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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앵무새 죽이기】규원사화 결국 근대의 위서로 밝혀지다...반론 3.
원문: http://blog.daum.net/nero1003/209
글: 대수맥
[반론부분 재시작]
아무튼 [규원사화]는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서술하였는데 원저본이 바로 발해 때 편찬된
[조대기]라고 밝히고 있다.
조대기는 발해 때 저술된 책으로서 발해국은 만주지역과 몽골 그리고 남 시베리아에 걸친 영역을
세세토록 영유해오던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와 같은 열국을 이은 나라로서 그곳과 상통하는 가장
근접한 지역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나라였다.
아울러 국초부터 국가 차원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채록한 사적과 사료
또는 민간 구전의 설화와 신앙은 물론 古 기록들을 추정해볼진대 우리 민족의 발원지나 이동정착지
에서 전승되어오던 창세신화들이 채록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먼저 대야발의 서문(序文)을 보면서 이를 추적해 나가보자.
그는 [단기고사]를 집필하면서 <사해四海에 있는 史書를 수집하고 여러 사평史評을 참고하여....
..>라 말하였으며 <각지를 돌아다니며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藏書와 옛 비碑와 흩어져 있던 史書를
참고하다가 전에 돌궐국까지 두 번 들어가 고적(古跡)을 탐사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으며......>라고
한 점이 주목된다.
이로서 돌궐국에 이르는 이역(異域)의 구석에까지 흘러들어간 古書들을 접하고 원전(原典)과는
다르지만 이를 채록하거나 필사하여 이름을 붙인 각종 서적(書籍)은 물론 수많은 비문(碑文)의
각자(刻字)나 탁본을 비롯하여 별칭(別稱)을 붙여 내용을 수록하고 나름대로 평(評)을 덧붙인 사평
(史評)까지도 모조리 수집하여 분석한 뒤 기록하였음이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
하여 13년이 걸려 비로소 완성되었으니 오호라! 이 글이 어찌 우연히 되었겠습니까?>라는 글로서
고스란히 입증되고 있다.
이런 방대한 자료를 입수하고 분류하였기에 그야말로 13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따라서 비문과 사평의 형식이나 이역만리에까지 가서 접한 기록물들이나 전승들이 입수되었거나
비록 원전은 소실되었지만 어떤 경로를 통했든지 전파된 사본의 형태로서 궁벽 진 구석에 남아
있다가 대일본제국육군참모본부를 통해 그럭저럭 수집될 수 있었던 정황이 느껴진다.
공통의 민족설화 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유한다고 말하지 내용이 같으니 누가 어느 것을
베꼈다고 하는 태도는 스스로 가벼움을 드러내는 태도이다.
스스로도 환국(桓國)의 맥을 이은 고구려의 정통 후예로 자처한 발해에서 소실된 귀중한 역사서
들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니 아마도 대야발이 명을 받을 무렵엔 그러한 전승들을 수집한
서적들이 다양한 기록으로 재현되었으리라는 짐작은 무리가 없다.
따라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도외시하면서 한참 후대에 거의 동일한 지역에서 채록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직 침탈의 도구로서 古來의 전승을 왜곡과 견강부회한 [만주지지]의 불순한 편찬 목적
에 얼개를 맞추는 경박한 태도는 조금 가벼운 판단이라고 본다.
어쩌면 후세에라도 어느 날 갑자기 원전이 등장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조금 기다려 보는 게 현명할 듯하다.
혹시 이런 자료나 비슷한 別文으로 서제(書題)한 저서들이 발해에 남아 있다가 거란에게 망하면서
훼손*멸실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규원사화] <태시기>나 <조판기>의 신화들을 그렇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앞서 말한 북애자의 창세신화나 만주설화의 해석을 위한 대전제를 기반으로 아래
부분부터는 다른 여러 분들의 다양한 분석검증자료와 의견들을 옮겨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함
으로서 풀 수 없는 의문점을 해소해주면서 반증을 대신하겠다.
