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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84)
2026.07.08
<이승훈 장로 1864 -1930>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아버지 이석주(李碩柱)와 어머니 홍주 김씨(洪州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이다
-태어난 해 10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할머니 송씨의 보살핌을 받았다. 6세 때인 1869년 정주읍에서 40여리 떨어진 청정(淸亭)으로 이사하여 8세 때인 1871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0세가 되던 1873년 아버지와 할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유기점을 경영하는 김이현의 상점에 무급 사환으로 들어갔다. 1874년 더 큰 상점과 유기공장을 운영하는 임일권(林逸權) 상점의 점원으로 자리를 옮겨 독학으로 장부 정리와 상업 수완을 익혔다.
-15세가 되던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이경강(李敬康)과 결혼했다. 결혼한 이듬해인 1879년부터 유기 행상을 시작하여 정주읍과 청정, 고읍 등지에서 장날 놋그릇을 팔다가 점차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1887년 임일권이 후계자가 되어 줄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독립하여 철산의 거부 오희순(吳熙淳)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청정에 유기상점을 내고 유기공장을 세워 경영하였다. 사업이 번창하여 평양에 지점까지 내었으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평안도 일대가 전장이 되자, 오희순에게 빌린 돈을 갚고, 덕천으로 피난하였다.
-1895년 전쟁이 끝나 피난길에서 돌아왔으나, 공장과 상점이 폐허가 되어 다시 오희순에게서 2만냥을 빌려 공장과 상점을 재건하였다.
-운송업과 무역에도 손을 대어 인천항으로 수입되어 들어오는 석유 약품 등을 사서 황해도와 평안도에 팔아 큰 이득을 남겼다. 당시 엽전의 가치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부산이 두 배나 엽전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1902년 엽전 1만냥을 모아 부산에 보내려다가 엽전을 실은 배가 목포 부근 바다에서 일본영사관 소속 배와 부딪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영사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했으나 본전인 1만 냥만 돌려받았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소가죽 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여 우피 2만장을 사서 만주 영구(營口)에 가서 팔아 이득을 남기려 하였으나, 1905년 전쟁이 일찍 끝나 우피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헐값에 처분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이때부터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 용동에 칩거했다.
-1907년 3, 4월경 안창호를 만나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고, 고향의 서당을 폐지하고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여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7월 안창호의 권고에 따라 신민회에 입회하여 평안북도 지회 책임을 맡았다. 1907년 신민회의 조직 확대를 위해 활동하는 한편, 학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하기 위해 중등 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세워 1907년 12월 24일에 개교하였다. 교장은 그 지역 유지이자 유림대표인 백이행(白彛行)을 추대하고 자신은 교감을 맡아 학교의 실제적인 운영을 책임졌다.
-1908년 5월 안태국(安泰國)과 함께 평양에 태극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며 이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서우학회는 1908년 1월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가 되었는데, 이 학회에도 계속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5월 정주지회 설립을 청원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실업구국론의 실천의 일환으로 1908년부터 주식을 공모하여 1909년 4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을 맡았다.
-1909년 1월 31일 순종의 서북지방 순시 때에는 교육유공자로 선정되어 정주역에서 순종을 알현하였는데, 이 사실이 1909년 2월 9일자 『황성신문』에 “거이승훈씨역사(擧李昇薰氏歷史)하야 고아전국인사(告我全國人士)”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 해에 교회 설립 부지를 제공하여 오산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7월 11일 오산학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이 무렵 일제의 교육 탄압을 예상하여 로버츠(Stacy L. Roberts, 羅富悅) 선교사를 오산학교 교장으로 청빙하였다.
