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걸 작사, 최강산 작곡
김병걸의 가요 이야기
<안동의 노래>와 음반을 만들다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동기인 안동시청 총괄 김자현이 낭보를 전한 그 다음날 개나리가 방긋 웃는 안동시청을 찾았고 나는 <예총 안동지부>사무실에서 김연수 국장과 <안동사랑노래 음반제작> 용역 계약서에 날인했다.
안동(安東)은 나를 길러 준 고향이다. 안동에서 나는 청운의 꿈을 키웠고 내 푸른날은 <시화전>과 <맥향문학麥鄕文學>동인(同人) 활동 등 시내 곳곳에 발자욱을 찍으며 희망의 시(詩)로 펄럭였다.
안동의 노래를 처음 만든 건 1989년이다. 고향 선배인 <해뜰날>의 작곡가 신대성 형과는 송해 선생의 <나팔꽃인생>을 비롯하여 이태호의 <잊으라면 잊어주마>,수연의 <나는 당신의 여자>,오은정의 <여자의 마음>과 <달리는 인생>,최진희의 <당신의 여자>,송창식이 부른 전경의 노래 <우리는 간다> 그리고 2009년 봄 상금 천만원에 당선한 공모작인 <남원의 찬가>등 여러편을 같이 만들었다.
우리는 <내고향 안동>이란 노래를 만들었고 1989년 한국연예협회에서 주관한 <89 레코딩 가수 선발 신곡발표회>에서 당시 안동간호전문대 출신의 갓 스무살 임춘화양에게 주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이에 관한 기사는 <노래샘>이란 연협 가요창작분과 회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안동시청에는 내 고교 동문들이 수십명이나 근무한다. 특히 전임시장으로 정동호 동문이 시정(市政)을 이끌었는데 나는 안동노래 제작을 여러 차례 건의 한 바 있고 특히 작년에 작고한 전 안동시의회 의장인 고교 동기 김성구에게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
김의장이 죽자 나는 타켓을 시장 비서격인 총괄이란 막강한 직책을 가진 김자현으로 바꾸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때마침 KBS TV <가요무대>에서 김경남이 <내고향 안동>을 불러 안동시민과 출향인들의 빗발치는 문의와 큰 호응이 음반제작을 서두르는 촉매역할을 했다.
드디어 김휘동 시장님의 재가가 떨어졌고 예총안동지부로 업무를 이관시켜 염원하던 안동노래들이 창작되고 1만장의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다.
10월3일 <안동의 날 >행사에 맞추기 위해 나는 작업을 서둘렀다. 하회마을을 자?의 앞면에, 뒷면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넣은 안동사랑음반은 총 7곡으로 채워졌다.
<내고향안동|김병걸작사/신대성작곡/김경남노래>,<제비원 아지매|김병걸작사/신대성작곡/윤사월노래>,<부용대연가|김병걸작사/이충재작곡/허범정노래>,<안동역에서|김병걸작사/최강산작곡/진성노래>,<안동껑꺼이|김병걸작사/김병걸작곡/권용욱노래> 등 5곡과 <안동자랑가|김명자작사/김태곤작곡.노래> 및 안동출신 유동일작사의 <저강은 알고 있다>를 이미테이션 가수 임이자양이 불렀다.
