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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낙동·백두를 가다] (42)김천의 백두대간 2개의 삼도봉이 병풍처럼 둘러싼 '팔도 소통처' | ||||||||||||||||||||||
총연장 62㎞. 6개면 22개 마을(리)이 수천년 동안 백두대간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김천의 백두대간은 봉화, 영주, 예천, 문경, 상주를 거치면서 고산준령의 기세를 이어오다 잠시 숨을 고른다. 용문산 맷돌봉(710m)을 시작으로 금산(370m) → 추풍령(220m) → 눌의산(743m) → 장군봉(624m) → 괘방령(300m)까지가 그러하다. 하지만 이내 황악산(1,111m) → 우두령(720m) → 석교산(1,207m) → 삼도봉(1,176m) → 대덕산(1,290m) → 대덕 삼도봉(1,249m·초전산) 등이 경상·충청·전라도 땅으로 다시 대간의 힘찬 기세를 이어준다. 지난 주말 부항면 해인리 삼도봉 정상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삼도봉 만남의 날’이다. 이날 경북 김천, 충북 영동, 전북 무주 등 삼도의 시·군민 500명이 21번째 만남을 가졌다. 삼도민들은 이날 삼도화합기원제를 열어 지역 간 불신의 벽을 허물고,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가기를 빌었다. 삼도의 첫 만남은 20년 전인 1989년이다. 삼도의 문화원들이 주관이 돼 매년 만남의 날을 갖고 있으며 그 동안 기념탑을 세우고, 제단도 만들었다. 삼도봉은 이름 그대로 3개의 도가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다. 북한을 제외하고 삼도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3개이며 모두 백두대간에 있다. 3개의 삼도봉 중 2개를 김천이 갖고 있다. 지리산의 서부능선에 위치한 삼도봉(1,550m)은 경남 하동과 전남 구례, 전북 남원의 경계지점에 우뚝 솟아 있다. 김천의 만남의 날 행사가 열리는 삼도봉은 소백산과 속리산을 거쳐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향해 서서히 고도를 높이다가 3개도의 경계지점에 이르러 우뚝 솟구쳐 오른 봉우리다. 또 하나의 김천 삼도봉은 경북 김천과 전북 무주, 경남 거창을 구분짓는 봉우리다. 삼도화합기념탑이 위치한 삼도봉의 남쪽에 이웃한 대덕산을 지나면 곧바로 만난다. 이처럼 김천의 백두대간은 한반도를 가장 대표적인 삼도가 만나는 화합의 큰 줄기인 것이다. 김천의 백두대간이 2개의 삼도봉을 가졌기에 영남과 전라도, 영남과 충청·한양 땅의 소통처이기도 했다. 고갯길이 백두대간의 빗장을 열어 인연을 잇고, 산 너머 마을의 문물을 서로 만나게 하지 않는가. 우리는 고갯길의 대명사 추풍령으로 향했다. 솔직히 지금의 추풍령엔 옛길이 없다.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조선의 고개’를 차지해 버렸다. 키도 작다. 불과 220m다. 노래의 가사처럼 구름도 자고 갈 정도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은 아니었다. 언제 고개를 넘었는 지도 모를 만큼이었다. 여하튼 추풍령은 나지막한 고갯길이지만 경북(김천 봉산면)과 충북(영동 추풍령면)을 잇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고개다. 또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계 역할을 한다. 김천 쪽 물은 직지천이 되어 김천의 젖줄인 감천으로 흐른뒤 낙동강에 합류하고, 영동 쪽으로 흐른 물은 추풍령천이 되어 초강천으로 흐른 뒤 금강에 물을 보탠다. 추풍령은 낙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 등 4대강 중 2개의 강에 백두대간의 큰 물을 내주고 있는 것이다. 추풍령은 조선에선 영남과 한양을 잇는 가장 중요한 관로(官路)였다. 조선의 같은 영남 3대 관문인 영남대로의 문경새재보다는 규모나 명성에선 뒤졌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문경새재의 명성과 규모를 뛰어넘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지나면서 추풍령은 문경새재는 물론 소백산의 죽령과 이화령을 넘던 사람과 경제까지 물려받은 명실상부 최대의 소통처였던 것이다. 이제 추풍령은 옛 길손들의 발품을 차량과 열차가 쉴 새 없이 대신하고 있다. 추풍령은 여전히 백두대간의 가장 중요한 소통처다. 현재 추풍령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은 봉산면 신암리에서 추풍령 정상까지 이어진 옛 왕복 2차로 국도다. 인근에 워낙 새 도로가 잘 나 있어 통행량이 민망할 정도다. 이따금 지역 주민들의 차량이 지날 뿐이다. 옛 국도 주위에는 추풍령 정상까지의 마을 길도 있다. 하루쯤은 옛 길손이 되어 추풍령 정상까지 오르며 대한민국 ‘길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것이 어떨까. 일행은 추풍령을 뒤로 하고 김천의 또 다른 고갯길 괘방령(掛榜嶺)에 올랐다. 역시 키가 작다(300m). 괘방령은 김천 대항면과 영동 매곡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괘방령 정상 역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다. 이웃한 추풍령이 관로라면 괘방령은 간섭받기 싫어하는 보부상, 괴나리봇짐장수들이 이용한 상로(商路)였다. 