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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공불가능성, 개체성, 자유(V, Incompossibilité, individualdité, Liberté)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1988)
들뢰즈, 이찬웅, 문학과 지성사, 2004(원P.192, 번272), pp 110-139
바로크가 건축, 회화, 조각에서는 르네상스에서부터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가지치기를 하고 또 다양한 재료들로 바로크 양식을 실현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실현을 한다. 그 실현은 창조적 방식을 창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교에서 신화(역사)에서 소설에서는 어떠한가? 종교에서 아담의 이야기는 한 가지치기일까? 역사에서 로마 공화정의 설화, 그리고 로마 황제정의 설화는 하나의 가지치기일까? 소설에서는 보르헤스(Borges, 1899-1986)와 르블랑(Maurice Leblanc, 1864-1941) 도 가지치기를 평면적으로 나열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역사도 이야기의 가지치기가 수많은 가운데 줄기만을 적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게다가 중동의 전설따라 삼천리는 더욱더 착각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온세상은 이어져 왔다는 데서, 그나마 착한 길을 모색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다른 가지치기도 있을 수 있으며, 그 중에서 “최고로 선한 세상”을 모색하는 과정이 세계사일 것이다. 제국에서 자본으로 이행하고 있는 모습이 최상이 아니라고 할 때, 가지치기의 이야기는 무성할 것이고, 시간이 흘러서 역사의 사건들의 계열을 서술하는 것은 다음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한 방식(마니에리슴)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암묵적으로 사건들의 계열은 세상에 충족이유가 있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한 것 같다.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귀결로서 나온 사건들의 계열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도 역사의 흐름(계열)에서 변곡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도 헤겔처럼 이성의 간지가 있어서 영웅이 최상의 계열을 선택한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53RMI)
영혼의 자유에 관한한, 스피노자의 아페이론의 능동적 전개, 라이프니츠의 아페이론의 폐쇄적 완전함 속에서 전개, 벩송의 개방적 전개 등은 모두 자유의 실행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노력과 행위, 라이프니츠의 최상의 세계 속에서 삶, 벩송의 자연의 자기 생성에서 삶은, 모두 현존하는 세계에서 현재의 삶에 대한 개인의 인성의 함양, 교양의 성취, 다음 인간들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을 비참, 야만, 비관 속에서가 아니라, 안락, 문화, 낙관 속에서 실행하자고 하는 것이리라. (53RMI)
신의 완전성과 완결성, 즉 세계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선가정을 버리지 않으면서, 현상의 세상의 다양한 사물들, 물체들, 식물들, 곤충들, 동물들, 인간들을 각각의 특이성 또는 고유한 내용물들을 인정하면서 개념화 작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제반 과학에 조예가 있어야 했을 것이고, 각 개체의 고유한 내용들이 다른 고유한 내용과의 차이를, 라이프니츠는 경험적으로 알아차려야만 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박학다식했다. 어째거나 외연적으로 개념을 설정하는 것을 넘어서 내포성(또는 강도)로서 개념들(또는 실사들)이 갖는 성격들을 구별하려 했다. 그럼에도 세상사의 사물들의 사건, 개인들의 사건, 역사적 사건, 신화나 성경의 사건들을 개별화의 방식에 의해 내포성을 설명하려 하는 점에서 볼 때, 그는 크리스트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당대의 문장 또는 명제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자료의 총체로서 다 다루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 1과0 사이에 제3자로서 정도의 차이와 질적 차이를 지닌 다양한 실체들(개체들)을 인정하고, 각 개체들(모나드들)의 고유함을 인정함에서 먼지에서 천사까지(먼지에서 보살까지)를 설명하려 하였다. 현실적 모나드의 특이성의 인정으로 창없는 단자를 만들었다기보다, 우주라는 신의 단자가 완전체여야 하기에 닫아버린 것에서 유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는 우주의 완전성에서 지식(인식)의 완전성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역학,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나오게 되면 달라질 것이고, 확률론에 의해서 보면, 1과 0사이에 있는 단자 또는 개체라는 단위들은 집합 속에 우연성의 단위(요소)처럼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그 요소는 단위 안의 요소라고 보았던 라이프니츠의 장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53SKF)
*목차
제1부 주름
1장 물질의 겹주름 / 2장 영혼 안의 주름 / 3장 바로크란 무엇인가
제2부 포함
제4장 충족 이유 79-109
제5장 공존 불가능성, 개체성, 자유 11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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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공불가능성, 개체성, 자유 110 V, Incompossibilité, individualdité, Liberté 79
L’incompossibilité ou la divergence des séries – Le récit baroque – Singularités pré-indiviiduelles et individu – Idividuation et spécification – Le jeu du monde baroque – Optimisme, misère du monde et maniérisme – La question de la liberté humaine – Phénoménologie des motifs – L’inculsion du prédicat et le présent vivant – Leibniz et Bergson: le mouvement en train de se faire – La damnation[영벌(永罰)] baroque // 공존불가능성 또는 계열들의 발산 – 바로크식 설화(說話) - 전 개체적 독특성과 개체 – 개체화의 종적 특수화 – 바로크 세계의 놀이 – 낙관론, 세계의 비참과 마니에리슴 –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 – 동기의 현상학 – 술어의 포함과 생생한 현재 –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 – 바로크의 저주.
§5.1. 공존불가능성 또는 계열들의 발산 110 - L’incompossibilité ou la divergence des séries 79
아담은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 반대, 죄인 아닌 아담은 불가능하지도 그 자체로 모순적이지도 않다(‘2더하기 2는 4가 아니다’는 모순이지만). 이러한 것이 현존 명제들의 고유성(le propre, 고유점)이다. (79, 110) [고유성은 본질과 다르다.]
죄인 아닌 아담과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 사이에는 본래적인 배제의 연관이 있어야만 한다. 죄인 아닌 아담은 또 다른 세계를 포함할 것이다. 두 세계 사이에는 모순과는 다른 어떤 연관이 있다(비록 두 세계를 구성하는 이 주어들 사이에는 국소적인 모순이 있겠지만).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 말하기(vice-diction, 2차화법)이다. 신이 무한히 많은 가능 세계들 중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관념이고, 특히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고유한 점은 가능세계들 사이에서 깊이있는 독창적인 연관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연관을, 라이프니츠는 신의 오성 안에 묻혀 있는 거대한 불가사의(un grand mystère)라고 말하면서, 공존 불가능성(l’incompossibilité)이라고 이름 붙인다. (79, 110-111)
세계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독특점들(points singuliers) 주위에서 수렴하는 무한히 많은 계열이라는 것을 우리는 앞서 보았다. 그래서 각 개체, 각 개체적 모나드는 자신의 집합 안에서 모두 같은 세계를 표현한다. (80, 111)
얻어진 계열들이 독특점들의 근방에서 발산할 때,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1)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수렴하고 이어질 수 있는 계열들의 집합. 2) 같은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의 집합(죄인 아담, 황제 시저, 구세주 크리스트‥…)을 공존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1) 발산하고, 따라서 두 가능 세계에 속하는 계열들, 2) 그 각각이 다른 것과 상이한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황제 시저와 죄없는 아담)을 공존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80, 111)
신은 서로 간에 공존 불가능한 무한히 많은 가능 세계 중 선택하며, 그리고 가장 좋은 것, 즉 가능한 실재성을 가장 많이 지니는 것을 선택한다. “좋음”은 두 세계의 규준인 반면, “가장 좋음”은 유일하고 상대적인 세계의 규준이다. 최선(最善)의 원리는 원리들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데, 왜냐하면 이 원리는 충족 이유를 세계에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80, 112) [현존하는 현실태가 최선이다(라이프니츠): 그럴듯한 이야기다(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권능과 노력의 한 귀결이다(스피노자). 생명체의 진화 형태이다(다윈), 자기에 의한 자기 생성인데 이를 아는 것은 인간이 처음일 것이다.(벩송)]
세계는 자신을 표현하는 모나드들 밖에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그러나 모나드에 앞서는 것이 있다. 신은 아담이 죄를 짓도록 하거나 또는 아담이 죄지을 것을 인식할 각오를 하고, 아담을 먼저 만들지 않았다. 그 아담이 죄를 짓는 세계를 창조하며, 또한 이것[세계]을 표현하는 모든 개체들 안에 이 세계를 포함시킨다(루크레티아를 능욕한 섹스투스,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시저). 우리는 일련의 변곡들 또는 사건들로서 세계에서 출발한다. (81, 112)
예를 들어 세 개의 특이성이 있다: 최초의 인간인 것, 기쁨의 정원에서 사는 것, 자신의 갈비뼈에 나온 여자를 갖는 것, 그 다음으로 넷째로 죄짓는 것. 이러한 사건-특이점들은 “평범한 점들” 또는 “정규적인 점들”(여기에서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과 연관 있다. (81, 112-113) .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모든 것이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특이한 점은 상이한 벡터들 아래의 두 평범한 점의 일치일 뿐이기 때문이다(정사각형의 점B는 선분 AB의 마지막 점인 a와 선분BC의 첫점인 c와 일치이다). 라이프니츠 철학의 두 극을 따라서, 모든 것은 정규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독특하다. 그래도, 주어진 스케일에서, 우리는 서로 서로 연관으로 독특점들과 평범점들, 정규점들을 구별한다. (81, 113)
§5.2. 바로크식 설화(說話) 111 Le récit baroque 80
우리의 네 특이점으로 되돌아가보자. 양방향으로 공통의 값을 갖는 정규적인 선 위에서, 이 특이점들 중 하나를 다른 하나의 근방으로 매번 이어지게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상정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섯째 특이점이 있다. 이 경향에 저항하는 것, 이것은 단순히 넷째, ‘죄짓다’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이것은 다섯째에서 다른 셋으로 향하는 이어짐의 선들이 수렴하지 않는다는 것, 즉 다시 말해 공통의 값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81, 113)
세계의 기원에 어떤 계산, 차라리 어떤 신적 놀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가장 위대한 많은 사상가들이 생각했던 바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놀이의 본성에, 그것의 우발적 규칙에,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재구성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모델에 의존한다. (82, 113-114)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의 끝에서 이것에 대한 거대한 바로크적 재현을 제공한다. 이것은 바로크식 설화(le récit baroque)의 일반적인 규준에 가장 전형적으로 상응하는 텍스트이다. 서술들이 서로의 안으로 끼워 넣어져 있는 것, 그리고 서술자-서술 관계의 변주. (82, 114)
이러한 모든 섹스투스는 가능하지만, 하지만 이것들은 공불가능한 세계를 이룬다. (83, 115)
그 근방에서 계열들이 발산하는, 마치 신전의 출구와 같은, 어떤 점을 분기(bifurcation)라고 말한다. 라이프니츠의 신봉자인 보르헤스(Borges, 1899-1986)는 중국의 철학자-건축가인 취팽을 원용하는데, 이 사람은 “갈라지는 오솔길이 있는 정원”의 창시자이다. “예를 들어 팽은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 취팽의 작품에는 모든 결말이 생산되며, 각각의 결말은 또 다른 분기의 출발점이다.” (83, 115)
라이프니츠의 또 다른 신봉자이자, 가장 위대한 대중적인 소설가인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 1864-1941)은 “일상적인 철학 교수”인 발타자르의 삶을 묘사했는데, 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평범하고 모든 것이 언제나 정규적이었다‥… 그러나 고아였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는데 전념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세 가지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고유한 지문, 가슴에 문신으로 새겨진 MTP라는 글자, 그의 아버지는 머리가 없다고 말해주었던 한 예언자의 계시. (83, 115-116) .[네 경우의 아버지가 등장했다.]
