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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세 | 파 | 성 명(자, 호) | 주 요 행 장 |
8 | Ⅱ-6 양촌 | 정엄(鄭淹) 문중(文中) 양촌(陽村) (1528 ~ 1580)
旌閭 | 생원 장원, 진사, 명종13년(1558년) 명경(明經) 문과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한림호당(選 翰林湖堂), 검열(檢閱), 사인전랑(舍人銓郞), 삼사아장(三司亞長), 동부승지(同副承旨), 수찬(俄陞修撰), 1571 여산부사(礪山府使), 1573 남원부사(南原府使), 1574년 나주목사(羅州牧使), 3읍 거사비(三邑去思碑) 증대사헌 양관제학(贈大司憲 兩館提學)
효성이 출중하여 정려을 명하였다. 「삼강록」에 실렸다 김평묵이 묘갈문을 쓰고, 성재 류중교가 묘지를 짓고, 회당 윤응선이 묘표를 썼다. 후종손 규종이 정려중수기를 지었다
以孝命旌閭 金平默撰碣銘 事見 「三綱錄」 省齋柳重敎撰墓誌 晦堂 尹應善撰墓表 後從孫圭宗撰旌閭重修記
* 정엄(鄭淹, 1528-1580) : 南道 인물(109) 한국매일
정엄(1528-1580)은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문중(文中), 호는 양촌(楊村), 본관은 광주(光州), 팔도관찰사 조계(棗溪) 만종(萬鍾)의 아들이다. 남구 양림동 출신으로 1552년(명종 7)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임명되어, 호당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2년(명종 17)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동부승지 허엽을 파직케 하고, 이듬해에 예조정랑,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6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개성부 유생들이 음사를 소각한 일로 청금(靑衿)들이 죄 없이 구류되어 방면하도록 주청하여 방면케 하였다.
1566년(명종 21)에 병조 정랑거처 사간원 헌납이 되어 "대간의 직은 책임이 가볍지 않아서 서정(庶政)의 잘잘못을 일에 따라 모두 말해야 하는 것인데, 신들은 모두 무상한 사람들로 중한 지위에 있으면서 자리만 지키고 녹만 먹을 뿐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옥당의 비난을 입고 있으니 하루도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하기를 청하였다. "답하기를,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퇴하지 말라."하였다.
1569년(선조 2)에 사헌부 장령과 홍문관 수찬을 거쳐, 외직으로 여산군수에 임명되어 강직한 목민관으로 전라감사의 추천이 있었다. 1571년(선조 4)에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교리를 거쳐 종시부 첨정 지제교로 명종실록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뒤에 남원부사가 되어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다는 전라감사의 보고가 있었고, 전라 순무 어사(全羅巡撫御史) 신응시(辛應時)의 서장(書狀)에, "남원(南原)은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서 예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부사(府使) 정엄(鄭淹)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합니다. 몇 해 동안 유임시키고 경관(京官)으로 차출하지 말기를 바라니, 어리석고 천한 백성이 사체(事體)를 모르는 것이기는 하나 그 성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574년(선조 7)에 모친 봉양을 위하여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어머님의 병을 자신의 아픔보다 더 아파하며 정성껏 간병하였으나 돌아가시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장사를 치른 뒤 죽었다는 갸륵한 효성에 나라에서 모두의 귀감으로 삼고자 1611년(광해 3)에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하고, 효자정려를 명하여 양림동에 정려를 세웠다. 이 정려는 퇴락 되어 1975년 후손들이 석조(石造)로 다시 세웠다.
이 정려비각에는 주인의 심부름을 사람 이상 잘하였던 충견상(忠犬像)이 있다. 양촌 공이 개의 목에 문서와 전대를 걸어 주며 말하면 밥을 사 먹고, 만약 밥값을 너무 많이 가져가면 떠나지 않는 등 상상을 초월할 만큼 영리한 개였다. 어느 해 급한 일이 있어 임신 2개월로 산기가 있는 이 개를 한양으로 심부름 보냈다.
한양을 갔다 오다가 전주 근교에 새끼 9마리를 낳고 한 마리씩 물어 나르다 마지막 새끼를 물고 오다 지쳐 죽고 말았다. 양촌이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석공을 시켜 견상(犬像)을 조각해 집 뜰에 두고 추모했다 한다. 양촌 공이 죽자 그의 후손들은 양촌 공의 정려각을 세우고, 그 견상을 정려각 앞에 세워 양촌 공과 그 개를 기렸다는 것이다.
「사람 몹쓸 것은 개만도 못하다」는 비유도 있는 것처럼 여기에 실린 전설은 어쩌면 인간보다 더 나은 개의 충성심과 의리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8 | Ⅱ-8 소강재 | 정이우(鄭以虞) 성순(聖舜) 소강재(昭江齋) | 천성이 순수하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다(天性純勤好學篤行文名大闡) 선조(宣祖) 조에 수재(秀才)로서 진사(進士) 소양강상에 머물며 낙향하여 한양에 들어오지 않으며 말하기를 “부친께서 출사치 않았는데 어찌 자식이 벼슬길에 나가랴!”(因臥昭陽江上不復入洛曰“親隱不仕子何出仕) |
9 | Ⅱ-6 양촌 | 정대휴(鄭大休) 회헌(悔軒) 倡義 殉節 | 생원, 경기전참봉(慶基展參奉)
임진왜란시 완산에서 순절하여 우승지에 증직되었다. 전쟁터에 나갈 때 유서를 남겨 종제 대신에게 조상봉사를 부탁하였다.
壬辰之亂 殉于完山 贈左承旨 臨行時遺書從弟大伸移住奉仕
< 전랑공 출전시 유서(1864년 정면수 공 필사) >
집 오가며 어른모시니 근황은 어떠하시냐! 멀리 있으니 그리움이 밀려온다. 나라가 장졸을 모집하고 형은 장차 전쟁터에 나갈 터인데, 생사가 어떠할지 알 수가 없구나!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냐마는 특별한 것은, 숙부께서는 연로하시고 너 역시 자식이 없으니 반드시 피란하여야 한다. 십분 명심하여라!
나는 비록 아내를 얻어 인연 맺어 살았지만 여러 달 봉양을 고심했는데, 너에게 조상께 술 올리고 제사모시고 부모님 양친을 부탁한다. 형수는 의당 가사에 대하여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인데 핍별하지 말고 잘 돌보아다오!
만약 형에게 불행이 오면 집안의 재산과 논밭 노비는 이를 재산으로 하여 조상봉사를 일여할지니 형은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후일 집안에 분쟁이 생기면 이 문서로서 해결해라!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구나. 이만 그친다
임진(1592년) 8월 11일 완산에서 종형 씀
< 殿郞公出戰時遺書 >
通來侍況差何遙慕實深 兄爲國事願兵將赴戰所 未知死生雖死何恨就中 叔父年深 君亦無子避亂一事十分愼之 我今雖得妾子緣閱月餘長養可慮願君愼酒敬奉養親及兄妾宜吾家事專恃於君勿以逼別善處如已事兄若不幸家財田民以爲已物 祖上奉祀一如兄所爲千萬幸甚他日門中如有爭端以此爲遺臨紙不覺淚下只此不備姑惟照下 壬辰八月十一日 從兄 大休於完山草 |
9 | Ⅱ-9 성재 | 정사호(鄭賜湖) 몽여(夢與) 화곡(禾谷) (1553 ~ 1616) 贈諡 忠敏 | 선조10년(1577년) 정축 문과 이조참의 (吏曹參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황해·경상·평안·경기관찰사(黃海慶尙平安京畿 四道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임진왜란 중 금성현령으로 현민을 구제하고, 정유재란 중 안동부사로서 명나라 장수 양호와 토적에 성공하여 광성군에 책훈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壬亂中 以錦城縣令救濟縣民 丁酉再亂中 安東府使 與明將楊鎬 討賊成功 策勳光城君 贈左贊成
영조 임오년(1762년)에 시호 “충민(忠敏)”을 내렸다. 나라걱정에 가사를 잊으니 “충”이요, 사변에 대응하여 공을 세우니 “민”이다
英祖壬午 贈諡忠敏 廬國忘家曰忠 事變有功曰敏
< 황명어사 손원화 찬 정자 정공 신도비명 중 발췌 >
- 조카(동생 명호의 5살 아들 두원)를 양육하다
~~ 정자공(정명호)이 일찍 아들을 두어 5살이 되었는데 형조판서공(정사호)이 조카를 양육하였다. (두원은) 문과에서 장원이 되어 10년 만에 경에 이르니 덕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아 이조판서로 귀하게 되었다. 명성을 날리고 행의를 세우니 새삼 정자공의 요절함을 추도하게 되니 어찌할 수 없다. 고아 되어 아버지 없음을 가슴아파할 것이나 아버지 있어도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 없어도 아버지 있으니, 다시 조카를 기른 아버지인 형조판서 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
~~當正字公早作一子甫五歲 刑書公撫猶子 擧鮮元會魁爲文科 高第十年之間爲躋於卿 得有造有德以成吏書旣貴 明楊行立追悼正字公之夭 不竟厥施 又自痛其孤失怙 有父無父 無父有父 乃更痛其撫已猶子之猶父刑書公矣~~~~ |
9 | Ⅱ-9 성재 | 정명호(鄭明湖) 정이(靜而) (1559 ~ 1585)
배 강릉김씨 烈婦 | 선조(宣祖) 13년(1580) 경진(庚辰) 문과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아버지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하도록 애통해 하며 장례를 마치고 3년 상을 마치기 전인 선조 을유년(1585년)에 졸하니 나이 겨우 27세였다. 좌찬성 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贈 左贊成 兩館大提學 * 정이주(鄭以周, 1530 ~ 1583.12.20.)