[인용부분]
1889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저술한 《만주지지》〈종교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문 옆에 가타가나로 표시된 내용이 단순한 ‘토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薩-滿ノ 說ニ 主神ハ 全世界ヲ 統治シ 無量ノ 知能ヲ 有シ 其形體ヲ 現スルナク
最上ノ 天ニ 坐シ 地上ハ 係ルモノハ 皆其小神ヲ 驅使スト 云フ
샤-먼의 이야기에 주신은 전 세계를 통치하고 무량의 지능을 가져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고
최상의 하늘에 앉아 지상에 관련된 것은 모든 그 작은 신을 구사한다고 한다.
매우 유사한 내용이 1910년대에 저술된 《단조사고》와 《신단실기》에도 실려 있다.
이들은 원문이 《만주지지》 또는 《만주지》에서 인용되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主神이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하사 而不現其形體하시고 坐於最上之天하시니 在地上者皆
其驅使小神이니라
주신이 전 세계를 통치하는 무량의 지능이 있어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고 최상의 하늘에 앉으니
지상에서는 모두 그 작은 신을 구사한다.
그 일부가 《규원사화》〈조판기〉에 포함되어 있다.
上界却有 一大主神 曰桓因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중략)
......麾下更有無數小神
상계에는 한 큰 주신이 있는데 환인이라 부르며 전 세계를 통치하는 무량의 지능이 있어 그 형태
를 나타내지 않고 최상의 하늘에 앉아......휘하에는 다시 무수한 작은 신이 있다.
《만주지지》의 명칭을 갖는 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위의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일본 육군
에서 발행된 것 뿐이다.
저자는 ‘가쓰라 테프트 밀약’에서의 일본 총리(당시 군인)였던 <가쓰라> 라고도 합니다.
청일전쟁을 앞둔 시기로 보아 만주 침략의 용도로 조사된 것이 분명하다.
만일에 《단조사고》가 《만주지지》를 인용하였다면 한자는 그대로 이용하고 한자어의 어순에
맞게 그 순서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之’, ‘而’의 접속사가 추가되었습니다.
이러한 변경이 우연한 것인지 당시의 용법이 그러했던 것인지는 판단이 어렵지만 현대의 기준으
로 본다면 두 문장의 뜻은 약간 다르다.
이 《단조사고》의 변경된 내용이 《규원사화》에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규원사화》는 《단조사고》의 내용을 도용한 것일까?
[필자의 새로운 시각]
이 분은 이렇게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석연치 않은 면은 있다.
북애자가 《단조사고》를 보았다면 《만주지지》의 내용 또한 확인했을 것이고 《만주지지》의
내용을 알았다면 《단조사고》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북애자가 참조했다면 그것은 《단조사고》가 아닌 《신단실기》였을 것이다.
《신단실기》에는 그 출처가 《만주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북애자가 《신단실기》를 참조했다고 하더라도 의문점은 있다. 해당 내용을 그대로 참조한 것은
그것이 부여나 고조선의 ‘소중한 기록’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일부는
그대로 인용하고 일부는 내용을 바꾸었는지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在地上者皆其驅使小神’
이 ‘麾下更有無數小神’으로 바뀌었다.)】
분명히 만주지지나 신단실기 등을 베꼈다는 전제로 하면 이런 오류와 모순이 생긴다는
걸 정확히 찾아내었지만 왜 내용을 변형하였는지? 에 대해서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버
리는데 앞서 말한 대전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해답을 찾지 못하였을 따름
이다. 즉 동일지역에서 발생 전파된 설화가 각기 다른 경로와 시기를 통해 입수된 결과
이며 그런 까닭으로 결국 그 내용은 동일하거나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각 민족 역사의 머리에 나타나는 천지창조의 신화는《규원사화》에서와 같이 거의 대부분이
한 분의 주재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 자연의 상태에서 처음의 신이 태어
나는 것으로 기술된《일본서기》는 특이하다 하겠다.
1) 천지가 처음으로 생겨났을 때 고천원高天原에서 나타난 신의 이름은 천지어중주신
天之御中主神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신은 고어산소일신高御産巢日神이고 그 다음으로
나타난 신의 이름은 신산소일신神産巢日神이었다.
