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788-1021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 Le XIXe après, Le XXe siècle 788-1021
* 1부 첫째 시대1850-1890
제1장 시대의 일반 특징 Traits généraux de la période. 789
이 세기의 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다소 진솔한 희망이라 할지라도 모든 희망의 종말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 희망들을 철학적이자 사회적인 거대한 구조물들 속에 놓았었다. [첫째 시대인 1850년부터 1890년경까지 계속하고 나서] 둘째 시대는 첫째시대가 지속한 1890년경에 열려질 것이다. (789)
앞선 시대의 사유의 일반 주제는 자연과 역사에 대한 일종의 정당화였다. 상위 실재성의 도래의 조건으로서 간주하는 자연과 역사의 정당화를, 사람들은 정신(Esprit), 생명(Geist, 정신), 자유(Liberté), 인류성(Humanité), 조화(Harmonie) 또는 아주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즉 엄격한 비결정론이라, 또는 사람들이 원한다면, 억제할 수 없는 발전의 법칙이라 불렀다. 이 이름들은 꽁트같은 이, 헤겔 같은 이, 쇼펜하우어 같은 이가 사물들 속에서 인정했던 것으로 그들의 눈으로 보아, 이것들이 목적인 자유에 의해 보상되었다. 필연에 연결된 파괴할 수 없는 자유, 그것은 헤겔(Hegel, 1770-1831)에게 있어서는 필연의 의식이이며, 그리고 꽁트(Comte, 1798-1857)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 필연의 의식이며,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에 따르면, 필연에 대한 부정이며 필연으로부터 해방(délivrance 해탈)이다. 진부한 낭만주의 영웅은 정열적인 사람이다. 그 영웅은 자신의 숙명적인 열정으로써 지옥과 천당을, 즉 천벌(damnation)과 구원(rédemption)을 발견한다. 그 당시의 철학적 사유가 똑같은 열기를 다시 느끼게 했고, 그 열기의 궁극적 표현은 매우 특이하게 문학적으로 쓴 편지 속에서, 즉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가 [그의 연인인]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 1828-1902)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견된다. “마술적이고 신성한 당신의 눈이 나에게 고정될 때, 내가 당신의 눈 안에 흡수될 때, 그 순간에 주체도 대상도 없고, 그 순간에 모든 것은 혼재되어 무한하고 깊은 조화, 그 이상의 것을 형성하지 않는다.” (790)
이 조화 속에서 이제 사람들은 금이 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심층의 통일성에 대한 직관을 상실한 것 같았다. 보다 절제 되어있는 사유는 여러 대안들을 제시되는데, 그것들의 항들은 더 이상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성은 이 항들 중에서 선택하도록 강요되었다. 예를 들어, 헤겔파들의 살아있는 날개, 즉 헤겔좌파, 다시 말하면 포이에르바하(Feuerbach, 1804-1872)와 맑스(Marx, 1818-1883)의 헤겔 좌파는 무엇보다도 스승으로부터 사회적 과정의 필연성의 개념을 유지하면서, 유물론에 이르게 되었다. 뗀(Hippolyte Taine, 1828-1893)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가 헤겔을 읽었을 때, 결정론의 관념을 [논문으로?] 보고 했었다.거기서 정신(l'esprit)의 모든 현상은 민족혼(Volksgeist)에 귀착하였고, 이 민족혼 자체는 물리적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것이다. 이렇게 텐이 읽었을 헤겔은 그 시대에 사람들이 읽은 것과 달리 읽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도 조화로운 욕망의 종말을 고하고서, 이 시대에는 자유의 철학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이것은 두 가지의 아주 다른 형식으로, 즉 프랑스 철학자 흐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의 형식과 스위스 철학자 세크레땅(Charles Secrétan 1815-1895)의 형식으로 태어났다. 특히 전자의 경우에서 자유는 자유재량(임의자유)처럼, 필연성을 소모하는 것도 아니고 그자체로 받아들여지는 필연성이다. 그 자유는 순수 부정에 의해 총괄적으로 정의된 결정론과의 단절이다. 인류의 역사적 작품은 개인들의 예견할 수 없는 모든 창안[창발]들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개인들의 창안들이란 이법이 개인들의 자유재량에 부여한 법칙일 뿐이다. (790)