< 백사 이항복 찬 묘갈문 중 발췌 >
을유년 봄에 내가 이조랑(吏曹郞)으로 있으면서 인사 행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한 여노(女奴)가 와서 그 주부(主婦:어머니 동래정씨, 성재공 배)의 명을 전해 왔는데, 그 주부의 말에, “윤자(胤子:맡아들 사호)가 평상시에 모든 하는 일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이모(李某:이항복을 지칭)가 무어라고 할지 물어봐야겠다.’ 하고는, 한 마디 가부(可否)를 얻을 때마다 이를 굳게 지켜 엄숙한 자세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행히 부친상을 당하여 근심 속에 있는데, 삼년상을 1개월쯤 남겨둔 이때에 예에 지나치게 슬퍼한 관계로 몸이 파리해져서 병이 날로 깊어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망인(어머니 동래정씨)이 삼가 초목의 맛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해도 안 된다고 굳이 거절합니다. 그러니 만일 하늘의 영험을 힘입어 이 홀어미(동래정씨) 집에 뜻밖의 복이 내려진다면, 군자(이항복)의 말씀 한 마디로 거의 스스로 깨닫게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즉시 달려가 문병을 하고 포수(脯脩)의 중동을 구부려서 왼쪽에 놓고는 온갖 방도로 자세하게 비유하여 그를 달래보았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대명(大命)이 이미 다하여 수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지금은 예를 따르건 어기건 간에 죽는 것은 똑같을 뿐입니다.” 하므로, 나는 차마 여기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 문을 나와 버렸는데, 그로부터 6일 뒤에 그 집 노인이 부고(訃告)를 전해 왔으니, 이 때 나이 27세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앞일을 미리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신기하단 말인가?” 고 하였었다
歲乙酉春。余以天曹郞。政罷歸家。有女奴來致其主婦之命曰。胤子某平居。凡有所爲。必曰李某云何。得一可否。輒服膺而色洒如也。今不幸斬焉。在憂恤之中。去再期未一月。越禮爲瘠。病日臻幾滅性矣。未亡人謹致草木之滋。而持不可。如賴天之靈。惠徼福於寡家。得君子一言。庶有以自解。余聞卽馳省。執脯修左胊而曲譬之萬方。猶不回曰。吾豈敢迷不悟也。大命已窮。亶在數日。今從禮與違。死等耳。余不忍於是也。悒悒出門去。越六日。室老以訃告。盖得年二十七。余私恠曰。是先處其前事。一何神耶。
배 강릉김씨(配 江陵金氏)
< 황명어사 손원화(孫元化) 찬 신도비명 중 >
남편 여의고 삼년상 기간에 피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6년간 소식하고 30년을 소복입고 지내니 규방이 숙연하였다
泣血三年 蔬食六年 素衣三十年 中壼肅然 |
9 | Ⅱ-9 성재 | 정운호(鄭雲湖) 호이(浩而) 와빈(臥濱) (1563 ~ 1639)
忠孝 | 광해군3년(1611년) 신해 문과 대사간, 대사성, 형조참판, 한성좌윤(漢城左尹), 증좌찬성 양관대제학(贈左贊成兩館大提學)
예관을 보내 제사를 올렸으며, 현곡 조위한이 묘지명을 짓고 종후손 송남 규종이 신도비명을 썼다
丁外艱哀毁逾禮 終喪前 宣祖乙酉 2月5日卒 年僅二十七 贈 左贊成 兩館大提學 遣禮官 李惟達 致祭 玄谷 趙緯韓 撰 墓誌銘 從後孫 松南 圭宗 撰 神道碑銘
< 종손 규종 찬 신도비명 중 발췌 >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님 섬김에 마음과 물을 다하였다. 여름날에는 침소에 부채를 들고 겨울밤 이면 군불 때며 온돌을 살피었다. 나이 20살에 조부이신 성재공이 병환에 있을 때 혁 띠를 풀지 않고 눈 붙이지 않고 변을 맛보며 하늘에 대신 죽게 해 달라고 비니 그 정성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끝내 돌아가시니 가슴을 두드리며 몸부림쳐 우니 혼절하고 깨어나길 반복했다. 죽을 먹으며 생선 고기를 먹지 아니하므로 거의 몸을 상하게 되었다.
큰 형님 화곡 선생을 섬기는 것을 부친과 같이 하여 조석으로 문안하고 모든 일을 반드시 고하였다. 둘째 형 찬성공(명호)이 일찍 돌아가심에 눈물이 잠자리에서 마를 날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왜병을 피하여 충청도의 누이동생 동서인 온양 정회의 집으로 갔다. 갑오년 여름에 모친상을 당하여 통곡하다 여러 번 정신을 잃었다. 청주 오구대에 안장하고 밤낮으로 남쪽을 바라보며 곡을 하고 살고자 하는 욕망을 잃을 지경이었다.
난이 끝나고 출사지 마다 직분을 다하였다. 때는 당시가 혼조의 시대로 간흉이 정국을 주도하고 인륜이 끊어지니 물러나 귀향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유유자적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어두움이 걷히고 밝은 세상을 보니 중앙 지방의 여러 관직을 맡아 성망이 올연하였다. 다시 병자호란을 치룬 후 출사의 뜻을 접고 전원으로 귀향하였다. 임금이 부르시면 알현 사은하고 돌아왔다. 근심과 분한 마음이 병이 되어 아쉬움을 품고 세상을 뜨니 오호 통재로다!