또 조선시대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때문에 마음 약한 유생들은 지름길인 추풍령 대신 괘방령을 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괘방령의 ‘방’(榜)자가 과거의 합격자를 발표할 때 붙이는 방과 같은 글자라는 사실이 조선의 유생들을 괘방령으로 유혹(?)하지 않았을까? 실제 괘방령 아래 마전마을은 전의 이씨(全義 李氏) 집성촌이다. 조선 정조 때 경남 의령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전의 이씨 이춘영·은영 형제가 괘방령 길목에 이르러 직지천의 아름다운 풍광과 마을 인심에 반해 터를 잡고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미뤄 괘방령에 과거 유생들의 드나들었음이 적잖은 것으로 보인다. 괘방령 일대는 옛날 전쟁터이기도 했다. 마전마을의 유래도 전쟁과 관계 있다. 임진왜란 당시 괘방령 마을 인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목숨을 잃은 조선군과 왜군의 말들을 들판 한가운데 묻어주고 돌을 쌓아 말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 이름도 ‘말무덤이 있는 들’이란 뜻으로 ‘마전(馬田)’이라 했다 한다. 괘방령 고갯길은 대항면 삼거리에서 시작해 정상까지 5㎞ 정도 된다. 옛길은 사라졌고, 밭두렁과 정상 부근에서 옛길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정상을 오르기 직전에 있었다던 주막과 성황당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듯 사라졌다. 괘방령은 과거 길의 대명사 문경새재에 이어 조선 유생의 혼이 담긴 또 다른 과거 길이 아니겠는가. 김천 구성면과 영동 상촌면을 잇는 고개인 우두령은 추풍령과 괘방령보다는 키가 훨씬 크다. 해발 720m에 이른다. 백두대간 산줄기의 삼도봉과 황악산 사이에 있다. 우두령 주변은 황악산, 삼도봉, 석기봉, 민주지산, 각호산 등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둘러싸 심산유곡을 이룬다. 그래서 우두령 기슭은 깊은 산골의 오지였다. 그래서 우두령은 궁벽한 통로인 것이다. 대동여지도도 우두령 주변의 지리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우두령이 얼마나 오지였길래 영동 상촌의 흥덕리라는 마을 이름이 ‘설보름 마을’이다. 설에 들어오면 보름에 나갈 정도로 오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두령의 깊음은 전쟁 때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할 때 임시 관아가 있었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중요 은신처였다. 우두령은 옛길의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 오지 덕을 본 셈이다. 우두령을 나와 부항령 가는 길은 사방에 가을 정취가 묻어났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울긋불긋 가을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 아름다움은 일행의 눈을 아프게 할 만큼이었다. 아쉽게도 인근에 댐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어 댐에 물이 차면 내년에는 산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섰다. 부항령은 경북과 전북을 연결하는 옛길이오, 작게는 김천 부항면과 전북 무주 무풍면을 오가는 지름길이다. 일제강점기 때 부항령 남쪽의 덕산재에 도로가 나기 전만해도 김천과 무풍의 주민들 대부분은 부항령을 오고갔다. 부항령은 역사의 길이오, 십승지지(十勝之地)로 통하는 이상향의 길이었다. 삼국시대 부항령 서쪽의 무풍 땅은 신라의 영토였다. 김천의 백두대간을 넘어 무풍까지 영역을 확장했던 신라에겐 부항령이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부항령과 부항령 너머 무주 땅의 나제통문 일대는 삼국시대 ‘피의 역사’가 있었다. 무풍 땅의 이남마을에는 커다란 분묘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신라 병사들의 무덤이라 전해진다. 후삼국시대에도 부항령 일대는 전쟁터였다. 후백제의 견훤군이 부항령 일대를 공격할 때 신라와 왕건의 연합군은 대격전을 벌였고, 그 바람에 부항령은 후삼국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뤘다 한다. 무풍을 중심으로 한 부항령 일대는 ‘정감록’의 십승지지로 손꼽혔다. 재난을 피하기 좋으면서 먹고 살기 좋은 곳이 십승지지가 아니겠는가. 무풍 땅이 그러하다. 일제강점기에 나제통문이 뚫리지 않았다면 분명 무풍을 중심으로 한 부항령 일대는 십승지지의 복을 온전히 누리지 않았을까. 무풍은 행정구역 상 전북 무주군에 속하지만 부항령을 사이에 두고 수천년 경상도 땅 김천과 교우했다. 그래서 ‘전라도 속 경상도’이다. 통혼이나 상거래의 경우 나제통문을 통한 무주보다는 부항령과 덕산재를 통해 김천 등 경상도와 주로 이뤄졌다. 말씨도 경상도 말씨에 더 가깝다. 역사의 길이자 이상향의 길인 부항령은 고개를 사이로 인연을 잇고, 문화의 벽도 허문 옛길인 것이다. 김천은 지금 길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바로 ‘모티길’이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관광형 체험 길을 만드는 것이다. 길은 지금 또 하나의 ‘문화콘덴츠’다. 이 참에 모티길에다 추풍령과 괘방령 등 사라진 옛 길을 복원하는 것도 김천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