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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영점조정
창 44:1-34
오늘 창세기 44장 전체 이야기를 ‘유다의 영점조정’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 본문을 우리가 대할 때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요셉이 은그릇을 집어넣지 않습니까? 은잔을 집어넣게 되는데 성경이 요셉이 쓴 트릭에 형제들이 걸려들게 되는 것을 묘사할 때에 당사자 베냐민 그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에 대한 묘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요셉이 중심에 선 이야기 같습니다마는 사실상 오늘도 이야기는 유다에 포커스가 맞혀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면서 유다의 영점조정 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생각하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영점조정이라고 하는 것은 측량하는 기계 측량하는 모든 기계들은 이 영점조정이 반드시 이루어져야지만 측량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은 특별히 성인병 중에 당뇨병 환자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조심해가면서 소변으로 당도를 측정을 합니다.
그 당도 측정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영점조정입니다. 계측기를 소변을 투입하기 전에 제로 상태인 것을 확인하지 아니하면 그 당도측정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고 오류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점조정이 계측기의 정확도를 위해서는 아주 생명과 같은 그러한 조작입니다. 모든 계측 이전에 모든 측량 이전에 이 영점을 조정하지 않으면 모든 측량이 오류가 되고 그리고 빗나가 버리고 말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문기사를 읽다가 보게 된 건데 국방부에서 특별히 육군에서 마일즈라고 별명이 붙여진 장비를 위해서 삼천억 원을 투자를 했습니다.
이게 어떤 장비냐 하면 k201 이라고 하는 건데 수류탄을 장전해가지고 아주 멀리 까지 쏴서, 수류탄이라는 게 보통 손으로 던지는 것인데 손으로 던져봐야 몇 미터나 나가겠습니까? 그런데 수류탄을 장전해서 멀리 쏴서 직경 10미터 내에 있는 모든 적들을 다 사살하는 그런 무기를 개발하는데 삼천억 원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기를 훈련단계에서 사용한 기록을 보면 예를 들어서 2005년도에 k201을 4,400발을 쐈는데 4발이 적중했다. 2006년도에 5,800발을 쐈는데 11발이 적중했다. 이런 식의 보고가 되면서 신문에 기사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래서 정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 추궁해 들어가자 당국의 책임자들이 하는 말이 바로 영점조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의 보고가 거짓이든지 사실이든지 상관없이 영점조정이라고 하는 것이 5,800발을 쏴서 11발 밖애 적중하지 않는 무기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인지 사실인지 상관없이 영점조정이 안 되면 백발이면 백발 다 빗나갈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영점조정이 아니면 절대로 인생의 적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적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 살아갑니다. 그리고 365일 삽니다. 평생을 삽니다. 그 평생을 살아가는데 그냥 살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늘에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줄이 하늘에 그어져 있다는 말씀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드렸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는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적중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인생의 적중률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정해진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운명론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뜻이 정해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통로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내 인생 어느 계획 하나 복된 게획이 아닌 계획이 없지 않겠습니까?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은 그런 계획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대해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계획이 우리 인생에 적중률을 어떻게 측정하느냐?
내 인격에 영점조정을 통해서 땅에서 이루어질 때에 우리 인생이 적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세운 그 계획이 이 땅에서 적중하는 겁니다.
오늘 유다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 얘기 다 아시죠?
곡식을 사러 왔는데 베냐민을 데리고 왔습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지금 볼모로 잡고 있는 시므온이 위험하기 때문에 베냐민을 데리고 왔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마음의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을 하면서 베냐민을 붙들고 있다가 너무 기근이 심각해지니까 더 버티지 못하고 이제 베냐민을 딸려 보냅니다.
이때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의 자식들을 볼모로 잡힌다 라는 그런 결심까지 하면서 아버지에게 안심을 시키고 베냐민을 데리고 갔는데 요셉이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다 자기의 은잔을 넣어가지고 은잔을 도둑질 한 것으로 꾸며서 그 형제들을 다시 붙들어 오게 됩니다.