誠孝根天 事父母盡志物 夏日扇枕 冬夜燃突 年잠勝冠醒齋先生有疾 不解帶不交睫 嘗糞驗症 禱天願代靡誠不逮 竟遭艱 擗踊號哭累絶而甦 啜粥行素幾乎傷生 事伯氏禾谷先生如事父 晨夕侯問 凡事必稟而行 仲氏贊成公夭逝 淚不乾於枕席之間 壬辰奉母夫人避倭于湖西溫陽娣壻鄭晦家 而甲午夏丁母夫人憂號屢絶 襄奉淸州梧邱臺 日夜望南而哭如不欲生 亂已出仕所在盡職 而時當昏朝 奸凶用事彛倫斁絶 退歸鄕第 與世不關悠悠自適 仁廟改玉托契昭瀜 歷踐中外聲望藹蔚 丙丁亂後 無意仕進歸臥田園 召命屢至 詣闕謝恩旋卽歸來 憂憤成病 含寃而終世鳴乎痛哉 |
10 | Ⅰ-4 자의 | 정준(鄭浚) 여호(汝浩) 추원당(追遠堂) (1564 ~ 1625)
孝義 | 광해군 1617년 진사(進士)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수은 강항, 둔암 양산해와 도의로 교류하였다. 부친상 여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목숨을 걸고 묘를 지키매 적병도 감탄하여 해하지 않았다. 광해군 1617년에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때마침 어지럽고 조정이 혼란한 때라 인륜이 끊어져 통렬한 상소를 올렸다. 효동사 배향 때 사헌부 집의 이홍직이 봉안문과 제사축문을 지었으며 행적이 「기성지」와 「문헌록」에 4세 6효 2열이라 실렸으며, 그 살던 곳을 “효동(孝洞)”이라 했다
受業于沙溪金先生(金長生)門 金愼獨齋輯 姜睡隱杭 梁遯庵山海爲道義交 丁艱廬墓 當龍蛇之變 誓死守墓敵感至孝不忍加兵 光海丁巳(1617년) 進士 時値昏朝彛倫斁絶上疏通辯 醊享孝洞祠 執義李弘稷撰奉安文輿享祀祝文 事載「箕城誌」及「文獻錄」 四世六孝二烈 誌基居曰 孝洞 |
10 | Ⅰ-5 능파정 | 정언우(鄭彦祐) 종언(宗彦) 둔암(遯菴) (1552 ~ ? ) 忠孝 倡義 | 어버이 묘소에 여막 살이 하며 효도를 다하였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청주에서) 순절하였다. 공적은 「예조문첩」과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居廬盡孝 壬亂倡義殉節(于淸州)事蹟俱載禮曹文帖及湖南節義錄 |
10 | Ⅰ-6 승지 | 정영(鄭濚) 의서(義瑞) 벽파정(碧波亭) (1574 ~ 1653) | 1606년 생원(生員)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어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孝友敦篤 鄕里稱服 |
10 | Ⅰ-7 진사 | 정만(鄭漫) 여장(汝長) 만헌(晩軒) (1623 ~ 1704) |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경서에 밝아 사람들이 받들었다 孝友經學 爲世推重 |
10 | Ⅱ-3 판서 | 정흠(鄭欽) 형백(馨伯) (1573 ~ 1637) | 음직으로 사직서참봉 불취(蔭社稷署參奉固辭不就) 임진왜란 시 부친 병은(정사위)공이 선조임금을 호가서행 할 때, 필마로 부친을 수행하고 평안도 맹산에서 부친병환이 위중하여 밤낮으로 모시여 정성을 다하였으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모셨으며, 3년 동안 묘를 지키며 몸이 여위도록 슬퍼함으로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양주 백석에 물러나 여생을 보내셨다
壬辰病隱公扈駕西行以匹馬隨行至孟山病隱公遘癘危谹晝宵侍側百方救護殫竭誠力遭艱返葬故山廬墓三年哀毁逾禮畿至滅性. 退居于揚州白石之陽以終餘年 |
11 | Ⅰ-1 절제사 | 정복문(鄭復門) 중선(重宣) 남포(南浦) | 성품이 순수후덕하고 기품이 맑고 깨끗하며 효도가 지극하였다. 정유재란(1597~1598년)에 팔십 조모를 업고 벽도(외진 섬)에 피란하여 일가를 보전하였다. 형제간 우애가 깊고 화락하며 생을 즐겼다. 성심 깊고 어진 이를 쫓아 낙사(낙향한 선비)를 밀고, 자기를 사양하였다. 출세에 뜻이 없었으며 북학에 밝고 문장이 넓고 깊었다. 만년에 시골에 은둔하여 남포(榮山浦)에 몇 칸의 초옥을 짓고 1~2명의 벗과 책을 읽으며 갈대꽃 달빛과 갈매기를 주인삼아 늙도록 평온하게 살았다. 종후손 규종이 묘갈문을 지었다
賦性淳厚 稟氣淸明 誠孝極至 丁酉之亂 負八耆祖母奔避僻島一家賴全 友于昆季 連床湛樂 誠沈慕賢爲落士推讓 少志立陽 優遊北學文章宏博 晩樂遺逸隱跡江湖 結數間茅屋于南浦 與一二同志 琴書自娛 蘆花煙月共作沙丘鳥主人安閒終老 從後孫 圭綜 撰 墓碣銘 |
11 | Ⅰ-4 자의 | 정지현(鄭志玄) 자정(子鼎) 효리(孝里) (1595 ~ 1665) |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문장과 학문이 높았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 죽을 먹으며, 6년간 여묘 살이 하였으며 행적이 「기성지」에 실렸다
誠孝根天 文學名世 啜粥廬墓六年 見「箕城誌」
* 기성지(箕城誌) 1926년 정내근(鄭乃根)이 엮은 함평군읍지
4권 2책. 지도가 첨부된 필사본. 권두에 오광은(吳光殷)의 서문과 정방현(鄭邦鉉)의 후서(後序), 그리고 함평군수였던 박준승(朴準承)의 구서(舊序)와 범례가 첨부되어 있다.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 권1은 건치연혁·고적·관원·성지(城池)·지계(地界)·도리(道里)·방리(坊里)·공해(公廨)·누관(樓觀)·창고·결총(結摠)·부세(賦稅)·균세(均稅)·진공(進貢)·봉름(俸廩)·환총(還總)·호액(戶額)·인구·지적(地積)·군액(軍額)·산천·형승(形勝)·도서진포(島嶼津浦)·제언·교량·관방(關防)·역원·봉수·사찰·장시·물산·속상(俗尙)·성씨·단묘(壇廟)·향교·원우(院宇)·정사유지(亭榭遺趾)·제각·읍선생안(邑先生案), - 권2는 사마안·문과안·학행·일덕(逸德)·행의(行誼)·인물·음사(蔭仕)·가자(加資)·증직, - 권3은 충의·효행·효부·삼강문, 권4는 문행·유림, 안시량(安時良)의 구발(舊跋), 안종태(安鍾泰)의 발문, 임원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특기할 사항은 수군기집물(水軍器什物)·육군기집물·봉수집물 등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어 당시의 군비사정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1 | Ⅰ-4 자의 | 정지교(鄭志僑) 자산(子産) 효헌(孝軒) (1607 ~ 1678) | 효를 지극히 행하며 덕망이 높아, 세상에서 존중하였다
孝行德望 見重當世 |
11 | Ⅰ-5 능파정 | 정은수(鄭訔秀) 경헌(景獻) 미능재(未能齋) (1567 ~ 1612) 忠孝 倡義 | 이율곡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를 전전하였으나 부친이 청주에서 순절하시자 대신 병을 통솔하여 경성에 이르렀다. 군자감 정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반장하여 나주에 머물며 여묘하였는데 묘 옆에 호랑이가 와 같이 지키니 기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묘 앞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켜 “충효송(忠孝松)”이라 불렀다. 그 행적이 「금성지」,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李栗谷門人 宣祖壬辰 從父倡義轉戰 淸州親竟歿節 代領其兵直到京城 除軍資監正不就 反葬羅州居廬墓側 有虎來同守之異 鄕人稱其墓前松曰忠孝松 事載「錦城誌」及「湖南節義錄」 |
11 | Ⅱ-6 양촌 | 정시립(鄭時立) 탁이(卓而) (1618 ~ 1645)
배 원주이씨 (1621 ~ 1660) 孝婦 烈婦 | 배 원주이씨(配 原州李氏)
아들 필수가 부친이 양진강의 독해로 죽음을 당하여 탄원함에 대하여, 부인 원주이씨가 5년간 26회에 걸쳐 송사로 호소한 끝에 마침내 그 원수를 갚게 되니 오호 열부로다. 많은 선비가 상언하였으나 오래된 일이라 하여 정포지전을 입지 못하니 통한이다. 8세손 인직이 가장을 쓰고, 중암 김평묵이 열녀전을 짓고 승지 송태헌이 묘표를 썼다.
子必壽謹按府君慘遭梁振剛毒害 而原州李氏五年號訴凡二十六訟庭竟復其讐 手書顚末曰復讐傳 嗚呼烈哉 多士上言以事在久遠未蒙旌褒之典痛恨 八世孫寅直述家狀 重菴金平默著烈女傳 承旨宋台憲撰墓表
* 김평묵(金平默) : 1819년(순조 19) ~ 1891년(고종 28)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菴). 세거지는 경기도 포천. 아버지는 성양(聖養)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 송태헌(宋台憲) : 1857(철종 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겸수(謙洙)의 손자, 병두(秉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교인(敎寅)의 딸이다. 1885년(고종 22)에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 해 9월에는 홍문관수찬이 되고, 1890년에 부교리를 거쳐, 이듬해에는 부응교가 되었다. 1894년 교리로 있으면서 동학농민전쟁 발발을 초래한 책임을 물어 당시 전라감사였던 김문현(金文鉉)에 대한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계문(啓文)을 삼사(三司) 합동으로 자주 올리기도 하였다 |
11 | Ⅱ-9 성재 | 정의창(鄭儀昌) 자강(子强) 국부(國副) (1633 ~ 1708)
배 인천채씨 孝婦 旌閭 | 의를 행하며 은거하여 경사를 익히며 시와 예로서 유연자적하며 집안을 이끌어 향리에서 이를 칭송하였다 秉義遯跡經史自娛詩禮治家一鄕稱之
배 인천채씨(配 仁川蔡氏)
시어머니가 늙어 젖을 짜드려 봉양함이 당부인 고사와 같았다. 이러한 효도에 호남유림들이 공론하여 이준백 등 20여인이 글을 보내고 진사 변희적 등 3백여 인이 조정에 천거하니 영조 기유년(1729년)에 정려를 내렸다. 기해년에 8세손 화용이 중수하고 외손 도사 송병대가 묘갈문을 짓고 9세손 장환이 행록을 편집했다.