이 세 명의 신은 모두 독신獨神으로 있다가 몸을 감추었다. <고사기>
2) 우리 환桓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有一神유일신)이 있어 시베리아
(斯白力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獨化之神독화지신)이 되시니...<삼성기전 상>
3) 上界로부터 또 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분의 上帝시라. 주체는 곧 일신(一神)이니 각각 神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三神이시라. 三神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지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최상의 꼭대기의 하늘에 앉아계시니(上界却有 三神卽一上帝
...萬物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不見其形體而坐於最上上之天) 계신 곳은 천만억토요...
<표훈천사表訓天詞>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단서가 보인다.
상기의 예문 가운데 <표훈천사>를 인용한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해당 부분에 거의 동일한
신화 형태소와 설화적 구성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띠게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본문
의 한자漢字 병기 부분).
아울러 두 사서들은 모두 발해의 고서적들을 저본으로 인용하였고 서술 내용이 우리 민족의 원출
과 이동정착지였던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러 가지 논거로 1675년 필사가 분명한 규원사화가 후세에 편찬한 대종교의 문헌을 인용할리 없고
항일에 가장 적극적이며 민족역사서 찬술에 열심이었던 대종교에서 중요한 서두를 구성하는 부분
이었던 우리 민족 유전의 창세전승을 기록하면서 일제의 만주지지까지 인용할 정도라면 만일 규원
사화의 기록을 보았을진대 눈에 불을 켜고 참작한 뒤 만주지지처럼 언급해두었을 터이나 그런 흔적
이 보이지 않으니 입수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는 세 사서들이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채록하였지만 창세 신화의 중요성과 공통적인 형태구조를
감안할 때 핵심적으로 전해오던 구전을 듣거나 잔질(殘帙)을 발견하여 채록되었음을 감히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분석태도는 문장 속에 끼어 있는 단편적인 문구나 단어만 골라내어 피상적이고
졸속한 고증만을 거쳐 귀중한 사료를 경솔하게 위서로 낙인찍는데 급급한 어리석음이다.
일관성 있게 큰 틀 안에서 전체의 흐름과 경향성을 읽어내어 근본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시작]
그리고 동 시베리아의 신화 중에서 ‘아이누족의 신화’ 부분이다.
【처음에 이 세계는 아주 커다란 진흙탕이었다. 물은 흙과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모두가 누더기같이 되었고 진흙탕 뿐이었다.
모든 땅이 물과 섞여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엉켜 움직이며 돌고 있었고 생명이라고는 없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모두가 죽음 뿐이었다.
대혼란 속에서 그 어느 생명도 살아남을 수 없었고 태어날 수 없었으며 공중에는 한 종류의 새도
없었다. 모든 것은 춥고 건조하기도 했고 사막이기도 했다.
그러나 구름에는 천둥신이 있었고 하늘에는 신(神)이 있었다.
그리고 창조주는 하늘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수많은 신들과 정령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 후에 신들은 이 땅을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할미새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보냈다. 《시베리아 부족신화 89p》】
이와 매우 비슷한 내용이 《규원사화》〈조판기〉에 등장한다.
【태고에 음과 양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채 아주 흐릿하게 오랫동안 닫혀 있으니 하늘과 땅은
혼돈하였고 신과 도깨비들은 근심하고 슬퍼하였으며 해와 달과 별들은 난잡하게 쌓여 질서가
없었고 흙과 바다는 뒤섞여 있어 뭇 생명의 자취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에 우주는 단지 커다란
암흑 덩어리일 뿐이며 물과 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움직이는지라 이와 같은지가 벌써 수백만
년이나 되었다.
하늘에 무릇 한 분의 큰 주신(主神)이 있었으니 환인이라 부르며 전 세계를 통치하는 무량의 지능
이 있어 그 형태를 나타내지 않고 최상의 하늘에 앉아 있었고 그가 있는 곳은 수만 리 떨어진 곳
이었지만 언제나 환하게 빛났다.
휘하에는 다시 무수한 작은 신이 있었다.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이다】
[필자의 새로운 시각]
여기에서도 이 분은 또 의문을 갖는다.
【어째서 《규원사화》의 내용이 아이누족의 신화에 있는 것일까? 아이누족은 왜
동 시베리아에 있는 것일까?
