 몰랐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뭐가 다른가?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고 말한다. 그 사람들은 지식만 말한다는 말이다. 역사, 성경, 지식, 이런 것만 말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뭐가 다른가? 유태인들을 보고 하는 말이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지식만 말한다는 말이다. 역사, 지식, 성경, 이런 것만 말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한다는 이 말은 하나라도 내가 그것에 대한 체험이 있으면 아는 것이다. 사람이 참 머리도 좋고 지혜로운 것 같은데 안 되는 것이 있다. 경험을 안 해 보면 모르는 것이 있다. 전혀 모르고 아무리 말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처음 미국에 가서 망고라는 그 신기한 과일을 먹어 보았다. 맛이 참 좋았다. 그런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망고 이야기를 했다. 안 먹어봐서 그런지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설명을 했다. 복숭아 같다고 설명해도 시원치 않고, 사과 같다고 해도 시원치 않았다. 모양은 이렇게 생겼고, 맛은 이렇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안다는 것이 별 것이 아니네, 뭘 좀 보고 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 안 보고는 아무 것도 모르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지도 않고 안다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 망고 하나라도 안 먹어 보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것이다. 여러분은 생전 안 먹어본 과일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겠는가? 다 자기대로 가지고 있는 관념을 가지고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문제가 생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이러면 각자 자기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희랍 사람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일은 감춰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러 감춰 놓은 것이 아닌데, 길이 다르니까 감춰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경부선을 타고 가면 호남선 사정을 모른다. 내가 안 봤으니까 모른다. 만원이 된 기차를 타 보니까 빈자리를 찾아서 앉는 것이 있다. 호남선과 경부선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내가 말하기 어려운데, 빈자리를 찾는 방법이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이렇게 차이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여러분들도 타 보면 안다. 그냥 말로 하기는 곤란하다. 사람들은 자기대로 관념이 있다. 그런 관념을 가지고 듣는다. 뭘 듣더라도 거기다 받아들인다. 거지가 밥을 얻어먹더라도 자기 깡통에 밥을 얻어먹는다. 깡통이 없으면 못 받아먹는다. 성격을 쓰신 분들은 다른 세계를 봤다. 다른 어떤 사람을 봤다. 다른 길을 봤다. 이것이 길이구나. 이것을 봤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봐야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다. 다른 길이 있구나. 이 길이 아니고 다른 길이 있구나. 이번에 어떤 종교 단체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갔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에 옆에 수녀님들이 몇 분 있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다. 옳지 됐다하고 이야기 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옆에서 젊은이가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 그만 시간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가? ‘수녀 되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렇게 시작하려고 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수녀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 수녀로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들어갈 때부터 철저히 검사를 하고 들어간다. 남자를 아는 여자는 수녀가 될 수 없다. 평생을 동정으로 살면서 수도 생활 자체도 굉장히 힘든 생활 같다. 우리 교회에 청년 하나가 있는데, 그 형제 조상들 중에 가톨릭 순교자가 있다. 그래서 가톨릭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를 조금 나오다가 어느 날 수사가 되려고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했다. 이것을 말릴 수도 없었다. 그 형제의 가문이 그러니까 잘 있어 보라고 했는데, 얼마 있지 않다가 되돌아 왔다. 그래서 왜 돌아왔느냐고 하니까 쫓겨났다는 것이다. 철저히 감독을 하는 모양이다. 뒤에서 다 조사를 한다. 생활이 어떤지, 행동이 어떤지, 이런 것을 다 조사한다. 면밀히 조사한 끝에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 수사가 되기 어렵다고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어 우리 교회에 도로 왔다. 지금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못 간 사람이 온 것이다. 그래서 나도 병원에서 만난 수녀님들께 ‘나는 자격이 없어서 신부는 못 되고 개신교 목사입니다.’ 그렇게 소개하려고 했다. 그런데 보니까 너무 수고를 많이 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대답이 나올 것인지 예상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직행하는 길이 하나가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못하고 집에 오니까 많이 아쉬웠다. 다음에 그런 기회를 만나면 꼭 해야겠다. 복음은 직행로이다. 그분들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모른다.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고 또 밖에 나가 일하고 노는 것이 아니다. 대구에도 베네딕트 수도원이라고 있는데 거기는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 안에는 농장이나 다 있어서 자급자족한다. 그래서 농사를 짓고 산다. 낮에는 밖에 나가서 각자가 맡은 일을 하는 곳도 있고, 평생 못 나오는 곳도 있다고 한다.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일이 쉬운 일이냐는 것이다. 천국에 가려면 이 정도로 해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천로역정을 읽어보셨을 것이다.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 굽이굽이 갈 때마다 다 장애물이 있다. 장애물을 다 통과해야 천성문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 기독교의 실상을 써놓은 소설이지만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벗어나서 천국에 가는 길은 없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험한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왔으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가시덤불이고 길이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은 공중에서 날아온 돌이다. 