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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욥을 참소하는 사단 (욥1:4-11)
초점:완전주의 양심의 문제점
요 약
아무리 순전한 양심일지라도 진리의 연단을 거치지 않는 양심은 늘 약점을 지닌다. 즉 복음을 보지 못하고 완전주의에 빠진 양심은 사단의 참소에 걸려들게 된다. 이러한 심령에 사단은 침투하여 온갖 고자질을 하여 정죄하여 시험을 준다. 사단의 참소를 받는 양심은 지나친 성찰로 인하여 불의는 물론 지나치게 폄하하여 옳다 하는 것으로도 자기를 책하게 만든다. 사단은 욥을 폄하하나 하나님께서는 욥을 칭찬하셨듯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보는 복음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본 문)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4-11)
(강 해)
지난 시간에는 양심의 정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양심이 거느리는 복이 얼마나 많으며 따라서 삶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양심만 잘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상상할 수 없는 큰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평안도 양심, 권능도 양심, 자유도 양심, 영적 부요도 양심, 믿음도 양심, 천국도 양심 양심처럼 주용한 기관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부터 욥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완전주의 양심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그토록 양심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양심일지라도 진리의 연단을 거치지 않는 양심은 항상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이란 각인에 따라 너무나 무딜 수도 있고 너무 예민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실수할 수 있는 완전주의 양심은 심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완전주의 양심을 봅니다.
4-5절에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완전주의는 회개의 범주를 넘어 온전히 철저히 철저히 자기를 성찰하고 회개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죄를 범해도 회개하고 죄를 범치 않았는데도 혹시 죄 범한 것은 없는가 두루 찾고 찾아 생각이 나도 회개하고 생각이 나지 않아도 회개하는 극도의 민감한 양심입니다. 우리 양심은 너무 무뎌서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예민하여 죄 아닌 것까지도 죄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신체에도 알레르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체가 특이하게 변하면 이렇게 예민한 반응이 나타나 남에게는 해가 안 되는데도 나에게는 해가 되고 크게 나쁜 음식이 아닌데도 나에게는 거부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알레르기입니다. 이처럼 우리 양심도 너무 민감하면 100% 사단의 참소에 걸려들게 됩니다. 완전주의는 아직 복음을 자세히 모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가 당하는 일로서 마치 홍역과 같습니다. 홍역 없이 산다면 더 좋지만 홍역이라는 열병에 걸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율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꼭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욥의 모습은 그의 경건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완전주의의 모형이 됩니다.
2. 이 완전전주의 양심에는 여러 가지가 요소가 존재합니다.
6절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했습니다.
이 구절은 의문 나는 구절입니다. 어떻게 사단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와서 이렇게 대화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그랜드종합주석 에 "타락 후 천상에서 쫓겨난 사단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이 천상 회의 장면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풍유적 문학기법으로 타락한 천사인 사단은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적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문학적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여주는 영적 세계 묘사인가? 참소 당하는 양심을 보여주는 묘사입니다. 그래서 6절 보면 선한 천사 악한 천사 두 종류의 천사가 나옵니다. 6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늘에 있는 영들에 대한 명칭으로 타락하지 않은 천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반대로 사단은 악의 천사입니다. 이것은 성도 안에 있는 두 종류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마음에는 선한 생각과 마귀가 주는 악한 생각이 함께 존재합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사단은 절대 천상 하나님의 보좌 앞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마음에 베풀어진 보좌에는 이렇게 사단이 출입한다는 사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온갖 참소를 해 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소 당하는 양심의 환경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참소 당하는 양심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두루 살피며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7절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사단이 땅에서 두루 두루 다니며 살펴서 삼킬 자를 두루 찾습니다. 그런데 그 습성은 참소 당하는 심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참소를 받은 심령은 꼭 그 모습이 됩니다. 얼마나 두루 두루 살피는지 죄는 물론이고 회개한 죄도 다시 생각나게 하여 회개하게 만들고, 회개해도 회개하는 것 같지 않고, 죄 아닌 것도 회개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어 회개하게 하고, 죄인지 아닌지 애매한 것은 물론이고, 꼭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는 모습인양 온갖 심령 상태가 드러나도록 얼마나 두루 두루 드러내는지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면 생각나는 것은 죄밖에는 없습니다. 마치 성령께서 진리를 생각나게 하시는 영이듯이 사단도 그것을 모방해서 얼마나 죄악과 허물과 우리의 본질을 생각나게 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죄는 회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참소는 회개와 다릅니다. 참소를 당하게 되면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와 같이 자살과 흡사한 영의 자살 현상이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 경험을 했습니다. 마귀가 루터의 모든 죄악과 부족을 샅샅이 기록한 것을 보여주면서 너는 죄인이라고 정죄할 때 그 사실 앞에 너무 낙심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피묻은 손이 나타나 그 죄의 목록을 다 지우시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루터는 사단이 자기를 정죄할 때 너무 고통스러워 잉크병을 내 던지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에 서서 의의 확신을 가지려는데 자꾸만 정죄의 마음을 주니까 사탄에 대해서 분노로서 물리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초보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여기에 대해 계12:10-11에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으니 이제 사단의 참소가 있을지라도 성도들이 예수의 공로로 물리쳐서 이기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우리 마음을 두루 두루 다니며 참소하려는 사단의 역사가 있다면 이 시간에 복음에 서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단의 참소를 받는 양심은 바르게 산 삶마저 폄하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8-11절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당한 평가는 8절 그대로입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그러나 사단이 평가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입니다. 이처럼 사단의 참소를 받은 심령은 올바르게 산 삶마저 폄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가대로 항상 진리에 서서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보면 우리들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내 안에 죄가 많아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예수 안에서 죄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5:17)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롬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담 안에서 보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요 복인이요 행복자라는 복음의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하기 전에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하면서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의 새 피조물이라 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보도록 버려 두지 않고 어떻든 아담 안에서 보게 만들어 자기를 폄하하게 만듭니다. 사단의 참소를 받은 양심은 두루 두루 다니며 못한 것들을 참소하더니 이번에는 잘한 것마저도 근본을 따지며 선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인성을 분석하고 분석합니다. 그 때 온 통 부정과 부패로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은 물론 선한 일을 했을지라도 진정한 아가페 사랑인가 성령에서 난 사랑이었는가 등등 근본 동기까지 들춰내며 온갖 잣대를 들이대며 의롭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어쩌면 반성이란 필요한 것 같지만 지나친 반성은 신령함마저 해침은 물론 예수 안의 나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고 폄하합니다. 그래서 못한 것도 자책하고 잘한 것도 자책하게 만듭니다. 이쯤 되면 그 심령은 악령에 사로잡혀도 크게 사로잡혀 혼란과 고통과 방황과 좌절과 낙심에 사로잡힙니다. 참소와 회개는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무시무시한 사단의 참소를 당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왜 성경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합니까? 우리들을 그 사단의 참소에서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욥과 같이 완전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완전주의는 반드시 사탄의 참소가 따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분석해 봐야 본질적으로 선할 수 없으며 스스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손들고 예수 공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의인되었고 영화롭게 되었음을 믿어 진정한 승리를 누리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