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9. 돈황석굴/ 塑像과 벽화
시대모습 그대로 담은 막고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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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과 명사산> |
사진설명: 막고굴 맞은 편에서 본 석굴 전경. 힌두쿠쉬 산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바미얀 석굴과 명사산을 병풍삼아 서 있는 막고굴이 비슷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
돈황을 포함한 서역(西域) 지방은 과거 중국 내지(內地)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파라다이스’로 비춰졌다. 중국인들이 불교의 안락 처로 ‘서방’(西方) 정토를 이야기하고, 당나라 현장스님(?~664)이 ‘서쪽’으로 구도 여행을 떠난 데서 이런 분위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서역’은 거의 ‘불교의 고향’과 같은 의미였다. ‘타오르는 횃불’을 뜻하는 돈황(敦煌)은 ‘서방’정토로 가는 관문이란 점에서 특히 주목 받았다. 한대(漢代) 이래 중국에서 서방으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고, 고대 실크로드를 따라 가는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중국 내 마지막 장소가 돈황이었다. 무시무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려는 순례자·상인·군인들은 정신적 불안과 육체적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366년 낙준스님이 처음으로 개착한 이래 확장을 계속하던 막고굴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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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곽말약이 쓴 '막고굴' 현판 밑에서 본 석굴. |
‘서방’에서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공포의 사막’(타클라마칸)을 무사히 건너게 해준 데 대해 석굴 사원에 들러 감사드렸다.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빈번하게 왕래한 결과,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수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캐러밴이 옥문관(玉門關)을 -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 중 하나로 돈황 북서쪽 90km 지점에 있다. 다른 한 관문은 남서쪽의 양관(陽關)이다 - 통과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첫 번째 오아시스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식료와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다. 그만큼 돈황은 중요한 도시였다.
2002년 9월27일. 꿈에도 그리던 돈황 막고굴 내부를 돌아다녔다. 이 석굴 저 석굴 순례하며 그 옛날 구도자들과 상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실크로드 상의 수많은 오아시스 도시들이 침략과 사막화로 폐허화 됐는데,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약 1천년 동안 조성된 돈황의 벽화(壁畵)와 소상(塑像)들만 이렇게 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지켜준 것일까, 이곳에 들어와 기도하고 간 무수한 사람들의 정성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건조한 자연조건이 석굴을 지켜준 것일까. 끊임없이 쏟아지는 명사산의 모래가 보호해 준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결합돼 지금까지 전해 온 것일까.
당나라 벽화 압권…비천도 1,50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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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막고굴 제319굴에 있는 당나라 시대 보살상. |
막고굴에 남아있는 석굴 수는 492개. 시대별 개착 수를 따져보면 당나라 시대 조성된 것이 가장 많다. 오호십육국 시대(304~439) 7개, 북위 시대(386~534) 11개, 서위 시대(535~556) 11개, 북주 시대(557~581) 12개, 수나라 시대(581~618) 79개, 당나라 초기 40개, 당나라 전성기 81개, 당나라 중기 46개, 당나라 말기 60개, 시기구분 모호한 당나라 시대 5개, 오대 시대(907~979) 5개, 송나라 시기(960~1277) 34개, 서하 시대(西夏. 1032~1277) 64개, 원나라 시기(1271~1368) 9~13개, 시대를 알 수 없는 굴 10개 등 모두 492개 석굴이 현존한다. 당나라 때 232개로 가장 많이 조성됐다.
어느 굴이나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 정면 안쪽의 수미단(須彌壇) 위에 소상이 모셔져 있고, 사방 벽면은 벽화로 메워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굴 안쪽에는 별도의 감실이 있으며, 그 안에 부처님 상이 놓여져 있는 경우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소상(塑像)은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唐) 초기의 321굴·322굴, 당 전성기의 449굴·328굴·319굴·130굴·79굴, 당 중기의 194굴·159굴, 당 말기의 12굴 등에 안치된 소상들이 특히 아름답다. 본존불이든 보살상이든 모두 풍만하고 표정에 여유가 있으며, 인간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아름다움이 각 소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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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막고굴 제130굴에 안치돼 있는 미를대불. 당나라 때 조성했다. |
벽화도 당나라 시대에 그려진 것들이 확실히 눈에 띈다. 당나라 시대 조성된 석굴에 가면 마치 꽃밭에 들어간 느낌이 들 정도다. 서하 시대 그려진 벽화들도 특색은 있다. 한때 돈황 지방을 지배했던 서하는 천불동을 파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굴도 만들었다. 서하 시대 만들어진 64개 석굴 가운데 북위의 벽화 위에 자기들(서하) 그림을 그린 것도 있고, 송나라 벽화를 그대로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돈황 벽화를 대표하는 그림은 비천(飛天)이다. 많은 굴에 그려진 비천은 확실히 아름답다. 모두 생동감 있고 날렵하며, 방금 물 속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올라 간 듯 보이는 비천도 있다. 비천은 당나라 석굴 뿐 아니라 다른 시대 굴에도 그려진 게 있다. 벽면과 천정의 중간에 경쾌한 자태를 드러내 보이는 비천, 수미단 뒤 벽에 그려진 비천 등이 있다. 248굴·305굴·419굴·329굴·390굴의 비천은 특히 아름답다고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막고굴 492개의 석굴 속에 그려진 전체 비천의 수는 대략 1,500개 정도라 한다.
