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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라일락꽃 향기 간간히 배어나오는 늦은 봄은 아직 쌀쌀한 기운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간단한 반팔차림에 느닷없이 끌려나온 영희는 사무실에 두고 온 윗저고리가 무척 아쉬워지고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내기 사원인지라 풍성한 저녁차림의 회식자리가 끝나고 2차로 나이트클럽을 가자는 제의에 갈등과 설렘이 인다. 사무실 안에서야 홍일점의 발군으로 종횡무진 하였으나 밖에서는 아무래도 사회초년생의 발걸음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숭을 떨기도 그렇고 쾌재를 부르며 분위기에 호응하기에는 아무래도 여자라는 존재감에 은근히 무게가 실린다. 잠시 머뭇대며 상황을 살피던 중 김 대리의 수신호에 이끌려 대충 버벅거리며 무리에 합류해 발길 옮기다 보니 어느덧 수많은 인파가 모이고 흩어지는 나이트클럽이 눈가에 들어온다.
요란한 밴드소리에 뒤질세라 광란의 지랄 굿을 벌이는 떼거지의 무리들은 스테이지 앞을 장악하고 그 열기를 압도하며 분위기를 끌고 나가는 미소년 차림의 가수는 노래에 걸맞게 현란한 춤 솜씨를 보이고 있다. 중간 중간 박혀있는 커다란 원통위에서는 외국여성 차림의 무희들이 요염한 몸짓으로 흐느적거리며 끈끈한 희나리 불꽃을 피우고 있다. 무전기를 들고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을 둘러 본 일행은 너무 비좁은 상황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때 건장한 차림의 사내가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좌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룸이나 이층 특별석이 있습니다, 물론 그 곳에서도 돔이 열리는 광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하며 앙증맞은 명함을 내밀고 재차 안내를 한다.
일행은 그 곳으로 안내를 해달라고 하며 기왕이면 룸이 좋겠고, 그렇다고 해서 술값이나 기타 소요비용이 더 들어서는 곤란하다고 하자 사내는 원래는 비즈니스 석이라 조금 비싼 것인데 오늘은 특별히 별도의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하며 재빠른 몸짓으로 무리를 이끌고 간다. 룸에 도착하고 좌석을 정돈한 후 돌아나가는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영희는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에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지만 아무런 표정 없이 가볍게 눈인사만 하곤 사라진 그를 도통 기억할 수 없었다. 까만 정장차림에 베이지색 머플러를 두르고 보석이 없는 금반지에 고리로 엮은 팔찌, 가늘게 꽃은 넥타이핀과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 없는 차림의 청년이 영희의 뇌리 속에서 자꾸 맴돌긴 하지만 아리송하기만 할 뿐 도무지 기억의 흔적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 대리가 호들갑떨며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서로 뒤질세라 스테이지 앞에 달려 나가 춤판을 벌리기도 하고 룸 안에 있는 노래방기기에서 각자 특유의 노래솜씨를 뽐내던 순간 나이트클럽 천정이 열리며 밤하늘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술이 약하신 부장님을 선두로 이젠 그만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는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옴을 느끼고 차마 식지 않은 청춘의 열기를 그만 잠재우기로 한다. 대리운전을 부르고 택시를 부르는 무리를 뒤로하고 영희는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이지만 아직 버스나 전철이 있으니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십 여분을 걸어 주안 역에 도착하니 아직 부평 가는 열차는 남아 있었다. 제법 쌀쌀한 기운에 팔을 문지르며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순간 온몸에 피곤함이 몰려와 스르르 눈이 감겨온다.
영희가 회사와 집을 오가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주안 5공단 의자공장에서는 구슬땀을 흘리며 350톤 유압프레스에서 철제의자 등판을 생산하는 청년이 있다. 엄청난 크기의 기계소음, 금형과 철판이 마주치는 소리가 커 옆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울정도의 환경에서 여러 사람이 맡은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점심시간 식당 겸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청년의 왼쪽 가슴에 반장 가(賈) 막(幕)이라는 이름표가 보인다. 흔하지 않은 성씨에 이름마저 특이한 청년은 주위에서 떠들고 얘기하는 사람들과 달리 별로 말이 없고 휴게실 한 쪽 구석에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지 아니면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거의 존재감이 없는 듯하다. 주위 사람들도 그 앞으로 나서지 않으며 곁으로 다가서기도 조심스러운 듯 간간히 눈치를 보며 그의 조용한 자태를 방해하지 않으려 신경 쓰는 모습이 언뜻언뜻 눈가를 스쳐간다.