북애자가 우연히 동 시베리아의 신화집을 얻어 아이누족 신화의 앞부분을 도용한 것일까?
그렇다고 가정하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내용은 실제로는 모든 아이누족의 신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아이누족의 신화는
할미새 이야기부터 시작되어 《규원사화》에 해당되는 부분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단, 아이누족의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카무이’는 그 뜻이 ‘빛의 남자’로 ‘환웅’과 같은 의미이다.
북애자가 위의 아이누족의 신화를 각색하여 고대사를 완성하려 했다면 어째서 《신단실기》의
내용은 문장 그대로 인용했는지에 대한 의문 또한 있다】
하지만 그 까닭은 상기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야만 모든 게 유리알처럼 확연해지는 것이다.(왜 모든 아이누족
신화에 등장하지 않고 동 시베리아 계통에만 있는지? 그리고 아이누족의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카무이’는 그 뜻이 ‘빛의 남자’로 ‘환웅’과 같은 의미인지?)
[다른 분의 글 인용] 곰돌이님
여러 사람들이 이 책들을 비교했었다. 이상시 변호사는 앞의 두 책이 《규원사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였던 듯하다.-《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뒤 부분에 첨부된 계보도 참조)
정영훈(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경우도 최근의「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에서《규원사화》
와 대종교 계통 사서의 공유되지 않는 내용에 주목하였다.
- 대종교에서는 일반적인 표현인 ‘건국이념으로서의 홍익인간’이나 ‘민족의 명칭으로서의
배달’이 등장하지 않는다.
- 대종교의 경전인 「천부경」이나 「삼일신고」가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도, 《규원사화》가 후대에 위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위의 대종교 서적을 직접 참조하였
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러하다.
- 《규원사화》에는 단군조선 이후 1천 년 간의 역사가 빠져 있고 부여의 역사는
아예 없다.
- 대종교 서적에는 단군의 수(壽)가 217년이지만 《규원사화》는 210년으로 덜
구체적이다.
- 《단전요의》나 《대동사강》에 인용된 단군 관련 내용(하백녀라든지 의술 관련
내용 등)이 있었음에도 인용하지 않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만주지(지)’에서 인용한 ‘주신’ 관련 내용이다.
이제 가장 중요해 보이는 ‘만주지’의 내용을 살펴본다.
《만주지》에서 《단조사고》, 그리고 《신단실기》로 인용된 부분은 이러하다.
薩-滿의 說에 主神이 全世界를 統治하고 無量의 知能을 有하고 其形體를 現하지 않고
最上의 天에 坐하고 地上에 係하는 것은 皆其小神을 驅使하도록 云하다 《만주지》
主神이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하사 而不現其形體하시고 坐於最上之天하시니 在地上者
小神이니라. 《단조사고》,《신단실기》
주신이 온 세상(또는 전세계)을 모두 헤아리고 통치하사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앉으니 지상에는
작은 신이 있었다.
인용하였다고 여겨지는 《규원사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上界却有 一大主神 曰桓因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 麾下更
有無數小神 상계에는 한 큰 주신이 있어서 환인이라 하는데 온 세상을 헤아리고 통치하나 그
형체는 보이지 않고 하늘 위의 가장 높은 곳에 앉으니......휘하에는 무수한 작은 신이 있었다.
‘대동소이’한 내용이다. 따라서《규원사화》-《만주지지-일본 육군 발행》의 인용경로를 밝혀
내지 못한다면 동시베리아나 일본 어딘가 -《만주지지》-《단조사고》 또는 《신단실기》- 어쩌면
있을 중간경로 -《규원사화》쪽이 합리적으로 생각된다.
《만주지지》에서는 위 내용을 동시베리아 어딘가에서 채록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채록을 통해 기록된 내용은 특징이 있다.
채록은 ‘원주민 - 통역자 - 채록자’로 전달되므로, 되도록 쉬운 말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위의 인용된 내용을 확인해 보면, ‘충분히’ 쉬운 말이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이다.
《시베리아 부족신화 이정재 민속원 1998》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의 동시베리아 부족들의 신화를 채록한 내용을 토대로
쉽게 풀이한 글로 채록은 아쉽게도 서양 사람들에 의해 번역된 듯하다.
