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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믿음 얻는 비결.(히브리서 11:1-6)
반갑습니다. 동해청운교회 원로 김병훈목사입니다. 큰 믿음 얻는 비결, 이런 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교회 안에서 제일 많이 듣는 단어 중의 하나가 믿음입니다. “저 집사님 믿음이 참 신실해. 우리 권사님은 다른 교회 권사 10명하고 안 바꿔.” 반면에 “언젯적 집사, 권사인데 너무 믿음이 없어.”라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늘나라 가는 첫걸음이요,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예수님을 내 구주로, 성령님을 내 삶의 인도자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은, 금보다 더 귀한, 내 통장에 예금보다 더 귀한 재물입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1.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을 환영하여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친정어머니가 찾아오셨을 때, 대문을 활짝 열고 친정 어머니를 환영하여 집안으로 모셔 들인 것처럼,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환영하여 영접한 것처럼, 갈릴리 해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라고 할 때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처럼, 예수님을 환영하여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 나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못난 사람, 실수 허물투성이인 사람, 이렇게 의지가 약하고 외로운 사람은 한순간도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네게 오심을 환영합니다.”하면서 주님을 내 인생의 구세주, 내 주인으로 환영하여 영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셨으면 큰 소리로 아멘 합시다.
(2)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아무리 근심, 걱정, 고민해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내가 환영하여 영접해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내가 걱정하고 근심하며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내 근심, 걱정, 고민,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 위탁해 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것은, 참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경 지식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남보다 오래전부터 믿은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그동안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 연륜이고 경험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깨닫고, 가르치는 쪽쪽 실천에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6개월 정도 교회에 나오던 청년이 하루는 담임 목사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이 교회 그만 나오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러세요.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소. 집으로 가는 길에 산 밑에 살고 계신 할머니에게 오늘 내가 심방 가기로 약속했는데 못 가게 됐으니 이 돈으로 사과 한 상자 전해 드리세요.” 그 청년은 목사님과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청년은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고 할머니 집을 찾아갔습니다. 대문 앞에 놔둔 사과 상자를 할머니가 모르실 것 같아 대문을 노크하니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사람이 그리웠던 할머니는, 우리 교회 청년이,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찾아 왔다고 반가워하시더니, 방으로 들어가 사과를 깎아 놓고, 먼저 할머니가 청년의 장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더니 청년도 이 늙은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주여!” 한마디 해놓고 식은땀을 줄줄 흐르더니 청년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시 목사님을 찾아오더니 “목사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청년이 어떻게 이렇게 됐습니까? 사과 한 상자 사다 드리라는 목사님 말씀을 실천에 옮기다가 결국, 쏟아버린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심방, 차량 운행, 노방전도를 실천에 옮길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겨나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그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2. 이런 믿음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1) 본질적인 면에서 믿음을 구분하면
1) 선물의 믿음이 있습니다. 선물의 믿음이란,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 지, 예수님을 환영하여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선물로 받는 믿음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구원(救援)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과거(過去)에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죄를 용서받는 구원입니다. 여기서 죄는 우리 조상 적부터 지은 죄, 내가 과거에 지은 죄, 내가 미래에 지을 실수까지 다 용서받았습니다.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현재(現在) 이루어져 가고 있는 구원입니다. 내가 과거에 죄는 용서받았지만, 오늘을 살아가면서 사건, 사고, 시험, 불행 등 만날 것은, 다 만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이것이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는 구원입니다. 그러하기에 구원받은 성도는 어떤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자살하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미래(未來)에 이루어질 구원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입니다.
옛날에는 권세 가진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살았고, 지금 자본주의 시대에 돈 많은 사람이 떵떵거리고 삶니 다만 머지않아 주 예수님 다시 오시면 믿음 가진 사람만이 구원받습니다. 대한민국 초기에 자유당 시절에는 자유당에 붙어있는 자들이 출세했고, 공화당 18년 반 동안에는 공화당에 붙어있는 자들이 출세했지만, 머지않아 주 예수님 다시 오시면 주 예수님께 붙어있는 자만이 구원받습니다. 그러므로 시대 말의 최고의 유산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선물의 믿음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할렐루야!
2) 은사의 믿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부르짖고 체험하여 역사가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어느 교회 한 찬양 대원이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중학생 때 정조를 잃었고, 고등학생 때 임신을 경험했고, 대학생 때 낙태 수술을 했습니다. 한번은 부흥회 통성기도 시간에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데, 강사님이 안수기도하신다고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으랴. 그런데 강사님이 “빛도 없는 것, 생명도 없는 것, 예수도 없는 것, 회개하라.”라고 하자 그 말씀이 비수처럼 꽂혀 아! 하면서 가슴을 치며 꼬꾸라져 회개하자 방언이 터졌습니다. 그 집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방언, 이것이 은사입니다. 은사의 믿음으로, 나를 이기고, 악한 황경과 세상, 마귀, 이단, 질병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동의가 되십니까?