노동에 지친 육신이 아우성치며 시계바늘을 향해 날아오를 때 막(幕)이는 쉴 새 없이 돌아치는 파이프 밴딩 기계 전원을 끄고 유압프레스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과 수신호를 한다. 곧이어 잔업인원 명단과 기타 작업진행상황을 일지에 적어 청년에게 넘겨주고 퇴근준비를 서두른다. 작업복을 탈의실에 벗어두고 잰 걸음으로 공장 문 앞을 나설 때 경비실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와 "야! 까마귀 오늘도 거기 가는 게야? 돈 버는 것도 좋지만 몸 생각도 좀 해라, 그러다 건강 해칠까 걱정된다" 하면서 어깨를 다독거리며 주무른다. 막이는 의외로 호탕하게 웃으며 "저야 뭐 아직 젊으니까 괜찮습니다, 건강이라면 저보다 아저씨가 더 염려 됩니다." 하며 정문을 돌아 나온다. 13평 다세대주택 2층에 돌아온 막이는 칠순이 넘는 할머니와 마주앉아 저녁식사를 한 후 검정색 정장을 갈아입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차림새로 대문을 나선다.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의 나이트클럽 안은 빈자리가 듬성듬성 보이고 활화산 같이 끓어오르던 광란의 도가니는 점차 열기가 식어간다. 작업선에 올라 힘차게 노를 젓던 부킹의 몇몇 무리는 마지막카드를 붙들고 혼신의기를 쏟아 온갖 이빨 쌈치기를 하고 일찌감치 나가리가 된 개털들은 혹시 모를 기회를 찾아 염탐을 계속하는데 버벅대는 꼬라지를 보니 패색이 짙다. 아닌 것은 아니라는 확실성이 밤무대처럼 잘 통하는 데가 없는데 왜 그리도 사람들은 이곳 사정을 허투루 보고 그저 돈 몇 푼에 뭘 건져보겠다는 요행수로 낚싯줄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더욱 가관인 건 잡은 고기 밥 안주고 남이 잡은 고기 넘겨다보다 모든 고기 다 놓치고 빈 낚싯대 들고 서로 다투는 부류들이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낚시터니까 별 탈 없는데 지역구에서조차 뻘 짓거리하다 들통 나 이혼장 앞에 두고 곡하는 인간들은 도통 구제불능이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남의 돈 먹는장사는 사람행위야 어떻든 거기서 나오는 지폐를 내 삶의 안식처로 삼아야하기에 어지간한 그림은 그저 스치고 지나가야한다. 저변에 널려있는 볼썽사나운 것을 일일이 간섭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고 자칫 시빗거리라도 생기면 매상 떨어지고 재수 없으면 벌금까지 내야하기 때문에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른 척하는 쌩 까는 자세가 현명한 것이다.
막이는 자기구역에 있는 테이블 숫자를 훑어보며 카운터로 향하다 마침 그 곳을 지나치는 지배인과 마주친다. 간단히 목례를 한 막이는 전표를 주섬주섬 챙겨 지배인에게 건네주며 "형님 제 구좌가 이제 몇 개 안 남았습니다. 중앙에 쪽 2개와 왼쪽통로에 부킹 족 하나만 죽 때리고 있는데 더 있어봐야 진상이니 그만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쪽은 계산 끝났고 부킹합석은 추가로 들어간 병 5개 접시 일반 2개 남았으니 처리 좀 부탁드립니다." 하자 지배인은 흔쾌히 "알았다 늦게까지 수고 많았다, 내일 또 공장에 출근하려면 피곤할 테니 어서 들어가 봐라" 하곤 전표를 챙겨 총총히 사라진다. 지하실 탁한 공기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아카시아 꽃향기가 새벽이슬에 배어 잔잔히 흩어지고 있다. 향긋한 내음에 심호흡을 길게 서너 번 하던 막이는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집까지는 걸어서 25분 거리이기 때문에 굳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것 없고 그저 걷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영희는 회사에서 단합대회 겸 야유회를 가기로 결정하고 장소를 물색하라는 특명 아래 컴터 안에 흩어진 세상잡것의 위치와 정보를 추적하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아마도 퇴근 무렵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 차례는 돌았을 것이다. 집에 가서 차분히 생각해 보겠다는 숙제를 안고 퇴근하는 길에 부평 풍물거리에서 우연히 고교동창인 선녀를 만났다. 영희는 한 동안 궁금했던 친구들안부와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야유회숙제를 혹시나 풀어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램 에 저녁을 사겠다는 제의로 선녀의 발뒤꿈치를 붙들었다. 근처 설렁탕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제법 운치 있는 커피숍에서 두 사람은 앞 다투어 뻐꾸기를 날리고 쌀집아저씨를 끌어들여 가뜩이나 폭락한 시세에 염장 질을 내지르기 시작한다. 제법 눈치 있는 주인의 자발적인리필이 건네질 때까지 두 사람은 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 잠시 야릇한 분위기에 두 사람은 이성을 찾고 본격적인 신상토론과 자아의 이상실현을 위한 주제를 선택하기 시작한다.