姑老乳養 如唐夫人故事* 以孝湖儒公儀 齊發 李俊白等 二十餘人 發文 卞進士熙績等 三百餘人 薦于朝 英祖己酉(1729년) 命旌閭後 己亥 八世孫 和用重修 外孫 宋都事秉大撰記 九世孫 章煥 編行錄
< 인천채씨 정려 중수기 중 발췌 : 외예 은진 송병대 지음>
~~ 나이 16세에 아버지는 일로서 교남에 가셨는데, 마을에 마침 염병이 돌아 어머니 소씨가 병에 걸려 위급하므로 유인이 약을 달여 구양을 다하였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하였다. 집에는 남정이 없어 한 여종과 같이 염을 하고 주야 호곡하니 이를 듣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친정 아버지가 일찍이 자기에 대한 효를 칭찬하였는데 열아홉에 정씨집안에 시집오게 되었다. 정씨는 대성(大姓)이라! 시아버지 말하길 “성원은 병정난후 과거에 나가지 않고 말하기를 이러한 시국에 한자리 꿰차면 어찌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는가?”한다고 하였다.
시어머니 신씨는 백록공 응시(부제학)의 증손녀이시다. 서사(書史)에 능통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성품 또한 효성스러워 아버지 병환에 눈물 흘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나의 선인 문정공께서 모두 이를 높게 칭송했다.
유인이 시어머니를 근신하며 섬기고 동서들과도 우애롭게 잘 지내 유인를 따랐으며 시어머니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임술년 시어머니가 71세로 몸이 쇠약해져 병이 중하여 식음을 전폐하니 유인이 바로 벼갯 머리에서 젖을 짜내어 드리니 3일간 연명하였다.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를 넘었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친정아버지가 홀아비로 살다가 의탁하러 오셨는데 병이 나 위중하시므로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에도 옆에 시중하며 십여 일, 손가락을 베어 진혈하니 순간 소생하였으나 돌아가심에 발 구르며 대성통곡하고 혼절하였다. 칠 일간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사람으로서 행하기 어려움을 행함이 이러하니 어찌 천성의 성효가 아니면 이러하겠는가?
유인 사후에 사림들이 이를 칭송해 조정에 아뢰니, 영조 기유년(1729년)에 정려를 내리므로 나라가 유인에게 베풀음에 서운함이 없다. 그 아들 위상(渭相) 또한 효도로 이름나 돌아간 지 몇 해 후에 좌랑에 추증되었으니 시경에서 이르는바 “군자 효도하니 그 아들도 효도한다.” 라 했으니 나는 유인 집안에서 이를 보게 된다. ~~~~
< 仁川蔡氏 旌閭 重修記 中 : 外裔 恩津 宋秉大 記>
~~ 年十六 父以事往嶠南 而村中適熾瘟疫 母蘇氏遭疾危急孺人盡藥餌救養之道 至不求則隣里畏避 家無男丁獨與一婢殮殯如禮晝夜擗踊聞者莫不感歎 其父嘗稱其孝於己 十九歸於鄭氏光州大姓也 舅曰 星源丙丁虜難後 不赴擧曰 此時得一官 寧不自愧於心乎 姑辛氏白麓公應時曾孫女也 通書史善翰黙性又孝 侍親疾必涕泣不離側 吾先子文正府君皆表章之 孺人事姑尤謹 友于姨 姨皆化之 姑稱之不容口 壬戌姑 年七十一衰病寢深 粥飮全廢 孺人就枕上而乳之賴延三日 及喪哀毁踰禮 祭祀盡盛 孺人之父鰥居來依 得疾危重盡不離側 夜不交睫至十日 斷指進血交甦一餉之頃 及喪又過哀哭踊必氣絶 水醬不入口者 七日 行人之所難行者 如是 豈非誠孝之根於天性者歟 ~~孺人沒後 士林稱之而聞于朝 英廟己酉命旌其閭 國家所以施於孺人者 殆無遺憾矣 其子 渭相亦以孝聞 沒未幾年 褒贈佐郞 時所謂君子卽孝 嗣子又孝 余於孺人家 ~
* 당부인(唐夫人) 이야기 : 유고불태(乳姑不怠)
- 당나라 때 최산남(崔山南)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에게는 증조모인 장손부인(長孫夫人)이 있었다. 이미 연로하여 걸을 때도 부축해야만 했고 이도 모두 빠졌다. 최산남의 조모인 당부인은 매우 효성스러울 뿐 아니라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난 후에는 장손부인의 머리를 빗기고 세수를 시킨 다음엔 곧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젖을 장손부인에게 먹였다. 장손부인은 며느리의 젖을 먹었기 때문에 비록 이러한 생활을 하며 몇 년이 지났어도 병을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손부인은 갑자기 중병에 들었다. 그녀 스스로 자기의 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임종 전에 집안의 자손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내 평생 며느리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나 보답할 것이 없구나! 한 가지 바랄 것이 있다면 자손 대대로 우리 집 며느리들은 모두 저 며느리가 나를 받들었듯이 그녀를 공경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장손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집안사람들은 당부인의 효심에 감동하여 모두 그녀를 칭송하고 존경하였으며 자손들의 며느리들 또한 그녀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
12 | Ⅰ-2 응교 | 정집(鄭䌖) 자장(子章) 귀래정(歸來亭) (158 8 ~ 1673) 老典 賻賜祭 | 광해군 떼에 폐모를 주장하는 자를 배척하여 고향으로 귀향하여 다시 한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인조 무인년에 이조판서 정경세, 예조판서 서성이 천거하여 동몽교관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합천군수 안악군수를 거쳐 동지로 수승하고 특명으로 가의대부에 올랐 다. 부음을 듣고 조정에서 부의를 보내고 제사를 내렸다 光海時 斥絶主廢母論者盡室歸鄕斷跡城闉 仁祖戊寅 吏判 鄭經世 禮判 徐渻 薦授 童蒙敎官 不就 庚辰 氷庫別坐 辛巳 司憲府監察 癸未 山陰縣監 以異政再蒙 表裏之錫 陞 通政大夫 孝宗 庚寅 陜川郡守 有 去思碑 癸巳五月 平山府使 六月 拜漢山郡守 皆不赴 八月拜安岳郡守 顯宗 丁未 壽陞同樞 庚戌特命嘉義大夫 顯宗癸丑 卒 訃聞致賻賜祭
천성으로 효가 지극하여 어머니 병환에 다리를 베어 진혈하고 상을 당하여 3년간 죽으로 끼니하고, 아버지 상을 당하여 나이가 연로하여 쇠약함에도 여묘하며 조석으로 곡을 하니 향당에서 그 효에 감복하였다
天性至孝侍母夫人疾刺股進血及丁憂啜粥三年 遭外艱年已衰邁而居廬墓側朝夕上哭鄕黨服其孝 |
12 | Ⅰ-2 응교 | 정유(鄭維) 지세(持世) (1593 ~ 1654) 旌閭 | 광해군 무오년(1618년) 생원
사마시험 치룰 때 적신 이이첨이 사마 급제자를 부추겨 장차 폐모의 소를 올리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 불의한 자와 영화를 누리느니 바름을 지키고 죽는 것이 낫다. 또 아비가 없고 군주가 없는 사람과 사대부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며 대과를 보지 않고 나주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인조반정으로 상산 신흠이 재상이 되어 최우선으로 공을 천거하였다.
