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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2권
16.2. 진리(諦)에 대한 상세한 주석[1]
13. 그 다음에 진리(諦) 라는 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로서,
괴로움의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이다.
14. 여기서 지자는 다음과 같이 교법의 순서에 대해 판별을 알아야 한다.
① 배분에 따라
② 어원에 따라
③ 특징 등에 따라
④ 뜻에 따라
⑤ 뜻을 추적함에 따라
⑥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으로
⑦ 순서에 따라
⑧ 태어남 등의 해설에 따라
⑨ 지혜의 역할에 따라
⑩ 내용의 구별에 따라
⑪ 비유로
⑫ 네 가지로
⑬ 공(空)함을 통해
⑭ 한 가지 등으로
⑮ 공통되는 것과 공통되지 않은 것에 따라
(1) 배분에 따라
15.
(1) 배분에 따라:
고통 등은 각각 네 가지의 뜻이 배분되는데 이것은 진실이고(tathā), 거짓이 아니며,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괴로움 등을 관찰하는 자는 이것을 관통해야 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괴로움의 압박의 뜻, 형성된 것(有爲_)이라는 뜻, 불탄다는 뜻, 변한다는 뜻,
괴로움의 이 네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은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
일어남의 쌓는다는 뜻, 근원이라는 뜻, 속박의 듯, 장애의 뜻, ··· 소멸의 벗어남의 뜻, 멀리 여읨의 뜻, 형성되지 않음(無爲)의 뜻, 불사(不死)의 뜻 ··· 도의 출구의 뜻, 원인의 뜻, 바르게 본다는 뜻, 탁월하다는 뜻,
도의 이 네가지 도라는 뜻은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PS.II.104-5)”
이와 같이 “괴로움의 압박한다는 뜻. 형성된 것(有爲)이라는 뜻, 불탄다는 뜻, 변한다는 뜻, 관통한다는 뜻(Ps.i.118)” 등으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배분된 각각 네 가지씩의 뜻에 괴로움 등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여기서 배분에 따라 판별한 것이다.
(2) 어원에 따라
16.
(2) 어원에 따라:
여기서 [둑카(dukkha, 괴로움)의] ‘두(여)’라는 단어는 비열하다(kuccita)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비열한 아이를 두뿟따(dupputta)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카(kha)’라는 단어는 비었다.(tuccha)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카(kha)’라는 단어는 비었다(tuccha)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텅 빈 허공을 카(kha)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진리는 여러 가지 위험이 도사리는 소굴이기 때문에 비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항상함, 아름다움, 행복, 자아가 없기 때문에 비었다.
그러므로 비열하기(두) 때문에, 비었기(카) 때문에 둑카(괴로움)라고 부른다.
17. [삼우다야(samudaya, 일어남)의]’삼(saṁ)’이라는 단어는 ‘함께오다, 함께 모이다’ 등에서 결합(saṁyaga)의 뜻을 나타낸다.
‘우(√u/nd)’라는 단어는 ‘일어나다, 위로 오르다’ 등에서 오르다(uppatti)의 뜻을 나타낸다.
‘아야(aya)’라는 단어는 원인(kāraṇa)을 나타낸다.
이 두 번째 진리가 다른 조건들과 결합되면 둑카(괴로움)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다른 조건이 결합되면 둑카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다른 조건이 결합되면 둑카(괴로움)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다른 조건이 결합되면 둑카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두카사무다야(괴로움의 일어남)라고 부른다.
18. 세 번째 진리(nirodha, 소멸)에서 ‘나(ni)’ 라는 단어는 ‘없음’(abhava)을, ‘로다(rodha)’라는 단어는 ‘감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모든 태어날 곳(gati)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감옥이라 불리는 괴로움의 압박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것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둑카니로다(괴로움의 소멸)라고 부른다.
혹은 생겨남이 없는 소멸의 조건이기 때문에 둑카니로다라고 한다.
19. 네 번째 진리는 소멸(滅,nirodha)을 대상으로 직면해(abhi-mikha) 있기 때문에 괴로움의 소멸(dukkha-nirodha)로 인도한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에 도닦음(paṭipadā)이라 한다.
그러므로 네 번째 진리를 둑카 니로다 가미니 빠띠빠다(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라고 부른다.
20. 부처님 등 성스러운 분들이 이들을 통찰하시기 때문에 성스러운 진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이다.
어떤 것들인가? ···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이다.(S.v.425-26)”
그러므로 성스러운 분들이 통찰하시기 때문에 성스러운 진리라고 부른다.
21. 더욱이 성스러운 분의 진리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신을 포함한 인간의 세상에서 ··· 여래는 성스러운 분이시다. 그래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부른다.(S.v.435)”
혹은 이것들을 깨달았기 때문에 성스러움이 성취되었다. 그래서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달았기 때문에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라 부른다.(S.v.433)”
22. 또 성스러운(ariyāni) 진리(saccāni)이기 때문에 성스로운 진리(ariyāni-saccāni)이다.
성스럽다는 것은 진실, 거짓이 아님, 속이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부른다.(S.v.435)”
이와 같이 어원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한다.
(3) 특징 등에 따라
23.
(3) 특징 등에 따라:
괴로움의 진리는 괴롭히는 특징을 가진다.
불타는 역할을 한다.