그는 살아남은 이의 지문의 표식과 문신의 기호를 네 아버지에게 보냈고, 이것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각각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에는 분기하는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으며, 이것들은 공불가능한 세계들 안에서 발산하는 계열들로 동시에 전개된다. 발타자르는 같은 세계 안에서 이 모든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는 없다. [소설의 결론] 다수의 사기(une escroquerie multiple)(84, 116)
왜 보르헤스가 라이프니츠 대신 중국 철학자를 원용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전적으로 모리스 르블랑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이 동시에 공존불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대신, 그 모든 세계들을 실존하도록 이행하게 만드는 것을 원한다. (84, 116)
신은 놀이 한다. 그러나 놀이 규칙을 부여한다(보르헤스와 르블랑의 규칙없는 놀이와는 반대로). 이 규칙이란, 가능한 세계들은 만일 신이 선택한 세계와 공존 불가능하다면 현존으로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아스트레(L'Astrée, 1607-1627,)와 같은 소설들만이 이렇게 공존 불가능한 것들의 관념을 제공한다. (84, 117) .
§5.3. 전 개체적 독특성 과 개체 Singularités pré-indiviiduelles et individu
이것에서 개체의 정의, 개체적 용어[개념]의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각 모나드는 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정의 불가능한 포함), 그러나 자신의 시선점에 근거하여 부분적인 지대 즉 구역만을 명석하게 표현한다는 것(정위된 지구)을 우리는 앞서 보았다. (84 117)
예를 들어 아담의 경우에는 먼저 고려되었던 네 가지 술어. 이것이 개체에 대한 실재적 정의이다: 몇 개의 수렴하는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집중, 축적, 일치(독특한 점들은 같은 점에서 일치할 수 있다. 마치 분리되어 있는 삼각형들의 다른 꼭지점들이 피라미드의 공통의 꼭지점에서 일치하듯이). 이것은 모나드의 핵과도 같다. 각 모나드의 심장에는 게루(Gueroult1, 1891-1976)의 가설에 따르면, ‘단순 개념’이 없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방법에 반대하여, 개념들의 사슬 안에 두 극단에 만족하는 것이다. (84-85, 117-118)
요컨대 가능한 각 모나드는 몇 개의 전-개체적 독특성들에 의해 정의 되며, 다라서 이 독특성들과 수렴하는 독특성들을 가진 모든 모나드들과 공가능하며, 발산 또는 이어지지-않음을 함축하는 독특성들을 가진 모나드들과는 공불가능하다. (85, 118-119)
§5.4. 개체화 와 종적 특수화(종별화) 85 Individuation et spécification
그런데 왜 공존 불가능한 세계들 안에서 발산하는 이 모든 개체에 아담이라는 고유명사를 부여하는가? 그것은 한 독특성이 언제라도 자신의 이어짐이 고립되고, 오려내지고, 잘려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85-86, 119)
개체화(l’individuation)는 분화(différenciation)의 규칙 하에서, 류에서 점점 더 작은 종들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개체를 이런 저런 세계와 관계시키는 수렴 또는 이어짐의 규칙하에서, 독특성에서 독특성으로 나아간다. (86, 119)
개체적 차이는 종적이지 않고, 개체는 마지막 또는 궁극적인 종이 아니다. 그렇지만 라이프니츠가 개체를 ‘최하위의 종’처럼 말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체에 대한 단지 유명론적 정의이며,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원용함에 있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즉 개체와 개념을 대립시키는 모든 이들과 관계를 끊고자 하는 목적에서 그렇게 한다. (86, 119) [라이프니츠의 용어는 유명론이 아니라, 개체의 내용을 지닌 개념론에 속한다.]
이 특이성들은 여전히 전개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는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현실화이며, 앞서 있는 어떤 종별화도 함축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반대로 말해야만 하며, [종적] 종별화가 그 자체로 개체화를 전제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86, 120)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구분한 두 경우에 있어 참이다: 수학적 종들과 물리학적 종들. 전자의 경우에서, “두 사물은 모든 면에서 전혀 닮지 않고, 종에 있어 서로 다르도록 만드는 가장 작은 차이”: 두 수학적 존재들 사이의 모든 개체적 차이는 필연적으로 종적이다. (87, 120)
그런데 물리적 사물 또는 유기체적 물체에서는 사정이 같지 않다. 여기서는 우리가 보았듯이, 종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누어지고, 동시에 사물(la chose) 또는 물체(le corps)가 끊임없이 변하게 되는 계열들을 상이한 특징들이 구성한다(cosntituer). (87, 121)
분류의 다양한 특징과 구분되지 않는 이러한 다중-종별화는 물체 또는 사물의 개체성이 다른 곳에서 온다는 것을 상정한다. 또한 사실 개체적인 것, 그리고 변경 가능한 물체를 개체화하는 것은 물체와 분리불가능한 영혼뿐이다. (87, 121)
우리는 식별불가능자의 원리와 연속체 법칙 사이의 최소한의 대립을 헛되이 찾고 있다. 후자는 주요한 세 영역에서 작동하는 종별화의 법칙이다. 후자의 법칙은 주요한 세 영역에서 작동하는 종별화의 법칙이다: 전체와 부분들의 수학적 영역, 종 또는 물체적 특징들의 물리학적 영역, 독특성들의 우주론적 영역(하나의 독특성이 규정된 질서 안에서 다른 독특성의 근방에까지 이어지는 한에서). 식별불가능자의 원리는 개체화의 원리며, 이것에 따르면 수, 공간 또는 시간에 의해서 오직 외부에서만 구분될 수 있는 서로 닮은 두 개체는 없다. (87-88, 121)
식별불가능자의 원리는 베어낸 자국들(des coupures, 절단들)을 설치한다. ... 이 때 사람들은, 두 개체 사이의 차이는 내적이고 환원불가능(=1)이라고 말하고, 반면에 이 차이는 연속성 덕분에 사라지게 되면서 0으로 향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셋 의미(방향, ses trois sens)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도 연속성은 차이를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사라지는 것은, 바로 차이를 정확하게 구성하는 내적 비율(raison)을 이용하여, 연관 항들에 할당할 수 있는 전체 값일 뿐이다. (88, 122)
그리고 만일 연속성의 법칙의 가장 일반적인 정식을 원한다면, 감각적인 것이 어디에서 끝나고 지성적인 것이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이 관념에서 아마도 그것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두 세계는 없다”고 말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두 심급의 일치 안에서, 영혼 위에 연속체의 역류(逆流)도 있다. (88-89, 122-123)
이 구역들, 각 모나드에 고유한 특별한 지대들 안에서 비교되는 외연과 내포성은 식물, 동물, 인간, 천사의 영혼들 또는 모나드들의 종, 연속해 있는 “모나드들 안의 무한히 많은 정도들”을 구분하는 것까지도 허용한다. (89, 123)
§5.5. 바로크 세계의 놀이 123 Le jeu du monde baroque 89
세계의 놀이(le jeu du monde)는 여러 측면들(plusieurs aspects) 을 갖는다. 그것은 특이성을 방출한다(émettre). 그것은 한 특이성에서 다른 특이성으로 나아가는 무한한 계열을 [천막치듯이] 펼친다. .. 그 세계의 놀이는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 또는 개체들의 핵 안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세계의 독특성들을 분배한다. 그러므로 신은 세계들 중 가장 좋은 세계, 즉 가능한 실재성에 있어 가장 풍부한 공존 가능한 집합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개체들 안으로 독특성들을 가장 잘 배분(la répartition, 재배열)할 것을 선택했다(같은 세계에 대해 독특성들의 다른 배분을, 개체들의 다른 경계 획정을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89, 123)
공간, 시간, 너비는 매번 세계 안에 있으며, 그 역(逆)은 아니다. 이 놀이는 놀의 말 역할을 하는 놀이자들 뿐만 아니라, 놀이를 하는 곳인 탁자와 그 탁자의 재료까지도 내면화한다. (90, 124) [의식(자아)은 당연히 심층이지만, 그 심층의 터전인 탁자(세계, 자연)도 탁자의 재료(아페이론)도 세계의 놀이의 심층이다. (53SKG)]
니체(Nietzsche, 1844-1900)와 말라르메(Mallarmé 1842–1898)는 주사위 던지기를 방출하는 세계-“사유”를 우리에게 다시 드러내주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모든 원리를 상실한 원리 없는 세계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을 긍정하고 모든 우연을 사유하는 역량이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원리가 아니라 모든 원리의 부재이다. (90, 124). [원리부재는 무질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원리가 적용하는 방향의 역방향은 생성이며, 생성은 다른 질서이다. 이 질서를 무시하는 원리에서 보면 질서 부재이다.]
“세계는 부재의 익명의 영역이며, 이것으로부터 사물들이 나타나고 그리고 사라지는 것이다‥… 나타남[생성]은 마스크(le masque)[chora]이다 그것 뒤에는 인격[신]도 없고, 단지 무(le rien) 이외에 아무것(avoir rien)도 없다” 어떤 것(quelque chose)이 아니라 어떠한 아무 것(le Rien)도 아니다. (90, 124) [마스크라는 세계 뒤에는 이데아도, 목적인도 들어있지 않다. 그러면 운동, 즉 권능이 있을 뿐이다.]
