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과 전문가
폴 슬로빅은 인간의 위험성 판단에 나타나는 특이한 점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연구에는 평범함 사람들이 등장한다.
매력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이성보다 감정에 이끌리고, 사소한 것에 쉽게 흔들리고,
단순히 낮은 확률과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낮은 확률의 차이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슬로빅은 숫자와 수량을 다루는 데 뛰어난 전문가들도 연구했다.
이들 역시 정도는 약해도 우리와 똑같이 여러 편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위험성과 관련한 판단과 선호도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곧잘 차이가 난다.
전문가와 일반인의 차이는 흔한 판단에 나타나는 편향으로도 일부 설명되지만,
그 차이가 순전히 가치 상충에서 오는 경우에 주목한다.
그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전문 가들은 보통 사망자 수(또는 줄어든 수명)로 잠재적 위험을 측정하는 반면,
일반 사람들은 '좋은 죽음' 그리고 '나쁜 죽음' 또는 무작위 사고사
그리고 스키 같은 자발적 활동 중의 사망처럼 더 섬세한 차이에 주목한다.
이런 타당한 구분은 사례 수에만 주목하는 통계에서는 쉽게 무시된다.
슬로빅은 이런 관찰을 토대로, 일반인이 전무가보다 위험성을 바라보는 개념이 더 풍부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결정은 전문가가 내려야 하다거나, 일반인의 견해나 소망이 전무가와 상충할 때
당연히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전문가와 일반인의 우선 순위가 다를 때
"양측은 상대의 혜안과 진혜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슬로빅은 전문가들이 독점한 위험관리 정책을 그들 손에서 빼앗으려는 마음에,
전문성의 토대가 되는 '잠재적 위험은 객관적'이라는 생각을 반박했다.
'잠재적 위험'은 우리 정신이나 문화와 동떨어진 '저기 어딘가'에서 측정되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인간은 삶에 존재하는 위험 요소와 불확실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잠재적 위험'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삶에는 실제로 위험한 요소들이 있지만,
'진짜 잠재적 위험'이니 '객관적인 잠재적 위험'이니 하는 따위는 없다.
슬로빅은 이 주장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독성물질이 공기 중에 노출되었을 때 사망위험률을 정의하는방법을 "100만 명당 사망자 수"부터
"생산된 제품 100만 달러당 사망자 수"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를 나열했다.
한마디로 위험 평가는 어떤 방법으로 측정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라는 결과에 따라 측정법은 얼마든지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슬로빅은 "따라서 위험성을 정의하는 것은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라고 까지 말한다.
판단 심리를 실험한 연구에서 이처럼 민감한 정책 문제를 도출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하지만 정책은 궁극적으로 사람에 관한 것이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그들에게 최선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모든 정책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추정이, 특히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은 그들과 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추정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내가 대단히 존경하는 또 한 명의 학자이자 친구인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은
전문가와 일반인의 서로 다른 시각을 바라보는 슬로빅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서,
지나친 '대중 영합적' 정책에 반대하는 보루로서 전문가의 역할을 옹호한다.
선스타인은 미국의 대표적 법학자이며, 다른 주요 법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분야의 지식도 빠르고 완벽하게 섭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데,
판단과 선택 심리학, 규제와 위험관리 정책을 비롯해 이미 많은 분야를 섭렵했다.
그는 기존의 미국 규제 체계는 우선순위가 형편없다면서,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보다 대중의 압력에 굴복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위험 조절, 그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한 정부 개입은 비용과 편익을 합리적으로 저울질해 결정해야 하며,
이 분석의 자연스러운 단위는 몇 명을 살릴 수 있으며(젊은이에 더 무게를 둔다며, 몇 년을 더 살게 할 수 있으며)
경제적 비용은 얼마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서툰 규제는 목숨과 돈을 낭비하게 되는데, 목숨과 돈은 객관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다.
선스타인에게는 위험과 위험 측정이 주관적이라는 슬로빅의 주장이 먹히지 않았다.
위험 측정의 많은 측면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선스타인은 과학과 전문성 그리고 심사숙고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공공 정책에서 우선순위가 오락가락하고 잘못 설정되는 중요한 이유는
위험에 편향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법과 규제를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그리고 그들도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인지적 편향에 사로잡히기 쉬운 탓에,
시민의 비합리적 우려에 과도하게 반응할 수 있다.
선스타인과 그의 동료 법학자 티무르 쿠란(Timur Kuran)은
편향이 정책에 흘러드는 작동 원리에 '회상 용이성 폭포(availability cascad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사회적 맥락에서 "모든 어림짐작은 다 동등하지만, 회상 용이성 어림짐직은
다른 어림 짐작보다 더 동등하다"고 평한다.
어림짐작의 확장된 개념을 고려한 말인데,
이때 회상 용이성은 판단에서 빈도와는 또 다른 어림짐작을 제공한다.
특히 어떤 생각의 중요도는 그 생각이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정도로(그리고 감정적 흥분으로) 판단할 때가 많다.
회상 용이성 폭포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것인데,
비교적 사소한 언론 보도가 발단이 되어 온 국민이 충격에 빠지고 정부가 대규모 조치를 취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더러는 언론이 보도한 위험성 경고 기사가 일부 대중의 주목을 끌면서 흥분과 우려 대상이 된다.
이런 감정 반응을 그 자체로 기삿거리가 되어 또다시 언론에 보도되고 이번에는 더 큰 우려와 관심을 촉발한다.
이런 순환은 우려스러운 뉴스를 계속 흘려보내려는 개인이나 조직,
즉 '회상 용이성 장사꾼'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속도가 붙기도 한다.
언론이 경쟁적으로 이목을 끄는 머리기사를 뽑으면서 애초의 위험은 점점 부풀려 진다.
과학자들과 일단의 사람들은 커져가는 두려움과 혐오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쓰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어쩌다 주목을 받아도 대부분 적대적인 반응이다.
위험이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악의적 은폐' 혐의를 받는다.
이제 해당 문제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되어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정치인들은 국민 정서의 정도에 따라 반응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회상 용이성 폭포가 우선 순위를 재조정한다.
그러면서 다른 위험관리도, 그리고 자원이 공익을 위해 쓰일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모두 물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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