인용서적의 제목은 주로 독일어로 되어 있다. 어쨌든 그 내용의 첫 번째로 아이누족의 신화가
소개되었는데 아이누족은 현재 동시베리아 일대에 일부와 일본의 훗카이도 지방에 다수가 거주
하며 이들은 또한 독특한 죠몽문화를 이끈 일본의 선주민이었다는 주장이 있는 이들이다.
번역을 인용하자면, 이들의 창조신화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창조주는 하늘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수많은 신들과 정령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만주지지》는 아이누족의 신화를 조사한 것일까?
아이누족의 신화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더 있다. 요약해 보면
- 처음에 세상은 큰 진흙이었고,
- 땅은 물과 섞여 서로 움직이며 돌고 있었고,
- 생명은 없었으며,
- 춥고 건조한 사막에, 구름과 천둥신이 있었고,
- 하늘 높은 곳에 창조주가 신들과 정령들과 함께 살았으며(위에 인용된 내용)
-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다.
요약된 내용 중 네 번째를 제외하면 《규원사화》의 내용을 요약한 듯하다.
《규원사화》에도 ‘대동소이’한 내용이 있다. 제외된 내용은 ‘진흙’에 ‘사막’이라 앞부분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정말로《규원사화》는 아이누족의 신화를 누군가가
조사해 놓은 것을 인용했을까?
또 하나의 문제는 정작 아이누족의 신화를 찾아보면 저러한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아이누족의 신화는 부족마다 약간씩 다른데 공통적인 것은 창조신화는 진흙 위로 내려온 할미새로
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에서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 비로소 할미새가 등장한다.
즉, 위의 내용은 아이누족의 신화의 앞부분에 의도적으로 덧붙여진 것이다.
저 내용에 해당되는 《규원사화》의 원문을 보면 기본한자에는 없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 한자가
쓰인다. 그 수준이 ‘채록’이 아닌 ‘인용’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서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전체 내용의 중간에 끼어 있는《만주지지》의 내용은
채록이 아니라 인용임을 알 수 있다(어려운 한자가 쓰였더라도 채록된 내용을 토대로 ‘윤색’되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그것도 부족의 신화에서 인용한 것이 아닌, 어딘가 다른 이야기의 단편을
인용한 것이다.
《만주지지》에는 이어서 ‘하늘을 나누어 7층으로 하고 조물주는 가장 높은 하늘에 살고 기 나머지
의 백신은 모두 그 이하의 모든 하늘에 산다’라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만주족 신화의 ‘9층
의 하늘에 3번째에 신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을 반영한 듯하다.
물론 만주족 신화에는 앞서와 같은 이야기는 없다.(현재 영어 위키백과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아이누족의 신화였다는 출처가 제시되지 않은 주장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일본어 위키백과에
그런 내용은 없다 - 출처를 확인한 결과 1901년에 출간된 'John Batchelor'의 책인데 오래된 책으로
하버드 대학 소장이기에 아직 내용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만주지지'보다 12년 후에 출간된 것이
된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민속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듯하다. 물론, 그 주요 목적은 동아시아
의 침략에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왜 일본 육군은 《만주지지》에 평이한 한자로 되어 있는 부분만을 인용했을까?
그 이유는 본인으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 육군이 위의 단편을 동학과 관련된 무력개입
과정을 통하여 입수했을 개연성은 추측할 수 있다(단지 추측일 뿐이다. 동학은 그보다 이른 1860
년에 창시되었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것은 1894년이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시베리아 부족신화》의 원 내용을 채록한 독일인이나 그 중간에
개입한 누군가가 《규원사화》를 신봉하여 그 내용을 끼워 넣었다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조대기》의 원본 일부가 동시베리아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밖에는 없다.(물론, 해답에 대한 힌트는 해당 인용서에 있을 것이다. 없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아이누인 신화의 할미새가 등장하기 전의 이야기는 혼란이 있는 듯하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되었지만, '主神이 全世界를 統治하고 無量의 知能을 有하고' 부분을 '有統治
全世界之無量智能하사'로 해석한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단조사고》의 《만주지지》가 《신단실기》에는 그 출처를 쉽게 확인할 수 없는《만주지》
로 그 이름이 바뀌어 있는 등 석연치 않은 점도 분명 있다(물론 《만주지지》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채록의 시기와 당시 일제의 행태를 볼 때에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어 조작되었을
여지는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참고 글]
□ 북애자는 어떤 사람일까?