신의 부재 안에서, 인간 자체의 부재 안에서 원리없이 사유하는 것은, 놀이의 오래된 ‘지배자(Maitre)’의 자리를 찬탈하고 산산조각 난 같은 세계(탁자는 부서진다‥…) 안으로 공불가능한 것들 들어가게 하는 놀이하는-아이의 위험천만한 일이 된다. (124-125) 하지만 그 긴 역사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우리롸 가장 가깝게는, 원리들이 마지막 피난처로서, 칸트의 피난처인 인간 [속좁은] 이성이 무너져야만 했다. 그 이성은 신경증으로 죽었다. 그러나 또한 그에 앞서 정신병리적 에피소트, 즉 신학적 모든 이성의 위기와 몰락이 필요했었다. 바로 여기에 바로크가 자리를 차지한다. (90-91, 124-125)
[신학적 이상에서 벗어나 바로크로 바꾸는 것] 이것은 “법률(Droit)”을 보편적 판례(Juriprudence)로 변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과 특이성의 혼인이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식의 혁명이며, 라이프니츠는 가장 대표적인 마니에리슴의 영웅, 프로스페로(Prospero)에 가장 가깝다. “불가사의한 프로스페로, 마술사이자 합리론자, 삶의 비밀빌들에 대한 전문가이자 요술쟁이(bateleur), 행복 분배자,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빛나는 고독에 몰두 한자.” (91, 125)
라이프니츠의 놀이의 참된 성격들이 있다. 그리고 그 놀이를 주사위 던지기에 대립시킨 것, 그것은 우선 원리들의 증식이다: 놀이는 원리의 과잉에 의해서 이지 원리의 결여에 의해서가 아니며, 놀이는 원리들 그 자체의 놀이이며, 원리들을 발명하는 놀이이다. [둘째로] 그러므로 이것은 숙고의 놀이(un jeu de réflexion), 체스 또는 체커의 놀이이며, 여기에서 재주(l’adresse)(아자르가 아니라)가 오래된 현명함과 오래된 신중함을 대체한다. 셋째로, 이것은 채우기의 놀이이다. 여기에서 비어 있는 곳은 쫓겨나고 어떤 것도 부재의 상태로 남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역전된 솔리테르(sollitaire) 게임이다. .. 끝으로 이것은 전장(non bataille)이 아니며, 말살하는 전쟁보다 유격전에 가깝고, 체스나 체커 놀이보다 바둑에 더 가깝다: 상대방을 부재하게 만들기 위해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무력화시키고 공존불가능하게 하고 발산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있는 곳을 포위한다. 그렇다, 세계가 원리들을 상실하기 앞서서, 이것이 바로크이다: 즉 찬란한 순간, 거기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기보다 어떤 것을 보존하고, 또 거기에서 세계의 비참함(le misère)에 응답하는데, 원리들에 과잉에 의해서, 원리들의 오만(hybris, 맹폭)에 의해서, 원리들에 고유한 오만에 의해서 응답한다. (91-92, 126). [허무주의와 비참의 극복이 낙관주의일까? 숙명 운력 소박을 모토로하는 노력에서 이겠지.]
§5.6. 낙관론, 세계의 비참과 마니에리슴 Optimisme, misère du monde et maniérisme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은 얼마나 낯선가. 다시 한 번 그것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비참함이 아니며, 가장 좋은 것은 플라톤의 “좋음”의 폐허 위에서만 꽃을 피운다. (92, 127)
그는 “변호사”, 신의 변호사이다. 철학자는 라이프니츠가 만든 말인 “변신론”에 따라 신의 입장(Causa)을 방어한다. 확실히 악에 맞선 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언제나 철학자의 공통된 자리였다. (92, 127)
악에 마주한 신의 정당화... 변호사가 그 세계를 재구축해야 할 정도로 세계의 붕괴 일어났다(여기에는 판례가 있다). 거대한 위기에는 강화된 정당화가 상응해야만 한다. 세계는 가장 좋아야만 하는데, 그 전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세부에서 또는 그 모든 경우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분열증적 재구축이다. 신의 변호사는 소위 등장 인물들의 ‘자기조형적(autoplastique)’이며 내부적인 변모들과 더불어 세계를 재구축하는 인물들을 불러온다. 이러한 것들이 모나드들, 또는 라이프니츠에게서 “자아”들, 자동인형들이다. (92-93, 127-128)
모나드들을 춤추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이 춤은 바로크의 춤이며, 여기에서 춤추는 이들은 자동인형들이다. 이것은 두 모나드 간의 나눌 수 없는 거리(공간)와 같이, 완전히 “거리에 대한 파토스”이다. 이 둘 사이의 만남은 축제 행렬, 즉 .. 작용과 반작용은 이 거리의 양쪽으로 분산되어 있는 자세들의 연쇄에 자리를 내어준다(마니에리슴). (93, 128)
§5.7.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 128 La question de la liberté humaine
낙관론의 원리 또는 “가장 좋은 것”의 원리는 신의 자유(la liberté de Dieu)를 구출한다. 그 자유를 보증하는 것은 세계와 신의 놀이이다. 죄는 짓지 않은 아담, 루크레티아를 능욕하지 않은 섹스투스가 다른 가능 세계들에는 있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것,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선택된 가장 좋은 세계와 공불가능할 뿐이다. (93, 128)
사람들은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보다 훨씬 더 강하게 우리른 단죄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스피노자에게는 최소한 해방이 가능한 절차가 있었다. 반면 라이프니츠에게는 울타리 쳐진 조건하에서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닫혀있다. .. 공존불가능성은 라이프니츠가 미래의 우발적 사건이라는 고대의 문제를 스토아의 아포리아에 빠지 않으면서 풀 수 있게 허용한다(내일 바다에 전투가 있을 것인가?). (93-94, 129)
어떻게 자유를 분열증적인 자동인형(un automate schizophrène)의 내적이고 완결적이고 예정된 규정과 뒤섞을 수 있겠는가? (94, 129)
§5.8. 동기들의 현상학 Phénoménologie des motifs
주어 안에 술어가 포함된 것으로 우리는 되돌아간다. 그리고 만일 술어가 속성이라면, 확실히 사람들은 주어의 자유를 구해낼 수 있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 최소한 두 곳의 텍스트에서 라이프니츠는 최초로 동기들에 관한 현상학의 위대한 토대를 놓는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착각을 고발한다. 하나는 동기를 대상화하는데 있다. .. 다른 하나의 착각은 동기들을 이중화하는(dédoubler, 두 줄로 놓는다) 데 있다. (94, 129-130)
의지적 작동(l’acte volontaire)는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자유로운 작동이란 지속의 어떤 순간에서 영혼 전체를 표현하는 행위이며, 자아를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95, 130)
앞서 변곡에서 포함으로 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변곡들이 자연스럽게 영혼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보았다. 성향은 바로 영혼 안의 주름이며, 포함된 것으로서 변곡이다. 여기서 ‘영혼은 필연적으로 강제됨 없이 성향(inclination)을 지닌다’ 라는 라이프니츠의 정식 나온다. 동기는 내적인 규정 자체가 아니라 성향이다. (95, 131)
라이프니트에게 포함은 어떤 점에서 – 나는 쓴다, 나는 여행한다[처럼] - 현재와 연동되어(indexée) 있다고 주목해만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내가 이 순간에 행하고 있는 것을, 또 내가 행하고 있는 중인 것을, 나의 개체적 용어는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때문에] 나는 또한 그것을 행하도록 나에게 밀고 있는 모든 것을, 또한 그것으로부터 무한히 흘러가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95, 131) [과거에 해온 것을 포함하고 있는 현재는 미래에도 무한히 포함한다(벩송과 같다)]
완전한, 실현된 현실태란 자신을 포함하는 영혼으로부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고유한 통일성을 받아들이는 현실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벩송(Bergson, 1859-1941)은 라이프니츠와 매우 가깝고, 바로 라이프니츠에게서 줄곧 이 정식이 발견된다. 미래를 품고 있고 과거로 가득 찬 현재. 내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자유 자체를 구성하는 내부성. 생생한 현재는 본질적으로 외연과 내포성[강도]에 있어 가변적인 것이다. (96, 131-132)
작동(l’acte)은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작동은 현재에서 영혼 전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96, 132)
§5.9. 술어의 포함과 생생한 현재 L’inculsion du prédicat et le présent vivant
[신의] 저주에 관한 어둡고 훌륭한 이론만큼이나 이를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경우에 조자도 저주받은 자, 유다(Judas) 또는 베엘제불(Belzebuth)은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의 현행적 진폭(l‘amplitude actuelle)을 구성하고 현재의 자기 영혼을 채우는 신에 대한 증오에 대해 값을 치른다. (96, 132)
라이프니츠가 말하듯이, 저주받은 자는 영원히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저주받아 마땅하며” 각 순간마다 저주받는 것이다. 또한 저자받은 자들은 자유롭고, 축복받은 자들 만큼이나 현재에 있어 자유롭다. 이들을 저주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현재의 정신의 협소함, 진폭의 부족이다. (97, 133)
아마도 저저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보다 광범위한 맥락과 관계하는 바로크의 깊은 심층에 속한다. 현재에 있는 죽음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으로서 인식한 것이 바로 바로크이며 여기에서 이 운동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동반’하고(“accompagne”) 있는 것이다. (97, 133)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고, 저주받은 자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만일 그 영혼이 다른 진폭, 다른 주름, 다른 경사를 지닌다면 충분했거나 충분할 것이다. (97, 133)
자동인형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데, “물질적 자동인형”[곤충]이 기계적 작동들을 위한 규정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듯이, “정신적 자동인형”[인간]은 자발적 행위들을 위한 동기 부여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만일 사물들이 신의 오성 안에 포괄되어 있다면, 그것들은 “자유로운 것은 자유로운 것으로, 또한 맹목적인고 기계적인 것은 기계적인 것으로서” 그러하다. (134)
§5.10.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 일어나고 있는 중인 운동 134 Leibniz et Bergson: le mouvement en train de se faire 98.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의 주제들과 벩송의 테제 사이의 유상성에 사로잡힌다. 동기에 관한 착각을 같이 비판하는 것, 영혼의 변곡들을 같이 개념작업하는 것, 내속과 포함을 자유로운 행위의 조건으로서 같이 요구하는 것, 자유로운 행위를 자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같이 기술하는 것(“자유로운 결정이 유래하는 곳은 바로 영혼의 전체이며, 이 행위는 결부되어 있는 역학적 계열이 근본적인 자아와 보다 많이 동일시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자유롭게 된다”). (98, 134)
신은 각자에게서 “도처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과 더 나아가 앞서 일어났던 것 또는 앞으로 일어날 것”까지도 읽고, 과거에서 미래로 읽는데, 왜냐하면 그는 “시간과 더불어서만 감각될 수 있도록 전개되는 모든 겹주름들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135)
그런데 신이 언제나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가 모나드의 모든 사태들을, 이 사태들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간격없이” 행위의 순간에 모나드와 동시에 발생하는 방식으로 관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99, 135)
물론 각 모나드는 신의 이행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각 모나드는 시선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시선점은 신의 독서 또는 시선의 “결과”이며, 신의 모나드를 관통하며 모나드와 함께 일치한다. (99, 136)
포함의 체계 내에서, 위협받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이다. 왜냐하면 만일 자유로운 행위가 영혼이 이 행위를 하는 순간 이 영혼의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세계의 각 부분 즉 모나드를 자극해야만 하는 가장 좋은 것으로의 경향이란, 그 경향이 세계 또는 모나드들의 전체에 대한 신의 선택을 자극하는 한에 있어, 무엇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라이프니츠보다 더 도덕에, 그것도 매우 구체적인 도덕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99, 136)
도덕은 각자에게 대해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저런 조건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표현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매번 자신의 명석한 표현의 지역을 확장하려는 노력, 자신의 진폭을 증가시키려는 노력. 이것이 사람들이 진보(progrès)라 말하는 것이며, 라이프니츠의 도덕론 전체는 진보의 도덕이다. 예를 들어 내가 술집에 갈 때, ..[두갈래의 선택] .. (99, 136-137)
§5.11. 바로크의 저주 137 La damnation[영벌(永罰)] baroque. 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진보 또는 확장의 이런 가능성은 세계 내의 진보들의 총량과 충돌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이 양(量)은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에 상응하는 지역들 전체의 수렴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100 137)
부활(la résurrection)은 이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내는 이 사유에 이들을 여전히 연계시킨다. 진보의 문제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시간의 질서이다. 영혼들을 올라가게, 다시 내려가게, 다시 올라가게 만드는 극작법(dramatique) 전체. (100-101, 138) [니체의 드라마 방법은 플로티노스의 방법이고, 샤키야 무니의 인연(因緣)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혼에 관한한 비슷한 사유를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니까.]
