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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莊陵)매표소를 지나면 제일 먼저 바각(碑閣)이 있다.
박충원(朴忠元) 낙촌비각(駱村碑閣)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은 "박충원"의 "정려각"(旌閭閣)이다.
"비각" 안에 있는 "기적비"는 후손들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박충원은 "단종"(端宗)이 운명하고 50년 후인 1507년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올만한 이야기이다.
"단종"(端宗)이 영월 땅에서 사약을 받고 운명을 한 뒤로 조선 조정에서는
"인종"(仁宗)임금때부터 내려오는 근심이 있었다.
수년 동안 강원도 영월 군수직을 제수(除授)할 사람이 없었다.
예부터 "영월 군수"는 지방 수령 중에서도 손꼽히는 직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종"(仁宗)때부터 영월에 괴이한 소문이 들리고,
부임해 간 사또는 그 첫날밤에 까닥 모를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였다.
그런 연유로 누구도 영월 땅에 가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월 군수에 제수(除授)되면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했다고 한다.
"인종"(仁宗)임금은 하는수 없이 영월 군수에 제수된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부임하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에 처하겠다고 영을 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임한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월군수직을
임금인들 신하에게 더는 권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영월 군수직이 비어 있는 수년 사이, 관아는 퇴락하고, 지방 관족들과
토호세력들의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여러 곳에서 도둑 떼들이 일어나 가뜩이나 시달리는 백성을 괴롭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충원"은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영월 군수직을 자청했다고 한다.
부임한 날 밤 동헌(東軒)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정좌를 하고 첫날밤을 보내는데,
밤이 깊어 갈 무렵 여러명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한다.
"박충원"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태연하게 앞을 쳐다 보았더니,
"사육신"을 양옆으로 거느린 단종(端宗)이 서 있었다.
놀란 "박충원"은 벌떡 일어나 큰 절을 올리면서 말하였다.
"상감마마! 신 박충원 삼가 문안 드리옵니다. 그간 "성수무강"(聖壽無彊)하오신지요!"
내려다보고 있던 단종(端宗)이 박충원에게 말을 한다.
"박 군수! 이 험한 곳을 오느라고 수고가 참 많았오.
짐의 유택이 심히 불편하여 짐의 유택을 바로해 달라고 영월군수를 여러 차례 찾았으나,
이곳에 오면 나를 보고 놀라 죽고 마니,
짐의 유택도 유택이려니와 죽은 전임 영월군수들에게 짐의 심기가 매우 괴롭소!
허나 이제 "박군수"가 내 말을 들었으니 짐의 유택을 바로 해주기 바라오!"
"박충원"이 바닥에 넢쩍 엎드리며 "상감마마! 알겠사옵니다" 하고 외치다가,
그 스스로의 큰소리에 깜짝 놀라 깬 박충원은 꿈이었음을 알고 괴이하게 여겼다.
다음 날 "박충원"은 관속들을 거느리고 "엄흥도"의 후손과 함께
여지껏 암장(暗葬)되어 있던 단종의 무덤을 힘들게 찾았다.
무덤은 잡초로 가리어져 황폐하고 흔적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박충원"은 조정에 상소하여 "단종"의 릉을 고치고 예를 갖추어 제를 지냈다고 한다.
"단종"이 정식으로 복권되어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지관을 조정에서 내려보내 살펴보니
단종이 묻힌 그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었기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墓祭)만 고쳤다고 한다.
그 후 영월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박충원은 승승장구하여 형조, 병조판서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 비각은 영월 군수 박충원의 충신 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2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근래에 세운 것이라 뒤에는 한글로 써져 있다.
"낙촌비각"(駱村碑閣)바로 옆으로 능침(陵寢)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곳은 다른 왕릉과 달리 능침(陵寢)가까이 갈 수가 있다.
계단을 조금 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걷기 좋은 길이다.
능침(陵寢)에서 보는 정자각은 무척 경사가 심해 위험하다.
"장릉"(莊陵) 능침(陵寢).
망주석(望柱石).
특이하게 왕릉중 이곳의 "망주석"에는 세호(細虎 : 다람쥐)가 없다.
장명등(長明燈)의 개석(蓋石)도 유일하게 사각형이다.
이후부터 사각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석마(石馬)
석양(石羊)
문인석(文人石)은 빙그시 웃는듯 보이기도 하고 눈을 감은채 침통한 표정인듯도 하다.
#이곳은 왕릉(王陵)인데도 유일하게 무인석(武人石)이 없다.
무인석(武人石)이 없는 이유는 "단종"이 무신(武臣) 세력을 등에 업은 "세조"(世祖)에게
왕위(王位)를 찬탈(簒奪)당했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혼유석(魂遊石)은 근래에 만들어진듯 마모가 덜 되었다.