1) 어려운 글자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규원사화》에는 천자문이나 표준한자에 지정되지 않은 한자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미루어 볼 때, 북애자는 근대식 교육이 아닌 한학을 오랜 동안 공부했다고 여겨집니다.
2)《죽서기년》을 비롯한 고대 사서를 많이 참조하였다.
《규원사화》에는 국내·외의 여러 서적이 인용되었고 관련 기사(구이* 단군*백두산*풍속 등)를
참조하였습니다.
3)《신단실기》를 보았으나《단조사고》와《만주지지》를 보지 않았다.
정황으로 볼 때에, 북애자는 대종교나 단군교 교인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홍익인간’
이라는 대종교 이후의 핵심 이념이 단 한 번도 단어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물론 신비로운 분위기의〈천부경〉도 인용되지 않습니다.
4) 사료의 시대를 구분할 줄 알았다.
《규원사화》에 인용된 도서는 숙종조 이후에 출간된 것은 없습니다.
5) 한글 사용에 관심이 있었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글 사용의 필요성’의 주장은 고조선과는 관련이 없는 개인적인
주장입니다.
6) 전승된 자료를 참조하였다.
《규원사화》의 경우, 참조할만한 서적이 없었으므로《조대기》나《진역유기》에 해당되는
모종의 전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북애자가 1920년대에 2000년대의
발굴 성과를 내다 본 ‘초능력’을 인정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7) 초기 발해인의 입장에서 저술하였다.
《규원사화》의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요동반도, 만주, 한반도 일대의 유민들을 동포로 인식하였고 초기의 한강 이남은 단군조선에
포함되지 않았다.
- 고조선과 부여와의 계승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다.
《규원사화》에는 요동반도*만주*한반도 일대의 유민들을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해 온 동포로
인식하고 있으며《고기(古記)》나 기타 단군 관련 서적에서 보이던 고조선과 부여와의 관계를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자조선과의 관계는〈단군기〉에는 그 내용이 없고〈만설〉에는 간단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북애자는 부여를 멸망시켰으나 그 곳에 자리 잡은 말갈족을 포용해야 하고 기자조선의 터에 자리
잡은 後燕을 멸망시킨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입장을 고려하여 저술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꾸며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전까지의 일반적인 단군론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내용
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고조선-부여-삼국의 계승관계도 나와 있지 않고 기자조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요동에 자리 잡았던 이들이 중국의 산동 지방에 진출했다고 두 지역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등
발해의 산동 반도 공략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 원저자 관련 사족(蛇足)
<서문>에 의하면 《규원사화》는 숙종 초 원년(2년차)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북애자가 삼각산
기슭에서 청평산에 살았던 도인(道人) 청평 이명이 고려 후기에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우연히 얻어 참조하여 저술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진역유기》는《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명은 고려 때의 사람(高者麗時人)으로 설명되었고 일부 인용된 청평의 주장은 원나라의《요서》
를 인용하고 있어서 그 저술 연대를 《요서》가 완성된 1344년 이후부터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전
까지의 약 50년 간 이내의 시기로 추정할 수 있게 합니다.
《조대기》라는 책이름은《세조실록》에도 등장하는데 실록에서는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규원사화》의 설명으로《조대기》는 발해의 고대 역사서이며 발해 왕자 대광현이 고려에 투항할
때에 바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황으로 볼 때에《요서》와《조대기》는 의당 고려 왕실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을 것이므로 청평
은 아마도 당시 높은 관직에 있었거나 그러한 이와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에 하나 ‘고자려시인高者麗時人’이 ‘고려 때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을 의미한다면 ‘행촌 이암’이 가장
적격자가 됩니다.