-1910년 가을부터 자금의 압박을 받고 있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의 주식 모금을 위해 서울로 평양으로 동분서주하던 중 1911년 2월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 헌병경찰에 검거되어 제주도에 1년간 거주제한처분을 받아 5월경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이기풍(李基豊) 목사가 개척한 성내교회(城內敎會)에 출석하며, 그 교회에서 운영하던 영흥학교(永興學校)의 교육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1911년 9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 연루자로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결국 윤치호(尹致昊), 양기탁, 안태국 등과 함께 123명이 기소되어 1912년 6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9월 28일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여기서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일제는 재판과정에서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사실이 드러나, 국제적인 비난과 여론의 압력을 받게 되자, 경성복심법원의 1913년 3월 20일 판결에서는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승훈을 비롯한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유동열에게 6년 징역형, 임치정(林蚩正)에게 5년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이것도 일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부당한 판결이었으므로 상고하였으나, 10월 9일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중에서 성경읽기와 기도로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으며, 신약성경을 10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1914년 징역 4년으로 감형되었고, 1915년 2월 15일 윤치호, 양기탁 등과 함께 일왕의 특별사면으로 가출옥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그 해에 평북노회장이던 정주읍교회 정기정(鄭基定)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평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1916년 3월 4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1월 31일 오산교회 장로로 장립(將立)받았다.
-45세에 신앙 생활을 시작하고, 53세에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매우 열성적이었던 것 같다. 더욱이 3·1운동 준비 과정에서의 인맥은 거의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었다.
-제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18년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평북 선천읍 북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던 여운형(呂運亨)이 참석하여 『상해재류교인상황』을 보고하였다. 여기서 여운형과 만나 국내외 정세를 논의하였다. 12월에는 오산학교 출신으로 도쿄(東京)에 유학 중이던 서춘(徐春)이 찾아와 도쿄 유학생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독립운동 방법을 상의하였다.
-1919년 1월 21일경에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105인 사건’의 동지 선우혁(鮮于爀)이 찾아와 국제 정세와 해외 동포의 동향을 말해주며, 상하이에서 대표를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하려고 하는데 자금을 모금할 수 있도록 알선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먼저 선천에서 양전백(梁甸伯) 목사를 만났고,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이승훈은 이 때 선우혁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이 때부터 동지들을 만나 선우혁의 이야기를 전하며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2월 10일경 선천읍 백시찬(白時瓚) 장로 집에서 다시 선우혁을 만나고 독립운동 계획을 의논하고 돌아왔다. 그 무렵 박현환(朴賢煥)이 찾아와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金道泰)의 부탁으로 왔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서울에 상경하여 계동 김사용(金思容) 집에서 송진우(宋鎭禹)를 만나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2월 10일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계의 독립운동 준비 소식과 기독교계와 연합하여 운동을 하고자 한다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동의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신학교 1년 선배지만, 그보다 8세 연하인 함태영(咸台永)을 만난 상황을 이야기한 후 그 날로 돌아왔다. 2월 11일 선천을 찾아가 이명룡(李明龍), 양전백, 백시찬,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등과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여 동의를 얻었다.
-2월 14일경 선천을 떠나 평양에 가서 기홀병원에 입원 중 손정도(孫貞道), 길선주, 신홍식(申洪植)을 만나 참여를 권유하여 손정도를 제외한 두 사람의 동의를 얻었다. 손정도는 독립운동에 동의는 하지만, 자신은 중국에 가는 길이므로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2월 17일 다시 상경하여 소격동 김승희(金昇熙) 집에서 수일간 머물면서 송진우, 최남선(崔南善, 19일), 박희도(朴熙道, 20일) 등과 만나 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특히 2월 20일에는 박희도가 찾아와 그의 집에서 기독교계 동지들이 모이니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참석하여 박희도·오화영(吳華英)·신홍식·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 등과 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그동안 기독교계에는 ‘독립선언서’냐, ‘독립청원서’냐로 약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둘 다 하기로 합의하고 2월 24일 함태영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2월 27일에는 이필주(李弼柱) 집에서 정오에 모인 기독교측 회합에 참석하여 최성모(崔聖模)·오화영·김창준(金昌俊)·박희도·박동완(朴東完)·신석구(申錫九)·이갑성(李甲成)·함태영 등과 의논하여 기독교계 서명자 16인을 확정하고 이 날 오후 2시 한강 인도교 부근에서 함태영·이필주·안세환·박희도·오화영·최성모 등이 모인 준비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2월 28일 저녁에는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모인 전체 모임에 참석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명월관지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곧 바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19년 4월 21일 예심판사의 “피고는 금후에도 어디까지든지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뿐으로 한 것이지 외국사람이나 외국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었다.”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감옥 중에 있던 1922년 2월 1일 부인 이경강(李敬康)이 별세했다. 감옥에서 성경읽기와 독서를 통해서 할 일은 준비하면서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이제 몸바쳐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922년 7월 21일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경성감옥에서 가출옥하였다. 일제의 비인도적인 감옥 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1922년 7월 25일에서 29일에 걸쳐 『동아일보』에 “감옥에 대한 나의 주문”을 연재했다. 그리고 오산학교의 운영을 다시 맡고 이곳저곳의 초청에 응하여 8월 10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연을 비롯하여 안주 중학기성회(25일), 선천유학생회(28일), 신의주유학생회(29일) 등에서 강연하였다.
