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군단장 축출사건과 나
박정희와 군부를 논할 때 가장 크게 부정적으로 인식된 사건이 ‘윤필용 사건’, ‘하나회 정치군인 사건’, ‘12․12 군사반란 사건’ 등을 떠올리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었으니 ‘제1군단장 축출사건’이다.
1976년 수도권 북방 방위책임을 맡고 있던 제1군단은 양봉직 중장이 군단장이었다. 당시 군단장의 친형이 양순직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는데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반대하고 나서자 박정희의 눈 밖에 났다. 이에 착안한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제 1군단장 양봉직 축출을 구상했다.
당시 8기생 군단장은 충청도 출신의 이재전과 강원도 출신의 이범준이었기 때문에 영남권 8기생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군단장을 거쳐야 군사령관 참모총장으로 이어지는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데 8기생 영남 출신이 자칫 전멸할 수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따라서 진종채와 이희성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양봉직 제1군단장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이희성이 가고 진종채는 사단급인 보안사령부를 군단급으로 격상하면 영남권 두 군단장급이 만들어진다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강직하고 그 낌새를 알고 있던 양봉직이 약점을 노출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진종채는 최후 방책으로 양봉직 군단장이 방위성금을 착복했다고 박정희에 허위보고해 단 하루 만에 제1군단장을 교체했다.
진종채는 보안사령부를 육․해․공군을 통합해 군단급으로 격상 시켜 중장이 되었고 이희성은 제1군단장에 취임함으로써 두 명의 8기생 영남권 군단장직을 확보했다.
1군단을 지원하는 공병여단의 여단장은 황오연 장군이었다. 당시 모든 부대는 지금처럼 예산이 없어 어렵게 운영되고 있어 공병여단장은 자금을 아껴 군단의 부대 운영 자금을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경우에 따라 그 자금을 군단장이 착복하기도 하여 군 수사기관은 늘 그 자금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황오연 공병여단장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양봉직 1군단장에게 부대 운영비 명목으로 3천 만원을 건네자 "내가 부대 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니 참모장 박익주 장군과 상의하라"며 여단장을 되돌려 보냈다. 이어서 그 3천 만원을 군단 참모장인 박익주 장군에게 전달했다.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양봉직 군단장을 축출하기 위해 이 자금으로 옭아매려는 게획을 세웠다.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양봉직 군단장이 방위성금 3천 만원을 착복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격분하여 그날부로 군단장을 해임하고 이희성 장군을 1군단장으로 임명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단 한 푼도 착복한 적이 없는 양봉직 군단장의 억울한 사정이 세상에 알려지자 진종채 보안사령관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당시 박익주 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본인(필자)을 불러 회유하기에 이르렀다.
"박경석 장군은 전도가 유망하니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확대하지 말고 3천 만원을 군단장이 착복한 것으로 알고 있으면 된다. 대신 잔금 3백여 만원은 박 장군이 임의로 사용해도 좋다"고 얼러댔다. 나는 순간 불타오르는 분노에 얼굴이 상기됐다. 나는 결연한 어조로 "제가 어찌 한 나라의 장군으로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저금통장도 필요 없습니다" 말하고 일어나서 경례하고 보안사령관실을 나왔다.
나는 나오면서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노랗게 보이는 하늘을 우러렀다. 이제 거대한 바위에 내가 계란이 되어 던졌으니 내 앞길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이어지는 앞길은 캄캄한 터널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