1634년 전의현감 1636년 병자란을 당하여 안무사 박횡의 종사관으로 근왕병을 통솔하였다. 1641년 구례현감 1648년 백천군수
光海 戊午 司馬時 賊臣李爾瞻 嗾新榜 將上廢母疏 公曰 與其不義而榮寧守正而死 且無父無君之人 士大夫不可同席而立遂不應榜遯歸羅州故庄 仁廟改玉申象村欽以冢宰首薦公 甲戌全義縣監 當丙子亂 爲按撫使朴橫從事 領兵勤王 辛巳求禮縣監 戊子白川郡守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한데도 죽을 먹으며 항시 소리 내어 우는 것이 돌아가신 날(1652년)과 같았다. 3년 탈상을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순조 임오년에 대신 김재찬과 한용구가 임금의 면전에서 충효를 아뢰니 정려를 내렸다. 8대손 제인이 묘 앞에 정려각을 짓고 기문을 세웠다
天性篤孝及丁外艱年己衰而啜粥呼泣常如袒括之日隔終祥五月而孝宗甲午卒 純祖 壬午 大臣 金載瓚 韓用龜 以忠孝筵奏命旌閭 八代孫濟寅建閣于墓前而延旌 |
12 | Ⅰ-2 응교 | 정시(鄭糹式) 자화(子華) (1619 ~ 1656)
배 문화류씨 (1619 ~ 1690) 賢婦 | 효성이 출천하였다. 병자호란(1637년)에 부모의 전화를 입어 상기를 늘려 6년 여묘하고 묘를 지키며 도성출입을 끊으니 사우들이 처사라 일컬었다
孝誠出天 丙子之亂痛考妣之禍 加服喪期六年廬墓 因廢居楸下絶迹都門 士友稱之以處士
배 문화류씨(配 文化柳氏)
현명하고 덕행이 높아 일찍 남편이 돌아간 후 어린자녀를 잘 길러 가문을 일으키므로 마을사람과 친족들의 칭송을 받았다
賢明有婦德早哭城崩敎養幼孤樹立門戶見稱於鄕黨宗族 |
12 | Ⅰ-3 지평 | 정득명(鄭得明) 군일(君一) (1644 ~ 1703) |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 우애 깊고 화목하였으며 재산을 기울여 주위의 곤궁한 사람을 도우니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孝友敦睦傾財周窮鄕里欽服 |
12 | Ⅰ-4 자의 | 정방(鄭紡) 공기(公器) 사정(思亭) (1623 ~ 1700) |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여묘를 6년 하였다 행적이 「기성지」에 실렸다 事親至孝廬墓六年 事載「箕城誌」 |
12 | Ⅰ-4 자의 | 정재(鄭縡) 공권(公權) 송암(松菴) (1636 ~ ?) | 성품이 덕이 높고 효성스러우며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다. 선함을 실천하고 의로움을 행하였다. 행적이 「기성지」에 실렸다
性悳孝友 樂善好義 見稱鄕里 事載「箕城誌」 |
12 | Ⅰ-6 승지 | 정염(鄭焰) 해숙(海叔) 모암(慕庵) (1609 ~ 1669) 恩典 | 부모를 효성으로 지극히 섬겼고 자식을 교육함에 법도가 있었다. 효성으로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었다
事親至孝敎子有方 以孝贈司憲府持平 |
12 | Ⅱ-3 판서 | 정일수(鄭日壽) 복일(福一) (1631 ~ 1705) 배 평택임씨 (1631 ~ 1708) 碩媛 | 배 평택임씨(配 平澤林氏)
사덕을 고루 갖추어 세간에서 “석원”이라 불렀다
四德俱茂 世稱碩媛 |
12 | Ⅱ-9 성재 | 정위상(鄭渭相) 위경(渭卿) 영취헌(暎翠軒) (1680 ~ 1712) | 1729년 증호조좌랑(贈戶曹佐郞)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으며 선조가 살아계실 때 효도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의 뜻을 받들어 극진히 모셨다. 어버이 상에 3년 여묘하였는데 성묘하던 자리에 있던 초목이 상하였다
誠孝出天 逮事養志 廬墓三年 泣血柴毁 |
12 | Ⅱ-9 성재 | 정윤상(鄭允相) 군신(君信) (1685 ~ 1743)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어 둘째 형 좌랑공(渭相)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진혈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孝友根天仲兄佐郞公病革斫指進血人皆稱歎 |
12 | Ⅲ-1 통정 | 정만하(鄭萬夏) 수이(遂而) 풍헌(風軒) (1692 ~ ? ) | 경암 윤동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존경받았다. 수상 이이장이 포상장계에서 아뢰길 가난한 마을사람에게 게으름 부리지 말 것을 가르치고 유문에 들어서도 먹줄을 몸소 지니고 다녔다. 여러 번 재랑에 천거되었다. 어버이 병환 삼년간호 중 2월에 송이(가을에 난다)를 구하고 6월에 메추라기를 잡아 구이(겨울철새)를 해드리니 기이하였다
受業于尹敬菴東洙*門 學文德行爲世推重 繡相李彛章褒啓曰 流落窮鄕訓誨不倦 出入儒門繩墨自持云 累入齋郞薦望 親癠三年 有二月松栮 六月鶉灸之異
* 경암 윤동수(1674~1739)
1706년(숙종 32)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1710년 시강원자의, 이듬해에 종부시주부를 거쳐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가 되고, 1716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1727년(영조 3) 진선과 집의를 거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허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복직된 뒤 1731년 호조참의, 1737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학문에도 매우 전심하여 영조가 두 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과 『성학집요』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저서로는 『경암선생유고』가 있다. |
13 | Ⅰ-1 절제사 | 정시만(鄭時萬) 수경(壽卿) (1648 ~ 1717) 安貧 | 1671년 모친이 돌아가실 즈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리고 상례를 잘 치른 후에는 나물과 장을 먹지 않고 소금과 죽을 먹으며 3년을 지냈다. 청렴검소하고 간명단아하며 분수를 지키므로 가난하여도 편안하였다
辛亥(1671년) 丁內艱 斫指進血執喪踰制 菜醬不口煮鹽啜粥以從三年 淸儉簡雅守分安貧 |
13 | Ⅰ-2 응교 | 정시원(鄭時元) (1613 ~ 1666) 恩典 | 백주 이명한* 문하에서 배웠으며 문장이 뛰어났고 향리에서 효와 우애를 칭송했다.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受業于李白洲明漢*門 文詞擅譽 場屋孝友著稱鄕里 贈司僕寺正
* 이명한(1595∼1645)
좌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홍문관, 이조판서, 예조판서. 1643년 이경여(李敬輿)·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 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아버지 정구, 아들 일상(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13 | Ⅰ-2 응교 | 정시형(鄭時亨) 숙하(叔夏) 반주(盤洲) (1619 ~ 1699) | 효종 정유(1657) 진사
1658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959년 도원찰방(桃源察訪) 1662년 제용직장(濟用直長) 1664년 사헌감찰(사헌監察), 형조좌랑(刑曹佐郞) 1667년 공조정랑(工曹正郞), 호조정랑(戶曹正郞) 1668년 12월 면천군수(沔川郡守) : 부임치 못함 1669년 1월 鄭時亨 戶曹正郞 仍任(호조정랑 유임) 1669년 4월 공산현감(公山縣監), 6월 25일 公山縣監 鄭時亨, 竝以判官, 改二批之意, 敢啓。傳曰, 知道. 공산판관(公山判官)으로 직책 이름을 바꿈 1672년 부평부사(富平府使) 167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1680년 原州牧使(원주목사), 1683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687년 한성서윤(漢城庶尹)
* 정시형(鄭時亨) : 1619년(광해군 11) ~ 1699년(숙종 25)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숙하(叔夏), 호는 반주(盤州). 아버지는 군수 유(維)이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고, 이듬해 의금부도사를 비롯하여 연원찰방(連源察訪)·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감찰·형조좌랑을 역임한 뒤 파직되었다가, 1667년(현종 8) 공조정랑·호조정랑·공산현감·형조정랑·부평부사를 역임한 뒤 해주목사·한성판관·원주목사·이조정랑·태인현감·한성부서윤·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는 남인·서인간의 당쟁이 극심하여 서인인 그는 여러 차례 파직된 바 있고,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남인에 의하여 서인이 축출 당하매 고향 임천(林川)에 돌아갔다가 1698년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이듬해 죽었다.