이암은 마침 공민왕 즉위년을 전후하여 3년 간 청평산에서 ‘은거’하면서 독서·저술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소한, 같은 시기에 같은 산에 은거한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암이 이명에게 이들 서적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암에 대한 기록에는 청평산에서 도인을 만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북애자가 참고한 《진역유기》가 실재했다면 이암은 《요서》와《조대기》를 갖고 청평산에 은거
하였고 이를 근거로 하여《진역유기》를 저술하였으며 홍건적의 난을 피해 산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을 것이라 추측하게 합니다.
[참고] 규원사화 교감기(校勘記)
1.《규원사화》현존 판본
□ 원본 1종-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도서열람번호 2105-1 1책)
북애노인의 친필본(親筆本)으로 알려진《규원사화》는 국립중앙도서관 측이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 사이에 서울 시내의 한 서점에서 <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현금 100원에 구입한
것이다.
그 후 1972년 11월 3일 이가원*손보기*임창순 등이 참가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乙卯 서기 1675년)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등록일자 1946년 5월 25일)되었다.(고평석 한배달 6호 1989년)
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貴629-古2105-1)은 1990년에 <한뿌리 출판사>에 의해 그 원전이 처음으로
영인 출판되었고 그 책자를 기준하여 책 제목을 제1쪽 그리고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
하였을 때 총 143쪽 26,828자(제45쪽 궐2자闕二字 포함 및 제목 제외)이다.
이 판본을 편의상 「한영본」이라 부른다.
□ 현재 전하는 필사본 계열(6종)
- 1940년(단기 4273년 소화昭和 15년) 9월에 양주동(梁柱東)이 비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손진태(孫晋泰)가 3본을 필사하여 지니고 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서울대학교
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도서열람번호 2121-3 1책)에 각각 1부씩 기증(고려대학교본은
1976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발간*서울대학교본은 그 후 없어졌다가 방종현(方鍾鉉)이
소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다시 등사하여 동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 그밖에 언제 어디에서 누가 필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권상로(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하여 동국대학교도서관에
- 이선근(李瑄根)본을 등사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도서관에
- 또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마이크로 필름본 1개를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다.
6종의 필사본을 비교 대조하여 보면 <동국대학교본>에서는 '계발啓發'을 '계달啓達'로 <고려
대학교본>에는 '임검壬儉'을 '왕검王儉' 등으로 잘못 필사한 흔적이 간혹 발견될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248P 고려원 1990년)
필사본 가운데 <양주동 소장본>을 <손진태>가 필사하여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기증하여 소장된
판본 가운데 하나가 서희건 저著(고려원 발간)의《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제2권의 부록으로
영인 수록되어 있으며 책 제목을 제1쪽으로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하였을 때 총 148쪽
26,357자(제목 제외)이다. 이 판본을 편의상 「손필본」이라 부른다.
2.《규원사화》번역 주해서 출판 현황
□ 신학균(申學均) 번역 주해본(저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貴629)
- 단기 4301년(서기 1968년) 3월 大東文化社 출판(열람번호 2105-81-0. 2)
- 역자의 본적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 성산리(1967년 4월부터 1973년 4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과장 역임)
□ 고동영(高東永) 번역 주해본(저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貴629 규원사화 외)
- 1986년 도서출판 자유문고에 의해 초판 발행 이후 한뿌리 출판사에 의해 96년 현재 3판까지
발행.
3. [한영본]의 북애노인 친필 여부에 관한 고찰
<한영본>의 원문은 총 26,828자이며 <손필본>은 총 26,357자로서 두 판본 간에 471자의 차이가 있다.
이 가운데 <손필본>에는 있으나 <한영본>에는 없는 글자가 연자(衍字)를 포함하여 모두 27자인데
일부 글자는 원본에 없던 것이 필사본으로 옮겨지며 필사자에 의해 내용이 보충되면서 첨가되었
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지는 내용이 보인다.
먼저 <태시기> 말미의 해당 문장을 판본별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영본]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 □□□□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손필본]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즉, <손필본>의 '遷徙往來 號令天下' 8자가 <한영본>에는 빠져있다.
필사본에 있는 문구가 정작 원본에 없을 수는 없으며 더욱이 <손필본>은 <한영본>과 비교해 보아
도 무려 500여 자를 빼먹는 등 필사할 때 다소 소홀한 흔적이 역력한데 한 두 글자의 조사(助詞)도
아닌 본문 8자를 보충하여 첨가하였을 리가 없다.