모든 굴의 벽면을 메우고 있는 그림들은 대부분 경전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285굴은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그림이다.〈대반열반경〉제16권에 설해진, 500명의 강도가 성불한다는 ‘오백강도성불도’를 - 일명 득안림(得眼林) - 그린 것인데, 경전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묘사돼 있다. 옛날 인도에 500명의 강도가 떼 지어 다니며 약탈을 자행하자 국왕이 이들을 체포했다. 눈알을 빼내고 험한 산으로 추방해 버렸다. 강도들은 고통에 못 이겨 울부짖으며 부처님께 하소연했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눈을 보이게 하자,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져 득안림(得眼林)을 이루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 모두 성불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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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85굴에 있는 '오백강도성불도'의 일부. |
285굴엔 이런 내용이 8장면에 나눠 그려져 있다. 500명의 강도가 무리지어 강도질 하는 장면, 국왕이 군대를 파견해 모두 잡아들이는 장면, 국왕이 강도들에게 극형을 내리는 장면, 강도들의 눈알을 도려내는 장면, 강도들을 험한 산으로 추방하는 장면, 부처님이 약초를 발라 강도들의 눈을 뜨게 한 후 설법하는 장면, 강도들이 참회하고 출가 수도하는 장면, 실명(失明)했을 때 짚고 다닌 지팡이를 던지자 ‘숲을 이루게 된 장면’(得眼林) 등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렇지만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시대 모습’도 벽화에 반영돼 있다. 풍속과 생활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것. 전투하는 모습이 그려진 경우도 있고, 농경이나 어로(漁撈) 상황도 벽화에 들어가 있다. 사회현상 전반이 다뤄지고 있다. 445굴의 체발(剃髮)과 결혼식 장면, 9굴의 당대 풍속, 85굴의 잡극, 220굴의 호선무(胡旋舞), 217굴의 군사훈련도, 172굴의 악기(樂器) 그림 등이 대표적인 예다. 막고굴 벽화는 이런 점에서 과거를 연구하는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 출서역도’ 눈길
벽화는 내용 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북량(北凉. 397~439)에서 북주에 이르는 시기의 벽화는 대체적으로 종합적인 안배가 돼 있다. 네 벽면의 중간에 불상과 불전도(佛傳圖. 부처님 일생을 그린 그림)가 있고, 그 아래 공양행렬이 있으며, 벽 위쪽에 천궁기악(天宮伎樂)이 있다. 반면 당나라 초기에 그려진 벽화의 인물은 전대에 비해 정교하고, 더욱 사실적이며, 산수화가 배경으로 깔려있는 것이 특색이다.
당 초기에 그려진 벽화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323굴에 있는 ‘장건 출서역도’(張騫出西域圖)다. 기원전 139년 한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기원전 114)이 서역 대월지(大月氏. 현재의 아프가니스탄)로 떠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대월지로 가는 길은 위험과 곤란이 중첩된 길이었다. 한나라의 숙적 흉노가 서역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장건은 감보(甘父)란 호인(胡人)과 100여명의 종자를 데리고 감숙을 향해 출발했다. 흉노가 이들을 놔줄리 만무했다. 장건 일행은 붙잡히고 말았다.
흉노왕 선우는 일행이 월지로 가는 사절임을 알고 “월지국은 우리의 북쪽에 있다. 한의 사자를 어떻게 쉽게 통과시킬 수 있는가”며, 장건을 포로로 잡았다. 10수년을 포로로 잡혀 흉노족 아내까지 맞아들인 장건이었지만 한 무제의 명을 잊은 적은 없었다. 어느 날 가까스로 탈출한 장건은 서쪽으로 간 지 수십일 만에 대원국(현재의 페르가나)에 도착했다. 강거(사마르칸드)를 거쳐 월지에 도착한 장건은 월지국 왕을 설득했으나, 왕은 한나라와 군사적 동맹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만 가슴에 가득 안은 채 귀국하던 장건은 또 다시 흉노족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기회가 왔다.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고 후계자 다툼이 일어난 것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한 것. 감보와 흉노인 아내를 데리고 원삭(元朔) 3년(기원전 126) 무사히 한나라로 귀국한 장건은 무제에게 서역 사정을 낱낱이 보고했다. 당시 장건이 무제에게 보고한 서역 사정은〈한서〉‘서역전’에 전한다.
‘대월지와 연합해 흉노를 공격한다’는 목적을 이루진 못했지만, 장건의 서역행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신천지를 중국인에게 처음으로 인식시켰다. 그가 ‘실크로드 개척자’로 대접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서〉에는 그의 서역행을 ‘장건의 착공(鑿空)’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도로를 만든 사람이라는 뜻. 상념을 정리하고 막고굴을 빠져나왔다. 아침 일찍 들어왔는데, 나오니 햇살은 이미 서쪽에 완연히 기울어져 있었다. 차를 타고 월아천(月牙泉)이 있는 방향으로 출발했다. 고개를 아예 막고굴 쪽으로 돌리고 달렸는데도 ‘아쉬운 마음’이 하염없이 가슴 속에 차 올랐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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