-1923년 4월 초에는 출범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총회의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그 집행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 5월에는 곤경에 빠진 동아일보사 사장을 맡았으나 10월에 사임하고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제자들이 그의 약전인 『육일지남강(六一之南岡)』을 발행했으나, 일제 경찰이 압수하여 소각하였다.
-1925년 8월에는 오산학원(五山學園)을 재단법인으로 만들어 이사장에 취임하고, 학교 시설을 확충하고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인가 신청을 하여 1926년 1월에 인가받았다. 1926년 6월 15일 20세 연하인 평양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의 간호부 장선경(張善慶)과 재혼하였다.
-오산학교가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은 후에는 더욱 교육사업을 확장하여 여성교육을 위한 여학교와 농과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제석산과 연향산에 실습림, 안주의 매립지를 이용한 임해농장, 절골에 직조공장, 제사공장을 세운다는 계획도 마련하였다. 그리고 용동에 마을공동체 자치기구인 자면회를 조직하여 용동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가지고 공동생산을 하는 이상촌건설 계획도 추진하였다.
-제자들이 모금하여 1929년 12월 오산학교 교정에 동상을 세우고, 1930년 5월 3일 동상제막식을 거행했는데, 이 제막식에 참석한 지 6일만인 5월 9일 새벽 갑자기 찾아온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5월 16일 오산학교 교정에서 사회장으로 치르고, 유해는 인체 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교에서 사용하라는 유언에 따라 표본 제작을 위해 서울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총독부 당국이 표본 제작을 제지하여, 결국 표본으로 제작 중이던 유골은 11월 2일 열차로 고향에 다시 옮겨져 11월 4일 향리인 용동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1919.04.15>
1919년 4월 15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만세구 향남읍) 제암리교회에서 아리타 토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헌병 중위의 주도로 발생한 학살 사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사건으로 29명이 사망하고 민가 30여 채가 불에 탔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가운데 제암리 인근의 개신교와 천도교, 유학자 지도자들이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여 3월 30일에 제암리 인근 주민 천여 명이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대가 일본 제국 경찰 주재소로 다가오자 육군 헌병들이 출동해 경고사격 이후 칼을 마구 휘둘러서 유학자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몇 명이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석방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격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일본인들의 주택, 학교에 불을 질러 정미업자 사사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대피했다. 사사키는 이에 앙심을 품고 스스로 자원하여 일본군 헌병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제국 및 조선총독부 측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4월 2일 발안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 검거하기 위해 일본 육군 헌병과 일본 제국 경찰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파병해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 군경의 폭압에 제암리 인근 주민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인 백낙열(白樂烈, 1865년 ~ 1937년)과 김교철(金敎哲, 1880년 ~ 1954년) 그리고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4월 3일, 2차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가 사망하였다.
