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사회사업가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나요?
「누가 서울대에서 A+를 받는가」(이혜정, 다산에듀, 2014)에 따르면
학생이 학업 결과로 얻는 학습 능력을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수용적 사고력’과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적 사고력’입니다.
“후배 사회사업가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나요?” 하고 질문한 선생님께서
어떤 사회사업 후배를 원하는지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수용·비판·창의, 어떤 역량을 갖춘 후배를 원하십니까?
책에서는 고학점을 받은 학생일수록 ‘수용적 사고력’이 높다고 합니다.
교수님 말을 거의 그대로 받아 적고 외운 뒤 써내었을 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습니다.
만족스런 보상이란 게 ‘사고(생각)하지 않을 때’ 따라온다면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할지 그려집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교수와 같은 지도자(선배)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사람으로 길러집니다.
수용적 사고력이 높은 사회사업가는 선배 사회사업가가 지시하는 일은 잘할 겁니다.
하지만 비판하는 힘이 거의 없으니 그 일을 개선·공유·확산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그 일의 책임도 선배 사회사업가에게 물을 확률이 큽니다.
시키는 대로 했으니 결과도 시키는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비판적 사고력이 높은 사회사업가는
선배 사회사업가가 지시하는 일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계속 묻습니다.
시키는 대로 그냥 진행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황스런 후배의 질문이 근본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답해야 하는 선배도 성장합니다.
당연히 ‘창의적 사고력’은 이런 비판적 사고 과정이 반복되며 만들어집니다.
수용적 사고력은 일의 결과에 마음 쓰고, 비판적 사고력은 일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비판적 사고의 결과가 실제 사회사업 현장에서 후한 점수를 받는다면
사회사업가들은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을 키울 겁니다.
하지만 현장 실무의 성과를 그저 ‘몇 건, 몇 명’인지만 묻기만 하는 구조에서 일한다면,
사회사업가들이 수용적으로 사고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수용성만 있으면 충분한 현장 문화 속에서
비판적이거나 창의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선배 사회사업가가 이상한 사람입니다.
비판성과 창의성을 갖춘 후배를 원한다면,
결과 외에도 이를 이룬 과정이 ‘사회사업이었는지’와 ‘바르고 정직했는지’도 함께 따져봐야
비판과 창의가 만들어집니다.
현장의 일이 이렇게 둘로 딱 나눠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일은 시키는 일만 하는 게 좋기도 하고, 어떤 일은 창의적으로 이뤄가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일에 관한 두 모습을 이해한다면
후배 사회사업가가 일을 대하는 태도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모두를 두루 갖춘 후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그런 이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때에 맞게 어떤 길로 안내할지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예비합니다.
아무리 좋은 최첨단 신형 차도 네비게이션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차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엉뚱한 곳에서 찾지 않기 바랍니다.
어릴 때 그토록 질문을 하던 아이들이 커서는 왜 질문을 하지 않는가?
궁금한 것이 안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궁금한 것이 안 생기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요즘 MZ세대와 일하기 힘들어.”
혹시, 선배 사회사업가의 말에 수용적으로 따라주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시키는 것만 하라고 하면 됩니다. 매뉴얼대로만 따라주기를 권하면 됩니다.
단, 다른 일도 하나하나 설계해주어야만 할 겁니다. 알아서 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혹시, 선배 사회사업가의 말에 답이 없는 답답함 때문입니까?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상을 분명히 안내하고, 이상에 빗대어 현재의 위치를 살펴주면 됩니다.
과정 하나하나 귀하게 이뤄가게 응원해주세요.
더욱 비판적이고 나아가 창의적인 사회사업가로 성장할 겁니다.
답해가는 선배 사회사업가도 (힘들지만) 함께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모두 두루 갖춘 이를 원한다고요?
욕심입니다. 나부터 돌아봅시다.
사회사업 이상이 분명하면서 성과를 잘 내고 행정도 잘하며 후배의 마음도 헤아리는 다정한 선배…. 어렵습니다.
서로 부족하고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편안합니다.
첫댓글 완벽한 후배를 바랐던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ㅠㅠㅎㅎ
이렇게 글을 읽고 보니 기준이랄 것이 없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못마땅해했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후배를 원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사회사업을 잘하려면 이상이 분명해야 하듯이
후배를 지도하는 일도 원하는 후배의 모습이 분명해야
방향이 서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나도 누군가의 후배이기에
선배가 나의 좋은 점을 먼저 봐주면 고맙고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마음으로 후배를 보자고 생각합니다.
후배를 지도할 때 붙잡고 가는 중심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때를 보아 그 중심도 후배와 상의하며 다듬어야겠지요.
해보니까요, 지지와 격려 방식으로 지도하는 편이 편안하더라고요.
서로 관계를 생각하여, 그럴 만한 관계라면 지적하여 바로잡는 지혜도 필요하고요.
현장에서 일할 때, 고진실 선생님 같은 선배가 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