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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 할 길
요즘 부쩍 제게 길을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생길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 먼저 그 길을 걸어본 제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지요.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합니다. 큰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인생길을 가야 할까.
인생은 독행도(獨行道)입니다. 홀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독립심입니다. 인생은 동행도(同行道)입니다. 함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불어 사는 협동심을 익혀야 합니다. 인생은 고행도(苦行道)입니다. 고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길 강건함을 길러야 합니다. 인생은 소명도(召命道)입니다. 부르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나만의 소명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인생은 신행도(神行道)입니다. 내 힘만으론 도저히 독행도 동행도 고행도 소명도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할 때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혹 지금 당신이 인생의 길을 잃었거나 그 걸음이 더뎌 답답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행도, 곧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걷는다면 그곳이 어디든 길은 열릴 것입니다.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4)
김석년 목사(서울 서초성결교회)
심쿵과 무감각
세상에 온갖 희소한 질병이 있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질병이 있습니다. 무통증은
감각을 상실했거나 감각이 전달되는 신경세포, 뇌의 이상으로 무감각하게 되는 병입니다. 이 질병은 열에 의한 뜨거움이나 물리적 자극, 가려움, 저림 등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만일 눈을 비빈다면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피가 날 정도까지 비비게 됩니다. 혀의 감각이 없어 뜨거운 음식을 먹고 화상을 입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면 굶어죽을 수도 있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무감각도 있습니다. 방탕함과 술취함, 생활의 염려가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눅 21:34) 영적인 무감각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악을 행하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 무지한 백성들에 대해 탄식합니다.(렘 4:22)
예수님 당시에도 무감각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정한 사람들에 대해 가슴 아파하셨습니다.(마 11:17)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을 들어주십니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 ‘심쿵’, 가슴이 ‘쿵’ 하는 감격을 느낍니다. 성경에는 ‘심쿵’의 말씀이 가득합니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광대한 우주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태양계에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8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천문학자들이 태양계 안에서 카론 세레스 제나와 같은 왜행성을
추가로 발견했다더군요.
우리는 우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주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우주의 반경은 약 470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빛이 1초에 30만㎞를 날아가는데 그 속도로 470억년 걸린다는 말입니다. 실로 엄청난 크기입니다. 현대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주엔 1000억개의 은하계가 존재하고 각 은하계마다 태양과 같은 빛을 내는 항성이 약 1000억개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주에 존재하는 태양계 같은 행성계의 숫자는 약 10의 22승입니다.
우리는 그중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지구 바로 옆에 있는 화성에도 가본 일 없는 인간이 어찌 우주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은총을 고백하게 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4∼27)
안성국 목사(익산 평안교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디테일의 악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최근
남북 및 북·미 관계에 있어 큰 틀에서는 합의가 되었지만, 작은
합의 과정에서 일이 틀어질 수 있기에 세밀하게 챙겨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에서 파생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협상 격언이 나왔다고 합니다.
중국의 유명 경영컨설턴트이자 학자인 왕중추는 ‘디테일의 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말단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대표이사 자리까지 오른 그는 경쟁력의 관건이 작고 사소한 디테일에 있다고 말합니다. 큰일을 망치는 것은 엄청난 실수가 아니라 아주 작은 흠집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보면, 성공 역시 한 방이 아니라 작은 디테일이 모여 이루는 결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마 25:23) 적은 일의 경험이 큰일도 맡을 수 있는 길로 이어집니다.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악마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작은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의 태도가 인생의 지혜인 듯합니다.
곽주환 목사(서울 베다니교회)
죄인임을 안다는 것
독일 작가 레마르크의 소설을 영화화한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실감나게 그려낸 반전영화이지요. 적군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한 병사가 상대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친구여, 나는 그대들을 죽이고 싶지 않소.… 우리는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적일 수 있단 말이오. 우리는 인간이오. 우리는 서로 불쌍한 인간이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죄인이오.”