(2) 내용적인 면에서 믿음을 구분하면
1)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송사리하고 고래하고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그렇다면 살아있는 송사리와 죽은 고래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건물만 한 고래라도 일단 죽으면, 칼로 토막을 내도 감각이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주보에 대표기도, 안내위원이던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 마디가 없습니다. 이것이 죽은 믿음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26)
그뿐만 아니라 일단 고래가 죽으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밀려갑니다. 어디까지 떠밀려 갑니까? 용하다는 점쟁이 집 앞에까지, 타락하는 자리까지 떠밀려 갑니다. 이것이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송사리 좀 보십시오. 물결치는 대로 떠밀려가지 않습니다. 몸부림 치면서 깨끗한 물줄기를 찾아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세상일에 떠밀려가지 않고, 은혜의 물줄기를 찾아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믿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축하드립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산 믿음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살다 보면 TV, 신문, 안 믿는 남편, 친구들한테서, 어떤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어떤 목사님, 어떤 장로님이 이랬다더라. 할 때 “그랬어. 그런 줄 몰랐네. 그럼 나 그 교회 못 나가.”라고 의심하고 낙심하면서 교회를 나가니 못 나가니, 한다면 이것이 곧 작은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한테 무슨 일을 맡기겠습니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
그런데 내 귀에 별별 소리가 다 들려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고 내 교회, 내 목자를 지키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28)
내 인생의 환란 날, 풍랑을 만난 날, 예수님 부인하지 않고 내 자리를 굳게 지키는 것이 질적으로 큰 믿음입니다. 큰아들이 죽었다고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권사님이 있습니다. 장사하다가 손해 좀 봤다고 교회를 떠난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믿음입니다.
물론 양적으로는 금식 열흘 한 것보다는 이십 일 한 것, 전도 한 명한 것보다는 열 명한 것, 십일조 10만 원 한 것보다는 100만 원, 천만 원 한 것이 큰 믿음입니다. 그러나 질적으로 큰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귀에 별별 소리가 다 들려도, 의심하지 않고, 낙심하지도 않고, 내 자리, 내 교회, 내 목자를 지키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살다 보면 내 눈에 험한 꼴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저런 꼴은 안 봤어야 하는데...” 그런데 험한 꼴을 다 보아도 의심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내 자리, 내 교회를 지키는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반면에 험한 꼴은 보는 순간에, “저 권사님, 저 장로님, 저 목사님이 저런 사람인 줄 몰랐어. 나 그 교회 나가네 못 나가”라고 하면서 의심하고 낙심하는 믿음이 작은 믿음입니다. 큰 믿음을 가져야 큰 직분을 받고, 큰 직분을 감당해야 복을 받아도 큰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큰 믿음 갖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기왕에 믿으면서 옳게 믿자, 바로 믿자, 크게 믿자, 상 받게 믿자, 복 받게 믿자, 믿는 자는 믿음대로 표적이 따르느니라.”
3) 내용적인 면에서 믿음을 구분하면, 자라나는 믿음, 구원받을만한 말씀을 듣는 데 성공하는 믿음, 거짓 없는 믿음, 보배로운 믿음, 온전한 믿음, 양심이 파선한 타락한 믿음도 있습니다.
3. 그런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 선진들의 믿음에는 특색이 있습니다.
(1) 아벨은 감사 잘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형 가인은 쉽게 말하면 농사지어 알곡은 제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북지, 북데기 털어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노 코멘트, 한 마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바친 헌금을 하나님이 어떻게 받으셨는지 내 자신이 알 수 있습니까? 내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거울입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은 ‘천지 창조’ 영화에 보면 아내와 함께 큰 양, 깨끗한 양을 골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
이 일로 아벨은 형 가인의 시기를 받아 죽었지만, 하나님은 아벨 대신에 셋이란 아들을 주셨고, 그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태어났으며,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감사생활 지성스럽게 잘하면 끝이 쭉쭉 퍼져 나간다.”
출산, 백 일, 돌, 생일, 결혼, 환갑, 7순, 8순, 입학, 졸업, 취직, 승진, 퇴직, 입대, 제대, 여행, 건축, 새집 구입, 이사, 장례, 추도, 대심방, 세례, 부활절, 성탄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부흥회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제물 위에 응답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애굽기 20:24)
구약시대에 제물로는 소, 양이나 염소, 비둘기 새끼, 곡식 빻은 가루를 드렸습니다. 자기 형편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둘기 새끼를 바쳐야 할 형편인데 소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 예물을 받으시고 “너는 앞으로 소를 바치고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마.” 이것이 감사헌금입니다.
