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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미우나 고우나
“강 선생님. 저. 필기 종합 시험 패스 했어요.”
“아. 마리아 아빠. 축하드려요. 그 시험을 한 번에 패스했다니. 대단하네요.
실기 시험은 지금 하는 대로 만 해도 돼요.
면접 때는 진솔하게 말씀하면 되고요. 면접까지 다 패스하면 택시는 제가 알아봐 드릴게요.“
민재가 보드 멤버 미팅을 마치고 나오다가. 마리아 아빠를 만났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기쁨이 얼굴에 확 피어났다.
‘사실, 필기시험에 한 두 번씩은 고배를 마시는데. 참 잘한 것이다. 밤잠 안 자고 얼마나 공부했으면 바로 합격했겠나.’
민재가 마리아 아빠를 데리고 회사 맞은편 빅토리아 카페로 갔다. 여러 택시 운전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 마리아 아빠. 오셨네요. 민재도.”
“어. 제니가 여기에 와 있었네. 혼자서 뭐해?”
“자기 기다렸다. 마리아 아빠는 어떻게 여길 오셨어?”
“응. 앞으로 우리랑 함께 일하시게 됐어. 오늘 필기시험 합격했거든.‘
제니가 일어나서 마리아 아빠에게 축하인사를 했다.
“마리아 아빠. 잘 하셨어요. 마리아 골프 후원도 한결 나아질 거예요. 여기 수입이 괜찮거든요. 자기 관리만 잘 하면. 하고 싶은 일도 다 하면서요.”
“네. 고마워요. 그래도 이렇게 아는 분을 여기서 만나니. 택시 운전 하는데 큰 힘이 되겠어요. 잘 부탁 드려요.”
마리아 아빠가 약간은 자신감이 생긴 듯,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됐다. 민재가 라떼를, 마리아 아빠가 카푸치노를 시켰다.
민재가 서류하나를 꺼냈다. 마리아 아빠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마리아 아빠에게 드리려고 제가 한 부 준비했어요. 보세요.”
“강 선생님. 이게 뭔데요? 무슨 영어로 된 서류네요.”
“네. 택시 운전하는데 필요한 실 사례중심으로 제가 정리해 봤어요. 아예 여기 나오는 예는 달달 외우세요. 마치 시험 준비 하듯 하면 돼요.”
지난 번, 마리아 아빠가 영어 실력이 부족해, 택시 운전하는 데 걱정스럽다고 한 것을. 민재가 기억해 뒀다가 준 영어 팁.
마리아 아빠가 택시 영어 가이드 서류를 받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챙겨주다니. 하는 일도 많은 걸로 아는데.
“여기 택시 회사 다니면, 강 선생님이 있는 한 제가 외롭지는 않겠어요.”
“마리아 아빠도. 외롭다는 말씀. 좀 의외네요. 어쩌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섬인데요. 다만 함께 떠있는 섬끼리 유대가 있으면 덜 외로워요.”
그때,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마리아 아빠가 택시 영어 가이드서류 첫 페이지를 죽 훑어보았다.
“와! 이거 내가 평소에 궁금했던 표현인데. 문장이 짧으면서도 의미가 쏙쏙 들어오네요.
그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요. 그동안 영어에 갈증을 느꼈거든요.”
“네. 이것은 아주 기본 적인 표현이거든요. 실제 이걸 적용해 쓰다 보면 자기만의 표현이 추가돼요. 그게 쌓이면 자신의 언어로 소통하는 거예요.
제가 현재 5개 국어를 익혔거든요. 방식은 다 똑같아요. 먼저 실생활 중심의 표현을 내 것으로 확장시켜나가면 자연스레 익혀져요.“
“5개 국어라고요? 가만 있자. 주변 국가부터 익혔을 텐데요. 한국어는 기본. 다음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그 다음은 무슨 언어인가요?”
“네. 스페인어요. 다음은 인도어를 배울 생각이거든요. 언어는 소통의 도구라서 참 유용해요.
택시 운전하면 여러 나라 사람들을 태우니까. 인사말부터 외워 써먹어 보면 손님들 반응도 좋아요. 컴플레인 나올 상황에서도 그냥 지나가요.“
“우와! 그거 정말 실용적이네요. 저도 될까요?”
“마리아 아빠께서는 오늘 제가 드린 표현부터 달달 외워서 비슷한 상황에서 써 먹어 봐요.
영어는 머리로 하는 게 아녜요. 입으로 해야 해요. 축구이론에 박사면 뭐해요? 발 앞에 순간 날아온 공을 그대로 차내야지요.
축구에서 몸이 저절로 움직이듯. 영어도 즉각 입에서 반응이 나와야 해요. 머리로 생각하면 늦어요.“
마리아 아빠가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재가 일어서며 당부했다.