그의 절규에 상대 병사도 적의를 상실했고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대가 한 인간임을, 그저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일 뿐임을 깨닫고 서로 용서하며 품어준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즉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요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할 수 있다면 진정 상대가 죄인임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길 수만 있다면 이 땅의 모든 갈등과 다툼은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과 감사만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다 죄인이다.”(블레즈 파스칼)
김석년 목사(서울 서초성결교회)
백비
비문에 아무 글자도 쓰지 않은 비석을 ‘백비(白碑)’라고 합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조선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아곡
박수량의 백비가 있습니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 형·예·공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했지만 어찌나 청렴했든지 돌아가신 후에 그의 상여를 메고 고향에도 가지 못할 만큼 곤궁했습니다. 명종은
그의 충정을 귀하게 여겨 비석과 청백당을 하사했습니다. 비석에는 그의 청렴결백을 높이 기리기 위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무명용사비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모를 용사를 위해 세운 백비입니다. 강원도 화천의 옛 6·25전쟁 격전지에 목비(木碑)가 서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낡은 백비입니다. 궁노루 울음소리 산을 울릴 때 달빛 타고 서 있는 목비를 보며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이 세상엔 허명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무수합니다. 그러나 허명은 밤나무가지에 높이 매달린 밤송이와 같아서 바람에 흔들릴수록 껍데기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명에 연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만이 참된 이름입니다.
한상인 목사 (광주순복음교회)
소녀의 유일한 슬픔
유관순 열사(1902∼1920)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성도였던 할아버지 유윤기로 인해 기독교 가정이 됐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습니다.
미션스쿨의 나라사랑기도회와 애국운동은 열사의 마음에 애국심을 불어넣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유관순 열사도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 소리가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이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천안으로 돌아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됐습니다.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옥중에서 갖고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심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순국했습니다.
유관순의 유언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빼앗긴 고통만큼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8세 나이에 나라를 사랑한 유관순, 요즘 우리는 너무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지 않는가요.
박성규 목사(부산 부전교회)
속도보다 정확성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제 3의 물결’을 통해 21세기는 정보화 시대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실제로 1990년대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정보화 시대가 왔고, 지금에는 스마트시대라는 새로운 물결이 찾아왔습니다.
스마트시대의 사람들은 속도가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걸어 다니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고 밥 먹는 시간을 아끼려 냉동식품과 패스트푸드를 먹습니다. 신중한 사람은 무능력자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론토대 경영대학원의 샌포드 드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속도에 쫓기는 사람들은 오히려 시간과 효율을 낭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야구에서 타율이 높은 타자들은 방망이를 최대한 늦게 휘두릅니다. 기다리는 만큼 공이 어디로 오는지 정확하게 판단해서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속도와 효율이 최고로 중요해지는 시대가 찾아왔지만, 그로 인해 오래 기다릴 줄 알고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필요해집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빨리,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일도 신앙도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생의 모든 목표를 조급해하지 말고 진중하게 세우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진리를 따라가게 하소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목표를 먼저 찾으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진짜 중요한 이익
미국에서 아이들을 위한 교육위원회가 처음 만들어진 건 1837년도입니다. 당시 초대의장을 맡게 된 사람은 호레이스만 이었는데 그는 보스턴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로 주의회 의원과 상원의장을
역임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많은 돈과 명예가 보장된 자리인데 이제 막 생긴 미래가 불투명한
일을 시작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자, 호레이스만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변호사 일을 잘해봤자 이익을 보는 것은 제 의뢰인뿐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다음 세대에 관련된 일입니다. 이것은 제가 얻는 어떤 보상보다도 훨씬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
그런 마음으로 초라했던 미국 교육을 개혁하기 시작한 그는 범죄를 일으킨 학생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센터를 짓는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정책까지 추진했습니다. 범죄자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해 건물을 짓는 것이 낭비가 아니냐는 말에는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변화되는 학생이 있다면 결코 낭비가 아니며, 아깝지 않습니다. 그 한 사람이 당신의 제자, 혹은 당신의 자녀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여전히 아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보다 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호레이스만이 교육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가졌던 마음을,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해봅시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을 살아가며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소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인 영혼구원을 위한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쓰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고독 속에 임하시는 주님
미국항공우주국 NASA에서는 유인우주선 개발을 위해서 당시 신경과 학의 최고 권위자인 에른스트
푀펠 박사에게 사람이 혼자 밀폐된 공간에 서 며칠정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푀펠 박사는 선별된 우주인을 데리고 안데스 산맥으로 떠났습니다. 박사는 산맥 지하에 우주선에서의 삶과 비슷한 환경의 벙커를 만들고 사람들은 약 2주간 격리시켜 생활하게 만들며 심리상태를 관찰했습니다.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잘해야 2주 정도를 겨우 버텨야 했으나 사람들은 3주가 지나도 어떤 어려움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실험이 잘못됐나 싶어 나중에는 박사가 직접 벙커에 들어가 생활을 했으나 처음 이틀만 조금 불안했을 뿐 삼일 째부터는 심신이 안정되고 창의적인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갇힌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은 정서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박사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
넘치는 정보와 손 안에 언제나 스마트폰이 들려 있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고요한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세상과 연결된 모든 줄을 끊고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께 나오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 할 것입니다.