요셉이 이렇게 한 이유는 아마 베냐민을 정말 잡아두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일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계략과 이런 요셉의 계략에 빠져서 난감한 처지를 당하게 되는 형제들의 이 이야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 요셉의 계략과 이 계략에 빠져든 형제들의 사건을 계기로 해서 속에 감추어져 있던 형제들의 믿음의 상태나 심리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 감추어져 있던 속 모습이 밖으로 드러나게 된 것에 이 성경 기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형제들 전체의 대표로 아니면 유다 혼자만의 인격과 신앙의 상태가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제 베냐민이 요셉의 노예와 종으로 남아 있게 될 수 밖에 없게 된 이런 상황에서 유다가 앞으로 나서면서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요셉 총리의 종으로 남아 있겠노라고 얘기를 합니다. 아직 형제들은 총리가 요셉인줄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아버지가 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노인네가 충격을 받아서 죽게 될 것이다. 내가 그걸 볼 수가 없다. 내가 대신 남아 있을 테니까 나를 당신의 종으로 삼아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말을 하는데 이상황에서 이 유다의 마음의 심리상태와 신앙상태가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종으로 삼아 주시옵소서.
종이 실제로 있던 세상에서 종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어떤 신분이라고 알고 있는 세상에서 나를 종으로 삼아달라. 나머지 여생 전체를 당신의 종으로 살겠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도 분명히 입 한번 다물면 넘어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좀 괴롭지마는 아버지와 베냐민의 괴로움을 좀 지켜보면 됩니다. 그러나 그걸 지켜보지 못한 채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말을 하고 나서게 됩니다.
여러분 종이라는 게 뭡니까?
아주 쉽게 말하면 생각이 제로인 사람입니다. 자기의 주체적인 생각이 제로인 사람, 자기 인생에 대해 비전과 꿈과 이상이 제로인 사람,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이 제로인 사람, 결국은 주인의 지시 말고는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그 사람을 살게 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는 어떤 계기나 어떠한 이유도 주어지지 않는 사람, 자발적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 종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로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이제 그 마음상태가 어떤 상태였는가를 드러내는, 쉽게 그래도 모든 형제 중에서 가장 앞서서 종의 자리를 스스로 택합니다. 그것도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어쨌든 베냐민이 잘못한 것도 아니지마는 베냐민의 곡식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처해서 베냐민 대신에 종이 되겠노라고 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영점조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여러분?
유다의 생을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요셉을 판 뒤로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다른 형제들은 그러지 않았는데 유다만 그 집에서 나옵니다. 이 아버지에 대해서 특별히 많은 염려를 기록한 것을 보면 요셉 앞에서 말한 것을 보면 특별히 이 유다의 마음 속에 아버지의 고통을 보면서 다른 형제들 보다 더 많이 괴로워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도저히 요셉을 잃고 난 후 괴로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의 얼굴을 대면하기가 뭐해서 또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였잖아요. 형제들과 함께 속였으니까 그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랬는지 나와서 가나안에서 자기 집을 잘 꾸렸습니다. 가계를 하나 형성했어요. 결혼을 했고 아들 셋을 낳습니다. 순조롭게 순풍을 달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며느리를 보자마자 며느리 다말과 함께 사는 첫째 아들 엘이 죽고 둘째 아들을 집어넣는데 둘째 아들 오난도 죽게 됩니다. 그리고 며느리를 친정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죽습니다. 죽음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래서 이 죽음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요셉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아마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또 베냐민을 잃게 될 때 아버지가 당할 고통도 유다는 다른 형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들 둘을 잃어버렸으니까. 세 아들 중에서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이제 아내까지 상처한 뒤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길에 있는 창녀집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고 나왔다가 인생이 완전히 파국으로 몰려갑니다.
그 창녀가 바로 며느리였고 그 며느리가 시어바지의 아기를 갖게 되고 만천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며느리가 간음해서 아기를 갖은 줄 알고 화형에 처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아이인 것이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되면서 더 이상 그 가나안 땅 가계를 이룬 그 장소에서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며느리 다말과는 다시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다말에게서 아기가 낳습니다. 그 아기는 아들입니까, 손자입니까?
자기의 씨임에도 불구하고 떳떳이 만나서 얼굴 한번 대면할 수 없는 그런 형편에 처하게 됩니다. 완전히 자기가 인생을 한번 새롭게 세워보려고 했다가 파국에 혼돈에 공허에 흑암이 겹쳐져 버린 인생이 뒤틀려져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점점 더 이 유다의 마음 속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계획하는 것 내 마음에 소망을 따라 내 마음에 비전을 따라 움직여간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고 잘못된 것이고 왜곡된 결과를 갖고 오게 되는 것인가를 알게 되면서 자기 생각을 영점으로 조정합니다. 자기 게획을 영점으로 조정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기대를 영점으로 조정합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 제일 먼저 베냐민이 잡히게 되었을 때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생각이 제로인 사람 계획이 제로인 사람 자기 인생에 대한 기대가 제로인 사람 그러한 종의 자리로 들어가겠다고 자처하면서 총리대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바로 이 유다의 모습 영점 조정이 가능해진 이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게 되는 12형제 중에서 그 가계를 형성하게 되는 첫 머리가 됩니다.