§5.12. [소결론: 영혼의 자유]
-[그래도 라이프니츠는 합일 또는 몰아경이라는 이야기는 않는다. 모나드가 창이 없어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세계는 이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 안에서 주름 잡혀 있는 것으로 밖에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든 모나드들의 공통 지평으로서, 또는 모나드들이 포함하는 계열들의 외부적 법칙으로서 잠재적으로 밖에 자신을 펼치지 않는다는 점은 사실이다. (101, 138)
바로크의 집은 자기가 가진 두 개의 층을,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최후의 심판(1562)」의 방식으로, 저주받은 자들의 층과 행복한 자들의 층으로서 구성한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진보의 총량은 신에 의해서 앞서 규정되거나 사후에 규정되지 않으며, 양심(conscience)을 모두 더하고 저주받은 자들을 모두 빼는 과정을 통과하는 무한급수의 계산 안에서 영원히 규정된다. (102, 139)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에는 총량의 불변이 들어있다. 스피노자와 벩송은 열려있다, 사키야무니와 니체에도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53RMI)]
(7:21, 53RMI)(14:01, 53SKF)
# 인명록 ******
540?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Sextus Tarquinius, ?-전509) 로마(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우스 왕조(전616-전509년)의 마지막 왕(폭군), 로마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 le Superbe)의 가장 어린 아들이다. [왕조의 멸망은 폭군, .하(夏)왕조(전2070년경-기원전1600년경) 걸(桀)왕의 말희(末喜), .. 중국의 상(商)왕조(전1600년경-기원전1046년경)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하다가 멸망(무왕에 의해 주(周)나라 성립)]
540? 루크레티아(Lucrèce, (Lucretia en latin, ?-전509) 타르뤼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l'épouse de Tarquin Collatin, homme fort et proche du roi Tarquin). 그녀는 자기를 능욕한 섹스투스를 징벌해줄 것을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낸다.
509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 ?-509-?) 로마공화정 건설자 중의 한사람.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 다음으로 약속하고 민중을 이끌고 왕정을 몰아내고, 섹스투스는 로마에서 추방되어 암살당했다(509). 브루투스는 로마의 첫 공화국을 세웠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출생시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100 시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전100-전44) 로마 장군, 정치가, 작가.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O
1518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Jacopo Robusti, 1518-1594) 이탈리아 화가 일반적으로 마니에리슴 (Manierismus)에 분류한다. / Le Jugement Dernier et Moïse recevant les Tables de la Loi et Les Hébreux préparant le veau d'or, 1560-1562. - huile sur toile - 1450 x 590 cm - (Madonna dell'Orto (Venice, Italy)) // 미켈란젤로(1475-1564)는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뒤의 벽에 <최후의 심판>을 1536년 5월 그리기 시작했다.
1567 뒤르페(Honoré d'Urfé, comte de Châteauneuf, marquis du Valromey, seigneur de Virieu-le-Grand, 1567-1625) 프랑스 작가, 역사상 첫째 대하소설인 아스트레(L'Astrée(1607-1627)(5부작)의 작가.
1580 케베도(Francisco Gómez de Quevedo Villegas y Santibáñez Cevallos, 1580-1645) 스페인 작가. Doctrina moral del conocimiento propio, y del desengaño de las cosas ajenas Philosophie, 1630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
1638 말브랑쉬 (Nicolas Malebranche, 1638-1715) 프랑스 철학자, 오라트와르 신부, 신학자. De la recherche de la vérité. Où l'on traite de la Nature de l'Esprit de l'homme, & de l'usage qu'il en doit faire pour éviter l'erreur dans les Sciences (1674-1675).
1638 레몽(Nicolas-François Rémond de Montmort, 1638-1725), 오를레앙 공의 고문단 단장엮임, 라이프니츠와 편지교환.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sur la liberté de l'homme, 1670-1671; Méditations sur la connaissance, la vérité et les idées, 1684; Discours de métaphysique, 1686; L’origine radicale des choses, 1697; De la nature en elle-même(1698); Nouveaux essais, 1704; Monadologie, 1714; Essais de Théodicée(1714) sur la bonté de Dieu, la liberté de l'homme et l'origine du mal 1714;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 1714;
1647 쟈끌로(Isaac Jaquelot, 1647-1708)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낭트칙령폐지로 프랑스를 떠나 네델란드로. Dissertation sur l'existence de Dieu, La Haye, 1697;
1661 프로스페로(Prospero)는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인 폭풍(La Tempête)(1610-1611)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유배된 섬에서 그 섬을 지배한다. / 이 작품은 실존인물 존 디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 존 디(John Dee, 1527–1608)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 비전전수자(occultiste), 그는 일생동안 연금술, 점, 예언(l’alchimie, de la divination et de l'hermétisme)에 전념했다. [참조, 프로스페로(Prospero Farinacci, 1554-1618) 이탈리아 형법학자, 대법관. 두 교황(Clément VIII et Paul V)에 봉사했다. 특히 후자의 검찰총장(procureur fiscal général sous ce dernier (1606-1611)을 했다.)
1675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 영국 철학자, 국교 성직자. 로크와 버클리 사이에서 중요인물, 라이프니츠와 편지 교환에서(1715-1716) 뉴턴의 대변자.
1678 부르게(Louis Bourguet, 1678-1742) 뇌샤뜰 시민, 지질학자, 박물학자, 수학자, 철학자, 고고학자.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라이프니츠와 편지교환(1714년) .
1696 삭스(Maurice de Saxe, comte de la Raute, 1696-1710) puis comte de Saxe (1710-1750), 1696-1750) 군인, 루이 14세 때 원수가 되었다.
1842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Étienne Mallarmé 1842–1898), 프랑스 시인, 비평가. 상징주의 시인, Hérodiade, 1864-1867
1844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문헌학자, 철학자.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864 모리스 르블랑(Marie Émile Maurice Leblanc, 1864-1941) 프랑스 소설가, 추리소설과 모험소설가. 모험소설, La Vie extravagante de Balthazar (1925) professeur de philosophie quotidienne .
1868 꾸뛰라(Louis Couturat, 1868-1914) 프랑스 철학자 논리학자, 러셀처럼 논리주의자. 라이프니츠 미발표 작품들 출간. La Logique de Leibniz : d'après des documents inédits, 1901
1891 게루(Martial Gueroult, 1891-197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7세기 전공. Dynamique et métaphysique leibniziennes, 1934 suivi d'une Note sur le principe de la moindre action chez Maupertuis, Paris: Les Belles Lettres, 1934.
189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1986)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이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의 관장직을 맡았다. 픽션들(Fictions (Ficciones) 1944), 알레프(L’Aleph (El Aleph) 1949),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1902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1902–1977) 프랑스 사회학자. Leibniz et Spinoza, 1946
1902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프랑스 철학자. 1921년 ENS, 1925년 철학교수 자격. 알사스 유대 총랍비(Moïse Schuhl, 1845-1911)의 조카이다. (벩송과 연관을 찾을 수 없다) Le Dominateur et les possibles (1960)
1903 그루아(Gaston Grua, 1903-1955)[쉰둘] 라이프니츠 전공자, 그르노블과 렌 대학에서 가르쳤다. Juriprudence universelle et théodicée selon Leibniz, 1953[아마도 학위논문], 1985.
1908 블라발(Yvon Belaval, 1908-1988) 프랑스 철학자, 문헌학자, 라이프니츠 전공자. Confessio Philosophi: La Profession de Foi du Philosophe(1672) 출판 1961.
1910 루세(Jean Rousset, 1910-2002) 스위스 문학 비평가. 바로크 문학 전공 제네바 대학 교수. La Littérature de l'âge baroque en France. Circé et le Paon, Paris, José Corti, 1953,
1920 뷔이유망(Jules Vuillemin, 1920-2001) 프랑스 합리론 철학자, 인식론자. ENS출신. 1943 철학교수자격 1등. Nécessité ou contingence. L'aporie de Diodore et les systèmes philosophiques(Paris, Minuit, 1984; réed. 1997.) [Diodore of Tarsus (Διόδωρος ὁ Ταρσεύς; died c. 390) 크리스트교 주교, 수도원 개혁자]
1923 클라닉차이(Tibor Klaniczay, 1923–1992) 헝거리 문학사가. 헝거리 민담과 민요를 이용. “La naissance du Maniérisme et du Baroque au point de vue sociologique,” in Renaissance, Maniérisme, Baroque, Ed. Vrin, p. 221.
1928 블란켄부르크(Wolfgang Blankenburg, 1928-2002) 독일 정신과 의사. 현상학적 정신병리학. “Tanz in der Therapie Schizophrener”, Psychotherapy and Psychosomatics, Vol. 17, No. 5/6 (1969), pp. 336-342.
1929 브룅슈비그(Jacques Brunschwig, 1929-2010) 1948년 ENS 1등, 1952년 교수자격 1등, 철학사가, 문헌학자(아리스토텔레스), 번역가. Essais de Théodicée et des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de Leibniz에 대한 그의 판본이 있다.
1930 세르(Michel Serres, 1930-2019) 프랑스 철학자, 과학사가. 라이프니츠의 체계와 그의 수학적 모델(Le Système de Leibniz et ses modèles mathématiques, 1968)
1930 즈네뜨(Gérard Genette, 1930-2018) 조상은 벨기에인, 프랑스 문학비평가 문학이론가. 이야기학(la narratologie) 창설자 중의 한사람. Figures(5권, essais, 1966-2002)
1932 필로넨코(Alexis Philonenko, 1932-2018)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933 브로솔레(Guy Brossollet, 1933-2015) 프랑스 작가, 수필가. 중국풍 운동가. 알제리 주둔 장교를 마치고, 중국을 공부했다. 마오 시집 첫 번역자. Essai sur la non-bataille, 1975.
스즈니세르(Evelyne Sznycer, s.d.) 벨기에 여성 정신분석학자(?) Droit de suite baroque // Schizophrenie et art : suivi de, les traits de plume du patient O.T. trad de l'allemand par evelyne sznycer. En postface, droit de suite baroque. De la dissimulation dans la schizophrenie et le manierisme par evelyne sznycer. 저자: Leo Navratil; Evelyne Sznycer, 1978.