주님, 세상과의 단절을 두려워 말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하소서.
하루에 5분이라도 고요한 가운데 주님을 묵상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믿을 수 있는 증거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핑계를 댔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아브라함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브라함의 말이 진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만약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메시아가 오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
예수님이 오신 시대에 믿지 않던 사람들은 이런 핑계를 댔습니다.
“지금 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많은 이적을 행하지만 사기일 수도 있잖아요? 만약에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저분이 메시아라는 걸 말해주신다면 저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 날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구약이나 신약 시대에 살면서 많은 이적과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면 성경이 참이라는 걸 믿을 수 있을 텐데요. 그러나 사실을 확인 할 수 없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보고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 이유만 찾고 있습니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 세상에 충만한 창조주 하나님의 증거를 바라보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지금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증거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있는 증거를 찾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마더 테레사가 인도의 빈민가인 캘커타에 고아원을 건설하겠다고 계획을 밝혔을 때 어떤 사람이 돈은 얼마나 모였냐고 물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주머니에서 3달러를 꺼내며 지금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질문을 한 사람이 도대체 3달러로 무슨 고아원을 짓느냐고 묻자 마더 테레사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3달러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3달러로도 충분합니다. ”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사역하시던 시카고의 교회에 화재가 나서 잿더미가 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이 찾아와 도대체 하나님의 귀한 교회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담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성도는 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는 성경이 들려 있습니다. 이자리에 더큰 예배당이설 것이고더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만 있다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지금 연약한 나의 모습과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안에 계시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게 하소서.
나의 환경과 능력의 부족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사랑의 반응
사랑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바바라 프레드릭슨은‘사랑이란 마음을 열어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사랑을 할 때는 크게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1. 감정의 교류가 일어나며 상대방의 행동을 따라함.
2. 뇌파가 서로 비슷해짐.
3. 엄마와 갓난아기가 교감할 때 나오는 옥시토신이라는 신경안정 호르몬이 나옴.
프레드릭슨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마치 몸은 두 개이지만 한 사람인 것 같은 반응이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연인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사소한 대화나 작은 배려를 베푸는 낯선 사람을 통해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우리에게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밤 중에 닫혀 있는 연꽃은 햇살을 받을 때만 꽃잎을 활짝 엽니다. 닫혀 있던 우리의 마음에도 예수님이란 빛이 찾아와야만 우리의 마음도 활짝 열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더욱 닮기를 사모하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몸도 마음도 날마다 주님을 더욱 사모하게 하소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심은대로 거둔다
작은 선행 하나 해놓고 당장 보상이 있기를 바라면서 조바심을 낸 적은 없는가?
그때 하나님이 "그렇다면 네가 죄지을 때도 그 벌도 당장 있게 할까?"
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차라리 복이 늦어지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눈치를 보면서 힘이 있는 쪽으로 붙을 생각을 하면
하나님은 그런 태도를 무엇보다 싫어하신다.
힘이 있을 때 붙으려교 하지 말고 어려울 때 도와주려는 사람이 결국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따라 나가는 사람을 소수라고 외면하고
큰 상처를 주면 결국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다.
반면에 힘과 숫자에 쏠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도와야 할 사람을 도와주는 소수가 되면 결국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
다툼을 극복하는 길
결국 소수의 이너써클 내에서 다툼과 갈등을 국복해 나가야 하는데
현대인들은 그런 부담이 싫어서 소수의 이너써클의 일원이 되는 축복을 되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상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면 잠깐의 편안함은 얻어도
생명동지도 얻기 힘들고 성숙과 발전도 없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도 받기 힘들다.
부부관계, 친구관계, 교우관계등은
마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관계와 같아서 다툼도 생길 수 있다.
그때 너무 충격을 받지 말라.
내가 상대에게 반대할 수 있는 것처럼 상대도 내게 반대할 수 있는 특권을 두라.
다툼이 생기면 영광과 권세의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오고
상대를 높여줌으로 그 다툼을 극복하라.
자신이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면 반대자들만 생각하지 말고 숨은 동지들을 더 생각하라.
반대자가 있다고 사람 자체에 실망해서 동지들까지 외면하지 말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동지들과 더욱 함께 있으려고 하라.