선녀는 야유회장소로 가평남이섬이 좋겠다고 추천한다. 넘실대는 북한강과 광활한 숲이 있고 잔디밭도 넓어 체육행사도 할 수 있다는 제의에 영희는 귀가 솔깃해진다. 학창시절 육상선수였던 영희는 이번 기회에 모두가 놀라는 솜씨를 보여주고 싶은 속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통편도 전철을 이용할 수 있으니 각자 출발해서 그 곳에 집결해도 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도 쉽게 풀린 숙제에 마음이 들뜬 영희가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찰나 선녀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와 영희는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 선녀역시 친구들과 주안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놀러갔다가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확인하곤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 했다는 것이다.
선녀와 친구들은 자정이 다 되가는 시간에 업소에 갔었는데 다들 3차까지 지난 후라 몇몇은 머리꼭대기에서 알콜이 솟아나올 지경이었고 몇몇은 무아지경의 경지에 올라 무릉도원을 방황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 곳에서 흥청망청 흐느적거리다 어느 정도 술이 깨어 거의 파장 무렵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친구하나가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 선녀는 퍽치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옆 사람과 부딪혔는데 어깨에 멘 가방이 어느 샌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부딪힌 사람은 그냥 멀뚱히 서있고 옆을 보니 아무도 없고 뒤에 있는 사람역시 다들 평범한 차림에 술이 많이 취해있으며 선녀의 커다란 명품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더라는 것이다. 정말 귀신이 곡할 지경에 모두는 혼이나가 안절부절 못하고 주위를 살피는데 업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람같이 내달리며 한참 앞서 지나가고 있는 사람을 붙잡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냅다 뛰는 자세가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매우 민첩한 자세와 숙달 된 상황이었고 더욱 놀라운 건 붙들어 세운 사람 입에 선녀의 커다란 가방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는 것이다. 입에 물고 순식간 치고나갔으니 뒤에서 아무리 쳐다봐도 가방이 보이지 않았고 여유 있게 뒷짐까지 지고 갔으니 다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가방을 빼앗는 순간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너무도 끔찍해서 차마 보기가 무서웠다고 한다. 상대는 작달막한 칼을 휘두르며 살기를 품고 덤비는데 옆으로 피하며 도는 순간 엄지와 검지로 상대 눈을 찌르고 사타구니를 걷어차더니 머리채를 잡아 방향을 돌려세운 후 허리띠를 움켜쥐고 어깨에 멘 후 땅바닥에 내리 꽂았다는 것이다. 그 것도 모자라 버둥대며 일어서려던 상대를 발길로 걷어차고 마지막엔 아예 타고 올라앉아 무차별폭행을 하여 주위사람들 모두 기겁을 했다는 것이다. 때마침 출동한 경찰이 신원파악을 하고 상대를 차에 태우고 돌아갔는데 선녀의 가방을 들고 돌아온 사람이 다름 아닌 중학교동창 까마귀였다는 것이다. 순간 영희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뭐야? 까마귀!! 하며 놀라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그 때서야 영희의 머릿속에는 지난번 회식 때 예의바르게 자리를 안내해준 청년이 삼삼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맞아 그 사람은 분명히 까마귀야, 까마귀...!!
영희가 멍 때리고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선녀는 찻잔에 남아있는 커피를 마저 비우곤 허탈하게 뇌까리기 시작한다. 근대 영희야 그 까마귀라는 애 말이야 학교 다닐 때 완전 병 맛 아니었니? 얼굴도 까무잡잡하고 차림새도 어벙해가지고 맨 날 달리기 한다고 운동장에서 땀 질질 흘리며 공부라고는 아예 담쌓고 지내던 애가 그렇게 변했다는 게 난 믿겨지지가 않아. 더군다나 주안 유흥가에서 까마귀하면 모두가 인정하는 선수 급이란다. 학교 다닐 때 애들이 놀려도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가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거야 말로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다.
얄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선녀를 바라보며 영희는 조용히 얘기를 한다. 내가 육상부에서 그 애를 봤을 때 분명 뭔가가 있었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애 가슴 깊은 곳에는 우리가 접하지 못한 나름대로의 세상이 있었던 게야. 언젠가 학교에서 남녀대항 계주릴레이가 있었는데 보나마나 남자가 우승하는 건 당연한 거였지. 또 거기서 우수한 몇 명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명문고에 입학하기로 되어있었지. 다들 심사위원 눈에 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는데 나는 남자선수와 부딪혀 자칫 균형을 잃고 처지게 되었지. 그런데 그 애가 나와 부딪힌 남자애를 고의로 슬쩍 건들인 거야, 그 애는 그만 땅바닥에 구르고 등수에서 처지게 되었어. 덕분에 나는 어부지리로 명문고교에 입학하는 행운을 얻었고 나와 부딪힌 애는 그 애 아버지와 코치 체육선생님이 담합하여 특채가 되었지만 까마귀는 심한 벌을 받았지.
