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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14권
45. 삼계품(三界品)[1]
[62견은 얻을 수 없다]
이때에 보살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정시왕(淨施王)이었다.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바르고 요긴한 법[正要法]은 매우 심오(深奧)하나이다.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기호(記號)를 받으면, 곧 예순두 가지 소견의 삿된 길[六十二見邪逕]의 도를 받나이다.
왜냐하면 예순두 가지 소견이란 것이 모두 보살을 낳고 보살의 도과(道果)를 내기 때문이나이다.
도과란 것이 곧 예순두 가지 소견을 내나이다.
왜냐하면 보살의 도과는 욕계로부터도 아니고 색계로부터도 아니고 무색계로부터도 얻지 못하고, 유위(有爲)ㆍ무위, 유루(有漏)ㆍ무루로부터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나이다.
왜냐하면 보살의 명자(名字)는 얻을 수 없고 또한 처소도 없기 때문이나이다.
예순두 가지 소견의 삿된 길의 명호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본래의 뜻이 청정하고 형상이 없어서 볼 수가 없나이다.
어떠하시나이까, 세존이시여. 마치 어떤 사람이 허공의 변제(邊際)를 찾아 궁구하고자 해서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흰 것을 헤아려서 분변(分辨)하는 것과 같나이다.
다시 5음(陰)으로 시설한 명자(名字)인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이것은 생겨남, 이것은 멸함, 이것은 유위(有爲), 이것은 무위, 이것은 유루(有漏), 이것은 무루, 이것은 유상법(有常法), 이것은 무상법, 이것은 괴로움, 이것은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과 같나이다.
어떠하나이까,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깊은 법 가운데서 지혜가 있나이까, 없나이까?”
부처님께서 정시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글자를 세우고 이름을 지어서 공(空) 속에서 공을 구하고자 하는가?
이 일은 그렇지 않느니라.”
그때에 정시왕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보살의 도과 및 걸림 없는 지혜와 37품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과 예순두 가지 소견은 모조리 있는 바가 없어서 볼 수 없나이다.
또한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가지고 있을 수 없듯이,
모든 법의 상(相)은 원하고 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나이다.
왜냐하면 본래 있는 바가 없어서 삼계를 뛰어넘고 3세를 초월했기 때문이옵나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과 보살도에 문득 두 소견을 내고,
두 소견이 있으므로 문득 두 가지 상념이 있고,
두 가지 상념이 있으므로 문득 삿된 부류[邪部]에 떨어지고,
삿된 부류에 떨어졌으므로 문득 5도(道)에 들어가고,
이미 5도(道)에 들어갔으므로 생사(生死)의 바다에 떠돌아다니고,
성현을 비방하여 도(道)를 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또한 성현의 법률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끼리 서로 일러 말하기를
‘부처님은 다르다, 도는 다르다, 나고 죽음도 또한 다르다. 나고 죽음이 이미 다른데, 어찌 열반이 있겠는가?
또한 다시 부처님이 보살도를 닦는 일이 없거늘, 하물며 마땅히 걸림 없는 지혜를 이룸이 있으랴? 이 일은 그렇지 않다’고 하나이다.”
[익힘 없는 익힘]
그때에 좌상에 보살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구경(究竟)이었다.
그가 정시왕보살에게 물었다.
“어떠합니까, 족성자여. 보살마하살이 대승을 발하여 나아가서 걸림 없는 지혜를 밝히면 위없는 지진 등정각을 이룰 수 있나이까?”
정시왕보살이 말하였다.
“만일 어떤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위없는 등정각을 성취하였다면,
보살행을 익힘이 다른 이를 위하는 익힘이 아님이 없고,
또한 바른 법을 버리고서 삿된 업을 익히지 않으며,
보살도를 행함도 보지 않고 또한 보살도를 행하지 않음도 보지 않으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수행의 경지를 초월하여 익혀도 익힌 바 없는 것이라 이르나이다.”
구경보살이 다시 정시왕보살에게 물었다.