-1919년 4월 5일, 일본 육군은 수촌리에 들이닥쳐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마을 가옥 42호 중에서 38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촌리에서 교회당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 1970년, 한국명 석호필)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4월 5일 발안 장날이 되자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러자 일본 육군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가 지휘하던 부대를 4월 13일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아리타 중위는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는데 "만세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걸 사과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아리타는 사사키 등을 통하여 제암리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아리타가 교회당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는데 이로 인해 민가 28채가 소실되었다. 바람이 거세 교회당 아래의 민가로 불이 번졌고 교회당 위쪽으로는 일본군들이 불을 질렀다. 일본군이 교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못 나오게 하려고 문에 못질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에는 문을 잠근 것으로만 되어 있다.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은 벽을 부수고 탈출했다고 한다. 한 여인이 아기를 창밖으로 내보내며 살려달라고 하자 칼로 찔러 죽였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공식 기록에 의하면 교회당 안에 모인 사람들은 여성이 없는, 15세 이상의 남자들 22명이다. 교회 안에 들어갈 때 키를 재서 총의 길이보다 키가 큰 사람들만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19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가족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는 부인 2명이 죽기도 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뒤쪽 언덕에는 이때의 순국선열 23인의 합동묘지가 있다.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고주리로 가서 화성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의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묻힐 뻔한 이 사건은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스코필드가 "제암리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코필드는 유골을 수습하는 한편, 제암리 학살의 증거들을 사진으로 찍고 《꺼지지 않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보고서를 저술해 전 세계에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폭로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져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제암리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에게 30일의 중근신 처분만 내리고 사태를 덮으려고 했다. 그러나 제암리 학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일본에 대한 세계의 여론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일본은 "아리타 중위가 미숙하고 주민들이 저항하여 우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후일 친일논객 김완섭은 '당시 조선 땅에 일본군이 없었는데 어떤 일본군이 학살을 하나'라는 주장을 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둔 일본 육군이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 중 헌병 병력 일부는 일반 치안 임무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완섭은 '이들은 치안 업무에 종사했으니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라고 우겼지만 이들은 경찰 업무뿐만 아니라 헌병 업무까지 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며 엄연히 이들의 법적 신분은 군인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우쓰노미야 다로 장군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일본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관여한 군인들은 30일간 근신처분을 받았고 나중에 군법회의 결과 살인, 방화에 대해 무죄 처분을 받았다.
-해방되기 전까지 제암리 사건은 언급조차 못 되다가 1959년 4월이 되어서야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된 순국 기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이 학살 사건은 거의 잊혀져 있었으나 1965년에 일본 개신교계 인사들에 의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해외선교회 소속으로 한국을 방문한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 목사가 유일한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오야마 목사는 귀국 후 '제암교회 사건 속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 개신교인들의 속죄헌금을 모금하여 교회당 재건 및 추모시설 건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왔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부 유족들은 '일본인의 돈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는 등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 교인들이 간곡히 거듭 속죄를 청해 왔고 예수의 속죄 사역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만큼 그 정신에 따라 속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강해지면서 제암교회 측도 1968년 2월에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일본에서 모금된 1,000만 엔(당시 환율로 한화 약 800만 원)을 토대로 사건 발생 50주기인 1969년 4월 15일에 교회와 유족회관의 기공식을 가졌으며 1970년 9월 22일에 사죄의 교회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 교회는 하늘에서 보면 3자로 보이고 높이 12m의 종탑이 1자로 서 있어 3·1 정신을 상징하도록 설계되었다. 적어도 일본 개신교계에서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온 셈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던 유족들도 있었고, 1990년대 중반 중앙청(舊 조선총독부 청사)을 철거하는 등 일제잔재 청산 및 복원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제암교회도 재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97년에 문화재관리국 주도로 제암교회 복원 및 새로운 3·1 운동 순국유적기념관 건축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개신교계의 '사죄의 교회당'은 헐리게 되었으며 1만7천여㎡의 제암리 성역단지 내에 1,300여㎡ 규모의 새로운 순국기념관, 23인 순교묘지, 상징조형물 등이 조성되어 2001년 3월 1일에 완공되었다.
-이 사건을 폭로한 스코필드 교수는 후에도 한국인을 돕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지만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외국인으로써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현재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제암교회에서는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가끔 시간만 잘 맞추면 당시 생존자의 후손들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도쿄대학 영문과 교수와 도쿄여자대학 학장으로 재직한 영문학자 사이토 타케시(斎藤勇, 1887년 2월 3일 ~ 1982년 7월 4일)는 자국 군인이 저지른 잔인함에 대한 비판과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를 담은 〈어떤 살육사건(或る殺戮事件)〉이라는 작품을 1919년 5월 22일 《복음신보(福音新報)》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백야 김좌진 장군 (1889 – 1930) 과 청산리 전투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1905년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1913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7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에 가입한 이후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청산리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루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던 장군은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했다. 암살 직후 만주땅에 묻혔다가 아내 오숙근 여사가 1940년에 유해를 비밀리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57년 부인이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현 위치에 합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말 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1989년에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한일간의 전투.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중화민국 지린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 육군 병력과 교전한 일련의 전투다. 대중에겐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워 이긴 대표적인 전과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전투의 전개와 결과에 대해 인용되는 매체마다 정보가 달라 이런저런 의문점이 많은 전투이기도 하다. 전과나 병력의 규모부터 신문이나 증언, 사료에 따라 중구난방인 데다 일각에서는 전사했다는 지휘관 등 군인이 다른 출처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등, 진위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기록이 많다.
