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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리랑' 드높여 - 세계에 자랑하는 무형문화재 |
거국적으로 진흥에 진력 이철우(李喆雨) 코리아음악연구소 소장 작년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7회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위원회에서 전통민요 '아리랑'이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록됐다. 한국에서는 종묘제례와 종묘예약, 판소리, 처용무(궁정에서의 무악), 줄타기, 택견 등에 이어 15건째다. '민요 아리랑'에서 등록된 것은 아리랑의 뿌리라고도 일컬어지는 강원도 정선아리랑, 전라도 진도에 전해지는 진도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등 특정지역의 것에 그치지 않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문구가 앞이나 뒤에 들어가 있는 모든 아리랑이 대상임을 의미한다. 세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다양한 형태로 계승되어 온 것, 즉 해외에 이주한 동포에 의해 전해진 아리랑도 포함된다. 등록된 세계무형문화유산에는 두가지 타입이 있는데, 하나는 앙코르와트나 고구려벽화고분같이 그 자체의 보호를 조성하기 위한 지정이다. 또 하나는 아리랑처럼 평소에는 당연하게 접하고 있는 것이 실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것으로 새롭게 재평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다. 아리랑의 등록으로 한국문화청은 빠르면 내년부터 15년에 걸쳐 336억원(약 25억6000만엔)을 투자하여 아리랑의 아카이브(기록보존관) 구축, 아리랑의 상설·기획전 개최, 학술조사·연구 지원, 아리랑을 테마로 한 지방자치체의 페스티발 후원 등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서민의 희노애락을 노래한 민요 아리랑이 이제 세계무형문화재가 된 것을 계기로 재일동포도 전통 아리랑을 비롯하여 '일본 속의 아리랑'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산재한 자료를 수집·보존하여 의식적으로 계승·발전시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단군 이전부터 한민족이 단군을 시조로 역사의 기록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민요 아리랑은 단군 이전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정치나 문자가 없는 시대에서도 말을 통해 인간의 생활, 정서, 일상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서 '삼국지위서'에 따르면, 기원전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 예(濊)의 '무천(舞天)', 마한의 5월 파종와 10월의 수확이 끝났을 때의 행사는 모두 제천의식과 결부된 부락 단위의 집단적 가무였다고 한다. 이것이 한반도 가무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민요는 구전이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생활과 일체로 길러진 민족예능 '우리민족은 노래와 함께 태어나 노래와 함께 인생을 마친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유사 이래 가무를 더없이 사랑하고, 노래·춤·생활이 일체화되어 왔다. 이는 한반도의 민족예능의 특징의 하나이며 음악은 춤을 수반하므로 반드시 강박(強拍)으로 시작되는 것도 특징이다. 한반도에는 '도라지', '양산도' 등 많은 민요가 있지만 민요 아리랑은 앞이나 뒤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후렴이 들어가거나 곡명에 아리랑이 붙음으로써 아리랑이라 규정하고 있다. 현재 '전통 아리랑'은 100종류를 넘고, 그 가사에 있어서는 3000종을 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전국에 분포되어 아리랑 민요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기원 100설 시는 3천여수를 넘어 - 민중의 한(恨)·사랑 배어나 기원에 대해서는 '아리랑 백설'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많고 정설은 없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5설만 소개하겠다. ①고대설 아리나(阿利那) 내지는 아리(阿利)라고 하는 말은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기본사에 자주 나온다. 고어에서 말하는 아리란, '길다'는 의미로 나(那)는 '물'을 의미했다. 