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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성지 - 천국의 북소리가 연이어 울리다 |
새남터 성지의 주소는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옛날에는 이곳을 ‘노들’ 또는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렀는데 ‘사남기’는 ‘새나무터’를 한자로 나타낸 말이다. ‘새나무터’의 ‘새나무’란 란 억새와 나무를 합한 말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까지는 이름 그대로 이곳에는 억새와 나무가 무성했다. 억새와 나무가 무성한 곳, 그래서 ‘새나무터’, ‘새남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 새남터 모래밭은 군사 훈련장이고 국사범(國事犯) 등 대역죄인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을 들 수 있는데, 세조 2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 여섯 신하가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예종 때 남이 장군도 이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조선 후기 한국천주교회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 새남터에 뿌려졌는데 이름과 행적이 밝혀진 것만도 모두 14명이나 되었다.
첫 순교자는 주문모(朱文謨) 야고보 신부였다. 원래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사제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목자 없는 양떼들이었다. 그러나 신자수가 점차 늘어나자 그 양떼들은 목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1795년 북경 교구는 이런 실정을 알고 우리와 모습이 비슷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첫 외국인 사제였다. 조선에 입국한 주 신부는 그해 4월 5일 최초로 이 땅에서 부활대축일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한양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6,000명으로 신자의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한 배교자의 밀고로 신부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자신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겪자 이를 보다 못하여 자수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의금부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결국 이곳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되었다. 군문효수란 나라에 큰 죄를 지은 이의 목을 베어 경계의 뜻으로 군문에 매달던 형벌이다.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이다.
신유박해가 끝나고 30년이 흐른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립되었다.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만난을 무릅쓰고 부임하려 했으나 끝내 1935년 입국 도중에 병사했다. 다음 해인 1836년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고, 1837년에 조선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들어왔다. 이때 신자 수가 9,000 여명으로 증가하였다. 모방 신부가 내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세 소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을 선발해서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모진 박해는 다시 이어졌다. 조정에서는 서학의 원흉 외국인 사제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결국 이들 세 선교사들은 양떼들을 위하여 새남터에서 기꺼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것이 1839년 기해박해 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난 김대건 안드레아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고 큰 포부를 가지고 밀항 선박 라파엘 호에 몸을 싣고 조국을 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845년 10월 12일 익산 나바위 인근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입국 후 그는 조국의 복음화에 힘쓰면서 선교사를 모실 것을 모색하다가 1846년 6월 관헌에 체포된다. 수십 차례 문초를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마침내 김대건 신부는 군문효수형을 받고 이곳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지 불과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 신부의 나이 26세였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들을 기록한 기해일기를 쓴 현석문 카롤로도 이곳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병오박해였다.
철종 임금이 재위하는 동안(1849~1863) 조선천주교회는 한동안 평화를 맛 볼 수 있었고, 교세도 크게 확장하였다. 이는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순조의 비 순원왕후 덕분이었다. 신자수가 1855년에는 14,000여명에 이르고, 신학교도 세워졌다. 그러나 순원왕후의 수렴청정도 왕후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1857) 철종이 승하(昇遐)한 후 고종 임금이 즉위하자(1863) 상황은 백급반전 되었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를 거두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제의하였는데 대원군도 이를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는 듯하다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
병인박해는 1866년에 박해가 시작되어 18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 동안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의 6명의 프랑스 사제가 순교하였고,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 등 지도적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서소문밖 성지가 평신도의 순교지라면 새남터는 사제의 순교지였다.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성직자는 모두 열 네 분인데 이곳 새남터에서 열 한 분의 성직자들이 순교하였다.
조선시대, 새남터의 저녁풍경은 용산 8경 중 하나였다고 한다. 어쩌면 이곳 새남터에서 돌아가신 순교자들의 피 때문에 이곳 저녁풍광이 지금도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에 하늘도 슬픔을 감추지 않고 천둥소리로 대답했던 곳, 바로 이곳 새남터의 연이은 순교의 북소리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천주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새남터 성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 성인를 배출한 성지이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이라고 하는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1950년 이곳을 순교 기념지로 지정했고, 1956년에는 용산구 이촌 2동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현양비를 세웠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다.
현재의 새남터 기념성당은 1984년 한국 순교복자 성직수도회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인 1987년에 완공하여 봉헌한 성전이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현재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새남터 기념 성당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한국 전통 양식의 새남터 순교 기념성당은 순교자의 모후를 주보로 모시고 있으며, 2009년 로마 성모 대성당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한 성당 및 순례지’로 선포되어 여러 나라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례한다.
12시 경에 도착하니, 우선 거대한 한옥 3층 건물이 주위의 고층 아파트에도 주눅이 들지 않고 위압적으로 버티고 서 있다. 건물이 너무 크고 건물 앞 공간이 좁아 카메라에 쉽게 다 담을 수 없다.
성당 정면에는 두 폭 병풍 같은 것에 십자가 모습의 예수님 고상이 음각으로 조성되었고 그 아래 순교 현장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빨마 가지가 교차되어 있다. 양쪽에는 촛불 상자가 있고 그 앞에는 형구들이 놓여 있다.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 라는 핏빛 문구가 섬뜩하다.
건물의 오른쪽에는 김대건 신부의 석상이 서있고 그 옆의 건물 추녀 밑에는 오석으로 된 새남터 순교기념 대성전 머릿돌이 있다. 여기에는 1984년 5월8일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명이 새져져 있다. 성당 주위에 곳곳에 삼지창을 세워 놓아 삼엄한 느낌을 준다.
