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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목) ◈ 눅 9: 18-27 내 힘으로 따르려 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로 주님을 따르라.
9: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9: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9: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9: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주 해
* 예수님은 12제자를 보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면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능력도 주셨다(눅 9:1-2)
대신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요구하셨다(눅 9:3-4).
- 제자들은 예수님만 행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복음전파와 병자치유를 행한다.
- 그 후에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데,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먹을 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눅 9:13).
- 예수님은 “할 수 없다”고 대답한 제자들의 손을 통하여 하늘의 양식을 나눠주셨다.
따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다.
1)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중 한 명이 살아왔다고들 말한다고 대답한다.
2)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다시 물으신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질문하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는지? 그리고 내가 주님을 누구라고 하는지를 물으신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믿는지, 내가 직접 보고 영으로 알게 된 예수님을 믿는지를 물으신다.
2.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당신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1) 베드로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2)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그런 문화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3. 우리는 예수님이 “니가 믿는 복음을 만천하에 전하라”고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신다.
1)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말씀을 전하라는 것은 때와 분별 없이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전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2) 얼마 전에 제자들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신 주님께서는 침묵과 함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가 가는 길을 알라고 하신다.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4. 예수님은 메시아의 길을 네 가지로 계시하신다.
1) 첫째,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 이것은 의인이 고난을 받는다는 시편 34:19절에 근거한다.
2) 둘째, 인자는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인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배척을 받는다.
- 이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표상하는 시편 118:22절에 근거한다.
-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먼저 “버림을 받는다.”
3) 셋째, 인자는 죽임을 당한다.
- 이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을 묘사한 이사야 53:7절에 근거한다.
4) 끝으로 인자는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일으킴을 받는다.
- 베드로는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미 증거하였으며,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였다.
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5. 그리고 메시야를 따르는 자의 길도 수난의 길이며, 수난의 길을 걷는 자는 부활에 연합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1)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은 것”과 같은 말씀이다.
2) 제자도의 첫째는 자기를 버리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 누가복음에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
6. 제자도의 둘째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다.
1) ‘십자가를 지다’는 말은 정죄받은 죄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형장으로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 ‘날마다’라는 하였으니 “제자는 날마다 죽음의 선고를 받은 사람과 같은 처지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바울은 이런 제자의 삶을 예수님의 죽음에 자신을 넘겨주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2).
7. 제자도의 셋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1)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는 단순한 고행, 자기 수련을 하는 자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이다.
2)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만이 내 안에 사시는 생명(주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음의 선고를 받는 사람과 같은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의 의와 종교적 의가 될 수 없다.
-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4)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의 사명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주님을 따르면, 주님이 친히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다.
8.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자기애, 종교적 의”를 위해서 행하면 오히려 “제 목숨을 잃을 것”이다.
1) 주님이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게 되면 오히려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서 주님을 대적하게 된다.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오류에 빠졌으며, 수많은 헌신자들이 이 오류에 빠져들었다.
- 헌신, 봉사, 수고함으로 주님이 사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장하고, 인정받으려고 하고, 수고의 댓가를 얻고자 하였다.
3) 그러므로 제자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교만”이다.
- 교만의 중심에는 “자화자찬”이 있다. 그는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의롭게 포장하고,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심지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속여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스스로 믿고 자랑한다.
9. 아담의 타락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한다.”
1)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자, 도리어 자기를 주장하고,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자, 도리어 십자가를 미워하는 자임을 알고 인정함으로 겸손해 질 때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된다.
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에 스스로의 힘으로 주님을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수제자인 베드로마저도 주님을 따르는 길,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에 실패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함으로 잃는 자가 되었다.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을 따르는 일에, 철저히 실패하였다.
3) 우리 스스로 “나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했다”는 말은 귀한 말이지만 무용지물인 말이다.
4) 어쩌면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니 꼬라지나 알고 겸손하게 살라”고 하실 것이다.
10.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신을 부인한단 말인가?
1) 자신이 어떤 교만, 어떤 착각, 어떤 집착이 있은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부인하는가? 학생이 수학 문제가 파악도 전혀 않되는데 그 문제를 풀수는 없다.
2)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그 복음으로 인하여 죄인 된 내 상태를 알아야 한다.
- 제자던, 바리새인이던 주님이 보는 나의 실체를 먼저 알아야 한다.
11.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들은 후에도, 죽기를 각오했을 때에도 주님을 따르지 못했다.
1) 그러나 주님의 사랑, 주님의 긍휼이 베드로와 제자들을 회복시켰고, 하늘에서 성령이 부어짐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었다.
2)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옳0다.