나는 그 얘기를 집에 가서 하였고 아버지께서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며 나를 데리고 물어물어 막이네 집엘 찾아간 게야. 산동네 초라한 움막 같은 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연신 고맙다고 해도 막이는 도통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잡아떼는 거야. 막무가내로 모르겠다는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변변히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체 발길을 돌려야했지. 부엌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막이는 나에게 속삭이듯 몇 마디를 했어. 경기할 때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는 말을 남기고 산비탈을 향해 뛰어 올라갔지. 그리고 몇 달 지나 졸업을 했으며 그 후론 그 애를 본 적이 없어.
선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영희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순서 없이 널브러진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사연들, 빛바랜 일기장 한 켠 에서 세월을 자장가삼아 잠들다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마저 요란한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간간히 옛일을 상기하며 걷던 영희는 집 앞에 다가서며 물끄러미 가로등을 바라보며 뇌까린다. 그래 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지, 항상 어두운 곳에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게 정녕 너를 밝히려는 게 아닌 걸 난 알아. 그렇지만 난 한 번도 남을 위해 자리를 지켜본 적이 없어. 지금 내 기억에서 오랜만에 잠을 깬 막(幕)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추억이란 이름표로 바꿔달고 빛을 내고 있었나보다. 무심한 나는 그 것도 모르고 엉뚱한 빛을 찾아 덧없는 시간여행을 한 게야.
야유회에서 돌아오던 길에 영희는 김 대리에게 다가가 지난 번 회식 때 나이트클럽에서 받은 명함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김 대리는 그 때 받았던 명함이 우습고 특이해서 기억이 생생한데 아마 사무실 책상서랍 어딘가에 있을 거라며 뜬금없이 웬 명함타령이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순간 머쓱해진 영희는 그냥 뭔가 알아볼 것이 있다고 하면서 내일 출근하면 그 명함을 좀 보여 달라고 한다. 김 대리는 알았다고 하며 그 때 우리를 안내했던 사람 명함이 보통 사람들 것과는 다르다고 한다. 앞뒤로 붉은 색 바탕에 까마귀라는 검은 글씨 빼고는 전혀 수식이 없어 본인도 참 궁금했었다고 한다. 순간 영희는 놀라움과 야릇한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으나 짐짓 딴청을 피우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멍 때린 가슴에서 스멀스멀 빠져나온 아스라한 추억은 차마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산등성이를 오가며 방황하고 있었다.
추억의 재발견
헝클어진 기억에서 당신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미로를 좋아하는 상대와 숨바꼭질 하는 게 힘겨웠지요
요동치는 격랑의 세월에 맞서 파도타기를 즐기는 그대
멀찌감치 지켜보며 발돋움하지만 다가설 수 없어
차라리 인연이 아니길 바랬었지요
기억의 언저리를 맴도는 추억의 그림자는
가슴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이는데
하염없는 인생구비 다람쥐쳇바퀴처럼 돌고
망각이란 답으로 삶의 여정을 피해갑니다
누군가 던져놓은 인연의 실타래로 물레를 돌리며
하릴없이 팔자 좋아 헛짓거리 하지만
세월도 인연도 팔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추억에 실려 방황하는 게 아닌지요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산천은 나들이에 들뜬 행락객을 맞아 화장과 집안분위기 바꾸기에 여념 없다. 성급한 무리는 벌써 산등성이에 불을 지펴 휘돌아나가고 뒤질세라 달음질치는 단풍의 추임새는 장단이 따로 없는데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떨어진 낙엽만이 야트막한 골짜기를 따라 흐르며 애달피 흐느끼고 있다. 모처럼 연휴에 연차휴가 까지 타낸 영희는 퇴근하기 전 선녀에게 전화를 한다. 이런저런 안부와 더불어 갖가지 인간명세서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하며 성실한 거래가 이뤄질 스펙과 혹시 모를 양다리 작업을 간파하기로 의기투합 한 후 전화를 끊는다. 건너편에서 모른 척 귀동냥 하던 김 대리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고 은연 중 비켜가는 눈웃음이 파티션 칸막이 위로 날아오르지만 모르쇠로 침묵하는 영희의 쌩 까는 무게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찌그러진다.
동 인천 송월동 근처 쫄면 집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호들갑 떨며 숭구리당당 아싸라비야를 연발하고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미지의 상대에게 내 마음 당신 곁으로라는 연서를 뻐꾸기에 실어 나른다. 한참 두서없이 진도가 나가는데 뜬금없는 세숫대야가 들어와 잠시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다름 아닌 김 대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호박을 벅벅 긁으며 어리버리 주춤되는데 영희는 깜 놀라는 순간 괘씸한 생각이 언뜻 스쳐 아니, 김 대리님, 아까 몰래 엿듣고 있다가 결국 이렇게 난장을 까는 건가요? 라며 톤을 높여 힐난한다. 김 대리는 잠시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아니고 선녀 씨에게서 이리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왔는데... 말 꼬리를 흐리는 순간 선녀가 나서서 잠시 일방통행에서 역주행 하던 상황을 진정시키고 김 대리를 곁에 앉힌다. 때를 놓치지 않고 김 대리가 턱하니 지겟다리를 괴고 틀어 앉으니 어이 상실한 영희의 머릿속에는 그 동안 이것들이 장난 아닌 장난을 하고 있었다는 그림이 그려진다. 남녀관계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기르던 개에게 도둑 들었을 때 발뒤꿈치 물린다더니 이거야 말로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다.