대과급제는 하지 않았으나 관료생활 40여년에 여러 차례 외직으로 수령과 내직을 역임하면서 보통 이상의 재주와 세월을 기다리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효력(孝歷) : 남구만(南九萬) 撰 묘갈명(墓碣銘) 중
공은 어려서는 영리하고 빼어났으며 자라서는 단정하고 씩씩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필법이 신묘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선배들이 그 학업을 감상하고 속성(速成)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거듭 상(喪)을 당하여 6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예에 지나칠 정도로 거상(居喪)하여 병이 들어 위태로운 적이 여러번 있었다.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짓고 퇴어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6대손 구석이 묘지를 지었다 陶菴李縡撰墓表 退漁 金鎭商書 六代孫 龜錫撰 墓誌 |
13 | Ⅰ-7 진사 | 정시하(鄭時夏) 사우(士禹) 자휴당(自休堂) (1731~1802) 孝行恩典 | 초야에 은둔하여 시와 책을 벗 삼아 지냈다. 순조 임술(1802년) 졸 후 유림들이 누차 천거하니 도신들이 임금에게 계를 올려 병인년(1806년)에 효행으로 사헌부지평을 증직하였다
遯跡湖海琴書自娛 純祖壬戌卒後 士林累薦道臣上啓 丙寅以孝司憲府持平
* 湖海之士(호해지사) : 호탕(豪宕)한 기풍(氣風)으로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 |
13 | Ⅱ-9 성재 | 정화기(鄭華基) 성잠(聖岑) 무하당(無何堂) (1693 ~ 1770)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 명망이 높아 선비와 벗들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孝友純至文章華邵聲望蔚然士友推重 |
13 | Ⅱ-9 성재 | 정임기(鄭林基) 여조(汝肇) (1668 ~ 1775) 老典 | 성품과 도량이 곧아 대쪽 같았고 효성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노전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수 88세
性度簡亢孝友純至 以壽陞同知中樞府事 |
14 | Ⅰ-1 절제사 | 정발(鄭勃) 흥언(興彦) 안락재(安樂齋) (1712 ~ 1796) 老典 | 천성이 인자 온후하고 풍모가 크고 뛰어났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향리에서 칭송하였다. 수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天性仁厚 姿容魁偉 孝友敦睦 鄕邦稱服 壽陞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
14 | Ⅰ-2 응교 | 정선(鄭敾) 원백(元伯) 겸재(謙齋) (1676 ~ 1759)
孝行 恩典 | 하양현감(河陽縣監), 청하현감(靑河縣監), 양천현령(陽川縣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증 좌참찬 겸 한성판윤(贈 左參贊 兼 漢城判尹)
국보인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 진경산수화의 태두
영조48년(1772년) 1.25 상께서 승지에게 효열단자를 읽으라 했다. (중략) “고 동지정선에 대하여 단지 그 필법만 알았을 뿐인데, 어찌 이러한 효행이 있음을 알았겠는가?” 하였다. 1772.1.27일 좌참찬 겸한성판윤에 증직했는데 효행이 뛰어남에 따른 것 이었다(승정원일기)
英祖48年(1772년)1.25. 上命承旨讀奏孝烈單子。~~故同知鄭敾, 予只知其筆法, 豈知有此孝行? 영조48년(1772년)1.27吏曹口傳政事 贈左參贊 贈判尹例兼, 以上孝行卓異贈職事承傳(承政院日記)
< 자화상 : 독서여가도 > |
14 | Ⅰ-2 응교 | 정부(鄭敷) 대재(大哉) 종애(鐘崖) (1659 ~ 1712) 孝悌 | 고요히 도와 덕을 닦고 학문에 힘쓰므로 선비와 벗들이 존경하였다. 귀영당 이만성공이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수암 권상하 선생이 그 묘에 “종애처사“라 제를 썼다. 저서로 「사준십책」이 있고 이밖에 유고가 남아있다.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짓고, 판서 권적이 행장을 썼다
淸修力學爲士友推重 歸榮堂李公晩成薦于朝未及筮仕 遂菴權先生題其墓曰 鐘崖處士 嘗著「士儁十冊」又有遺稿 陶菴李縡撰墓表 判書權樀撰行狀
* 이재(李縡) : 1680년 ~ 1746년, 조선후기 문신(붙임)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유겸(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䎘)이고,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대제학, 공조판서를 지냄
* 권상하(權尙夏) : 1641년∼1721년, 조선 후기의 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아버지는 집의격(格)이며, 동생은 우참찬상유(尙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 효력(孝歷) : 권상하(權尙夏) 撰 묘갈명(墓碣銘) 중
대재는 효성과 우애가 남보다 뛰어나서 형과 누나를 항상 화기애애하게 모셨으며 분가(分家)할 때에도 형제들에게 많이 양보하고 자신은 조금만 가져갔다. 두분 형이 먼저 죽었으므로 구수(丘嫂, 큰 형수(兄嫂)를 말함)를 받들고서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버지를 여읜 여러 조카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무양(撫養)하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어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묻곤 하였다.
대체로 대재는 성품이 너그럽고 솔직하였으며 말수가 적어서 평소에 과격한 행동이나 남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랑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이후로 강산(江山)을 유유자적하며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서 경적(經籍)을 폭넓게 보았다. 또 손수 여러 사책(史冊)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베껴내어 10책으로 엮은 뒤에 이를 ≪사준(史雋)≫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가운데 정신을 몰두하고 이것을 낙으로 삼아 그 곤궁함을 잊고 지냈다. |
14 | Ⅰ-2 응교 | 정인(鄭粦攵) 문중(文仲) (1674 ~ 1719) | 9세에 생부(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어른과 같아 동리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장성하여 문장이 높고 품행이 바르고 도의가 있어 사우로부터 존경받았다
九歲丁生考憂(時相)哀毁如成人鄕里莫不感歎及長文章行誼爲士友推重 |
14 | Ⅰ-2 응교 | 정계(鄭棨) 무백(武伯) (1668 ~ 1734) | 부모를 모심에 효로서 극진히 하고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하니 집안에서 흠복하였다
孝事父母友於兄弟宗黨欽服 |
14 | Ⅰ-3 지평 | 정광린(鄭光麟) 공서(孔瑞) 남일재(南一齋) (1715 ~ 1784) | 通德郞 인과 효를 행하고 몸은 단정하였다. 수신하고 정진함에 있어 도의가 있었다. 좌명에 “효제” 가훈은 “근검”이다. 선대의 행장을 지어 집에 남겼다
仁孝端雅 修齋有道 座銘曰孝悌家訓曰勤儉 撰先世遺事藏于家 |
14 | Ⅰ-3 지평 | 정광훈(鄭光勳) 미여(美汝) 남당(南堂) (1727 ~ 1759)
배 천안전씨 (1735 ~ 1809) 烈婦 賢婦 | 총명 박학하였고 언행이 신중하였다. 효제로서 자식과 조카들의 교훈이 되었다.
聰明博學 言行愼重 以孝悌爲子姪訓誨 有遺稿 彦陽 金錫海 撰 行狀
배 천안전씨(配 天安全氏)
효열로서 향도에서 조정에 천거하였다 以孝烈 鄕道累薦
< 幸州 奇正鎭 찬 운와 정홍규(子) 정려기 중 >
~~~ 고 효자 증동몽교관 정홍규의 정려표창을 청함에 예조복계하여 작설을 윤허하시니 성명이 비로소 내린 것이라 삼가 상언의 말 뜻을 살피니, 그 하나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어 어머니께서 따라 죽기로 결심한대 울부짖으며 밥을 먹지 않고 어머니 보다 먼저 죽으려는 성의가 지극히 정성스러워 마침내 어머니의 마음을 돌린 것이오. 그 하나는 조금 자라서 어머니 명으로 백리 밖 스승을 좇아 부지런히 힘씀을 멈추지 않아 큰 선비가 된 것이오~~~
~~~故孝子贈童蒙敎官 鄭弘規 加獎閭事 禮曹覆啓允下綽稧 成命始下 謹按上言辭意 其一曰 七歲失怙其母決意下從卽號泣絶粒欲先母致命誠意懇到卒回母心 其一曰 梢長以母命從師百里外謹苦不輟 遂成巨儒 ~~~ |
14 | Ⅰ-5 능파정 | 정치복(鄭致復) 덕이(德以) (1730~1797) | 1753년 성균진사(成均進士) 1773년 생원(生員) * 생진구중(生進俱中)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문학의 성망이 높았다(孝友純至文學贍富) |
14 | Ⅰ-5 능파정 | 정치대(鄭致大) 보행(普行) (1752 ~ 1824) | 천품이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여 향리에서 조정에 여러 번 천거하였다
誠孝根天 友愛益敦 鄕道累薦 |
14 | Ⅰ-5 능파정 | 정치순(鄭致淳) 찬보(燦甫) 모당(慕堂) (1760 ~ 1829) 恩典 | 부친병환에 대변 맛보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넣어 드리고 상을 당함에 죽 먹으며 여묘할 때 호랑이가 묘를 지키니 기이하였다. 향도가 여러 번 천거하여 영조 신미년(1751년)에 효행으로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었다
親癠嘗糞斫指 丁艱啜粥廬墓有虎衛之異 鄕道累薦 英祖辛未(1751년) 以孝贈童蒙敎官 朝奉大夫 |
14 | Ⅰ-6 승지 | 정선(鄭璇 ) 형옥(衡玉) 기남(箕南) (1685 ~ 1743) |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글과 학문의 명망이 높아 추앙받았다
孝友文學 爲世推重 |
14 | Ⅰ-6 승지 | 정복창(鄭復昌) 일찬(逸贊) (1749 ~ 1797)
배 영광정씨 (1759 ~ 1835) 孝婦 賢婦 | 배 영광정씨(配 靈光丁氏)
효성이 지극하고 어른을 공경하므로 집안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남편 별세에 따라죽기로 결심하였으나 유복자를 가져 마음을 돌리고 슬픔을 참고 아이 잘 길러 집안형편을 일으켜 세웠다.