-일본에 맞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은 무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기 도움을 준 이들은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의 독립군인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었다.
-원래 이들은 러시아군 소속으로 유럽 러시아 일대에서 독일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1918년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 서부로 물밀 듯이 들어오자 이들은 시베리아로 밀려났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백군 편으로 가담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했다. 하지만 마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조국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자 귀국을 준비 중이었다.
-1920년 2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한 이들 군단은 소련 적군과의 휴전 협정이 성립된 후 쓸모가 없어진 무기를 처분하고자 했고 마침 독립군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의 일부 병사들이 자신들이 보관하던 무기를 북로 군에 판매하였다.
-다만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체코 군단 자체가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들은 일본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일부 군단원들의 일탈 행위였다. 실제로 일본은 군단원들의 무기 판매 행위를 알고 군단 사령부에 이를 근절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군단 사령부는 이 점을 매우 우려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서 매입한 무기인 권총, 기관총, 탄약 200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했다. 이때 획득한 무기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체코제 무기가 아니라 모신나강 소총, 게베어 1871 등의 타국 소총들이었다.
-이렇게 독립군이 무장을 구입하는 동안 일본군은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에 따라서 19사단 병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28여단, 그리고 관동군 부대를 동원하고 산포, 비행기 등의 무장을 보강하며 훈춘-경원에 전산선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후 일본군은 19사단 예하 병력을(73연대, 74연대, 27기병연대) 히가시 마사히코 소장 하에 병력을 동원하여 청산리의 독립군을 포위 섬멸하려고 하였다.
-양측이 서로 전력을 강화해 나가던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써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던 제14, 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토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북로 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탓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처지에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 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 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했다. 대한 독립군도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한 후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했던 홍범도 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주전론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 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한 후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했던 홍범도 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주전론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봄부터 독립군이 북간도 지역에서 연합과 통합을 반복하고 국내 진입 작전까지 시도하면서 일제 입장에서 북간도 독립군이 굉장히 '불편한' 존재로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고 이에 따라 간접적인 압박 뿐 아니라 직접적인 공격에까지 나서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북간도의 독립군 입장에서 보면 느긋하게 준비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준비하더라도 일정 이상 세를 불리면 일제가 간섭할 것은 뻔한 이치이므로 빠르게 전력을 모아 공격에 나서는 것도 꼭 틀린 선택지라고 할 것은 아니다. 이는 독립운동가끼리 노선의 차이를 보인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 한쪽이 특별히 잘못했다고 해석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간도 참변이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패배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은 배경 항목에도 나와 있듯 일찍이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을 세우고 19사단과 28여단, 기타 관동군 부대를 동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은 독립군을 토벌하려다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화풀이로 간도 참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하고 간도의 조선인 세력을 초토화시키려고 계획까지 세워놓고도 청산리에서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이 된다. 그동안 선후 관계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학살이 화풀이성이라고 알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이 청산리 전투보다 먼저 세워진 이상, '청산리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작전 목적 달성 실패가 간도 참변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 된다. 위에서 서술하였듯 이미 일본은 청산리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간도 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결심하고 대규모 부대를 간도로 투입하였기 때문이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해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뒤이어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독립군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오인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아예 전투 자체를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의 제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 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독립군을 공격한 일본군은 우회 공격에 실패하여 어랑촌으로 이동한 가노 노부테루 대좌가 지휘하는 27기병연대 병력이었다. 당시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에 일본군은 야포까지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고 전투는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탄약부족과 일본군 증원 부대를 우려한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다.
-다음 날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대체로 독립군은 흩어져서 이동했다. 24일 저녁 8시 천보산의 광산을 지키던 일본군 중대와 전투를 벌였고 25일 새벽 식량을 수집하러 갔던 독립군이 재차 전투를 벌였다.