저녁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밑밥을 까는데 깨소금처럼 고소한 두 사람의 분위기가 슬슬 영희의 염장을 내지른다. 그러던 차에 김 대리가 오늘은 본인이 쏠 테이니 주안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한바탕 살풀이를 하자고 제의한다. 선녀는 좋아서 길길이 뛰며 생뚱맞은 곡을 하고 영희 역시 그곳 소식이 궁금했던 차에 선뜻 나서니 순식간 분위기가 반전되어 세 사람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물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며 보부도 당당하게 클럽 안으로 돌진하니 어느새 막이가 다가와 반듯한 자세로 허리 굽혀 인사하며 일행을 룸으로 인도한다. 김 대리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우린 그냥 홀에 있는 게 편한데 하며 망설이자 영희가 눈에 힘을 주며 오늘 쏘신다면서요? 저는 룸에서 양주 마시는 게 좋거든요, 시끄럽지도 않고 분위기도 나고 하니까, 형편 어려우시면 제가 좀 보태드리죠, 하며 거침없이 소파에 앉자 막이가 재차 목례를 하며 그럼 오늘은 병 값만 받고 기본 안주는 저희 업소에서 제공하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하며 바람같이 룸을 빠져나간다.
술과 음식이 들어온 후 세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을 잊고 무아지경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와!! 하는 탄성 속에 밖을 내다보니 클럽천정이 열리고 밤하늘이 쏟아져 들어온다. 순간 영희의 눈에 막이의 넥타이핀과 어제보다 조금 커진 조각달이 얼비치고 깔끔하고 새하얀 막이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취기가 오른 몽롱한 의식에서 흩어졌다 모이는 물상들을 찬찬히 훑어보는데 선녀가 조심스레 손을 잡으며 다가선다. 영희야 뭘 그렇게 보고 있니? 조금 전 김 대리가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중 한 사람이 합석을 하고 싶어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하며 조심스레 표정을 살핀다. 영희는 선뜻, 그래? 어차피 우리 셋이 저 술을 다 마실 수 없으니 그도 괜찮겠지, 더불어 놀다보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고 하며 방그레 웃자 김 대리가 반색을 하며 손짓을 크게 하여 누군가를 부른다. 이젠 제법 그럴 듯한 그림도 나오고 분위기도 물이 올라 광란의 도가니는 점차 뜨겁게 달아오른다.
자정을 넘긴 시간은 서서히 밤이슬을 토해내며 새벽이슬을 머금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클럽 안은 듬성듬성 빈자리가 생겨 이빨 빠진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 영희는 막이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머릿속 에서 맴돌 뿐 뚜렷한 뭔가 생각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막이의 모습은 클럽 안 곳곳을 헤집어 봐도 도통 보이질 않는다. 정신은 자꾸만 흐려지고 다리 힘이 서서히 풀리는 지경이 되니 이젠 아니다싶어 그만 자리를 끝내고 돌아가자고 일행들을 다그친다. 김 대리가 술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오니 옅은 새벽안개가 머리를 풀어헤치며 대로를 건너 고샅을 향해 숨어들고 있다. 김 대리와 선녀는 약속이나 한 듯 잽싸게 택시를 타고 손을 흔들며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영희는 속이 메스꺼워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선다. 귀동냥으로 얼핏 들은 숙취해소에 좋다던 음료수를 마시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며 중심을 잡기가 힘들어진다. 한 때 육상선수였던 영희는 탄탄한 허벅지근력이 있기에 버티고서는 지구력에는 남다른 탁월함이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별다르게 힘들고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 지기를 거듭하니 보통 어려운지경이 아니다. 선녀와 합승해서 도중에 내려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만둔 것을 후회하며 자리에 주저앉아 혼잣말로 투덜대는데 누군가 어깨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운다.
영희가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합석했던 김 대리 친구가 어느새 나타나 영희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후 택시를 부르고 있다. 영희는 고마운 한편 부끄럽기도 하여 애써 몸을 가누고 있는데 미끄러지듯 택시가 발 앞에 와서 선다. 김 대리 친구가 서둘러 차문을 열고 영희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김 대리 친구는 거꾸러지며 외마디비명과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고 억센 두 팔이 낚아채듯 영희를 감싸 안아 땅바닥에 앉힌 후 택시를 돌려보낸다. 급작스런 사태에 영희는 너무 놀라 정신을 가다듬는데 영희 앞에 서있는 사람은 막이가 분명하였다. 미처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막이는 나뒹구는 사내를 확인사살 하듯 옆구리를 가늠하여 사정없이 일격을 내지르고 영희를 부축하여 사라진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알지 못한 영희는 갑작스런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체 정신 줄을 놓아버린다.