일반적인 방식으로, 앞선 학설들에서 이 학설들이 지닌 종말론적 성격과 천리안적(visionnaire, 예견적) 성격 모두를 제거해보라. 당신들은 회의적이고 용기를 잃게 하는 측면만을 갖는 새로운 학설을 얻게 된다. 또는 반대로 [신적인 것이 아닌] 많은 인간적인 힘들을 기대하고, 자연적 필연성을 거의 벗어나는 새로운 학설을 얻게 된다. 바로 맑스(Marx)의 유물론이다. 그것은 종교적 의미를 뺀 국가에 대한 헤겔(Hegel)의 학설이다. 이것은 또한 마치 리트레(Littré, 1801-1881)의 실증주의와 같은 것이다. 또한 그것은[맑스의 유물론] 미래 교회의 환타지를 내려놓는[철회하는] 꽁뜨(Comte)의 학설이며, 시대물(le temporel)과 정신물(le spirituel)의 결정적 연관의 조직화를 철회하는 것이다. 헤겔은 훨씬 더 강하게 그리고 거의 폭력에 가깝게 역사와 문헌학 사이를 구별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정신의 도래(l' avènement de l'esprit: 크리스트교 성령의 강림)를 서술한다. 반면에 문헌학은 문서자료들의 비판적 연구에 만족하면서, 텍스트들에 대한 직접적 강독이 자료들에게 주는 시대적 국면을 역사에서 걷어내는 것이다.이런 구별은 우리가 차지하는 이 시대에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 프랑스 문헌학자인 에르네스트 흐낭(Renan 1823-1892), 독일 문헌학자인 막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 독일 철학사가인 에두아르트 젤러(Eduard Zeller, 1814-1908), 스위스 예술사가인 야콥 부르크하르트(Burckhardt, 1818-1897) 등 여러 다른 학자들도 스스로를 문헌학자이면서, 동시에 역사가로서 자부한다. 이런 비평의 일반적 결과란 바로 과거의 측면에서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것이다. 이 결과는 일반적으로 훨씬 덜 불가사의한 것으로, 또 훨씬 더 현재에 닮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적 구조에 의해서 특별하게 구별된 시기로서 보쉬에(Bossuet 1627-1704) 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 354-430)에게서 역사란 단어가 취하는 강한 의미는 르낭에서 와서야 다시 꽃피우게 되었다. 르낭에게서, 예를 들어 독일 문헌학자 호데(Rohde, 1845-1898)에서처럼, 사람들은 먼 과거의 시대에서도 많은 점에서 우리들 시대에도 유사한 역량들(des facultés 능력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며, 이런 전망들에서 보면 각 시대는 우리와 동시에 이루어져 있다. 헤겔이 그러한 것을 꺼려했던 것처럼, 비평[평론]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강한 구별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가 우리를 이끌어 가는 종착점인 최종의 미래에 대한 예감을 상실하게 했다. 모든 것은 동등하게 되어 있다는 것, 즉 루크레티우스(Lucrece, Lucretius 98-55)가 말한 항상 모든 것이 동일한(semper eadem omnia)이라는 것은 사실상 비관주의보다 더 차갑고 반어적(아이러니칼한) 음정[음색]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또한 예를 들어 언어학적 탐구에서는 방법의 필수불가결한 규칙으로 되돌아온다. 우연(le hasard, 운수)과 사고들(les accidents)에 관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꾸르노(Cournot, 1801-1877)는 역사적 인식이론을 구축했다. 이 인식이론은 모든 사건들의 생산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엄청나게 많은 원인들을 수렴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역사에서 하나의 의미[만]를 발견할 가능성을 제거했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결정론과 꾸르노의 비결정론 사이에서 틀림없이 분명한 대립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서 하나의 일치를, 즉 역사의 최종단계에 관한 모든 비의적인(ésotérique) 학설을 부정하는 데는 일치를 한다. (791)