아벨은 감사 잘하는 것이 그 믿음이 특색이었습니다.
(2) 에녹은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에녹은 365세를 사는 동안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세기 5:21-22)
에녹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 안에 에녹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철저한 자기 정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힘든 것 중 한 가지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입니다.
머릿속에 교만을 정복하고 겸손해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귀속에 의심을 정복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혀 밑에 거짓을 정복하고 진실해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뼛속에 게으름을 정복하고 부지런해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살속에 음욕을 정복하고 정결해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피속에 혈기를 정복하고 온유해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여러분! 비가 쏟아지려고 하면 장독 뚜껑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할 말은 많아도 참는 것이 성도고, 성질은 있어도 부리지 않는 것이 성도고, 혈기는 있어도 내지 않는 것이 성도입니다.”
허파속에 위선을 정복하고 안과 밖, 겉과 속이 일치해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쓸개 속에 고집을 정복하고 관용할 줄 알아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오장육부 속에 탐심을 제거하고 분수를 알아야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에녹은 자신을 정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3) 노아는 인내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에 100년 이상을 참고 견디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다 죽고 다 망했는데도 노아는 방주에 들어간 8식구를 구원해냈습니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창세기 7:12-13)
인내라는 헬라어에 두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는 쉬퍼모네입니다. 비인격적인 상황에서 잘 참는 것이 쉬퍼모네입니다. 날씨가 좀 추워도 더워도 잘 참고, 배가 고파고 시간이 지루해도 아파도 잘 참는 것이 쉬퍼모네입니다. 반면에 마크로두미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잘 참는 것입니다. 그 못된 인간 앞에서도 자기 페이스를 잘 지키고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서울 관악구 난곡제일교회를 지을 때입니다. 예배당 2층이 올라가는데 교회 뒷집에 사는 시청 직원이 술이 만취가 되어 담임 목사님을 찾더니 “우리 집 앞에 이렇게 높이 교회를 지으면 우리 집을 어떻게 팔아먹느냐?”라고 목사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습니다. 이 꼴을 작업하는 인부들, 교인들, 사모님이 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입니까? 유도하셨던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한주먹감도 안되더라고. 그런데도 목사님은 멱살을 잡힌 대로 끌려다녔습니다. 얼마 후 예배당을 다 짓고 헌당식을 마친 어느 주일, 새 가족이 등록했는데 글쎄 멱살 잡던 그 시청 직원이 등록한 것입니다. 나중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목사님 멱살 잡아끌던 그 머리 위에 세례를 베푸는데, 얼마나 마음이 푼한 지 참고 참던 목사로서 보람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기왕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으세요.
노아는 인내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4)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하면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하면 아브라함은 내 쫓았습니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하면 아브라함은 번제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닙니다. 못합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기도해보겠습니다.”가 없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5) 사라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그 믿음의 특색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니 아브라함이 달려 나와 영접하고 부인 사라는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했습니다. 내 집에 아무리 귀한 손님이 오셨기로 송아지를 잡을 사람이 누구랴. 사라는 기적을 체험할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아들을 낳으리라.” 이 말을 들은 사라가 “내 나이 90이 넘고 경수도 끊어졌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겠습니까?”라고 하하하 웃으니 “사라야. 왜 웃느냐?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그런데 사라의 배가 불러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이삭입니다. 기적의 믿음을 갖고 있으면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서울 왕십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젊은 부인이, 어느 목사님이 인도하는 집회 시간마다 앞자리에 앉아 울며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고 싶은 부인 아닙니까? 1년 후 그 목사님이 제2한강교회에서 밤 집회를 마쳤는데 그 젊은 부인이 강사 방을 노크했습니다. “강사님! 땀에 젖은 러닝셔츠 구하러 왔습니다.” “왜요?” “저는 결혼한 지 7년 됐는데 남편이 독자인데 자식이 없습니다. 내 남편은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나와 한국과학연구소에 다니고 있습니다. 서울대병원, 세브란스, 성모병원에 가보았으나 둘 다 자녀를 낳을 수 없다고 최종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다 보니 능력있는 목사님 러닝이라도 빨아 내 남편에게 입히면 아들을 낳을 것 같아 왔으니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후 어느 교회 집회 중에 전화가 와서 그 교회 여전도회장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아갔더니 출산 직전이라 의사들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기왕이면 순산케 해주시고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 돌아오니 아들 낳았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100일 잔치에 초대받고 갔더니 “네가 기도해서 낳은 예수 새끼라 매”하면서 남편 동료 친척들이 기뻐 어찌할 줄을 몰라 했습니다. 오늘도 기적은 있습니다. 지금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오늘, 이 집회가 그런 집회, 그런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부른 후, 목숨 걸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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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