-한편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여 급습했다. 추위로 인해서 불을 피운 것 때문에 발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난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으며 이후 새벽 무렵 방어 태세에 들어간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이동휘의 제안에 따라 소련으로 올라갔다가 자유시 참변 문제가 불거지기까지 하는 등 악재 속에서 투쟁 역량을 상실해 갔다.
-또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한 것과는 별개로 전략적으로는 일본군이 간도참변을 자행하는 동안 동포 사회를 보호할 방법을 내놓지 못한 임시정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安川)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뒤이어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김좌진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 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리고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해서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오후 늦게부터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한 부대 400여명이 전멸당하였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군복의 색깔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자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한편, 22일 새벽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 · 2지대는 그 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 곳으로 이동해 일본군 기병중대를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東正彦)부대의 일부였다.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이 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랑촌 일대의 치열한 접전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날이 저물자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추격하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해 신속히 대피하였다가 전열을 정비,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하였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매헌 윤봉길 의사 1908 – 1932>
1932년 4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켰다. 본관은 파평 윤씨 판도공 제학공 공간공파 32세손, 호는 매헌(梅軒)이다.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現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마을)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11살 때이던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現 예산덕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조선인으로서 우리말도 마음대로 못 쓰고 외국 말인 일본어를 쓰고 배워야 한다는 것과 꼴도 보기 싫은 일본인 교사 휘하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상당히 많았다.
-결정적으로 이듬해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주도하며 시위대를 이끌던 인한수 열사가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여 순국한 것을 보고 더 일본을 증오하게 되어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부모에게 폭탄선언을 하고는 자퇴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학업을 멈춘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그 대신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한학을 배우러 서당을 다녔고, 그는 서당 공부는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대표적인 일화로 동네에서 글자를 몰라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농부를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월진회를 조직해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 및 계몽 운동에 힘썼다. '월진회'는 설립 초기에는 계몽 운동 조합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농촌 체험 마을 사업, 마을 도서관 건립 운동, 윤봉길 문화 축제 등을 추진하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1944년~1946년까지 '우진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했지만 1946년 다시 월진회로 환원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초대 회장이던 윤봉길을 기리는 의미에서 '매헌 윤봉길 월진회'로 사용한다. 윤봉길은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하여 만주 등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 이후 윤봉길은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 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 이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 고 부탁했다. 그리고 윤봉길은 조국을 떠나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고 말하였다.
-일본 제국은 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며 상하이시 훙커우(홍구) 공원에서 쇼와 덴노 탄생 기념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를 가졌다. 거사 얼마 전에 있었던 이봉창의 천황 암살 시도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외에는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사용했는데, 이때 흔히 윤봉길이 투척했다고 잘못 알려진 투척했던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다.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들고 갔지만 불발로 알려져 있다.
-폭탄은 기미가요의 마지막 소절이 울려퍼질 무렵 정확히 단상 위로 투척되어 폭발했다. 이 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는 그 자리에서 직격으로 폭탄을 맞아 복부와 다리에 중상을 입어 창자가 끊어진 상태로 다음 날 3시 10분에 사망하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은 후 패혈증으로 인해 상태가 악화되어서 5월 26일에 죽었다.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다리를 잃었고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는 중상을 입었으며 육군 제9사단장 육군 중장 우에다 겐키치 장군은 왼다리를 잃고 해군 제3함대 사령장관 해군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은 우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 주변에서 그들을 호위하던 일본군 병사들 수십 명도 폭탄의 파편으로 인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때 부상을 입은 생존자 중 노무라 제독과 시게미쓰 공사는 각각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노무라 제독은 예편 후 외교관이 되었다. 본래 초급 장교 시절부터 해외로 나가는 국방무관으로 자주 활동해 외교 분야의 경험이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외교관으로 전향했다. 1939년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미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며 진주만 공습 직후 선전포고 문서인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 문서를 들고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간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의거 당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공사는 아이오와급 전함 3번함 미주리함(BB-63)에서 가진 항복 문서 조인식에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나타나 일본의 전권 대사 자격으로 문서에 사인한 그 인물이다.