“여기. 표현. 눈에 선하게 그려보며 정말 달달 외워요. 이번 면접 때도 써먹을 수 있을 거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강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우선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 단계 지나면 제가 다른 팁을 줄게요. 면접. 며칠 안 남았지요?‘
“네. 다음주. 수요일. 그러니까 5일 남았네요. 달달 외울게요.”
“한 가지 팁요. 영어는 짧고 똑똑하게 말하세요. 길게 말하다 보면 문장이 얽혀버려요. 짧고 똑똑하게. 천천히. 아셨지요?”
민재가 마리아 아빠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리아 아빠도 환하게 화답했다.
***
오클랜드 택시 운전사 면접 날이었다. 회의실에 보드 멤버가 참석한 가운데, 면접 볼 운전사가 들어왔다.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저스틴이 새 운전사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이름은 케빈 리입니다. 한국 출신이고요. 전직은 트럭 운전사였습니다.”
이어서 다니엘 의장이 질문했다.
“왜. 오클랜드 택시 회사에서 운전을 하기로 했어요?”
“네. 첫째 신뢰 있는 회사라서요. 둘째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요. 셋째 제 딸아이에게 물질적 도움을 줘야 해서요. 딸이 골프 신동이거든요.”
짧고. 똑똑하게. 천천히. 마리아 아빠, 케빈 리가 대답했다. 민재가 흐뭇하게 웃었다. 다니엘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민재가 몇 마디 물어보며 질문을 던졌다.
“딸아이가 골프 신동이라고 하셨어요. 딸아이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네. 열 살입니다. 초등학생입니다. 다음 달, 주니어 대회에 나갑니다.”
“네. 좋습니다. 좋은 성적 거두길 응원합니다. 실무적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케빈 리가 하얏트 호텔에서.
이든 파크 럭비 경기장에 가는 손님을 태웠다고 할 때. 하얏트 호텔부터 이든 파크까지 지름길로 가야할 텐데. 그 루트를 말해 보세요.”
마리아 아빠, 케빈 리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입을 열었다. 천천히. 똑똑한 목소리로. 짧게 풀어갔다.
“네. 하얏트 호텔. 좌회전, 워털루 쿼더런트. 우회전, 사이먼 스트리트. 우회전, 맥키논 드라이브.
스트레이트, 도미니언 로드. 우회전, 월터스 로드. 좌회전, 크리켓 애비뉴. 이상입니다.”
“짝짝짝!”
다니엘 의장이 손뼉을 쳤다. 일어서서 바로 마리아 아빠 손을 잡았다. 다른 보드 멤버도 악수했다. 맨 나중에 민재가 손을 잡았다. 꽉 잡았다.
마리아 아빠가 울컥했다.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저스틴이 마리아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 사무실로 가서 오클랜드 택시 회사, 고용 계약서를 썼다.
민재가 사무실에 들렀다. 엘리가 바쁘게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민재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엘리. 바쁘시네. 짧고 밝고 경쾌한 피아노곡인가?”
“존. 아. 이제 거의 마쳤네. 방금 무슨 소리한 거야?”
“응. 엘리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0번 같아서.”
“어? 존이 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0번을 다 알아?”
“응. 내가 이어서 남은 것, 한 번 두드려 볼까?”
“그래봐. 여기 이쪽 페이지 마지막 두 단락만 치면 끝나거든.”
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자리에 민재가 앉았다. 한 번 죽 훑어보더니 바로 자판기를 두드렸다.
“따다다닥! 딱딱. 따다다다다. 또또또. 다다다다닥.”
자판기 소리가 짧고 밝고 경쾌했다. 리드미컬하게 흐름을 타는 민재 손가락을 보며, 엘리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엘리. 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0번. 이 곡 스타일 좋아하거든. 두 악장만으로 구성되었잖아. 간결하고 소박하며 연주가 쉬워서. 딱! 끝.”
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리가 손뼉을 쳤다.
“존은 도대체 못 하는 게 없네. 집에 피아노라도 있어?”
“아니. 난 매일 자판기로 소설을 쓰거든. 피아노 치듯 쓰면 글 흐름이 잘 풀려나와. 왜 있잖아. 생텍쥐베리. 프랑스 야간 비행의 선구자이자 소설가!”
“그럼. 민재는 뉴질랜드 택시 운전사이자 소설가?”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가 씩 웃었다. 재밌는 친구야. 놀듯 일을 해.
엘리. 부탁 하나. 오늘 마리아 아빠가 우리 회사 고용 계약서 썼거든. 아직 택시와 번호판 쉐어가 없어. 그걸 살 여건이 안 돼서.
번호판 포함한 택시가 필요해. 그 조건 갖춰서 운전사 구하는 것 있으면 알려줘. 오늘이라도 계약하게.”
그때였다. 마리아 아빠가 저스틴이랑 사무실에 들어왔다. 택시 빌리는 것에 대해 민재와 엘리가 이야기 하는 걸 보고.