흰 돌이다. 딱 하나 던지니까 신상이 무너져 버리는 돌이다. 직항로이다. 바로 가는 길이다. 예수를 바로 만나는 곳이다. 이것이 복음이 아닌가? 예수와 연합이 되면 인생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우리가 일일이 인생 문제를 해결하러 다니면 끝이 없다. 심방을 하려면 일주일에 한 번은 심방을 가야 된다. 계속 가야 된다. 나도 심방을 해보았지만 가서 특별히 할 말도 없다. 의례적으로 한 번씩 꼭 가야 되는 것이다. 안 가면 삐져서 안 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런 것이 많다. 아마 서양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려면 전화해야 되고, 예약해야 하는 문화니까 없을 것인데, 우리는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다. 요즘은 교역자들이 초급으로 큰 교회에 가면 심방하느라 너무 힘들다고 한다. 몇 가정을 맡아서 그 가정을 계속해서 심방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역자들이 많이 필요하다. 사람이 100명이면 교역자가 하나 필요하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안 해도 될 곳에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진짜로 해야 될 곳에는 에너지 소비를 못한다. 할 것도 없다. 우리가 노선을 잘 잡으면 성경도 노선으로 보인다. 이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아니면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고, 일생을 성경 속에서 헤맬 수 있다. 이 속에 있는 길을 언제 다 가보겠는가? 수많은 방법을 언제 다 해보겠는가? 우리는 이 급한 시대에 이제는 복음이 분명해져서 길이 좀 밝혀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이다. 모든 사람이 다 천로역정으로 다 헤매고 다닐 것이 아니라 쉽고도 간단한 길로, 온 인류가 다 포함될 수 있는 길로,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어떤 길은 참 고상하고 좋은 길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나 갈 수가 없다. 만일에 수녀 생활을 해서 천성에 이른다면 참으로 환영할 일이겠지만 그것은 아무나 갈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못할 것이니까 환영한다고 하더라도 슬픈 일이다. 한 두 사람이 가는 것을 보고 부럽다고 하고 끝날 것이다. 그럴 사람이 더 많다. 가는 사람보다 못 가는 사람이 더 많다.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곳, 그 길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원하시겠는가?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모든 사람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전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만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그것이 복음이 아니겠는가? 요한은 지금 로고스 세계에 어떻게 하면 예수를 전할까 하고 요한복음을 쓴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이다. 처음에 보고 화려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당연히 실망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미리 다 알고 계시니까 이런 말을 하지만 초장부터 이러면 되겠는가? 그런데 이 마지막에 만난 예수가 우리에게 참 좋다면 죽은 사람이 한 알의 알약으로 살아난 무협지와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무협지를 읽어보면 죽었던 사람이 알약 한 알 먹으니까 탁 살아나는 것이 있다. 이렇게도 쉽고 간단한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헤맸는지 모르겠다. 예수만 만나면 되었는데,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어디에 속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우리가 잘못했고. 길을 잘못 들었으니까 아무리 가도 답이 없는 길을 찾았다. 왔지만 사람들이 거부했다고 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분을 영접하게 되었으니까 이것이 축복이다. 참 빛으로 오신 분, 빛이 오면 모든 어둠이 사라지니까 문제가 되었던 것이 그냥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빛이 없었을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이 빛이 오면 문제가 저절로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조목조목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포괄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빛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비교하면 조목조목 하나씩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포괄적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다. 언제 문제가 있었던가? 이렇게 해결된다. 우리 인류에게도 그런 날이 와서 우리가 공중으로 주님을 영접하러 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요한복음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해 보자. 여러 번 했는데 해도 늘 미진한 점이 있다. 시간만 있다면 계속하겠는데 시간이 없어서 계속 못하는 것이 아쉽다. 옛날에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에 말씀이 알아질 때, 사도 바울의 말씀이 알아졌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하고 한참 동안 감격했다. 그 다음에 주암산 기도원에서 처음으로 요한복음을 가지고 집회를 할 때가 있었다. 그 전에는 복음서를 읽으면 별 재미가 없었다. 시시한 이야기만 있었다. 바울 서신에서 뭔가 빛을 봤는지 요한복음에 들어오니까 세계가 다르다는 경험을 했다. 강가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래 속에 있는 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래 한 가마니를 가지고 금을 몇 개나 얻을 것인지 모른다. 1그람을 얻을지 10그람을 얻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떤 곳에 가니까 모래 한 가마니에서 금이 한 되가 나왔다면 그것은 대박이 터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복음서가 시시하더니만 이제 보니까 이것이 더 금이 많다는 생각을 한 경험을 했다. 복음서는 순전히 예수에 관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뭐가 있단 말이다. 거기에 아주 깊은 것이 들어있다. 단순한 역사도 아니고, 스토리나 이야기도 아니고, 거기에 깊은 것이 들어있었다. 우리가 시간이 되는 대로 같이 연구하고 알아보면 좋겠다. 요한복음을 많이 읽고 오시기를 바란다. 그냥 한 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알아지지 않겠는가? 한꺼번에 다 모른다. 다음에 또 봐야 되고, 다음에 또 봐야 되고, 항상 그렇다. 한꺼번에 다 알 생각을 하지 말고 대강 알면 되고, 그 다음에 또 대강 알면 되는 것 같다. 오늘은 첫 날이라 이렇게 두서없는 말했다. 여러분 다 잘 아시니까 잘 골라서 추수하시기 바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