고석(鼓石)과 색이 비교된다.
능에서 내려다 본 영천(靈泉)
중간에 내려가는 길.
조선시대는 그 어떤 왕릉이라도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백리 안쪽에 자리 잡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장릉(莊陵)은 단종(端宗)이 유배 중에 운명을 마쳤던 곳이므로 그 시대의 완고한 원칙에서 벗어나
한양에서도 천리나 떨어진 아주 외진 지방에 봉분한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릉이다.
장릉(莊陵)은 조선의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능으로, "단종"의 시신이 강가에 버려졌던 것을
영월의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지금 현재의 자리인
영월읍 영흥리에 몰래 묻고 가족들과 함께 잠적해 버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70년 후인 1526년 중종 때 영월군수 박충원에 의하여 봉분이 다시 꾸며졌다고 한다.
17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1698년 숙종 때,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란 글씨를
단종비각에 새겨 놓으므로서 그때부터 "장릉"(莊陵)으로 격상시켜 부르게 되었다.
단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그다음 해,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과 "김종서"를 등을 참살하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단종"은 상왕의 신분으로서 창덕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단종이 창덕궁에서 2년 정도 되었을 때,사육신이 상왕 복위를 꾀하다가,
그 기밀이 누설되어 "사육신"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결국,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뜻하지 않은 홍수로 거처를 영월군내의 "관풍헌"으로 옮겼다.
영월의 유배되어 사약을 받을 때까지가 약 두 달 가량이지만
그곳에서 사약을 받을 때까지 약 1년간 머물렀다고 하기도 하고,
영월 지방에서 내려오는 야사(野史)에 의하면 2년 이상을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단종" 아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것이다.
당시 경북 순흥(順興 : 지금의 영주시 물야면 부근)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의 작은 삼촌 "금성대군"(수양의 동생)과 순흥부사 등이 단종의 복위를 은밀히 꾀하다가
기밀이 또 누설되어 관련자 모두 참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영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결국 운명하였다.
당시 단종의 시신이 일설에 의하면,
영월 동강변(東江邊)의 아주 후미진 곳에 버려졌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설에는 영월 군내를 흐르는 두물 머리(東江과 西江이 만나는곳)에 버려졌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동강변에 버려졌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장릉(莊陵)은 역대 조선왕조 왕들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10대에 요절한 미성년자 임금이 안장된 왕릉이다.
"영창대군"같은 어린 왕족들의 묘소가 있지만 모두 재위한 왕이나 추존왕은 아니다.
유일하게 어린 나이에 왕릉에 안장된 조선왕조 임금은 왕족 전체를 통틀어서 "단종" 한 명 뿐이다.
단종(端宗)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여러 계층의 사람들 위패를 한자리에 모신 "장판옥(藏版屋)
장판옥(藏版屋) 문위의 액자.
여인위(女人位)
이 여섯명은 "단종"을 모시기위해 영월까지 따라 왔다가
"단종"이 죽자 "동강"(東江) 낙화암(落花岩)에서 투신(投身)하여 자결한 여인들이다.
환관위(宦官位)
충신위(忠臣位)
충신위(忠臣位) 좌측에 "엄흥도"(嚴興道)의 이름이 있다.
"엄흥도"는 중인 출신의 지방 아전(衙前)이였지만
"세조"의 눈을 피해 "단종"의 장사를 지낸 일로 후대에 높게 평가를 받게 된다.
"단종"이 복위되기 전인 "선조" 때 이미 그 자손은
"노산군"의 묘역을 관리하는 대신 병역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고,
후에 "정조"가 "단종"의 충신들을 정리하여 등급을 결정할 때,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죽은 이들 바로 다음으로 "엄흥도"를 놓았는데
아무리 절의를 다했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단종"과 관련되어 죽은 것이 아닌 이상
"사육신"들과 동급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원칙에서 유일하게 예외이자
심지어는 "생육신"들보다도 더 위였다.
"고종" 때에는 아예 정승급의 관직을 추증했다.
죽은 이의 장례를 매우 중히 여겼던 조선 시대에 누구나 억울함을 알지만
감히 장사지낼 생각을 못했던 "단종"의 시신을 목숨걸고 수습한 공을 높이 산 것이다.
조사위(朝士位)
배식단(配食壇)
배식단(配食壇)도 다른 왕릉에는 없는 구조물이다.
오른쪽 높은 자리는 "정단"(定檀)이고, 앞의 세곳은 "별단"(別檀)이다.
배위(拜位)는 홍살문을 지나서 설치되었다.