孝敬淑德 宗黨咸稱 及遭城崩決欲下從 旋念遺腹强自寬抑 産育幼孤 克成家道 |
14 | Ⅰ-7 진사 | 정환(鄭土奐 ) 성회(聖誨) 성암(醒菴) (1758 ~ 1821) |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근검하고 경서와 사서를 즐기었다. 재덕을 감추고 이름 내지 않으며 영리를 구하지 않았다
孝友勤儉 書史自娛 韜晦名跡 不求榮利 |
14 | Ⅱ-9 성재 | 정헌주(鄭憲柱) 소백(昭伯) (1711 ~ 1766) | 천성이 올바르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진혈하여 생명을 연장했다. 문장 또한 일찍 성취하였으나 불행이 일찍 세상을 뜨니 사우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賦性醇正誠孝根天 丁憂斷指延縷 文章夙就 不幸早世 士友嗟惜 |
15 | Ⅰ-1 절제사 | 정내붕(鄭來鵬) 명서(明瑞) (1754 ~ 1808) | 효성이 순수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며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두루 보살피니 향리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誠孝純至 友于彌篤 周窮恤賓 鄕里咸稱 |
15 | Ⅰ-2 응교 | 정오상(鄭五常) 사강(士鋼) (1663 ~ 1698) | 일찍 효행이 현저하여 여러 번 대제학을 지낸 오도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자식 규가 귀(壽同樞)하게 되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孝行夙著 累被西波吳道一獎詡 以子揆貴贈戶曹參判 |
15 | Ⅰ-2 응교 | 정오행(鄭五行) 사건(士健) (1672 ~ 1731)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어 칭송이 자자하였다(孝友而聞) |
15 | Ⅰ-2 응교 | 정오운(鄭五雲) 사룡(士龍) (1689 ~ ?) | 문행과 재물로서 형제지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니, 사람들이 “노학선생(老學齋) 오규(五奎)의 현명한 아우”라 했다.
以文行資 益於塤箎之間 人稱 老學先生賢弟 |
15 | Ⅰ-2 응교 | 정내휴(鄭來休) 사량(士良) (1700 ~ 1751)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지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하여 화목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孝友敦睦文翰贍富 |
15 | Ⅰ-3 지평 | 정홍참(鄭弘參) 사견(士見) 초암(草菴) (1751 ~ 1806)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지간의 우애가 깊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孝友文學爲世師表 |
15 | Ⅰ-3 지평 | 정홍규(鄭弘規) 사건(士建) 운와(雲窩) (1753 ~ 1836) 旌閭 | 학문이 넓고 행실이 부지런하고 친절하며 지조가 높고 진실하였다. 저서로 「경필삼육조」가 있고, 효성이 남달라 어버이 상에 여묘하였다. 향도가 여러 번 추천하고 고종 경오년(1870년)에 승지 이장렬과 유생 조철호가 조정에 아뢰니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고 정려를 내렸다. 「나주군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博學篤行操履純眞 著「警筆三六條」 誠孝根天 丁憂廬墓鄕道累遷 高宗更午 承旨 李章烈 儒生 趙喆浩擧實行聞于朝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命旌閭 事載「羅州誌」及「三綱錄」 有遺稿
<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 찬 운와 정홍규 정려기 중 >
~~~ 고 효자 증동몽교관 정홍규의 정려표창을 청함에 예조복계하여 작설(旌門의 양옆에 세워 효열을 표창하던 나무기둥)을 윤허하시니 성명이 비로소 내린 것이라 삼가 상언의 말뜻을 살피니, 그 하나는 일곱살 때 아버지를 잃어 어머니께서 따라 죽기로 결심한대 울부짖으며 밥을 먹지 않고 어머니 먼저 죽으려는 성의가 지극히 정성스러워 마침내 어머니의 마음을 돌린 것이요. 그 하나는 조금 자라서 어머니 명으로 백리 밖 스승을 좇아 부지런히 힘씀을 멈추지 않아 큰 선비가 된 것이오 글을 읽는 겨를에 문득 고기 잡고 나무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니 일직 반찬이 떨어진 일 없었던 것이다. 그 하나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 살이 하면서 슬픔을 다했고 예제 한결같이 주문공가례 대로 따라 하였으며 성묘도 추위나 더위로 게을리 하지 않고 기제 때 애통해 함도 초상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 하나는 「운와경필삼십육편」을 지어서 세상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故孝子贈童蒙敎官 鄭弘規 加獎閭事 禮曹覆啓允下綽稧 成命始下 謹按上言辭意 其一曰 七歲失怙其母決意下從卽號泣絶粒欲先母致命誠意懇到卒回母心 其一曰 梢長以母命從師百里外謹苦不輟 遂成巨儒 讀書之暇輒以樵魚 供養甘旨 未嘗乏絶 其一曰 祖上廬墓盡哀 喪中禮制一遵文公家禮 省所寒暑不解 忌辰哀慟無異袒括 其一曰 著「雲窩警筆三十六編」爲一世矜式 |
15 | Ⅰ-4 자의 | 정오응(鄭五應) 군응(君應) 둔암(遯菴) (1743 ~ 1779)
배 밀양박씨 (1756 ~ 1795) 烈婦 | 배 밀양박씨(配 密陽朴氏)
남편 병환에 다리 살 베어 드리고, 공이 돌아가심에 어린 아이*가 강보에 싸여 있는지라, 스스로 마음 다져 슬픔을 억누르고 자녀를 교양 있게 양육하여 집안을 바로 세웠다. 어느 날 남편기일에 자식 부부를 불러 마지막 유언을 말하기를 “지아비 돌아가실 때 바로 따라죽지 못한 것은 너희가 장성하여 성취하기를 기다려 왔음이라” 하시고 조용히 의절하시니 그날이 정조 을묘년(1795년) 남편 기일이다. 향도에서 여러 번 조정에 열부로 천거하였다
夫病刲股 及艱幼孩*在襁 强自寬抑鞠育敎養樹立門戶 當公忌日 召子與婦 遺訣曰 “城崩之日旣未下從侍汝成就”從容取義節 正祖乙卯也 鄕道累薦
* 정빈(鄭彬) : 둔암공 자녀, 1778.4.8생 * 정오응 : 1779.4.14. 졸, * 밀양박씨 : 1795.4.14. 졸 |
15 | Ⅰ-4 자의 | 정오빈(鄭五贇) 무여(茂汝) 봉당(蓬堂) (1715 ~ 1795) 老典 |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 집상을 못하였기에 돌아가신지 60년에 다시 상복을 입고 여묘하였다. 향약을 만들어 벼리를 세우고 풍속을 바로 하여 향도가 천거하였다. 정조 을묘년(1795년) 수 첨지중추부사로서 「기성지」에 실렸다. 향년 81세 함평 이홍심이 행장을 쓰고 족손 규종이 묘갈을 지었다
早失所怙 幼未執喪 當外憂周甲 追服廬墓 創設鄕約立綱正俗 鄕道交薦 正祖 乙卯(1795년) 壽僉知中樞府事 事載「箕城誌」 咸平 李弘心 撰行狀 族孫 圭綜 撰碣銘 |
15 | Ⅰ-5 능파정 | 정창후(鄭昌垕) 복(復) 청취옹, 북헌 (淸翠翁, 北軒) (1694 ~ 1775) 忠孝 老典 | 어버이 병환에 신단을 구하여 목숨을 연장했다. 영조 무신년(1728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수령 구윤명이 그 공적을 칭송하는 증시를 하였다. 도리를 다하고 효도에 정성을 다하여 강신도 감탄하였다. 문명이 높은데도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다들 이를 칭송하였다. 계사년(영조49년, 1773년)에 천수로 첨지하고 갑오년(영조50년, 1774년)에 동지로 승자하였다(수 82세). 유고가 남아있고 예조문첩에 행적이 실렸다
親癠得神丹延壽 英祖戊申(1728년)倡義旅勤王 本倅具公允明贈公時 以窮道誠孝感江神 半世文章傾俗類等語獎詡之 癸巳壽僉知中樞府事 甲午陞同知中樞府事 有遺稿 事載「禮曹文帖」 |
15 | Ⅰ-6 승지 | 정오윤(鄭五潤) 덕유(德裕) 백헌(柏軒) (1720 ~ 1780) 배 함평노씨 (1725 ~ 1779) 碩媛 | 천품이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버이 병환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리고 상을 당하여 여묘하였다. 경서에 밝고 행의가 높아 선비와 벗들로부터 추앙받았다
天性至孝親癠刲股 遭艱廬墓 徑行高明 士友推仰
배 함평노씨(配 咸平魯氏)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정성을 다하여 봉제사 하였다. 4덕을 갖추니 “석원”이라 칭했다
孝事舅姑誠奉祭祀 四德俱茂 世稱碩媛 |
15 | Ⅰ-7 진사 | 정오신(鄭五臣) 낙서(洛瑞) 술재(述齋) (1786 ~ 1866) 老典