(8:27, 53RMI) (16:37 53SKF)
제5장 공불가능성, 개체성, 자유(V, Incompossibilité, individualdité, Liberté)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1988)
들뢰즈, 이찬웅, 문학과 지성사, 2004(원P.192, 번272), pp 110-139
바로크가 건축, 회화, 조각에서는 르네상스에서부터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가지치기를 하고 또 다양한 재료들로 바로크 양식을 실현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실현을 한다. 그 실현은 창조적 방식을 창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교에서 신화(역사)에서 소설에서는 어떠한가? 종교에서 아담의 이야기는 한 가지치기일까? 역사에서 로마 공화정의 설화, 그리고 로마 황제정의 설화는 하나의 가지치기일까? 소설에서는 보르헤스(Borges, 1899-1986)와 르블랑(Maurice Leblanc, 1864-1941) 도 가지치기를 평면적으로 나열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역사도 이야기의 가지치기가 수많은 가운데 줄기만을 적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게다가 중동의 전설따라 삼천리는 더욱더 착각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온세상은 이어져 왔다는 데서, 그나마 착한 길을 모색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다른 가지치기도 있을 수 있으며, 그 중에서 “최고로 선한 세상”을 모색하는 과정이 세계사일 것이다. 제국에서 자본으로 이행하고 있는 모습이 최상이 아니라고 할 때, 가지치기의 이야기는 무성할 것이고, 시간이 흘러서 역사의 사건들의 계열을 서술하는 것은 다음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한 방식(마니에리슴)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암묵적으로 사건들의 계열은 세상에 충족이유가 있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한 것 같다.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귀결로서 나온 사건들의 계열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도 역사의 흐름(계열)에서 변곡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도 헤겔처럼 이성의 간지가 있어서 영웅이 최상의 계열을 선택한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53RMI)
영혼의 자유에 관한한, 스피노자의 아페이론의 능동적 전개, 라이프니츠의 아페이론의 폐쇄적 완전함 속에서 전개, 벩송의 개방적 전개 등은 모두 자유의 실행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노력과 행위, 라이프니츠의 최상의 세계 속에서 삶, 벩송의 자연의 자기 생성에서 삶은, 모두 현존하는 세계에서 현재의 삶에 대한 개인의 인성의 함양, 교양의 성취, 다음 인간들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을 비참, 야만, 비관 속에서가 아니라, 안락, 문화, 낙관 속에서 실행하자고 하는 것이리라. (53RMI)
신의 완전성과 완결성, 즉 세계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선가정을 버리지 않으면서, 현상의 세상의 다양한 사물들, 물체들, 식물들, 곤충들, 동물들, 인간들을 각각의 특이성 또는 고유한 내용물들을 인정하면서 개념화 작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제반 과학에 조예가 있어야 했을 것이고, 각 개체의 고유한 내용들이 다른 고유한 내용과의 차이를, 라이프니츠는 경험적으로 알아차려야만 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박학다식했다. 어째거나 외연적으로 개념을 설정하는 것을 넘어서 내포성(또는 강도)로서 개념들(또는 실사들)이 갖는 성격들을 구별하려 했다. 그럼에도 세상사의 사물들의 사건, 개인들의 사건, 역사적 사건, 신화나 성경의 사건들을 개별화의 방식에 의해 내포성을 설명하려 하는 점에서 볼 때, 그는 크리스트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당대의 문장 또는 명제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자료의 총체로서 다 다루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 1과0 사이에 제3자로서 정도의 차이와 질적 차이를 지닌 다양한 실체들(개체들)을 인정하고, 각 개체들(모나드들)의 고유함을 인정함에서 먼지에서 천사까지(먼지에서 보살까지)를 설명하려 하였다. 현실적 모나드의 특이성의 인정으로 창없는 단자를 만들었다기보다, 우주라는 신의 단자가 완전체여야 하기에 닫아버린 것에서 유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는 우주의 완전성에서 지식(인식)의 완전성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역학,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나오게 되면 달라질 것이고, 확률론에 의해서 보면, 1과 0사이에 있는 단자 또는 개체라는 단위들은 집합 속에 우연성의 단위(요소)처럼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그 요소는 단위 안의 요소라고 보았던 라이프니츠의 장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53SKF)
*목차
제1부 주름
1장 물질의 겹주름 / 2장 영혼 안의 주름 / 3장 바로크란 무엇인가
제2부 포함
제4장 충족 이유 79-109
제5장 공존 불가능성, 개체성, 자유 11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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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공불가능성, 개체성, 자유 110 V, Incompossibilité, individualdité, Liberté 79
L’incompossibilité ou la divergence des séries – Le récit baroque – Singularités pré-indiviiduelles et individu – Idividuation et spécification – Le jeu du monde baroque – Optimisme, misère du monde et maniérisme – La question de la liberté humaine – Phénoménologie des motifs – L’inculsion du prédicat et le présent vivant – Leibniz et Bergson: le mouvement en train de se faire – La damnation[영벌(永罰)] baroque // 공존불가능성 또는 계열들의 발산 – 바로크식 설화(說話) - 전 개체적 독특성과 개체 – 개체화의 종적 특수화 – 바로크 세계의 놀이 – 낙관론, 세계의 비참과 마니에리슴 –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 – 동기의 현상학 – 술어의 포함과 생생한 현재 –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 – 바로크의 저주.
§5.1. 공존불가능성 또는 계열들의 발산 110 - L’incompossibilité ou la divergence des séries 79
아담은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 반대, 죄인 아닌 아담은 불가능하지도 그 자체로 모순적이지도 않다(‘2더하기 2는 4가 아니다’는 모순이지만). 이러한 것이 현존 명제들의 고유성(le propre, 고유점)이다. (79, 110) [고유성은 본질과 다르다.]
죄인 아닌 아담과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 사이에는 본래적인 배제의 연관이 있어야만 한다. 죄인 아닌 아담은 또 다른 세계를 포함할 것이다. 두 세계 사이에는 모순과는 다른 어떤 연관이 있다(비록 두 세계를 구성하는 이 주어들 사이에는 국소적인 모순이 있겠지만).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 말하기(vice-diction, 2차화법)이다. 신이 무한히 많은 가능 세계들 중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관념이고, 특히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고유한 점은 가능세계들 사이에서 깊이있는 독창적인 연관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연관을, 라이프니츠는 신의 오성 안에 묻혀 있는 거대한 불가사의(un grand mystère)라고 말하면서, 공존 불가능성(l’incompossibilité)이라고 이름 붙인다. (79, 110-111)
세계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독특점들(points singuliers) 주위에서 수렴하는 무한히 많은 계열이라는 것을 우리는 앞서 보았다. 그래서 각 개체, 각 개체적 모나드는 자신의 집합 안에서 모두 같은 세계를 표현한다. (80, 111)
얻어진 계열들이 독특점들의 근방에서 발산할 때,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1)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수렴하고 이어질 수 있는 계열들의 집합. 2) 같은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의 집합(죄인 아담, 황제 시저, 구세주 크리스트‥…)을 공존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1) 발산하고, 따라서 두 가능 세계에 속하는 계열들, 2) 그 각각이 다른 것과 상이한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황제 시저와 죄없는 아담)을 공존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80, 111)
신은 서로 간에 공존 불가능한 무한히 많은 가능 세계 중 선택하며, 그리고 가장 좋은 것, 즉 가능한 실재성을 가장 많이 지니는 것을 선택한다. “좋음”은 두 세계의 규준인 반면, “가장 좋음”은 유일하고 상대적인 세계의 규준이다. 최선(最善)의 원리는 원리들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데, 왜냐하면 이 원리는 충족 이유를 세계에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80, 112) [현존하는 현실태가 최선이다(라이프니츠): 그럴듯한 이야기다(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권능과 노력의 한 귀결이다(스피노자). 생명체의 진화 형태이다(다윈), 자기에 의한 자기 생성인데 이를 아는 것은 인간이 처음일 것이다.(벩송)]
세계는 자신을 표현하는 모나드들 밖에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그러나 모나드에 앞서는 것이 있다. 신은 아담이 죄를 짓도록 하거나 또는 아담이 죄지을 것을 인식할 각오를 하고, 아담을 먼저 만들지 않았다. 그 아담이 죄를 짓는 세계를 창조하며, 또한 이것[세계]을 표현하는 모든 개체들 안에 이 세계를 포함시킨다(루크레티아를 능욕한 섹스투스,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시저). 우리는 일련의 변곡들 또는 사건들로서 세계에서 출발한다. (81, 112)
예를 들어 세 개의 특이성이 있다: 최초의 인간인 것, 기쁨의 정원에서 사는 것, 자신의 갈비뼈에 나온 여자를 갖는 것, 그 다음으로 넷째로 죄짓는 것. 이러한 사건-특이점들은 “평범한 점들” 또는 “정규적인 점들”(여기에서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과 연관 있다. (81, 112-113) .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모든 것이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특이한 점은 상이한 벡터들 아래의 두 평범한 점의 일치일 뿐이기 때문이다(정사각형의 점B는 선분 AB의 마지막 점인 a와 선분BC의 첫점인 c와 일치이다). 라이프니츠 철학의 두 극을 따라서, 모든 것은 정규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독특하다. 그래도, 주어진 스케일에서, 우리는 서로 서로 연관으로 독특점들과 평범점들, 정규점들을 구별한다. (81, 113)
§5.2. 바로크식 설화(說話) 111 Le récit baroque 80
우리의 네 특이점으로 되돌아가보자. 양방향으로 공통의 값을 갖는 정규적인 선 위에서, 이 특이점들 중 하나를 다른 하나의 근방으로 매번 이어지게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상정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섯째 특이점이 있다. 이 경향에 저항하는 것, 이것은 단순히 넷째, ‘죄짓다’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이것은 다섯째에서 다른 셋으로 향하는 이어짐의 선들이 수렴하지 않는다는 것, 즉 다시 말해 공통의 값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81, 113)
세계의 기원에 어떤 계산, 차라리 어떤 신적 놀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가장 위대한 많은 사상가들이 생각했던 바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놀이의 본성에, 그것의 우발적 규칙에,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재구성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모델에 의존한다. (82, 113-114)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의 끝에서 이것에 대한 거대한 바로크적 재현을 제공한다. 이것은 바로크식 설화(le récit baroque)의 일반적인 규준에 가장 전형적으로 상응하는 텍스트이다. 서술들이 서로의 안으로 끼워 넣어져 있는 것, 그리고 서술자-서술 관계의 변주. (82, 114)
이러한 모든 섹스투스는 가능하지만, 하지만 이것들은 공불가능한 세계를 이룬다. (83, 115)
그 근방에서 계열들이 발산하는, 마치 신전의 출구와 같은, 어떤 점을 분기(bifurcation)라고 말한다. 라이프니츠의 신봉자인 보르헤스(Borges, 1899-1986)는 중국의 철학자-건축가인 취팽을 원용하는데, 이 사람은 “갈라지는 오솔길이 있는 정원”의 창시자이다. “예를 들어 팽은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 취팽의 작품에는 모든 결말이 생산되며, 각각의 결말은 또 다른 분기의 출발점이다.” (83, 115)
라이프니츠의 또 다른 신봉자이자, 가장 위대한 대중적인 소설가인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 1864-1941)은 “일상적인 철학 교수”인 발타자르의 삶을 묘사했는데, 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평범하고 모든 것이 언제나 정규적이었다‥… 그러나 고아였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는데 전념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세 가지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고유한 지문, 가슴에 문신으로 새겨진 MTP라는 글자, 그의 아버지는 머리가 없다고 말해주었던 한 예언자의 계시. (83, 115-116) .[네 경우의 아버지가 등장했다.]