주님을 모셔들인다는 게 뭡니까? 주님이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말하고
주님 말씀 하시잖아요.
하나님의 생각을 누가 합니까? 성령이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갖고 이 땅에서 실현해나가면서 명중률 100%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내 생각과 내 계획이 영점으로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주 좋은 예가 있어요.
요셉 앞에서 지금 동생입니다. 자기가 팔아버렸습니다.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 총리 앞에서 형인 유다가 동생을 종으로 팔았는데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 창세기의 이야기가 너무 반전이 심해서 정말 스릴 만점 아니에요?
자, 이 반전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뭡니까?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총리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래부터 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점이 조정된 사람이었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살이 귀에 들리는 세상살이를 마음에 받아들여서 그것들을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반응하면서 인생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부터 들려오는 음성과 이미지와 계시를 따라 살았다는 것은 이미 요셉은 17살 때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영점조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 계획을 영점 조정해놓았고 자기 인생의 비전을 영점으로 조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형들이 절할 그럴 때가 올 것을 계시해주시고 비전으로 주십니다.
요셉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나 무엇이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갖고 있던 어떤 계획의 구체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들려 주시는 것 이미 종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이미 자기를 영점 조정해놓고 하나님 앞에서 종처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것만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나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갔을 때나 언제나 오셉이 생각했던 것은 자기의 상태를 영점으로, 감옥이니까 좋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자기의 마음을 영점으로 놓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위해서 자기 마음을 영점으로 조정해놓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유다는 비로소 영점으로 조정합니다. 자기를 종으로 내어 놓습니다. 자기의 생각 제로, 자기의 바램 제로인 종의 자리에 내어 놓습니다.
한 사람은 총리가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종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둘다 영점 조정이 되어 있는 사람들로 보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점 조정이 된 이 유다가 예수님을 담아내는 족보에 첫머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점 조정이 되었던 요셉은 그 요셉을 향해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계획이 꿈을 통해서 미리미리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 계획대로 적중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곡식단에 절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하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자기의 생각을 영점으로 조정하면서 자기의 느낌과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기대를 영점으로 만들면서 하나님의 기대 하나님의 느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종으로 살아갈 때에 형제 곡식단이 절하게 된다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이 정확하게 적중해서 총리가 되고 형들이 절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길을 찾아갈 것이냐?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경제상황이 안 좋다. 자식들이 어떻다.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문제가 뭡니까?
계속해서 하늘의 뜻은 지금 땅을 향해 쏴대고 있어요. 그런데 그 하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발사하게 되는 총이 뭐냐?
내 인격. 내 인격의 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통과되어서 이 세상에 현실화 됩니다. 그런데 내 인격이 영점 조정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이 통과하면서 실현되는 발사되어서 정확하게 명중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오늘 하루의 과제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대하든지 우리의 인격을 즉, 내 생각 내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 내 분별력 내가 갖고 있는 꿈과 비전 다 가능해요. 다 나올 겁니다. 그 생겨나는 모든 것들을 따라가지 말고 그것이 생겨날 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붙잡고 내 마음에 영점 조정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유다가 예수님을 닮는 족보의 첫머리가 된 것처럼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담겨지고 예수님이 오시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인격을 통해 이 세상에 쏴가면서 적중해가며 실현시켜 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계획은 최선의 것으로 가장 멋진 것으로 예비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만 유다처럼 나를 종으로 두사 내 생각도 제로, 내 바램도 제로, 내 계획도 제로, 내 판단도 제로인 사람으로 하나님 임하셔서 나를 종으로 삼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가능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도]
하나님!
영점 조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담아내는 족보에 첫머리가 된 유다처럼 영점 조정을 통하여 하늘의 계획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총리의 자리로 이끌림을 받게 된 요셉처럼 우리를 위한 하늘의 계획들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유다처럼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내어놓고 요셉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내어놓는 영점 조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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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