“어떠합니까, 족성자여. 보살마하살이 수행의 경지를 지나쳐서 익혀도 익힌 바가 없으므로 위없는 도를 닦아 보살의 이름을 얻는 것이나이까?”
정시왕보살이 구경보살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일체 모든 법의 모습[相]과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을 받아서 취하지 않고,
이 경계를 지나치는 까닭에 온갖 지(地)를 초월하여 익혀도 익힌 바 없는 것이외다.”
구경보살이 다시 물었다.
“족성자여, 무엇이 수행의 경지를 지나쳐서 익혀도 익힌 바 없는 것이나이까?”
정시왕보살이 구경보살에게 답하였다.
“온갖 경지를 두루 거치지 않고도 보살도를 익히는 것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이 보살도의 가르침을 낳기 때문이외다.”
구경보살이 말하였다.
“족성자여, 무엇이 모든 법에서 다시 경계가 있음이나이까?
왜냐하면 온갖 경지를 초과해서 익혀도 익힌 바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나이다.”
정시왕보살이 말하였다.
“모든 법은 여여(如如)하고, 도의 성품[道性]도 또한 여(如)하며, 또한 온 때를 보지 않고 또한 간 때를 보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도의 가르침을 낳아서 익혀도 익힌 바가 없음이외다.”
구경보살이 정시왕보살에게 여쭈어 말하였다.
“족성자여, 어떤 것이 도의 마음을 발하여 나아가는 것이나이까?”
정시왕보살이 말하였다.
“도(道)의 여(如)함과 같나이다.”
구경보살이 말하였다.
“어떤 것이 도의 여함과 같음이니까?”
정시왕보살이 말하였다.
“대저 ‘도의 여(如)’란 또한 과거ㆍ미래ㆍ현재에도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3세 가운데서 도의 성품이 청정하고 여(如)도 또한 청정함을 보지 않고, 그대로 바로 위없는 지진 등정각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여여(如如), 미래의 여여, 현재의 여여와 같아서
자연히 성품이 공해서 오는 것도 보지 않고 또한 가는 것도 보지 않으며,
나아가도[趣] 나아가는 바가 없고, 그대로 위없는 지진 등정각을 발하여 익혀도 익힌 바가 없음이외다.”
구경보살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위없는 지진 등정각을 발하여서 익혀도 익힌 바 없는 것이나이까?”
정시왕보살이 말하였다.
“길을 잃은 이에게는 길에 나아가게 하고,
또한 대비심[大哀]으로 두려움이 없게 하고,
비록 삼계의 5무간(無間)의 지옥에 처하더라도 그 수고로움을 품지 않고,
평등의 마음으로 두루하여 능히 도의 뜻을 발함이 익혀도 익힌 바 없음이외다.”
구경보살이 다시 물었다.
“어떠하나이까, 족성자여. 만일 눈이 없으면 어찌 볼 수 있으리까?
저는 이제 갑절이나 의심이 나나이다. 오직 깨우쳐 풀어주시기를 바라나니, 이제 마땅히 저를 위하여 말씀하시어 망설임을 없애서 마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족성자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길을 잃은 이에게 위없는 도[無上道]에 나아가게 하고, 게다가 대비심으로 두려움이 없게 하고, 평등의 법에서 또한 늘거나 주는 것이 없나이다.
이 병은 능히 고치는 이가 없으니, 바라건대 족성자께서는 저를 위하여 연설하여서 마음의 무거운 의심을 덜어 없애 주소서.”
정시왕보살이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족성자여. 당신의 발한 물음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威神)이 감응한 바라,
이제 문수사리가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그에게 청구(請求)하여 그대의 물음에 답변하게 하여 알게 할 것이외다.”
그때에 구경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아까, 나의 의심을 정시왕보살이 말했는데, 어떠합니까,
족성자께서 능히 아신다 하오니, 오직 원하옵건대 연설을 해 주시어 남은 의심들을 없애 주십시오.”