그는 살아남은 이의 지문의 표식과 문신의 기호를 네 아버지에게 보냈고, 이것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각각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에는 분기하는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으며, 이것들은 공불가능한 세계들 안에서 발산하는 계열들로 동시에 전개된다. 발타자르는 같은 세계 안에서 이 모든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는 없다. [소설의 결론] 다수의 사기(une escroquerie multiple)(84, 116)
왜 보르헤스가 라이프니츠 대신 중국 철학자를 원용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전적으로 모리스 르블랑과 마찬가지로, 그는 신이 동시에 공존불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대신, 그 모든 세계들을 실존하도록 이행하게 만드는 것을 원한다. (84, 116)
신은 놀이 한다. 그러나 놀이 규칙을 부여한다(보르헤스와 르블랑의 규칙없는 놀이와는 반대로). 이 규칙이란, 가능한 세계들은 만일 신이 선택한 세계와 공존 불가능하다면 현존으로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아스트레(L'Astrée, 1607-1627,)와 같은 소설들만이 이렇게 공존 불가능한 것들의 관념을 제공한다. (84, 117) .
§5.3. 전 개체적 독특성 과 개체 Singularités pré-indiviiduelles et individu
이것에서 개체의 정의, 개체적 용어[개념]의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각 모나드는 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정의 불가능한 포함), 그러나 자신의 시선점에 근거하여 부분적인 지대 즉 구역만을 명석하게 표현한다는 것(정위된 지구)을 우리는 앞서 보았다. (84 117)
예를 들어 아담의 경우에는 먼저 고려되었던 네 가지 술어. 이것이 개체에 대한 실재적 정의이다: 몇 개의 수렴하는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집중, 축적, 일치(독특한 점들은 같은 점에서 일치할 수 있다. 마치 분리되어 있는 삼각형들의 다른 꼭지점들이 피라미드의 공통의 꼭지점에서 일치하듯이). 이것은 모나드의 핵과도 같다. 각 모나드의 심장에는 게루(Gueroult1, 1891-1976)의 가설에 따르면, ‘단순 개념’이 없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방법에 반대하여, 개념들의 사슬 안에 두 극단에 만족하는 것이다. (84-85, 117-118)
요컨대 가능한 각 모나드는 몇 개의 전-개체적 독특성들에 의해 정의 되며, 다라서 이 독특성들과 수렴하는 독특성들을 가진 모든 모나드들과 공가능하며, 발산 또는 이어지지-않음을 함축하는 독특성들을 가진 모나드들과는 공불가능하다. (85, 118-119)
§5.4. 개체화 와 종적 특수화(종별화) 85 Individuation et spécification
그런데 왜 공존 불가능한 세계들 안에서 발산하는 이 모든 개체에 아담이라는 고유명사를 부여하는가? 그것은 한 독특성이 언제라도 자신의 이어짐이 고립되고, 오려내지고, 잘려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85-86, 119)
개체화(l’individuation)는 분화(différenciation)의 규칙 하에서, 류에서 점점 더 작은 종들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개체를 이런 저런 세계와 관계시키는 수렴 또는 이어짐의 규칙하에서, 독특성에서 독특성으로 나아간다. (86, 119)
개체적 차이는 종적이지 않고, 개체는 마지막 또는 궁극적인 종이 아니다. 그렇지만 라이프니츠가 개체를 ‘최하위의 종’처럼 말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체에 대한 단지 유명론적 정의이며,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원용함에 있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즉 개체와 개념을 대립시키는 모든 이들과 관계를 끊고자 하는 목적에서 그렇게 한다. (86, 119) [라이프니츠의 용어는 유명론이 아니라, 개체의 내용을 지닌 개념론에 속한다.]
이 특이성들은 여전히 전개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는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현실화이며, 앞서 있는 어떤 종별화도 함축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반대로 말해야만 하며, [종적] 종별화가 그 자체로 개체화를 전제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86, 120)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구분한 두 경우에 있어 참이다: 수학적 종들과 물리학적 종들. 전자의 경우에서, “두 사물은 모든 면에서 전혀 닮지 않고, 종에 있어 서로 다르도록 만드는 가장 작은 차이”: 두 수학적 존재들 사이의 모든 개체적 차이는 필연적으로 종적이다. (87, 120)
그런데 물리적 사물 또는 유기체적 물체에서는 사정이 같지 않다. 여기서는 우리가 보았듯이, 종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누어지고, 동시에 사물(la chose) 또는 물체(le corps)가 끊임없이 변하게 되는 계열들을 상이한 특징들이 구성한다(cosntituer). (87, 121)
분류의 다양한 특징과 구분되지 않는 이러한 다중-종별화는 물체 또는 사물의 개체성이 다른 곳에서 온다는 것을 상정한다. 또한 사실 개체적인 것, 그리고 변경 가능한 물체를 개체화하는 것은 물체와 분리불가능한 영혼뿐이다. (87, 121)
우리는 식별불가능자의 원리와 연속체 법칙 사이의 최소한의 대립을 헛되이 찾고 있다. 후자는 주요한 세 영역에서 작동하는 종별화의 법칙이다. 후자의 법칙은 주요한 세 영역에서 작동하는 종별화의 법칙이다: 전체와 부분들의 수학적 영역, 종 또는 물체적 특징들의 물리학적 영역, 독특성들의 우주론적 영역(하나의 독특성이 규정된 질서 안에서 다른 독특성의 근방에까지 이어지는 한에서). 식별불가능자의 원리는 개체화의 원리며, 이것에 따르면 수, 공간 또는 시간에 의해서 오직 외부에서만 구분될 수 있는 서로 닮은 두 개체는 없다. (87-88, 121)
식별불가능자의 원리는 베어낸 자국들(des coupures, 절단들)을 설치한다. ... 이 때 사람들은, 두 개체 사이의 차이는 내적이고 환원불가능(=1)이라고 말하고, 반면에 이 차이는 연속성 덕분에 사라지게 되면서 0으로 향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셋 의미(방향, ses trois sens)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도 연속성은 차이를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사라지는 것은, 바로 차이를 정확하게 구성하는 내적 비율(raison)을 이용하여, 연관 항들에 할당할 수 있는 전체 값일 뿐이다. (88, 122)
그리고 만일 연속성의 법칙의 가장 일반적인 정식을 원한다면, 감각적인 것이 어디에서 끝나고 지성적인 것이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이 관념에서 아마도 그것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두 세계는 없다”고 말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두 심급의 일치 안에서, 영혼 위에 연속체의 역류(逆流)도 있다. (88-89, 122-123)
이 구역들, 각 모나드에 고유한 특별한 지대들 안에서 비교되는 외연과 내포성은 식물, 동물, 인간, 천사의 영혼들 또는 모나드들의 종, 연속해 있는 “모나드들 안의 무한히 많은 정도들”을 구분하는 것까지도 허용한다. (89, 123)
§5.5. 바로크 세계의 놀이 123 Le jeu du monde baroque 89
세계의 놀이(le jeu du monde)는 여러 측면들(plusieurs aspects) 을 갖는다. 그것은 특이성을 방출한다(émettre). 그것은 한 특이성에서 다른 특이성으로 나아가는 무한한 계열을 [천막치듯이] 펼친다. .. 그 세계의 놀이는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 또는 개체들의 핵 안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세계의 독특성들을 분배한다. 그러므로 신은 세계들 중 가장 좋은 세계, 즉 가능한 실재성에 있어 가장 풍부한 공존 가능한 집합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개체들 안으로 독특성들을 가장 잘 배분(la répartition, 재배열)할 것을 선택했다(같은 세계에 대해 독특성들의 다른 배분을, 개체들의 다른 경계 획정을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89, 123)
공간, 시간, 너비는 매번 세계 안에 있으며, 그 역(逆)은 아니다. 이 놀이는 놀의 말 역할을 하는 놀이자들 뿐만 아니라, 놀이를 하는 곳인 탁자와 그 탁자의 재료까지도 내면화한다. (90, 124) [의식(자아)은 당연히 심층이지만, 그 심층의 터전인 탁자(세계, 자연)도 탁자의 재료(아페이론)도 세계의 놀이의 심층이다. (53SKG)]
니체(Nietzsche, 1844-1900)와 말라르메(Mallarmé 1842–1898)는 주사위 던지기를 방출하는 세계-“사유”를 우리에게 다시 드러내주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모든 원리를 상실한 원리 없는 세계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을 긍정하고 모든 우연을 사유하는 역량이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원리가 아니라 모든 원리의 부재이다. (90, 124). [원리부재는 무질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원리가 적용하는 방향의 역방향은 생성이며, 생성은 다른 질서이다. 이 질서를 무시하는 원리에서 보면 질서 부재이다.]
“세계는 부재의 익명의 영역이며, 이것으로부터 사물들이 나타나고 그리고 사라지는 것이다‥… 나타남[생성]은 마스크(le masque)[chora]이다 그것 뒤에는 인격[신]도 없고, 단지 무(le rien) 이외에 아무것(avoir rien)도 없다” 어떤 것(quelque chose)이 아니라 어떠한 아무 것(le Rien)도 아니다. (90, 124) [마스크라는 세계 뒤에는 이데아도, 목적인도 들어있지 않다. 그러면 운동, 즉 권능이 있을 뿐이다.]