端宗大王 諱 文宗大王 嫡嗣 母妃 顯德王后 權氏 以 正統
辛酉 七月二十三日 誕生 王 戊辰 封 王世孫
景泰 庚午 冊封 王世子 壬申 五月 文宗 昇遐 王嗣 登
大位 乙玄 尊爲 上王 上號 恭懿溫文
天順 丁丑 王在 江原道 之 寧越郡 是年 十月二十四日 薨 春秋 十七
葬 郡 北 辛坐乙向 原
肅宗大王 二十四年 戊寅 追諡 王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廟號 端宗 陵曰莊 祔 永寧殿 上之九年 癸丑 命樹石于 陵以識之 .
단종대왕 휘(홍위)로 문종대왕 적사 모비 현덕왕후 이 정통
신유 칠월이십삼일 탄생 왕 무진 봉 왕세손
경봉 경오 책봉 왕세자 임신오월 문종 승하 왕사 등
대위 을해 존위 상왕 상호 공의온문
천순 정해 왕재 강원도 지 영월군 시년 십월이십사일 훙 춘추 십칠
장 군 북 신좌을향 원
숙종대왕 이십사년 무인 추시 왕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묘호 단종 릉왈장 부 영녕전 상지 구년 계축 명수석우 능이식지 .
단종대왕의 휘 (이름 弘暐)로 문종대왕의 적사(본처가 낳은, 집안의 대를 이을 맏아들)다.
모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정통(명나라 영종 때의 연호 1436~1449) 신유년(1441년, 세종23년) 7월23일에 왕을 낳으셨다.
무진년(1448년, 세종30년) 왕세손에 봉해지고,
경태(명나라 대종 때의 연호 1450~1456) 경오년(1450년, 문종 즉위) 왕세자에 책봉되셨다.
임신년(1452년, 문종2년) 5월 문종께서 승하하시자, 왕세자로서 왕위에 오르셨다.
을해년(1455년, 세조 즉위) 왕을 높여 상왕으로 삼으며, "공의온문"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천순(명나라 영종 때의 연호 1457~1464) 정축년(1457년, 세조3년) 왕께서 강원도 영월군에 계셨는데,
그해 10월24일에 "훙서"(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하셨다.
춘추(나이)는 열일곱이셨다.
영월군 북쪽 신좌을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숙종대왕 24년 무인년(1698년)에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는 "단종端宗"으로 올려드리고, 능호陵號는 "장莊"이라 하고 영녕전(永寧殿)에 합사하였다.
금상(영조) 9년 계축년(1733) 능침에 표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명하셨다.
단종(端宗)비(碑)는 다른 능의 비(碑)와 달리 글자에 붉은 칠을 해 놓았다.
"장릉"(莊陵)은 "궁능유적본부"(宮陵遺跡本部)가 관리하고 있지 않은 유일한 조선왕릉으로,
"영월군"이 관리하고 있는 관계로 다른 조선의 왕릉과는 관리방법이 다르다.
일예로 2024년까지는 다른 능과 달리 월요일에도 개방을 했다.
그러나 2025년부터는 "장릉"(莊陵), "청령포"(淸泠浦) 모두 월요일에는 방문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왕릉은 정자각에서 능침을 곧바로 보게 되어 있다.
"장릉"(莊陵)의 경우는 "능"과 "정자각"이 같은 때에 만들어지지 않고,
능이 먼저 만들어 진 후 후에 정자각이 세워진 까닭에 이렇게 된 특이한 경우다.
정자각과 능침을 잇는 신도(神道)도 다른 능과 달리 낮게 설치되어 있다.
이는 지형상 정자각과 능침의 높이 차이 때문에 그리 된 것일듯하다.
또 하나 특이점은 "산신석"(山神石)과
제를 지낸 후 "지방"(紙榜)을 불사르고 제물을 묻는 "예감"(隸坎)이 같이 있는 것이다.
원래 "산신석"은 정자각 오른편에 설치된다.
영천(靈泉)은 다른 계절에는 수량이 적으나 한식 전후에는 수량이 많아진다고 한다.
엄흥도(嚴興道) 정려각(旌閭閣)
정려각(旌閭閣) 위에 있는 정려기(旌閭記)
재실(齋室)
"단종 역사관"에 있는 "정순왕후"의 "금보"(金寶)모형.
단종의 금보(金寶) 모형.
"장릉"의 위치를 표시한 옛 지도.
정업원(淨業院)터는 현재 청룡사(靑龍寺)가 들어서 있다.
단종애사 (端宗哀史) -1- 낙산 청룡사(駱山 靑龍寺).
자세한 내용은 여행기 9서울 22번 단종애사 1~4 를 보시기바랍니다.
"사릉"(思陵)의 고지도(古地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