언제봐도 반가운 말/이랬니껴 저랬니껴/칠백리 낙동강이 쉬어 가는 곳/중앙선 허리춤에 대대로 이어오는/인정 많고 경우 바른 양반의 고장/안동댐 보고 가는 뱃길을 따라/도산서원 하회탈춤 자랑스러운/청포도가 익어가는 내고향 안동/사랑하는 님과 함께/안동에 살자
또 들어도 정다운 말/이랬니껴 저랬니껴/영남산 산비알이 아름다운 곳/ 낙동강 줄기따라 정 많은 사람들이/여지껏도 삼강오륜 지키는 고장/영호루 난간머리 달빛을 안고/안동포와 차전놀이 자랑스러운/청포도가 익어가는 내고향 안동/정신문화 수도 안동/안동에 살자 -<내고향 안동>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오는 건지 못오는 건지/오지않는 사람아/안타까운 내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어차피 지워야할 사랑은 꿈이었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오는 건지 못오는 건지/ 대답없는 사람아/기다리는 내마음만 녹고 녹는다/ 밤이 깊은 안동역에서 -<안동역에서>
넘어도 넘어도 다 못 가는 인생고개/ 태화산아 너는 아느냐/ 칠흑같은 인간사가 너무 가여워/ 미륵불도 말을 잃었나/ 꽃같은 세월이 노을에 타는 세상/ 얽히고 설킨 사연 누가 알아주나요/ 궁금해도 아지매/ 묻지마소 아지매/ 그건 나도 모른답니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사랑 노래/ 태화산아 너는 아느냐/ 바람같은 인간사가 너무 서러워/ 미륵불도 말을 잃었나/ 나그네도 길을 가다 쉬어가는 제비원아/큰바위에 새긴 얼굴 누가 전해주나요/ 궁금해도 아지매/ 묻지마소 아지매/ 그건 나도 모른답니다 -<제비원 아지매>
시내 강변 체육공원에서 열린 <2008 안동의 날> 행사에 나는 귀빈으로 초대되었고 시청에서는 위생과장님을 나를 호위하는 담당으로 배정하는 극진한 배려를 해주셨다.
안동 관련 각종 사이트에 탑재된 안동노래들 중 <내고향 안동>과 <안동껑꺼이>는 시청앞이나 강변공원에 <제비원아지매>는 제비원이 있는 태화산 자락에 그리고 <부용대연가>는 하회마을 입구에 <안동역에서>는 안동역앞 광장에 노래비를 세워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부턴 그 일에 매달려야 겠다.
음반제작을 결심한 김휘동 시장님께 감사드린다. 김자현, 안동예총 김연수 국장님 외 시청 문화담당과와 총무과 직원 여러분에게도 엎드려 절 올린다.(시인 김병걸 글)
- 안동 출신 김병걸 작사가, 국민 MC 송해씨가 부른 '나팔꽃 인생',
'사나이 눈물' 등..
안동 역사(驛舍) 옆에는 작은 공터가 있고, 거기에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오층 전탑과 오래된 벚나무가 서 있다.
이 벚나무가 그 유명한 ‘원이 엄마’ 이야기 못지않은 애틋한 사랑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어 소개한다.
해방이 되기 전 어느해 겨울 밤, 한 젊은 역무원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한 처녀를 역무실로 업고와 정성스레 간호해 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며칠 뒤 처녀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그 역무원을 찾아왔고,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당시 역 주변에는 두 사람이 같이 시간을 보낼 만한 이렇다 할 장소도 없고 해서,
늘 오층 전탑 주위를 거닐며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며 벚나무 두 그루를 같이 심었다.
그러다 얼마 쯤 뒤 그는 갑자기 일본 고등계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사실 그는 비밀 독립운동단체의 단원이었는데, 그게 그만 일본 형사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녀가 걱정할 것을 우려해
‘같이 심은 벚나무가 죽지 않는 한 자신에게도 별 일이 없을 테니 걱정 말라’
는 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만주로 떠났다.
그 후 처녀는 수시로 역을 찾아와 전탑 앞에서 간절히 기도를 하며 벚나무를 보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6·25 전쟁이 일어났고,
피란을 떠났던 그녀는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동역부터 찾았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역에는 그가 와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군 생활을 하던 그는 해방이 되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북한군에 편입되었다가 전쟁이 일어나 안동까지 내려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벚나무를 보고는 그녀 생각에 도저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어
국군에 투항을 한 후 그녀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어쩌면 고인이 되었을 지도 모를 두 사람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심어놓은 벚나무는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말해 주려는 듯
연리지처럼 밑둥치가 하나로 붙은 채 오늘도 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고 있다.
요즘도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젊은연인들은 안동역을 찾아 벚나무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맹세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잘 다듬고 알리는 것도
지역의 문화와 관광자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싶다.
박희채 <소설가·안동역장>(영남일보)




|
첫댓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역 옮기기 전에 가서 사진 한장 찍어 놔야겠네요.
자료가 좋아서 산내들산악회로 퍼갑니다.
감사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