성전 건물의 왼쪽에는 성모상과 주문모 신부의 흉상이 서 있고 옆에 지하 새남터 성지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건물 앞 둘레에는 돌아가며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어 있다.
성전 내부
성전 안을 들어가면 성수대가 있다. 그러나 실제 사용하지는 않는 듯, 기도문만 있고 성수 없음이라는 스티커가 담겼다.
“주님 이 성수로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정면 중앙 감실 위에 십자 고상 이 높이 걸렸고 , 감실 좌우 벽에는 오석으로 제작한 벽화 ( 방오서 마르가리타 작 ) 가 있는데 왼편 벽화에는 예수님과 103위 성인들을 , 오른편 벽화에는 성모자상과 새남터 순교자 14명을 담았다 . 감실 앞쪽에는 제대와 독서대 가 있다 . 제대의 좌우 열주 바깥은 왼쪽에는 성요셉 부자상이 , 오른쪽에는 성모님 모자상 이 있다 .
제대 앞쪽 좌우로 성인의 유해 성광이 안치되어 있는데 왼쪽은 성 앵베르, 성 모방, 성 샤스탕, 성 베르뇌, 성 브르트니에르, 성 블리외 루드비코, 성 우세영 알렉시오, 성 도리 헨리코 8인이며 오른쪽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이다.
왼쪽 8인의 유해 성광 밑에는 제대 왼쪽 벽화에 나오는 천상에서 예수님 103위의 위치와 명단을, 오른쪽 김대건 신부 성광 밑으로는 새남터 순교자 14명의 위치와 이름을 밝혔다.
열주 바깥에 공간이 있어 통로가 되어 성전 내부는 엄청 넓다. 특이하게도 창문이 없고 벽면에는 큼직한 액자형 십자가의 길 14처가 걸려 있다. 십사처의 나오는 관원의 복장도 한복차림이다. 양쪽 통로 맨 앞에 성 요셉부자상과 성모자상이 보인다.
소성전과 그 부근
소성전으로 가는 통로와 계단 주위로는 전시관을 방불하게 하는 성물, 성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성화는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현시하신 예수님 모습이다. 성체로부터 발산되는 붉은 빛과 창백한 빛은 피와 물을 상징하는데 피는 영혼의 생명이요, 물은 영혼을 이롭게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수녀는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웃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방법은 첫째 행동이요, 둘째 말이요, 셋째 기도라고 하셨다. 이 성화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요한 23세의 시성 기념으로 성화세계교회미술연구소에서 제작한 것이다.
1987년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서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을 지을 때의 봉헌문이다. 봉헌하신 분들의 명단과 내역을 망라한 것이다.
이순이 누갈다의 십자고상과 옥중편지도 전시되어있다. 누갈다의 옥중편지는 경주 진목정 성지의 순교 복자 김종륜 루카가 필사하여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그림 선교사들의 출발은 1864년 7월 15일 파리외방선교회에서 조선으로 파견되는 4인의 선교사를 보내는 예식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선교사는 유스토 브르트니에르 신부, 헨리코 도리 신부, 루도비코 블리외 신부(이상 세남터 순교) 위엘 신부(보령 갈매못에서 순교)이다. 신자들은 선교사의 발에 입을 맞추어 존경심을 나타낸다. 예식의 마지막에는 선교사의 출발을 위한 ‘이별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이 예식이 끝나고 이들은 바로 마르세이유로 열차를 타고 조선으로 떠났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 그림은 이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화가 샤르르 루이 드 쿠베르탱이 그렸으며 파리 외방선교회 총본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 녹색 원안의 얼굴 좌로부터 위엘, 블리외, 도리, 브르트니에르 신부)
소성전 출입문 앞에는 뜨거운 심장의 예수성심상이 서 있고 기둥에는 서울의 가톨릭순례의 길이 국제 순례지임을 교황청이 인정하는 교령이 붙어 있다.
새남터 기념관
새남터 성지 기념관은 2006년 9월3일 지하 주차장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으로 새남터 기념 성당 지하에 있다. 새남터 순교자 14명과 관련된 각종 자료와 희귀한 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는 주문모 신부 흉상과 성모상이 자리한 곳이다.
기념관 안쪽의 유해실에는 다른 지역에서 순교한 5위(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성 황석두 루카,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이명서 베드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사진촬영 금지)
새남터 순교성지 근처에는 서울역이 있어서 한강철교를 통해 수많은 기차가 다닌다. 기찻길 방음벽에는 대형 유리화 ‘김대건 신부의 축복’(조광호 신부, 2018년 작)이 있는데 새남터에서 순교한 복자 주문모 신부와 성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12위 성인들 모습을 담았다. 가운데 있는 김대건 신부는 손을 들어 한국교회 신자들과 새남터 순교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을 향해 축복해 주고 있다. 교황청은 2018년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공식 선포하며 새남터 순교성지를 일치의 길에 포함하였다.
황사영의 기록을 보면 순교 현장에 무지개가 나타난다고 했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놓은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래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황사영의 '백서' 중)
13시 20분. 다음은 용산 성심신학교이다. 이동하는데 약 30분. 13시 50분쯤 도착해보니 용산 성심학교는 다름 아닌 성심여자고등학교였다. 따라서 학생들이 수업을 하는 시간이라 성지순례를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사전에 미리 생각하지 못한 점이 또 드러났다. 1차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순례시에 방학기간이라서 순례가 허용된다고 했을 때 학교가 성지인 곳은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시행착오를 또 되풀이한 것이다. 스스로 실망스러웠다.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서서 당고개 성지로 이동했다. 13시 50분쯤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