배 광산김씨 (1786 ~ 1865) 孝婦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 있으며 경서가 고명하여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을축 년(1865년)에 노전(壽職)으로 용양위부호군을 제수 받고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승자하였다
孝友經術鄕黨稱頌 乙丑(1865년) 以優老典陞龍驤衛副護軍 再陞同知中樞府事
배 광산김씨(配 光山金氏)
거동범절이 정숙하고 덕성 있고 인정 많고 따뜻하였다. 시보모를 효성으로 봉양하고 예로서 봉제사 하였다. 「기성지」에 실렸다
儀範貞淑德性純厚孝養舅姑禮奉祭祀事載箕城誌 |
15 | Ⅱ-1 참봉 | 정국태(鄭國泰) 국경(國慶) 우재(迂齋) (1692 ~ 1762) | 천품이 효성지극하고 경서와 행의로 이름 높았다
誠孝根天 經行名世 |
15 | Ⅱ-9 성재 | 정익휘(鄭益輝) 술보(述甫) (1723 ~ 1789)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있었다. 문장과 학문에 능하였으며 선대의 행적을 본받았다
孝友文學 克趾先美 |
15 | Ⅱ-9 성재 | 정문휘(鄭文輝) 성모(聖模) (1768 ~ 1833)
배 곡산연씨 烈婦 | 배 곡산연씨(配 谷山延氏)
시집오기 전 친정아버지 병환에 손가락 베어 진혈하여 연명하였고, 시집와 지아비 병환에 다리 살 베어 드리니 가상한 효열을 향도에서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였다. 강재 송의섭이 행장을 쓰고 족손 규종이 묘갈문을 지었다.
在家親癠斫指延縷 及歸夫病刲股 常以孝烈累登鄕道薦 事載「上黨誌」 剛齋 宋毅燮撰 行狀 族孫 圭宗 撰 碣銘 |
16 | Ⅰ-2 응교 | 정박(鄭璞) 국보(國寶) 경와(敬窩) (1713 ~ 1783)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글과 학문이 높아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孝友文學鄕里稱頌 |
16 | Ⅰ-1 절제사 | 정극(鄭極) 수옹(壽翁) (1739 ~ 1799) | 효성이 지극하고 순수 독실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으로 돌아가셨을 때 염습하지 않고 7일간 호곡하였는데 마침내 깨어나시므로 온 고을사람이 경탄하였다
誠孝純篤 親有疾殞命 不爲收斂號哭七日 竟得回甦 鄕里驚歎 |
16 | Ⅰ-3 지평 | 정운화(鄭運華) 경심(敬深) (1792 ~ 1849)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다. 글과 학문이 높이 빛났다
孝友純篤 文學華邵 |
16 | Ⅰ-3 지평 | 정이준(鄭履俊) 화직(和直) 학양재(鶴陽齋) (1825 ~ 1886) | 부성이 어질고 마음이 넓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인근 혼사·흉사를 발 벗고 도우면서도 스스로 부덕하다 하였다. 1876년 선공감 가감역을 제수 받았다. 유고가 있다
賦性仁恕孝友純至多恤婚喪自如不德 高宗丙子(1876년)繕工監假監役 有遺稿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6 | Ⅰ-3 지평 | 정운호(鄭運昊) 문언(文彦) 송파(松坡) (1780 ~ 1852) 恩典
배 광산김씨 (1778 ~ 1832) 孝婦 | 어버이 병환에 의원이 말하기를 살아 있는 잉어가 가장 좋다고 하므로 사방으로 구했으나 매우 가뭄이 심해 얻을 방법이 없었다. 냇가에서 울며 빌고 있었더니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므로 잉어를 구하여 올려 드렸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상을 당하여 모든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성묘하는 자리가 패이니 사람들이 아버지 효자에 아들 효자라 했다. 도내에서 많은 선비가 효성을 조정에 아뢰어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었다. 행적은 「금성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親疾醫云生鯉最利時太旱四求不得 泣禱于澗畔 天忽聚雨得鯉封進見效 遭內外艱 送終踰禮 省掃坎瑎人稱父孝而子孝 庚午 道內多士孝累聞于朝 贈司憲府持平 事載 錦城誌及三綱錄
배 광산김씨(配 光山金氏)
어버이 섬김에 온 정성을 다하니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事親盡職 鄕黨欽歎 |
16 | Ⅰ-3 지평 | 정운필(鄭運弼) 여량(汝良) 신의재(愼義齋) (1756~1783) | 1783년 성균진사(成均進士)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고 행실을 삼가하고 성실히 하였다. 예와 법도대로 처신하므로 모두 우러러 존경하였으나 불행이 일찍 별세하므로 모두 애석해 했다 孝友謹篤以禮律身世仰重望不幸早世人皆惜之 |
16 | Ⅰ-3 지평 | 정운하(鄭運河) 경좌(景佐) (1766 ~ 1831) 命旌 | 어버이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고 학문에 힘쓰고 실천하였다.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효행을 여러 차례 추천하여 조정에서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事親至孝力學篤行道內多士 以孝累遷于朝 贈童蒙敎官朝奉大夫命旌 |
16 | Ⅰ-4 자의 | 정건(鄭楗) 군협(君挾) 모당(慕堂) (1737 ~ 1800) | 어버이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고 조상을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경서에 밝고 행의가 고명하여 사람들의 사표가 되었다. 1892년 증손 성진이 귀하게 되어(수 동지)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事親至孝奉先盡誠 早廢擧業講究性理 經明行高爲世師表 高宗 壬辰 以曾孫成鎭貴 贈司僕寺正 |
16 | Ⅰ-5 능파정 | 정두량(鄭斗量) 철중(哲中) (1824 ~ 1887) | 6년 여묘하니 동네에서 흠복하였다
六年居廬 鄕里欽服 |
16 | Ⅰ-5 능파정 | 정두칠(鄭斗七) 운집(雲集) 남강(南岡) (1819 ~ 1883) | 학문에 독실하였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 우애도 돈독하였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學力純實孝友敦篤 贈戶曹參判 |
16 | Ⅰ-6 승지 | 정동규(鄭東奎) 군오(君五) 유헌(幽軒) (1825~1896) | 효릉참봉(孝陵參奉)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여 화목하여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孝友敦睦鄕里稱頌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6 | Ⅱ-5 청백리 | 정재심(鄭載心) 치양(稚養) 운림재(雲林齋) (1748 ~ 1813)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문장과 학문이 높아 이름이 알려졌다
孝友文學 名重當世 |
16 | Ⅱ-6 양촌 | 정재원(鄭載遠) 사의(士毅) 덕촌(德村) (1742 ~ 1801) | 진사(進士)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문장이 뛰어나 사람들에 이름을 알렸다
孝友文章 擅名當世 |
16 | Ⅱ-6 양촌 | 정재권(鄭載權) 덕경(德經) 만성(晩星) (1741 ~ 1810)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학문이 깊고 심오하여 호남의 선비와 벗들이 우러러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孝友純至 學文沈邃 兩湖士友 莫不景仰 |
16 | Ⅱ-9 성재 | 정희상(鄭喜祥) 사정(士精) (1772 ~ 1810)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가 우애가 돈독하고 경서에 밝고 행실이 순실하여 세간으로부터 존경받았다
孝友經行 爲世推重 |
16 | Ⅱ-9 성재 | 정희간(鄭喜艮) 자안(子安) (1794 ~ 1854) |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몸과 마음으로 봉양하였다.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여 재산이 있든 없든 같이 나누니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誠孝根天 志體兼養 友于彌篤 有無與共 鄕里稱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