윤회가 계속됨으로 나타난다.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근원의 특징을 가진다.
끊어지지 않는 역할을 한다.
장애로 나타난다.
소멸의 진리는 고요함의 특징을 가진다.
불사의 역할을 한다.
[오온의] 표상이 없음으로 나타난다.
도의 진리는 출구의 특징을 가진다.
번뇌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탈출로 나타난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발생(pavatti), 발생하게 함(pavattana), 정지(nivatti), 정지하게 함( nivattana)의 특징을 가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형성됨, 갈애, 형성되지 않음, 봄(dassana, 見)의 특징을 가진다.
이와 같이 특징 등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한다.
(4) 뜻에 따라
24.
(4) 뜻에 따라:
만약 ‘무엇이 진리라는 뜻인가’라고 한다면,
통찰지의 눈(paññā-cakkhu, 慧眼)으로 면밀히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환처럼 변회하는 것이 아니며,
신기루처럼 속이는 것이 아니며,
외도들이 주장하는 자아처럼 고유성질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 괴롭힘(bādhana), 기원(pabhava), 고요(santi), 출구(niy-yana)의 형태이며 진실이고 변화하지 않으며 사실인 것으로서 성스러운 지혜( ariya-ñāṇa)의 영역이다.
불의 특징처럼, 세간의 본질처럼, 진실하고 변화하지 않고 사실인 것이 진리의 뜻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래서 상세하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것은 진실이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S.v.430)”
25. 더욱이 다음과 같이 뜻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한다.
압박 없는 괴로움 없고 괴로움을 떠난 압박 없으니
압박하는 것이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
그것을 떠나 따로 괴로움이 없고
그것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괴로움 없다(苦諦).
애착이 고통의 원인됨이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集諦).
열반을 떠나 따로 고요 없고
그것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고요 없다.
고요한 상태가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滅諦).
길을 떠나 따로 출구 없고
출구가 없는 것은 길이 아니다.
진실한 출구이기 때문에 진리라 한다(道諦).
이처럼 지자들은 괴로움 등 네 가지 진리에 예외 없이
진실하고 헛되지 않으며 사실인 진리의 뜻을 설하셨다.
(5) 뜻을 추적함에 따라
26.
(5) 어떻게 뜻을 추적함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하는가?
진리(諦, sacca)란 단어는 여러 뜻으로 사용된다.
“그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Dhp.224)”는 등에서는 말릐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수행자와 바라문은 진리에 서있다.( Jā.ii.97)”는 등에서는 절제의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왜 스스로 지자라고 말하는 그들은 여러 가지 진리를 말하는가?(Sn.885)”라는 등에서는 견해의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진리는 하나뿐이고 두 번째는 없다.(Sn.884)”는 등에서는 궁극적인 뜻에서 진리인 열반과 도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네 가지 진리에 얼마나 많은 유익한 것(善)이 있는가?(Ps.ii.108)”라는 등에서는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도 이것은 성스러운 진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뜻을 추적함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한다.
(6)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으로
27.
(6)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으로:
만약 ‘왜 더도 덜도 않게 오직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만 말씀하셨는가?’라고 한다면,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어느 것도 삭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보다 더 첨가할 것이 없고 이 중에서 하나라도 삭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와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고 다른 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나는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삭제하고 다른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천명하리라’라고.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다시
“비구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와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고따마가 가르친 첫 번째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나는 이 첫 번째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삭제하고 다른 첫 번째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천명하리라’라고.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지 않다.(S.v.428)”는 등으로 말씀하셨다.
28. 윤회의 일어남을 설하시면서 세존께서는 그것을 원인과 함께 설하셨고 윤회의 멸함도 그 방법과 함께 설하셨다.
이와 같이 최대의 수치로 일어남과 멸함과 그 둘의 원인인 넷을 설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pariññeyya)
[원인(集)을] 끊어야 하고(pahātabba)
[멸을] 실현해야 하고(sacchikātabba)
[도를] 닦아야 하는(bhāvetabba)것으로,
갈애의 토대와 갈애와 갈애의 소멸과 갈애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로,
욕망(ālaya)과 욕망을 기뻐함과 욕망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로 오직 넷을 설하셨다.
이와 같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으로써 이것의 판별을 알아야 한다.
(7) 순서에 따라
29.
(7) 순서에 따라:
여기서도 오직 가르침의 순서이다.(ⅩⅣ.§211 참조)
이것은 거칠기 때문에 또 모든 중생에게 공통되기 때문에 알기가 쉽다.
그래서 괴로움의 진리를 첫 번째로 설하셨다.
그것의 원인을 보여주기 위해 그 다음으로 일어남의 진리를,
원인이 소멸하기 때문에 결과도 소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소멸의 진리를,
그것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도의 진리를 설하셨다.
30. 삶의 행복한 맛에 빠져있는 중생들에게 분발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괴로움을 말씀하셨다.
짓지 않은 것이 스스로 오는 것이 아니며, 신 등이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 [원인으로]부터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일어남을 말씀하셨다.
그것의 원인과 함께 괴로움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분발심을 내었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을 찾는 중생들에게 벗어남을 보여주어 위로를 주시기 위해 소멸을 설하셨고,
그 다음으로 소멸을 얻게 하기 위해 소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