-이 거사에 숨은 조력자가 있으니 바로 미국인 선교사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인데 자신의 자동차 요인석에 윤 의사를 태우고 직접 훙커우 공원으로 운전했다. 피치 선교사는 이후 독일인 존 라베와 함께 난징 대학살에서 중국인들을 구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폭탄 투척을 실행하기 전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와의 마지막 조찬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 산 회중시계를 김구에게 주고 김구의 낡은 회중시계로 바꿔 품에 넣고 갔다고 한다.
-식장에 가는 길에 김구에게 남은 돈을 다 주었는데 김구는 계속 사양하다가 끝내 받았다고 한다. 직후 김구가 "돈 좀 가져가면 어때서 그렇소?"라고 묻자 윤봉길 의사는 "자동찻값 다 치러도 5~6원은 남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
-8.15 광복을 맞이한 후 김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생가를 찾아 윤봉길의 어머니 김원상 여사에게 인사하고 윤봉길과 교환했던 시계를 보여주면서 "아드님께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원상 여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구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한테 못 할 짓을 했다고 생각해 깊게 탄식하고 시계를 도로 품에 넣었고 시계를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나중에 백범김구기념관에 김구가 소지했던 윤봉길의 시계만 전시되었는데, 이후 윤봉길의 후손이 윤봉길이 김구에게 교환받은 시계를 가져왔고 현재 이 두 시계는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윤봉길은 이렇게 일본 군민과 관료들을 싹 날려 버린 후 현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일본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헌병들이 엄청난 구타를 가했는데 연행 후 고문받고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육군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1월 18일 일본기선 소속 1만4천 톤급 여객선 다이요마루(大洋丸)에 호송되어 오사카에 도착해 오사카 육군 위수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2월 18일에 가나자와 육군 구금소로 이감됐다.
-1994년에 일본의 시민 운동가인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일본은 윤봉길을 체포한 직후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즉결 처형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자신을 희생한 순국자의 모습이 돋보이게 되어 그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이미지만 강해질까 염려해서 이감 이튿날인 19일에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육군 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이 때 윤봉길의 나이는 불과 24세. 그야말로 짧고 굵은 생이었다.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윤봉길은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후 숨을 거두었다. 사진을 보면 일부러 윤 의사에게 흰 천을 둘러 미간을 쏘고 붉은 피가 나오게 만든 것은 일장기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가나자와에서 이른 아침 사형이 집행된 것은 폭탄 투척 당시 중상을 입고 숨진 시라카와 장군의 세력 근거지에서 그가 병상에서 사망한 시각에 형을 집행한 것이란 설이 있다. 윤봉길의 시신을 계단 바로 밑에 묻었는데, 사람들이 윤봉길을 밟으며 지나가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일제는 치졸하게도 순국마저 욕되게 하였다.
-이후 가나자와시의 노다야마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재일 독립운동가 박열과 이강훈 등이 백범의 지시로 유해를 찾기 위해 시도했다. 처음엔 공병 작업장에 묻혔으리라 믿어 찾아내려고 수소문했지만, 관계자들은 "그때 일은 너무 오래됐으며 당시 복무한 군인들이 한 거라 모르겠다."라고 했거니와 묘표가 없다 보니 찾는 데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위수 형무소 간수(교도관)였던 시게하라의 협조로 다시 유해를 찾아냈는데 카나자와 공동묘지 관리 사무소 근처 쓰레기 하치장이었다.
-결국 수습단으로 간 사람들은 유해의 위치를 알고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유해가 매장된 곳은 공동묘지 관리 사무소로 들어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며 즉, 14년이란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밟고 갔으며, 수습단 자신들조차 처음 관리 사무소를 찾아갈 때 그곳을 밟았기 때문이다.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손뼈가 소나무 뿌리에 얽혀서 손뼈 7개만은 수습하지 못해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암장지에 남아 있다.
해당 지역 인근에는 윤봉길 기념비와 총살당한 지역의 비석이 설치되었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부산에서 봉환식을 거행했고 이어 서울에 도착한 후 태고사에 임시 봉안했다가 장례식을 치르고 용산 효창공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장(現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봉길의 폭탄 투척은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었고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었다. 윤봉길을 통해 한국이 독립했다고까지 말하긴 어렵지만, 윤봉길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장제스의 지지가 독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당하게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 극찬했다는 건 와전이지만, 윤봉길의 의거 이후 장제스가 대한민국 독립에 적극적인 후원을ㄷ 하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