신의 부재 안에서, 인간 자체의 부재 안에서 원리없이 사유하는 것은, 놀이의 오래된 ‘지배자(Maitre)’의 자리를 찬탈하고 산산조각 난 같은 세계(탁자는 부서진다‥…) 안으로 공불가능한 것들 들어가게 하는 놀이하는-아이의 위험천만한 일이 된다. (124-125) 하지만 그 긴 역사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우리롸 가장 가깝게는, 원리들이 마지막 피난처로서, 칸트의 피난처인 인간 [속좁은] 이성이 무너져야만 했다. 그 이성은 신경증으로 죽었다. 그러나 또한 그에 앞서 정신병리적 에피소트, 즉 신학적 모든 이성의 위기와 몰락이 필요했었다. 바로 여기에 바로크가 자리를 차지한다. (90-91, 124-125)
[신학적 이상에서 벗어나 바로크로 바꾸는 것] 이것은 “법률(Droit)”을 보편적 판례(Juriprudence)로 변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과 특이성의 혼인이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식의 혁명이며, 라이프니츠는 가장 대표적인 마니에리슴의 영웅, 프로스페로(Prospero)에 가장 가깝다. “불가사의한 프로스페로, 마술사이자 합리론자, 삶의 비밀빌들에 대한 전문가이자 요술쟁이(bateleur), 행복 분배자,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빛나는 고독에 몰두 한자.” (91, 125)
라이프니츠의 놀이의 참된 성격들이 있다. 그리고 그 놀이를 주사위 던지기에 대립시킨 것, 그것은 우선 원리들의 증식이다: 놀이는 원리의 과잉에 의해서 이지 원리의 결여에 의해서가 아니며, 놀이는 원리들 그 자체의 놀이이며, 원리들을 발명하는 놀이이다. [둘째로] 그러므로 이것은 숙고의 놀이(un jeu de réflexion), 체스 또는 체커의 놀이이며, 여기에서 재주(l’adresse)(아자르가 아니라)가 오래된 현명함과 오래된 신중함을 대체한다. 셋째로, 이것은 채우기의 놀이이다. 여기에서 비어 있는 곳은 쫓겨나고 어떤 것도 부재의 상태로 남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역전된 솔리테르(sollitaire) 게임이다. .. 끝으로 이것은 전장(non bataille)이 아니며, 말살하는 전쟁보다 유격전에 가깝고, 체스나 체커 놀이보다 바둑에 더 가깝다: 상대방을 부재하게 만들기 위해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무력화시키고 공존불가능하게 하고 발산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있는 곳을 포위한다. 그렇다, 세계가 원리들을 상실하기 앞서서, 이것이 바로크이다: 즉 찬란한 순간, 거기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기보다 어떤 것을 보존하고, 또 거기에서 세계의 비참함(le misère)에 응답하는데, 원리들에 과잉에 의해서, 원리들의 오만(hybris, 맹폭)에 의해서, 원리들에 고유한 오만에 의해서 응답한다. (91-92, 126). [허무주의와 비참의 극복이 낙관주의일까? 숙명 운력 소박을 모토로하는 노력에서 이겠지.]
§5.6. 낙관론, 세계의 비참과 마니에리슴 Optimisme, misère du monde et maniérisme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은 얼마나 낯선가. 다시 한 번 그것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비참함이 아니며, 가장 좋은 것은 플라톤의 “좋음”의 폐허 위에서만 꽃을 피운다. (92, 127)
그는 “변호사”, 신의 변호사이다. 철학자는 라이프니츠가 만든 말인 “변신론”에 따라 신의 입장(Causa)을 방어한다. 확실히 악에 맞선 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언제나 철학자의 공통된 자리였다. (92, 127)
악에 마주한 신의 정당화... 변호사가 그 세계를 재구축해야 할 정도로 세계의 붕괴 일어났다(여기에는 판례가 있다). 거대한 위기에는 강화된 정당화가 상응해야만 한다. 세계는 가장 좋아야만 하는데, 그 전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세부에서 또는 그 모든 경우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분열증적 재구축이다. 신의 변호사는 소위 등장 인물들의 ‘자기조형적(autoplastique)’이며 내부적인 변모들과 더불어 세계를 재구축하는 인물들을 불러온다. 이러한 것들이 모나드들, 또는 라이프니츠에게서 “자아”들, 자동인형들이다. (92-93, 127-128)
모나드들을 춤추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이 춤은 바로크의 춤이며, 여기에서 춤추는 이들은 자동인형들이다. 이것은 두 모나드 간의 나눌 수 없는 거리(공간)와 같이, 완전히 “거리에 대한 파토스”이다. 이 둘 사이의 만남은 축제 행렬, 즉 .. 작용과 반작용은 이 거리의 양쪽으로 분산되어 있는 자세들의 연쇄에 자리를 내어준다(마니에리슴). (93, 128)
§5.7.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 128 La question de la liberté humaine
낙관론의 원리 또는 “가장 좋은 것”의 원리는 신의 자유(la liberté de Dieu)를 구출한다. 그 자유를 보증하는 것은 세계와 신의 놀이이다. 죄는 짓지 않은 아담, 루크레티아를 능욕하지 않은 섹스투스가 다른 가능 세계들에는 있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것,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선택된 가장 좋은 세계와 공불가능할 뿐이다. (93, 128)
사람들은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보다 훨씬 더 강하게 우리른 단죄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스피노자에게는 최소한 해방이 가능한 절차가 있었다. 반면 라이프니츠에게는 울타리 쳐진 조건하에서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닫혀있다. .. 공존불가능성은 라이프니츠가 미래의 우발적 사건이라는 고대의 문제를 스토아의 아포리아에 빠지 않으면서 풀 수 있게 허용한다(내일 바다에 전투가 있을 것인가?). (93-94, 129)
어떻게 자유를 분열증적인 자동인형(un automate schizophrène)의 내적이고 완결적이고 예정된 규정과 뒤섞을 수 있겠는가? (94, 129)
§5.8. 동기들의 현상학 Phénoménologie des motifs
주어 안에 술어가 포함된 것으로 우리는 되돌아간다. 그리고 만일 술어가 속성이라면, 확실히 사람들은 주어의 자유를 구해낼 수 있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 최소한 두 곳의 텍스트에서 라이프니츠는 최초로 동기들에 관한 현상학의 위대한 토대를 놓는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착각을 고발한다. 하나는 동기를 대상화하는데 있다. .. 다른 하나의 착각은 동기들을 이중화하는(dédoubler, 두 줄로 놓는다) 데 있다. (94, 129-130)
의지적 작동(l’acte volontaire)는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자유로운 작동이란 지속의 어떤 순간에서 영혼 전체를 표현하는 행위이며, 자아를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95, 130)
앞서 변곡에서 포함으로 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변곡들이 자연스럽게 영혼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보았다. 성향은 바로 영혼 안의 주름이며, 포함된 것으로서 변곡이다. 여기서 ‘영혼은 필연적으로 강제됨 없이 성향(inclination)을 지닌다’ 라는 라이프니츠의 정식 나온다. 동기는 내적인 규정 자체가 아니라 성향이다. (95, 131)
라이프니트에게 포함은 어떤 점에서 – 나는 쓴다, 나는 여행한다[처럼] - 현재와 연동되어(indexée) 있다고 주목해만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내가 이 순간에 행하고 있는 것을, 또 내가 행하고 있는 중인 것을, 나의 개체적 용어는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때문에] 나는 또한 그것을 행하도록 나에게 밀고 있는 모든 것을, 또한 그것으로부터 무한히 흘러가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95, 131) [과거에 해온 것을 포함하고 있는 현재는 미래에도 무한히 포함한다(벩송과 같다)]
완전한, 실현된 현실태란 자신을 포함하는 영혼으로부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고유한 통일성을 받아들이는 현실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벩송(Bergson, 1859-1941)은 라이프니츠와 매우 가깝고, 바로 라이프니츠에게서 줄곧 이 정식이 발견된다. 미래를 품고 있고 과거로 가득 찬 현재. 내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자유 자체를 구성하는 내부성. 생생한 현재는 본질적으로 외연과 내포성[강도]에 있어 가변적인 것이다. (96, 131-132)
작동(l’acte)은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작동은 현재에서 영혼 전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96, 132)
§5.9. 술어의 포함과 생생한 현재 L’inculsion du prédicat et le présent vivant
[신의] 저주에 관한 어둡고 훌륭한 이론만큼이나 이를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경우에 조자도 저주받은 자, 유다(Judas) 또는 베엘제불(Belzebuth)은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의 현행적 진폭(l‘amplitude actuelle)을 구성하고 현재의 자기 영혼을 채우는 신에 대한 증오에 대해 값을 치른다. (96, 132)
라이프니츠가 말하듯이, 저주받은 자는 영원히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저주받아 마땅하며” 각 순간마다 저주받는 것이다. 또한 저자받은 자들은 자유롭고, 축복받은 자들 만큼이나 현재에 있어 자유롭다. 이들을 저주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현재의 정신의 협소함, 진폭의 부족이다. (97, 133)
아마도 저저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보다 광범위한 맥락과 관계하는 바로크의 깊은 심층에 속한다. 현재에 있는 죽음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으로서 인식한 것이 바로 바로크이며 여기에서 이 운동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동반’하고(“accompagne”) 있는 것이다. (97, 133)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고, 저주받은 자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만일 그 영혼이 다른 진폭, 다른 주름, 다른 경사를 지닌다면 충분했거나 충분할 것이다. (97, 133)
자동인형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데, “물질적 자동인형”[곤충]이 기계적 작동들을 위한 규정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듯이, “정신적 자동인형”[인간]은 자발적 행위들을 위한 동기 부여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만일 사물들이 신의 오성 안에 포괄되어 있다면, 그것들은 “자유로운 것은 자유로운 것으로, 또한 맹목적인고 기계적인 것은 기계적인 것으로서” 그러하다. (134)
§5.10.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 일어나고 있는 중인 운동 134 Leibniz et Bergson: le mouvement en train de se faire 98.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의 주제들과 벩송의 테제 사이의 유상성에 사로잡힌다. 동기에 관한 착각을 같이 비판하는 것, 영혼의 변곡들을 같이 개념작업하는 것, 내속과 포함을 자유로운 행위의 조건으로서 같이 요구하는 것, 자유로운 행위를 자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같이 기술하는 것(“자유로운 결정이 유래하는 곳은 바로 영혼의 전체이며, 이 행위는 결부되어 있는 역학적 계열이 근본적인 자아와 보다 많이 동일시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자유롭게 된다”). (98, 134)
신은 각자에게서 “도처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과 더 나아가 앞서 일어났던 것 또는 앞으로 일어날 것”까지도 읽고, 과거에서 미래로 읽는데, 왜냐하면 그는 “시간과 더불어서만 감각될 수 있도록 전개되는 모든 겹주름들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135)
그런데 신이 언제나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가 모나드의 모든 사태들을, 이 사태들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간격없이” 행위의 순간에 모나드와 동시에 발생하는 방식으로 관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99, 135)
물론 각 모나드는 신의 이행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각 모나드는 시선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시선점은 신의 독서 또는 시선의 “결과”이며, 신의 모나드를 관통하며 모나드와 함께 일치한다. (99, 136)
포함의 체계 내에서, 위협받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이다. 왜냐하면 만일 자유로운 행위가 영혼이 이 행위를 하는 순간 이 영혼의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세계의 각 부분 즉 모나드를 자극해야만 하는 가장 좋은 것으로의 경향이란, 그 경향이 세계 또는 모나드들의 전체에 대한 신의 선택을 자극하는 한에 있어, 무엇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라이프니츠보다 더 도덕에, 그것도 매우 구체적인 도덕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99, 136)
도덕은 각자에게 대해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저런 조건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표현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매번 자신의 명석한 표현의 지역을 확장하려는 노력, 자신의 진폭을 증가시키려는 노력. 이것이 사람들이 진보(progrès)라 말하는 것이며, 라이프니츠의 도덕론 전체는 진보의 도덕이다. 예를 들어 내가 술집에 갈 때, ..[두갈래의 선택] .. (99, 136-137)
§5.11. 바로크의 저주 137 La damnation[영벌(永罰)] baroque. 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진보 또는 확장의 이런 가능성은 세계 내의 진보들의 총량과 충돌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이 양(量)은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에 상응하는 지역들 전체의 수렴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100 137)
부활(la résurrection)은 이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내는 이 사유에 이들을 여전히 연계시킨다. 진보의 문제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시간의 질서이다. 영혼들을 올라가게, 다시 내려가게, 다시 올라가게 만드는 극작법(dramatique) 전체. (100-101, 138) [니체의 드라마 방법은 플로티노스의 방법이고, 샤키야 무니의 인연(因緣)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혼에 관한한 비슷한 사유를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니까.]