농경민족의 발생의 근원지라고도 할 수 있는 긴 강(아리나)은 출생지이자 행복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것이 하천에 정주하는 '아리라'의 문화를 낳아 우리민족의 신앙과 함께 발전하여 아리랑 문화가 되고 사상이 됐다. ②알영(閼英, 사람 이름)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비 '알영'이 알영정(閼英井)이라는 샘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 '알영'을 비유하여 '아리영'이라 불렀던 것이 '아리랑'으로 변화했다. 남북 모두 많은 순애물 이야기 전설 ③아리랑(我離郞, 사람 이름)설 조선시대에 전해진 설. 리랑(離郞), 성부(成婦)라고 하는 젊은이의 순애와 용감한 행동을 칭송하여 리랑이 숨을 거둔 '고개'를 '아리랑'이라 이름지었다. 리랑과 성부를 주인공으로 한 다양한 전설이 남북에 가장 많은 것은 흥미 깊다. ④아랑(阿娘, 사람 이름)설 밀양지방에 옛부터 전해지는 '아랑'이라는 효녀 딸의 전설. '아랑'은 미목이 수려하고 학문에 뛰어난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평판이 난 딸이었지만, 기혼자를 연모하여 그 남자를 위해 비극적으로 목숨을 끊게 된다. 아랑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의 마음이 '아랑가'가 되고, 그 밖에 밀양에서의 전설로부터 일찍이 '밀양 아리랑'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하는 것. 지금도 밀양에 아랑의 전설과 관련한 아랑각(阿娘閣)이 있다. ⑤아이롱(我耳聾)설 조선시대 말기의 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부흥공사 때,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했기 때문에 민중이 오히려 "귀머거리가 되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의미를 담아 불렀다는 '아이롱'으로부터 '아리랑'이 됐다. ■□ 타입도 다양 지역이나 생업과 결부 전국적으로 불리고 있는 아리랑은 본조 아리랑, 긴 아리랑 등이 유명하고, 지역이 처음에 붙는 아리랑으로서는 서도아리랑, 남도아리랑(서도란, 평안도·황해도 지방의 총칭. 남도는 전라도·경상도 일부의 총칭), 도 이름이 붙는 것은 강원도아리랑, 경상도아리랑, 함경도아리랑, 제주도아리랑 등이 있다. 시 이름이 붙는 것은 정선아리랑, 해주아리랑, 통천아리랑, 밀양아리랑, 영천아리랑, 원산아리랑(신고산타령) 등이 있고, 내용이 타이틀에 붙는 아리랑으로서는 삼아리랑(삼이란 인삼을 일컬음), 봉화아리랑, 초동아리랑(초동이란 잔디를 깍는 소년을 일컬음), 냉상묘아리랑(냉상묘란 농법의 하나), 아리랑세상(한오백년) 등이 있다.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아리랑은 구전이기 때문에 정해진 형식도 악보도 없이 여러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계승되고 시대적으로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괄하여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소리꾼이 노래하는 통속적인 민요 아리랑과 서민이 노래하는 토속적 이리랑(향토민요)으로 나누면 나누기 쉽고, 또 지역적인 특징을 음계로 분류함에 따라 경기요, 남도요, 서도요, 동부요, 제주도요로 전국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용도 농요, 어요, 생활요, 동요 등으로 나누는 방법이 있다. ■□ '본조'의 탄행 생명력, 놀라운 부활 - 나운규(羅雲奎) 감독의 영화 대히트 1926년작 영화 주제가로 1926년에 발표된 나운규가 감독·각본·주연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것이 '신아리랑'으로 그것이 '본조 아리랑'이 됐다. 이 영화는 한반도에서 해방 전에 제작된 150편 정도의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서 평가가 높다. 영화는 서울 종로의 단성사라는 영화관에서 10월1일에 개봉하여 2년 반의 롱런 상영을 하고, 그 후에도 지방의 모든 영화관에서 상영됐다. 일본에서도 상영했지만 반일적이라 하여 나중에는 금지됐다. 당시의 기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단성사 앞에는 인산인해로 북적거렸다. 상영시간 훨씬 전부터 티켓은 매진. 티켓을 사지 못한 사람은 난리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끝날 때마나 밀고 들어가는 사람과 밀고 나오는 사람들로 대단했었다" "3·1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후, 잔인한 고문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주인공이 일제경찰 부하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밧줄에 묶여 노을에 물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객석이 눈물바다가 됐다고 한다.