저스틴이 마리아 아빠에게 잘 듣고 결정하라며. 민재와 엘리에게 손을 흔들며 나갔다.
“가만 있어봐. 여기 두 차가 있는데. 한 대는 포드 팔컨 택시. 또 한 대는 홀덴 코모도어. 어느 걸로 할 거야. 렌트 비용은 같아.
“연료가 뭐지? 가스 LPG 용인가. 아니면 가솔린인가?”
“포드 팔컨은 가솔린. 홀덴 코모도어는 가스 LPG. 가스 LPG가 연료비 절감도 되고 좋잖아. 홀덴 코모도어로 할 거야?”
“아니. 포드 팔컨 가솔린으로.”
“왜? 포드 팔컨이 3800cc라서. 홀덴 코모도어가 4000cc고. 배기량 때문에?”
“아니. 가스 LPG 연료비 절감은 3년이면 끝나. 다음부턴 고장이 잦아 수리비로 다 나가. 3년간 절약한 연료비가 수리비로. 일 못하고. 스트레스 받고. ”
“우와~. 그런 걸. 멀리까지도 예측하네.”
마리아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 하는 것, 그냥 하는 게 아니네.
“마리아 아빠. 아니 여기선 회사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부를게요. 케빈 리는 어떤 차로 했으면 좋겠어요?”
민재가 사무적으로 묻자, 마리아 아빠가 약간 움칠했다. 그러지. 남들 앞에서는 개인적 감정 드러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것도 빨리 적응하자.
“강 선생님, 아니지. 존이 추천한대로 따를 게요. 전 모르니까요.”
옆에서 민재와 마리아 아빠 대화를 듣던 엘리가 호호하고 웃었다.
‘공과 사를 분별하겠다는 저 태도. 귀엽네. 아주 세련됐어. 적응도 잘하고.’
“엘리. 그러면 포드 팔컨으로 할게. 그 차 주인이 누구지?”
“다니엘 의장.”
“뭐라고? 다니엘 의장은 쉐어 차가 몇 대나 있는 거야. 내가 알기로 두 대인데.”
“다섯 대야.”
“그래? 부자네. 그건 그렇고. 자기 차 빌리는 사람이 추가 수입을 만들어 주니까. 그 운전사한테야 잘 해 주겠지. 지금 연결해줘.”
엘리가 다니엘 의장에게 전화하자, 잠시 뒤, 다니엘 의장이 들어왔다.
“아. 케빈 리가 내 차를 렌트하겠다고? 좋지. 돈 잘 벌어서 딸 골프 하는 것 지원해준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차 상태는 괜찮습니까? 택시는 트랜스미션 고장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케빈 리. 예리하네. 올 초에 트랜스미션 크게 손 좀 봤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고장 나도 내가 수리할 거고. 대차도 보험으로 되니까요.
단, 너무 무리하게 뛰지는 말아요. 차나 사람이나 혹사하면 열화 돼 그냥 나가떨어지니까. 돈 번다고 무리하다 쓰러진 사람, 꽤 있어요.“
민재가 다니엘 의장을 향해 엄지를 들어보였다. 기왕 할 거면. 기분 좋게 계약해야지.
“케빈 리. 다니엘 의장님 것. 좋은 상태니 계약해도 돼요. 차야 문제되면 차주가 다 수리해 주니까요.
다니엘 의장님. 곧 계약할 테니. 케빈 리. 잘 부탁해요. 의장님도 케빈 리 딸아이, 골퍼 후원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가. 존. 아빠가 딸 아이 하고 싶은 일을 돕는다는데. 나도 힘닿는 대로 후원해야지. 존 부탁까지 받았는데. 지금 당장 후원해야겠어.
알았어요. 주당 택시 렌트 비가 요즘 400달러인데. 50달러 깎아줄게요. 주당 350달러로 해 드릴게. 절대 무리하지 말고. 몸 건강 잘 챙겨요. 케빈 리.“
“우~와! 우리 다니엘 의장님. 크게 후원하셨습니다. 한 달이면 200달러씩 후원하는 셈인데요.”
민재가 다니엘 의장한테 고맙다고 인사하자. 마리아 아빠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엘리가 택시 렌트 계약서를 가져와 다니엘 의장 앞에 내 놓았다.
여러 기재 사항을 쓰고 서명했다. 다니엘 의장에 이어. 케빈 리가 펜을 눌러서 썼다. 엘리와 민재가 손뼉을 쳤다. 미우나 고우나. 한 가족이 됐다.
마리아 아빠, 케빈 리가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속전속결 이었다. 사람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게. 참 고마운 일이었다.
민재가 마리아 아빠, 아니 케빈 리 손을 꼭 쥐었다. 마리아 아빠가 강 선생, 아니 존에게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
71화 끝(5,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