3) 동시에 나의 힘으로는 절대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전적인 자기 포기”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4) 주님이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임하실 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잃는 길”을 갈 수 있다.
12. 사도들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했다.
2) 그러나 주님이 다시 사랑으로 찾아와 주시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다.
3)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아무것도 버리지 않겠다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부어지지 않았다.
4)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려고 온 힘을 다해야 하지만, 따를 수 없음을 알고 겸손하게 된 가난한 마음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신다.
◈ 나의 묵상
십자가와 제자도는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다. 그런데 나에게는 가장 찔리고 아픈 본문 이기도 하다. 1997년 제자도에 대한 강의를 듣고서 나는 제자가 되겠다고 일어나서 헌신하였다.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구원해 주신 주님이라면, 그분의 사랑이라면 제자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였고, 제자로서 따르게 하실 것이라고 여겼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권리포기와 댓가지불로 이해하였다. 세상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제자도라고 여겼다. 그 이후 목회로의 부르심이 있었고 제자도를 실천할 기회는 많아졌다. 권리포기와 댓가지불을 조금씩 실천해 갔다.
그러나 나의 권리포기와 댓가지불이 처음에는 주님이 사시게 하는 통로였으나, 죄의 세력에 속은 나는 권리 포기와 댓가지불을 나의 의와 자랑과 교만의 합리화의 도구로 삼았다. 처음에는 댓가지불과 권리포기, 그리고 그로 인하여 경험한 하나님을 자랑하고 간증했지만, 점점 나를 자랑하고 나를 주장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댓가를 지불한 만큼 역사해 주셨기에 남들보다 더 권리를 포기한 것은 “나의 의, 교만, 자기 자랑”이 되었다. 결국 나는 댓가지불과 권리포기로 “나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경고대로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니 잃는 자”가 되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거두어 가신 후에야 나는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임을 알게 되었다. 헌신하면서 목회 성공을 탐하였고, 성장을 즐겼고, 인정을 원하고, 능력이 나타남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창창한 목회적 성공과 복음의 역사를 기대하였다.
그리고 이제야 안다. 주님이 더 이상 댓가를 지불하지 못하게 하고, 권리도 포기하지 못하게 하심은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속지 않고,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안다. 광야의 가장 큰 유익은 나를 낮추는 것, 즉 겸손이다. 교만은 가장 큰 죄이고 주님을 대적하게 하며, 겸손은 가장 유익한 덕목이며,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한다. 그러기에 나의 교만을 멈추시고, 나를 낮추시는 주님의 손길이 긍휼임을 안다.
한 때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자”고 외쳤던 자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자임을 안다. 감사한 것은 사도들 중에 한 명도 자신의 힘과 결단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 나도 사도들이 알았던 그 은혜, 그 복음, 그 사랑을 알기 원한다. 그 은혜가 나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한 제자들을 정죄하거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성령을 부음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신 그 주님을 소망한다. 철저한 패배, 전적인 자기 포기, 철저한 절망의 자리에서 부어진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은총이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능하게 하였기에 나도 자기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의 긍휼을 바라본다. 철저한 자기 포기의 자리에 전적인 은혜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기에 주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자기 자랑, 자화자찬이 될 수 없다.
갈릴리 바다의 베드로처럼 나는 주님이 베푸신 식탁을 찾아 왔다. 나는 그분께 무엇도 요구할 수도 없고, 그 무엇도 약속할 수 없다. 그저 주님이 차려 주신 조반을 염치없이 받아먹을 뿐이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저항감을 뚫고 들어오는 그 은혜와 긍휼을 용납하며 받아들인다.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용납하시며 품어 주시는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고멜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품고 감사를 드린다.
◈ 묵상 기도
댓가를 지불하고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치유하고 축사하고 오병이어 표적을 행하실 때 주님이 행하신 일로 제자들의 어깨가 어쓱해 졌을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면서 얼마나 들떴을까요? 제가 그랬습니다. 주님, 저는 베드로보다도 더욱 나를 모르고 주님을 따른 자입니다. 저는 제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제가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나의 의, 자기주장, 자기애”를 가지고 주님을 도리어 힘들게 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입술로만 “주님”이라고 부르고, 주님을 내 맘대로 조정하려던 자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무너진 모든 삶의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베드로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와 다른 분,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왜 은혜를 베푸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몸된 교회와 각 성도들을 주님의 은혜의 손길에 맡깁니다. 특별히 장재석 집사님에게 그 은혜의 손길로 온전하게 치유하시어,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낫게 하시는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십시오. 창조하신 몸의 능력대로 온전하게 하시고, 그 영혼과 가족들도 붙들어 주십시오. 복생캠프를 통하여 성령님의 충만과 함께 복음이 계시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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