§5.12. [소결론: 영혼의 자유]
-[그래도 라이프니츠는 합일 또는 몰아경이라는 이야기는 않는다. 모나드가 창이 없어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세계는 이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 안에서 주름 잡혀 있는 것으로 밖에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든 모나드들의 공통 지평으로서, 또는 모나드들이 포함하는 계열들의 외부적 법칙으로서 잠재적으로 밖에 자신을 펼치지 않는다는 점은 사실이다. (101, 138)
바로크의 집은 자기가 가진 두 개의 층을,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최후의 심판(1562)」의 방식으로, 저주받은 자들의 층과 행복한 자들의 층으로서 구성한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진보의 총량은 신에 의해서 앞서 규정되거나 사후에 규정되지 않으며, 양심(conscience)을 모두 더하고 저주받은 자들을 모두 빼는 과정을 통과하는 무한급수의 계산 안에서 영원히 규정된다. (102, 139)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에는 총량의 불변이 들어있다. 스피노자와 벩송은 열려있다, 사키야무니와 니체에도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53RMI)]
(7:21, 53RMI)(14:01, 53SKF)
# 인명록 ******
540?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Sextus Tarquinius, ?-전509) 로마(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우스 왕조(전616-전509년)의 마지막 왕(폭군), 로마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 le Superbe)의 가장 어린 아들이다. [왕조의 멸망은 폭군, .하(夏)왕조(전2070년경-기원전1600년경) 걸(桀)왕의 말희(末喜), .. 중국의 상(商)왕조(전1600년경-기원전1046년경)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하다가 멸망(무왕에 의해 주(周)나라 성립)]
540? 루크레티아(Lucrèce, (Lucretia en latin, ?-전509) 타르뤼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l'épouse de Tarquin Collatin, homme fort et proche du roi Tarquin). 그녀는 자기를 능욕한 섹스투스를 징벌해줄 것을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낸다.
509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 ?-509-?) 로마공화정 건설자 중의 한사람.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 다음으로 약속하고 민중을 이끌고 왕정을 몰아내고, 섹스투스는 로마에서 추방되어 암살당했다(509). 브루투스는 로마의 첫 공화국을 세웠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출생시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100 시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전100-전44) 로마 장군, 정치가, 작가.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O
1518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Jacopo Robusti, 1518-1594) 이탈리아 화가 일반적으로 마니에리슴 (Manierismus)에 분류한다. / Le Jugement Dernier et Moïse recevant les Tables de la Loi et Les Hébreux préparant le veau d'or, 1560-1562. - huile sur toile - 1450 x 590 cm - (Madonna dell'Orto (Venice, Italy)) // 미켈란젤로(1475-1564)는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뒤의 벽에 <최후의 심판>을 1536년 5월 그리기 시작했다.
1567 뒤르페(Honoré d'Urfé, comte de Châteauneuf, marquis du Valromey, seigneur de Virieu-le-Grand, 1567-1625) 프랑스 작가, 역사상 첫째 대하소설인 아스트레(L'Astrée(1607-1627)(5부작)의 작가.
1580 케베도(Francisco Gómez de Quevedo Villegas y Santibáñez Cevallos, 1580-1645) 스페인 작가. Doctrina moral del conocimiento propio, y del desengaño de las cosas ajenas Philosophie, 1630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
1638 말브랑쉬 (Nicolas Malebranche, 1638-1715) 프랑스 철학자, 오라트와르 신부, 신학자. De la recherche de la vérité. Où l'on traite de la Nature de l'Esprit de l'homme, & de l'usage qu'il en doit faire pour éviter l'erreur dans les Sciences (1674-1675).
1638 레몽(Nicolas-François Rémond de Montmort, 1638-1725), 오를레앙 공의 고문단 단장엮임, 라이프니츠와 편지교환.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sur la liberté de l'homme, 1670-1671; Méditations sur la connaissance, la vérité et les idées, 1684; Discours de métaphysique, 1686; L’origine radicale des choses, 1697; De la nature en elle-même(1698); Nouveaux essais, 1704; Monadologie, 1714; Essais de Théodicée(1714) sur la bonté de Dieu, la liberté de l'homme et l'origine du mal 1714;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 1714;
1647 쟈끌로(Isaac Jaquelot, 1647-1708)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낭트칙령폐지로 프랑스를 떠나 네델란드로. Dissertation sur l'existence de Dieu, La Haye, 1697;
1661 프로스페로(Prospero)는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인 폭풍(La Tempête)(1610-1611)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유배된 섬에서 그 섬을 지배한다. / 이 작품은 실존인물 존 디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 존 디(John Dee, 1527–1608)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 비전전수자(occultiste), 그는 일생동안 연금술, 점, 예언(l’alchimie, de la divination et de l'hermétisme)에 전념했다. [참조, 프로스페로(Prospero Farinacci, 1554-1618) 이탈리아 형법학자, 대법관. 두 교황(Clément VIII et Paul V)에 봉사했다. 특히 후자의 검찰총장(procureur fiscal général sous ce dernier (1606-1611)을 했다.)
1675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 영국 철학자, 국교 성직자. 로크와 버클리 사이에서 중요인물, 라이프니츠와 편지 교환에서(1715-1716) 뉴턴의 대변자.
1678 부르게(Louis Bourguet, 1678-1742) 뇌샤뜰 시민, 지질학자, 박물학자, 수학자, 철학자, 고고학자.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라이프니츠와 편지교환(1714년) .
1696 삭스(Maurice de Saxe, comte de la Raute, 1696-1710) puis comte de Saxe (1710-1750), 1696-1750) 군인, 루이 14세 때 원수가 되었다.
1842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Étienne Mallarmé 1842–1898), 프랑스 시인, 비평가. 상징주의 시인, Hérodiade, 1864-1867
1844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문헌학자, 철학자.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864 모리스 르블랑(Marie Émile Maurice Leblanc, 1864-1941) 프랑스 소설가, 추리소설과 모험소설가. 모험소설, La Vie extravagante de Balthazar (1925) professeur de philosophie quotidienne .
1868 꾸뛰라(Louis Couturat, 1868-1914) 프랑스 철학자 논리학자, 러셀처럼 논리주의자. 라이프니츠 미발표 작품들 출간. La Logique de Leibniz : d'après des documents inédits, 1901
1891 게루(Martial Gueroult, 1891-197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7세기 전공. Dynamique et métaphysique leibniziennes, 1934 suivi d'une Note sur le principe de la moindre action chez Maupertuis, Paris: Les Belles Lettres, 1934.
189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1986)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이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의 관장직을 맡았다. 픽션들(Fictions (Ficciones) 1944), 알레프(L’Aleph (El Aleph) 1949),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1902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1902–1977) 프랑스 사회학자. Leibniz et Spinoza, 1946
1902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프랑스 철학자. 1921년 ENS, 1925년 철학교수 자격. 알사스 유대 총랍비(Moïse Schuhl, 1845-1911)의 조카이다. (벩송과 연관을 찾을 수 없다) Le Dominateur et les possibles (1960)
1903 그루아(Gaston Grua, 1903-1955)[쉰둘] 라이프니츠 전공자, 그르노블과 렌 대학에서 가르쳤다. Juriprudence universelle et théodicée selon Leibniz, 1953[아마도 학위논문], 1985.
1908 블라발(Yvon Belaval, 1908-1988) 프랑스 철학자, 문헌학자, 라이프니츠 전공자. Confessio Philosophi: La Profession de Foi du Philosophe(1672) 출판 1961.
1910 루세(Jean Rousset, 1910-2002) 스위스 문학 비평가. 바로크 문학 전공 제네바 대학 교수. La Littérature de l'âge baroque en France. Circé et le Paon, Paris, José Corti, 1953,
1920 뷔이유망(Jules Vuillemin, 1920-2001) 프랑스 합리론 철학자, 인식론자. ENS출신. 1943 철학교수자격 1등. Nécessité ou contingence. L'aporie de Diodore et les systèmes philosophiques(Paris, Minuit, 1984; réed. 1997.) [Diodore of Tarsus (Διόδωρος ὁ Ταρσεύς; died c. 390) 크리스트교 주교, 수도원 개혁자]
1923 클라닉차이(Tibor Klaniczay, 1923–1992) 헝거리 문학사가. 헝거리 민담과 민요를 이용. “La naissance du Maniérisme et du Baroque au point de vue sociologique,” in Renaissance, Maniérisme, Baroque, Ed. Vrin, p. 221.
1928 블란켄부르크(Wolfgang Blankenburg, 1928-2002) 독일 정신과 의사. 현상학적 정신병리학. “Tanz in der Therapie Schizophrener”, Psychotherapy and Psychosomatics, Vol. 17, No. 5/6 (1969), pp. 336-342.
1929 브룅슈비그(Jacques Brunschwig, 1929-2010) 1948년 ENS 1등, 1952년 교수자격 1등, 철학사가, 문헌학자(아리스토텔레스), 번역가. Essais de Théodicée et des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de Leibniz에 대한 그의 판본이 있다.
1930 세르(Michel Serres, 1930-2019) 프랑스 철학자, 과학사가. 라이프니츠의 체계와 그의 수학적 모델(Le Système de Leibniz et ses modèles mathématiques, 1968)
1930 즈네뜨(Gérard Genette, 1930-2018) 조상은 벨기에인, 프랑스 문학비평가 문학이론가. 이야기학(la narratologie) 창설자 중의 한사람. Figures(5권, essais, 1966-2002)
1932 필로넨코(Alexis Philonenko, 1932-2018)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933 브로솔레(Guy Brossollet, 1933-2015) 프랑스 작가, 수필가. 중국풍 운동가. 알제리 주둔 장교를 마치고, 중국을 공부했다. 마오 시집 첫 번역자. Essai sur la non-bataille, 1975.
스즈니세르(Evelyne Sznycer, s.d.) 벨기에 여성 정신분석학자(?) Droit de suite baroque // Schizophrenie et art : suivi de, les traits de plume du patient O.T. trad de l'allemand par evelyne sznycer. En postface, droit de suite baroque. De la dissimulation dans la schizophrenie et le manierisme par evelyne sznycer. 저자: Leo Navratil; Evelyne Sznycer, 1978.
(8:27, 53RMI) (16:37 53S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