너무 지나친것도 문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할 때도 많다.
그러나 지나치지 않고 지혜롭게 앞서나가면
그를 뒤로 잡아 끌려고 하지 말고 힘써 격려해주라.
좋은 비전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과 행복인가?
그런 비전 동역자가 있다면 미래도 든든해진다.
그러나 소수의 이너써클에 속하길 두려워 하면
비전 동역자를 얻을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미래도 불안해진다.
숫자에 좌우되지 말라
살면서 너무 문제와 대적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두려워 하는 것보다 상대는 더욱 두려워 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교회의 발전과 부흥은 담임목사의 건강한 목회 비전과
그 방침에 순종하며 협조하는 성도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이뤄내는 것이다.
숫자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숫자적인 성공에도 너무 몰입되지 말라.
큰 교회 목사가 되면 성공했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의 성공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성공이 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하게 일한 목사가 성공한 목사다.
소수의 인물이 되라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사기 7장 4절에서는 하나님이 왜 시험하겠다고 했는가?
하나님은 멸망으로 떨어뜨리는 시험은 하지 않지만
믿음을 가진 소수 정예를 선택하는 시험은 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작고 시시한 일이 없다.
하나님은 그 일과 직분을 통해 나를 테스트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일상의 일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자의 축복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목자의 축복기도도 교인이 3-4백명 이상이 되면 힘들어지기에
어떤 학자는 3-4백명 정도 이하의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상 교인이 3-4백명만 되어도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다.
신중함과 담대함을 병행하라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를 위해 싸우면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
불의와 악의 세력은 강해 보여도 생각보다 약하고
정의와 진리는 약해 보여도 생각보다 강하다.
성도는 자기 믿음이 더욱 지혜롭고 신중하고 사려깊은 믿음이 되도록 기도하고 묵상해야 한다.
믿음은 만용이나 막무가내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신중해서 어떤 일을 잘 시도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주변 상황도 살피지 않고 무작정 자기 기분이나 감정대로 일을 벌여도 안된다.
너무 신중하면 사람도 움직일 수 없고 내일의 주인공도 되기 힘들다.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야 사람을 움직일 수 있고
내일을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런 사람의 편이 되어 주신다.
큰 믿음의 용사가 되라
오늘날에도 자기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문제를만나서는 "왜 나를 외면하십니까?"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연약한 존재도 큰일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르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부르셔서 강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현재 모습이 부족해도 꿈을 가지고 열심히 뛰면
어디선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역사가 나타난다.
그런 꿈의 열매들이 모이면 엄청난 폭발력이 생긴다.
그러므로 '나는 못해!'라고 미리 포기하지 말라.
교리는 정통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행동이 이단의 행동이면 역시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도 이단이지만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도 이단이다.
지금 하나님은 이 시대의 여룹바알을 찾고 계신다.
자기 안의 우상을 버리는데 힘쓰라.
'타협 교회'나 '타협 교인'이 되지 말라.
내 안의 우상을 철폐하면 반드시 선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
인생 승리의 요인
헌신의 철학으로 살아도 때로 고통은 다가오지만
고통의 밤을 지나면 영광의 새벽이 있다.
꿀벌이 꽃에서 꿀을 도적질할 때 꽃가루가 옮겨져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하나님의 은혜를잊는 경향이 있다.
물질적인 풍요가 하나님을 잊게 만든다면 그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된다.
반면에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할 때
그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된다.
교회는 경건한 냉장고가 되지 말고 믿는 자를 깨우는 부화기가 되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중개소가 되어야한다.
동참하는 숫자가 적어도 실망하지 않고 자신만이라도 거룩한 비전에 최대한 협력하면
인생의 의미와 보람도 커지고 공동체에서의 영적인 축복 지분도 커질 것이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성도에게 최선의 길을 열어 주신다.
주어진 의무를 행하려는 자세도 없이 행운에만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 기회를 최선을 다해 살려야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면 내가 그의 축복의 통로가 되면서
거꾸로 그가 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신비한 역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리는 사람보다
무엇을 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사람을 더 귀히 여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
하나님의 섭리는 늘 포괄적이다.
모든 사람, 모든 시간, 모든 환경을 어우르면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눈을 떠야
믿음도 견고해지고 깊어진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모든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대척하면 모든것이 합력하여 패망을 낳는다.
어두우면 적은 빛이라도 더 힘있게 비치게 된다.
결국 진리와 사명을 따라 사는 성도는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