그때에 문수사리가 구경보살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대애(大哀) 보살은 삼계에 걸림이 없으니,
만일 깊고 묘한 그 법의 심제(審諦)에 들어가면,
익혀도 익힌 바가 없고, 또한 집착한 바가 없고, 또한 의심할 바가 없고, 또한 어려운 바가 없고, 또한 두려운 바가 없나이다.
만일 이 같은 이라면 이미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서 본제(本際)에 머물면서 편안한 몸을 얻고,
돌아갈 바 없는 이에게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며,
비록 삼계의 5무간(無間) 지옥에 처하더라도 그 수고로움을 불평하지 않고,
평등한 마음으로 두루하여 능히 도의 뜻을 발해서 익혀도 익힌 바가 없나이다.”
구경보살이 다시 물었다.
“어떠하나이까? 문수사리시여, 무엇으로 근본을 삼나이까?
가령 말씀하신대로 익혀도 익힌 바 없으면, 모든 법의 생겨남은 다름이 있습니까?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뜻이 다를 수 있습니까?
크게 불쌍히 여기는 보살의 평등은 다르나이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만 그쳐라, 그만두어라, 족성자여. 그 도라고 말한 것은 도가 있음이 아니니라.
만일 나[吾我], 목숨[壽命], 중생의 무리가 있다고 생각지 않으면,
이 자는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서 평등한 마음으로 두루하여 능히 도의 뜻을 발하면서 익혀도 익힌 바가 없나이다.”
구경보살이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시여, 대저 도의 성품이 여(如)하여 삼계를 갖지 않으면서도 삼계를 버리지 않는데,
어떻게 위없는 지진 등정각의 도를 발하게 되나이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마음은 가진 바 없고 또한 반연도 있지 않으며,
또한 4대(大)인 땅ㆍ물ㆍ불ㆍ바람을 인하지 않고,
또한 5음인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의지하지 않고,
또한 여섯 가지 쇠함[六衰]에서 여섯 가지 수고로움을 일으키지 않고,
덕 있음도 생각지 않고 덕 없음도 생각지 않으며,
세속에 집착하지도 않고 도의 마음을 내지도 않으며,
죄와 복의 분별도 없고, 지혜와 어리석음의 분별도 없으며,
유여(有餘)도 보지 않고 무여(無餘)도 보지 않으며,
또한 계의 몸[戒身]ㆍ정의 몸[定身]ㆍ슬기의 몸[慧身]ㆍ해탈의 몸[解脫身]ㆍ해탈지견의 몸[解脫知見身]을 보지 않고,
생사에 물들어 집착하고 얽매임과 열반의 청정함도 보지 않으며,
본래 나고 멸하고 집착하고 끊음이 없음을 보지 않으며,
또한 유상(有常)ㆍ무상(無常), 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보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다 관해서 고요히 허공에 머무느니라.
이와 같이 머무는 이는 머물러도 머무는 바가 없고,
이미 등애(等哀)를 얻어 한마음으로 평등하게 둘이 없어서 익혀도 익힌 바 없고,
위없는 지진 등정각을 발하게 되어서 비록 삼계의 5무간 처소에 처하더라도 그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는 것이외다.”
구경보살이 이 법을 듣고 나서 뛸 듯이 매우 기뻐하며 스스로 그칠 줄 몰랐다.
“오직 원하거니와, 문수사리시여, 저로 하여금 이 익힘 없는 익힘에 미쳐서 열반의 으뜸가는 걸림 없음을 얻고, 다시 이 법을 인연하여 편안함을 얻게 하소서.”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익혀도 익히는 바가 없는 배움의 경지에 머무르나 일체 모든 법에 바라는 바를 두고서 문득 이에 반연하여 편안함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런가?
만일 반연하는 바가 없으면 편안함도 없으니, 어찌 반연으로부터 열반을 얻겠는가?