여기에서부터 아주 독특한 상황이 전개된다. 종말의 결정론에 대한 주제에서 무지 또는 회의(의심)에 감화를 입어서, 철학자들은 관심을 인식하는 사유 연습 또는 행위 하는 의지 연습으로, 그리고 이 사유와 의지의 형식적 조건들로 이동시켰다. 이 시대는 도덕에 토대에 관한 사색들에서 만큼이나 또한 인식에 관한 일반적 관점들과 논리적 탐구들에서도 풍부한 시기였다. 상상적 대상을 탐구하는데 지친 정신은 자기 훈련의 법칙[사유의 훈련으로 논리적 법칙]을 관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러한 형식주의에 반대하여 전 생애에 걸쳐서 투쟁했던 꽁트(Comte) 같은 또는 헤겔(Hegel) 같은 철학자에게 더 많은 반감을 갖는 태도는 없어졌다. 이런 태도와 더불어 관심은 칸트(Kant)의 비판주의로, 특히 순수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을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신비판주의(néocriticisme)의 시작이라 불린다. 동일한 정신적 기풍 속에서, 뗀느(1828-1893)는 꽁디약(Condillac, 1715-1780)의 분석을 다시 존중하였다. 이 시대는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저술 귀납과 연역 논리체계(A System of Logic: Système de logique inductive et déductive, 1843; Système de logique inductive et déductive)이 큰 성공을 거두 시대였다. 밀에 대해 말하자면, 논리학 저술보다 더 많은 것이 있는데, 인식의 경험론 이론이다. 결국에 사람들은 이 운동에 집착하게 되면서, 다음 시대에 특히 발전하게 될 과학들의 비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 (792)
이로부터 엄격하지만 반어적인(아이러니칼한) 많은 냉철한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이 작품들은 1850년에서 1890년경에까지 침착해진 이 시기의 본질적 특징에 힘입어서, 즉 대상에 관해 무차별(l'indifférence, 기준없음)에 힘입어서 여러 성격들이 드러난다. 니체(1844-1900)에게 매우 생생하게 충격을 준 것이 이 무차별이고, 그리고 니체가 역사가들에게 매우 엄격하게 비난했던 것도 이 무차별이다. 이 무차별이 완전히 일반적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철학에서 형식주의는 프랑스 시(詩)에서 파르나스파 예술에 상응한다. 나중에는 말라르메(Mallarmé 1842-1898)의 예술은 시의 순수 형식적 조건들의 탐구에서 극단으로 갈 것이다.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가 쓰기를, “경탄할 만한 시도, 거기에서 칸트는 아마도 아주 순진하게 [온]도덕법칙(Loi morale)을 본다고 믿었으며, 거기에서 말라르메는 틀림없이 시의 [온]정언명법(Impératif), 즉 하나 시학전형(une Poétique)을 지각했었다.” 게다가, 풍경화가에게 있어서 또는 자연주의 소설에 있어서는 심지어 무차별적 선입견(parti pris)과 같은 것이다.그리고 꾸르노(Cournot)가 쓰기를, “절대적인 철학적 진리를 믿는 신앙은 그 만큼 감퇴되어서 대중들이나 대학인들은 박학다식한 작업에서와 역사적 호기심에서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수용될 뿐이었다.” 이때에 영국의 사상이 유럽에서 오랫동안 상실했던 영향을 다시 펼치고 있다.” 밀(Mill, 1806-1873)의 논리학(la logique), 다윈(Darwin, 1809-1882)의 변형론(le transformation),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진화론(l'évolutionisme)은 이 시대의 정신의 자연적 경사처럼 표시되었다. (4:05, 45SKJ)
(4:09, 57TKI)
*참고문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