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이청준
십칠팔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술버릇이 점점 사나워져가던 형이 전답을 팔고 선산을 팔고, 마침내는 그 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까지 마지막으로 팔아넘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K시에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던 나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나 알아보고 싶어 옛 살던 마을엘 찾아가보았다. 집을 팔아버렸으니 식구들을 만나게 될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달리 소식을 알아볼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스름을 기다려 살던 집 골목을 들어서니 사정은 역시 K시에서 듣고 온 대로였다. 집은 텅텅 빈 채였고 식구들은 어디론지 간 곳이 없었다. 나는 다시 골목 앞에 살고 있던 먼 친척간 누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누님의 말을 들으니, 노인이
뜻밖에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네가 누군데 내 집앞 골목을 이렇게 서성대고 있어야
하더란 말이냐."
한참 뒤에 어디선가 누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노인이 문간 앞에서 어정어정 망설이고 있는 나를 보고 다짜고짜 나무랐다. 행여나 싶은 마음으로 노인을 따라 문간을 들어섰으나 집이 팔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날밤 노인은 옛날과 똑같이 저녁을 지어 내왔고, 그날밤을 거기서 함께 지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일찍 k시로 나를 다시 되돌려보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노인은 그렇게 나에게 저녁밥 한끼를 지어 먹이고 마지막 밤을 지내게 해주고 싶어,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렇게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했다. 언젠가 내가 다녀갈 때까지는 하룻밤만이라도 내게 옛집의 모습과 옛날 같은 분위기 속에 맘 편히 눈을 붙이고 가게 해주고 싶었을 터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문간을 들어설 때부터 썰렁한 집 안 분위기가 이사를 나간 빈집이 분명했건만.
이청준, 『눈길』, 열림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