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기마대 순사가 늘어서고,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신아리랑'의 작사작곡자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가를 나운규가 시나리오의 일부로 생각했던 점, 레코드에 취입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던 점(나중에 레코드가 많이 나오지만)도 있다. 나아가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기 위해 제작을 일본인 경영의 '조선시네마'로 하고, 감독을 가명인 츠모리 슈이치(津守修一), 시나리오도 나운규의 호 춘사(春史)로 하는 등 스탭을 일본인 중심으로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아리랑'의 작사는 나운규임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운규 자신, "거기서 전에 들었던 멜로디를 떠올려 작사했고, 작곡은 단성사 음악대에 맡겼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나운규가 시나리오를 썼을 때 '신아리랑'의 가사를 5절까지 작사하여 발표했다. 그리고 그 5절의 가사가 불온하다 하여 나중에 검게 지워져 발매된 레코드도 있었다. 나운규가 작사한 '신아리랑'의 히트와 함께 그 후 같은 멜로디로 수많은 작사가 나왔다. 나운규 작사에 의한 '신아리랑' 1절의 가사가 실은 '전통 아리랑'을 포함하여 3000종류 이상 불리고 있는 모든 아리랑의 내용으로 통하는 님의 정신을 부른 명가사인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고 부르는 십리는 일본식으로 말하면 이치리(一里, 1리는 4km). 나를 버리고 나시는 님은 바로 후회한다는 의미로 직역할 수 있지만 앞 부분의 '고개를 넘어간다'고 하는 고개는 지상의 고개가 아니라 마음 속의 고개를 말한다. 마음의 고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싸움이자 시련이다. 그리고 갈등이자 수난을 의미한다. 님의 정신은 배려하는 마음 그러한 인생의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사랑하는 님의 정신, 즉 아리랑의 정신이 있는 것으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선생님과 같이 님은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며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아이들이자 재일동포에게 있어서는 그리운 고향이기도 하다. 즉, 아리랑에서 불리고 있는 님의 정신이란 배려이자 희망이며 미래인 것으로,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히 하는 마음의 버팀목인 것이다. 나운규가 작사한 '신아리랑'을 작곡한 것이 당시 단성사 음악대의 책임자였던 김영환(金永煥)씨다. 당초는 경기지방(서울)의 음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서울아리랑', '경기아리랑'이라고도 하며 나운규가 지었기 때문에 통칭 '나운규의 아리랑'이라고도 했다. '신아리랑'에 민요적 요소가 가미되어 지금의 '본조 아리랑'으로 정착된 것이 1930~40년경이라 생각된다. 영화 제목을 '아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제목으로 한 것이 이 영화의 최대 히트의 요인이라 하지만, 나운규는 '전통 아리랑'의 생명력, 영향력도 당연히 염두에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 아리랑'을 전하는 방법이 지역적인 구전방법이었던데 비해 '신아리랑'은 영화라고 하는 매체로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거기에서 '본조 아리랑'이 태어나고, '전통 아리랑'이 재평가됨으로써 일본 식민지하의 민족문화 말살정책 아래에서도 미발표되거나 미발견된 '아리랑'이 잇따라 민간에서 발굴되고 보존되어 후에 전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오늘에 이른다. 필자 주석 = 아리랑과 일본, 재일동포와의 관계에 대해 기회를 다시 갖고 소개하겠다. ■□ 민요 '아리랑'의 각종 CD와 영화 상영, 유네스코 등록 기념콘서트에 관한 문의: 홈페이지: arirangchosun.web.fc2.com e메일: leekorea@mx6.tiki.ne.jp 주소: (우)182‐0025 도쿄도 쵸후시 타마가와(東京都調布市多摩川)2‐12‐2 K.A.C내 재일문예구락부 '아리랑 벗의 모임'(대표: 이철우) ( 민단신문 2012-12-30 ) |
첫댓글 일본에서 아리랑 문화활동에 전력을 다하시는 작곡가, 이철우님을 여기서 뵈니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