그 법은 적적하고 고요하여 본래 시작됨이 없고,
과거의 멸함과 끊지 않음을 염(念)함을 반연하지 않고,
현재의 항상함을 계교하는 마음을 생각지 않고,
미래의 상대(相對)가 있고 상대가 없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익힘 있음에 머물지 않아서 또한 익힌 바가 없고,
생각 있음을 보지 않아서 또한 생각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편안함이 있지 않아서 또한 편안한 바가 없으며,
또는 잘난 체하지 않아서 단멸(斷滅)이 있지 않으며,
일체 모든 법은 들음도 없고 소리도 없어서 또한 음향이 없고,
유여(有餘)도 보지 않고 무여도 보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편안함에 처해 열반을 얻어서 모든 법을 통달하면서도 일어나고 멸하는 상념이 없다고 말하느니라.”
문수사리가 다시 구경보살에게 말하였다.
“만일 족성자여, 염(念)과 무념(無念) 사이에 염(念)을 내지 않고 중간에도 뜻이 없으면 뒤에 재변[災異]이 없다.
설사 마땅히 생각을 내어 재변이 있다면, 이는 편안치 않음이니, 근본부터 구경(究竟)까지 근심 있음과 근심 없음을 벗지 못한다.
만일 마땅히 분별하여 재난 있음도 보지 않고 재난 없음도 보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에 통달하여 영원히 편안함에 처해서 다시는 익힘 있음과 익힘 없음에 오가는 일이 없이 제1의(第一義)에 응한다고 이르나이다.”
그때에 구경보살이 말하였다.
“어떠하나이까, 문수사리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공은 머무름이 있는가, 공은 머무름이 없는가?
공은 익힘이 있는가, 익힘이 없는가?
생겨남이 있는가, 생겨남이 없는가?’라고 말을 한다면,
이런 말은 그 뜻이 어떠하나이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공이 머무름이 있거나 공이 머무름이 없거나,
공이 의지함이 있거나 의지함이 없거나,
익힘이 있거나 익힘이 없거나,
생겨남이 있거나 생겨남이 없거나,
원함이 있거나 원함이 없거나,
상념이 있거나 상념이 없거나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열반에 이르러 익힘 없음에 응하게 되겠는가?”
구경보살이 말하였다.
“어떠하나이까, 족성자여. 공이란 머무름이 있지도 않고 또한 머무름이 없지도 않으며,
둘을 반연하지도 않고 또한 하나를 반연하지도 않으며, 다시 중간도 없나이다.
이것을 여읜다면 마땅히 다시 어떻게 열반의 으뜸가는 익힘 없음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나이까?”
문수사리가 답하여 말하였다.
“공에 머무름이 있으면 또한 머무는 바가 없고,
공에 머무름이 없으면 본래 머무는 바가 없고,
의지함이 있으면서 의지함이 없고,
익힘이 있으면서 익힘이 없고,
남(生)이 있으면서 남이 없고,
원(願)함이 있으면서 원함이 없고
상(相)이 있으면서 상이 없고,
본래 상 있음이 없고 상 있음 아님도 없으며,
상이 또한 상 없음이고 상 없음도 또한 상 없음이다.
온갖 여러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음 있음도 보지 않고 지음 없음도 보지 않으며,
지음이 있지 않음도 아니고 지음이 없지 않음도 아니며,
상 있음과 상 없음을 보지 않으며,
다름 있음과 다름이 없음, 구함이 있음과 구함이 없음을 보지 않으며,
나의 지은 바 있음과 나의 지은 바 없음을 생각지 않으며,
몸ㆍ입ㆍ뜻에 의지하여 선악의 행을 말하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곧 으뜸가는 익힘 없음에 응함이다.
왜냐하면 나고 죽음의 상념이 없고,
유위(有爲)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위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3세를 반연하지 않아서 근본이 깊고 견고하며,
열반이 영원히 고요하여 무위(無爲)임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족성자여, 보살대사가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서 이를 내지 않으면
위없는 익히면서 익히지 않음이 없는 것에 응한다고 함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