속이 메스꺼워 잠을 깬 영희가 주위를 둘러보니 전혀 다른 그림판이 펼쳐지고 방문이 반쯤 열린 사이로 할머니 한 분이 티브이를 보고 계신다.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열어보니 집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줄줄이 서서 답을 기다리고 있다. 방안의 인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온화한미소를 지으며 들어서서 꿀물을 타 놓았다며 윗목에 있던 조그맣고 앙증스런 주전자와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놋대접을 끌어당긴다. 영희가 어안이 벙벙하여 우물쭈물하자 아, 막이를 찾는 게야? 진작 출근했지, 오늘 휴일이지만 물량이 밀려 특근을 한다는 게야 다들 성수기라 열심히 하는데 반장이 빠지면 안 된다고 서둘러갔지. 그때서야 영희는 끊어졌던 필름을 다시 돌리고 지난밤 있었던 일이 새삼 되살아난다. 아! 그럼 할머니는 막이와 함께 지내시고 다른 가족은 없나요? 음 여기에는 없어, 아버지는 하늘에 있고 어머니는 병원에 있는데 세상과 인연 끊은 지 오래 됐지. 대충 사태를 파악한 영희는 핸드폰을 열어 친구 집에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연락한 후 할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공손하게 한다.
영희는 할머니와 함께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후 설거지를 하고 본격적인 집안청소를 한다. 한사코 말리시는 할머니를 피해 다니며 숨바꼭질 하듯 이곳저곳을 치우다 벽에 걸린 의젓한 소방관모습과 단아한 차림의 여인이 함께한 부부사진을 보며 막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곁에 와 눈시울 붉히며 막이 아버지와어머니인데 내 딸이지. 불의의사고로 남편을 잃은 후 정신을 놓고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다 남편친구들 도움으로 요양원에 있어. 가끔 막이와내가 찾아가지만 눈물만 흘릴 뿐 도통 입을 떼지 않는 게야, 하기야 꽃다운 나이에 그 커다란 시련을 겪었으니 정신이 제대로 있다면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들었겠지. 참, 그 옆에 걸려있는 메달은 막이아버지가 사후에 받은 공로훈장이야, 죽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 있겠냐만 막이가 애지중지 아끼는 물건이라 그냥 옆에 걸어두고 있지. 영희는 갑자기 설움이 밀려와 어쩔 줄 몰라 하며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다 할머니 품에 안겨 흐느낀다. 서로가 상대의 등을 어루만지며 잠시 숙연해지는데 할머니가 먼저 조용히 돌아서서 현관을 향해 걸어 나가신다. 영희도 옷매무새를 고치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뒤따라나가 저희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할머니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참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신세만 지고 가는 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공손하게 인사한 후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를 두고 현관문을 닫는다.
공장에서 퇴근한 막이가 클럽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몇몇 사람이 걱정된 눈빛으로 쳐다본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묻자 경찰이 업소에 다녀갔다는 말과 함께 상무님이 급히 보자고 하셨으니 연락해보라고 한다. 막이는 통화를 한 후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곧 이어 두 사람은 해장국을 앞에 두고 마주앉는다. 야, 까마귀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은데 오늘새벽 네가 건들인 사람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폭행을 당했다고 고소를 한 것 같다. 물론 업소에서 일어난 일 아니니 모른다고 닭발 밀었는데 철없는 누군가 꽈리를 불어대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 쪽에 뒷심 있는 선수가 짱 박힌 것 같은데 섣불리 개기다 호구되기 십상이니 우리도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좋지 않겠니? 조용히 듣던 막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러실 필요 없고요 이번 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생활 하루, 이틀 한 것 아니고 공연히 생사람 잡아 다구리 터트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 애들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탄 것 같고 합석했던 여자가 그걸 마신 것 같습니다. 일행 중 김 대리라는 사람은 업소에 몇 번 들락거려 안면을 텄는데 그날 업소화장실 가는 길에 얼핏 보니 후문으로 나가더라고요. 낌새가 이상해 지켜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들어왔는데 중앙 좌측 홀에서 쪽 팀들과 은밀한 속닥이 타고 가만 보니 예전에 작대기 손댔다 달려서 집행유예 받은 애들이더라고요. 이럴 줄 알고 보조들한테 후까시 병 빼놓으라고 했으며 여자 손님 모발 몇 가닥을 확보해 놓았습니다. 어쩌면 저 놈들이 지레 겁먹고 연막뿌리는 것일지도 모르니 너무 앞서가지 말고 천천히 대응해 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약쟁이 그 애들 서서히 본병 도져 물 흐리기 시작하니 더 이상 클럽 안에 발 못 붙이게 하겠습니다. 대충사태를 직감한 상무님은 알았으니 잘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며 음식 값을 지불하고 급하게 사라진다.
연휴기간 영희는 이런저런 생각과 수없는 망설임을 거듭하다 결국 막이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고 출근을 하였으나 회사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모두가 아리송한 느낌과 표정으로 영희 곁을 맴돌다 사라진다. 야릇한 분위기에 주눅 들어 힘든 시간을 보내고 퇴근 무렵 탈의실에서 만난 청소부아주머니가 오늘 힘들었지? 하면서 말문을 연다. 김 대리가 며칠 전 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교묘히 틀어서 회사에 소문을 퍼뜨렸고 영희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으며 클럽의 종업원과 눈이 맞아 동행했던 사람을 두들겨 패고 길바닥에 팽개친 체 어디론가 잠수를 탔다는 것이다. 동행했던 사람은 클럽종업원을 경찰에 고발했는데 두 사람 모두 종적을 감춰 형사가 뒤를 쫓고 있다는 말을 남긴 체 부디 몸조심 하라고 하며 급하게 사라진다. 너무 어이없는 말에 영희는 김 대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고 전화를 해도 도통 받질 않는다. 한참을 망설이다 선녀와 통화를 한 후 두 사람은 부평공원에 마주앉아 얘기를 나눈다. 따지듯 영희가 김 대리를 몰아세우자 선녀는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며 그럴 사람 아니니 일방적으로 욕하지 말고 네 자신도 한 번 되돌아보라고 어이없는 충고 비슷하게 몰고 간다. 부아가 치민 영희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는 절교를 선언하고 눈물을 훔치며 발길을 돌린다.
영희가 클럽 앞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서성대는데 누군가 곁에 다가와 조용한 기척을 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막이와 눈이 마주치자 북받치는 설움에 겨워 막이를 끌어 앉는다. 조용히 등을 쓰다듬던 막이는 손을 이끌고 근처 커피숍으로 향한다. 영희 얘기를 들은 막이는 내가 알아서 해결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집에 들어가 푹 쉬라는 말과 함께 지금 영업시간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한다. 밖으로 나온 막이는 누군가를 불러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지시하고 다시 한 번 영희 손을 쓰다듬고 업소 안으로 급히 사라진다. 다음 날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영희는 퇴근시간만을 기다리며 시계바늘을 쫓아가고 있는데 말끔한 차림의 막이가 조그만 쇼핑백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선다. 거리낌 없이 막이가 전무님이 계신 집무실로 들어간 후 김 대리 표정이 굳어지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전무님과 마주한 막이는 술병과 앙증맞은 위스키 잔, 머리카락 몇 가닥을 펼쳐놓고 업소에서 일어난 상세한 그림을 펼쳐 보인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전무님은 사태를 직감하고 회사 명예를 걸고 사실을 증명하여 처리 할 테니 그만 돌아가 보라고 한다. 막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까마귀라는 야릇한 명함을 공손하게 책상위에 두고 바람같이 회사를 빠져나간다.
경찰서에 도착한 막이는 김 형사와 마주앉아 쇼핑백을 건네고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다. 김 형사는 폭행 건은 저 쪽에서 고소를 취하했으니 문제될 건 없으나 아무래도 최음제와 납치미수행위는 형사사건이라 내사를 해야 하니 윗선에 보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위층환각파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니 이 번 기회에 모두 잡아들여 싹을 잘라야겠다는 답을 들은 후 막이는 어려우시더라도 수고 부탁드린다고 정중히 예의를 표한 후 발길을 돌린다.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들른 막이는 현관 앞에 여자구두가 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할머니와 영희가 두런두런 얘기하며 주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기척을 하며 들어서자 영희가 반색하고 맞으며 오늘 김 대리가 퇴사했으며 본인의 억울한 사연이 모두 밝혀졌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잘 처리 되서 다행이라며 윗저고리를 벗어 벽에 걸고 대충 씻고나오니 아담한상차림이 기다리고 있다. 세 사람은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밥상을 물리자마자 막이는 출근을 서두르는데 영희가 다가선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손잡고 걷다 영희가 그 동안 내가 보고 싶지 않았느냐고 묻자 막이는 무척 보고 싶었지만 너희 아버지와 약속한 말이 있어 한편 참고 한편 잊으며 살았다는 말을 한다. 깜짝 놀란 영희가 언제 우리 아버지를 만난 적 있었느냐고 묻자 아주 오래 된 일이라고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동그랗게 커진 달 속으로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이 성큼 걸어 들어간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막이는 할머니와 함께 손님맞이를 위한 집안 청소를 하고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정성을 쏟는다. 어찌 보면 막이보다 할머니가 더 분주하고 경황이 없으신 듯 좌불안석인데 어느덧 현관문에 기척이 느껴지고 조용한 노크소리가 난다. 현관문을 열자 영희가 부모님을 모시고 밝은 웃음으로 인사하며 제 집 들어오듯 거침없이 들어온다. 할머니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하는데 행여 뒤질세라 영희 아버님이 할머니 두 손을 마주잡고 허리를 굽히자 영희 어머니는 급한 동작으로 방석을 끌어 할머니 앞에 놓고 앉으시라고 안내한다. 엉거주춤 할머니가 앉자 두 사람 모두 할머니에게 예의 갖춰 큰 절을 하고 뒤이어 영희도 공손하게 절을 한다.
좁은 집에 사람이 들어오니 공간이 별로 없어 집안 곳곳이 훤히 보인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막이 부모님 사진과 상패를 둘러보던 영희 아버님 눈시울이 붉어지고 어머니 뺨 위로 영롱한 이슬방울이 묻어나고 있다. 영희 아버님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말문을 열며 언젠가 막이가 군에 입대하기 전 저를 찾아 왔었지요. 그 때 영희는 대학에 입학 했을 때라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제가 만류 했으며 제대한 후 직장을 구하면 한 번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딸 가진 부모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후회를 두고두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나야 될 사람은 어떻게든 하늘이 인연을 만들어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배웠습니다. 서로 필요한 소중한인연이 부디 영원히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고 온화한미소를 짓는다.
경기도 파주의 한적한 산골에 위치한 요양원에 흰 눈이 쌓여 가뜩이나 인적 없는 길은 동장군이 여기저기 혀를 빼물다 날름거리며 들판을 가로질러 산허리를 돌아나간다. 영희와 막이는 꽁꽁 얼어붙어 손바닥이 쩍쩍 달라붙는 철문을 비집고 들어가 면회신청을 한다. 들고 간 음식보자기를 풀어 찬합을 열자 따스한 기운이 배어나오고 여린 김이 살포시 피어난다. 이윽고 요양보호사 손을 잡고 단아한 차림의 여인이 묵묵히 시선을 내린 체 걸어 나와 두 남녀 앞에 가만히 앉아 눈을 맞추고 있다. 영희가 방그레 웃으며 손을 잡자 막이를 지그시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어머니 저희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머니 며느리입니다, 하고 표정을 살피며 조그만 미소를 짓는다. 찬찬히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여인이 손짓으로 펜과 종이를 부탁하는 것 같은데 요양보호사는 벌써 눈치 채고 급히 종이와 색연필을 들고 온다. 커다란 글씨로 ‘영특한 까마귀 행복하게 살고 힘차게 날아라, 꼭 필요할 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라는 글씨를 써서 두 사람 앞에 놓고 눈시울을 적신다. 뒤이어 세 사람이 부둥켜안고 흐느끼며 떨어질 줄 모르는데 요양보호사가 다독이며 상황을 정리하고 가지고 온 음식 다 식겠다고 보채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충의 상차림을 하고 둘러앉는다. 조촐하지만 오손 도손 도우며 나름대로 살아가는 모습에 서로 화답하고 상을 물린 막이와 영희는 어머니 사랑해요, 부디 건강 하십시오!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적어 건넨다.
먼발치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창문 밖으로 넘겨다보던 여인은 손을 흔든다. 동료들도 번갈아 손을 흔들고 기척을 느낀 막이와 영희도 돌아서서 손을 흔든다. 두 사람이 사라진 길 위로 또 다시 동장군이 설쳐대는데 요양원창문을 휘감던 바람소리에 묻어나는 뜻밖의 소리에 모두는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막이 아버지 알고 계신가요? 우리 막이가 결혼을 한답니다, 부디 들었으면 축하해 주십시오! 여인의 낭랑한 소리에 요양보호사는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며 외친다. 세상에 기적이야 기적, 드디어 말문이 터진 게야!
요양원
당신 두고 돌아선 발자국은 날이 갈수록 깊어집니다
한두 번 오가는 길도 아니지만 마음의 짐은 늘어나
시냇물에 띄우고 마을 어귀에 숨기고 산모퉁이에 버려도
헤어질 때 받은 보퉁이는 집 안 곳곳을 누비고 다닙니다
기억이 머물지 않는 당신은 아픔을 모르고 울지만
아프지 않아도 복받치는 설움이 차고 넘칩니다
애달픈 이별연습을 시키는 것인지
그렇게 해서라도 오만가지 정을 끊으려는 것인지
사람의 도리라는 것은 아무런 답도 없다는 계산을
당신은 꿰뚫고 계신건지요
윗목에 처박아둔 보따리가 마루턱에 걸터앉아도
아직 어리석기에 그러한 셈법을 모르고
천진한 아이 같을 뿐
순식간 이별 여행 떠나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질지 못한 당신도 정신 줄을 놓아 버렸는데
연습 할 채비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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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양원이란 보내지도 말고 가지도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맘 대로 되지는 않겠지요...
가족과 가정에 피치 못할 사정 있을 때 산 사람은 살아야 되고
그 곳에도 사람은 살아가고 있으니...
가막이가 까마귀군요.. 슬프고 아름답네요.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일필휘지로 펼쳐나가는 현대판 고전소설처럼 특이하고 재미있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