문맥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宅於淮岱'에서 문장이 일단락됨에 무리가 없는데 그 부분이 조심성
없는 필사자의 눈에 띄어서 없던 내용이 8자나 보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영본>을 친필 원본으로 가정한 뒤 그 후에 내용이 보충된 원본의 재판본이 나왔으며
<손필본>은 그 재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한영본> 자체가 필사된 판본일 것이라는 여러 흔적으로 인해 더욱 희박해
진다.
<한영본>과 <손필본>을 상호 교감하여 볼 때 비록 <손필본>의 것을 버리고 <한영본>의 것을 취할
수 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무려 30곳 정도가 된다.
물론 교감의 내용에 따라 그 숫자에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영본의 것을 버리고 손필본의
것을 취할 경우가 대부분 문맥의 내용상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글자의 순서가 바뀌는 즉 필사자들이
필사하며 흔히 행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한영본] 古有淸平山人 李茗高者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X)
[손필본] 古有淸平山人 李茗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O)
[한영본]《史記》.《漢書》通及典, 皆有王險城字, (X)
[손필본]《史記》.《漢書》及《通典》, 皆有王險城字, (O)
[한영본]《北史·勿吉傳》曰亦: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X)
[손필본]《北史·勿吉傳》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O)
[한영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白頭於山, (X)
[손필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於白頭山, (O)
[한영본]《孟子》舜曰生諸馮, 東夷之人也.」 (X)
[손필본]《孟子》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 (O)
[한영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八聖矣之名, 必表以佛家名字, (X)
[손필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O)
[한영본] 夫南方之濕熱, 北方燥寒之, (X)
[손필본] 夫南方之濕熱, 北方之燥寒, (O)
[한영본] 立業垂憲未嘗有差, 末流而之弊猶然如此. (X)
[손필본] 立業垂憲未嘗有差, 而末流之弊猶然如此. (O)
[한영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敎始成, (X)
[손필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而政敎始成, (O)
주로 조사(助詞)의 순서가 바뀐 이러한 실수는 전체적인 내용을 머리에 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행해진 실수로 보기는 힘들다.
그 가운데 <한영본>에서 「史記漢書通及典」의 '書'와 '通' 사이 및 「孟子舜曰生諸馮」의
'子'와 '舜' 사이 등 글자의 순서가 바뀐 것으로 여겨지는 문장마다 붓으로 그린 작은 원이 표시
되어 있는데 이는 옮겨 적다가 글자가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듯하니 즉 '及'자는 '書'와 '通' 사이
에 와야 하며 '曰'자는 '子'와 '舜' 사이에 와야 함을 표시한 듯하다.
또한 <한영본>의 원문은 줄이 쳐진 빈 책(空冊)에 붓으로 직접 쓴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전체에서
16자 정도가 이미 쓰여 진 글자 사이에 덧붙여 적어 넣은 작은 글자이다.
그 가운데 몇몇 助詞는 글을 적다가 흘렸기에 다시 적었다고 볼 수 있지만 '閉'·'里'·'惑'·'侯' 등의
글자는 문맥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글자들로서 내용을 재검토하며 보충하여 넣은 조사와는 성격
이 틀리는 글자들이다.
[閉]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축
[里] 上有九萬里者
[惑]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侯] 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루진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
그리고 군데군데 틀렸다고 생각되어(실제로 몇 군데는 교감 상 틀린 곳으로 밝혀졌다.) 일정한
표시를 한 부분 가운데 「人事則軀殼」의 '事'(교감 상 '死'의 오자이다.)는 글자 전체를 붓으로
둥글게 덧칠하여 글자가 틀렸음을 즉 잘못 옮겨 적었음을 나타낸 듯하다.
글자를 옮겨 적는 필사자의 입장이 아닌 내용을 옮겨 적는 저자의 입장이라면 문맥의 내용상
'人死'가 분명한 곳에서 '人事'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이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 원본이 아님과 더불어 <손필본> 계열 필사본의 저본이 된
<양주동 소장본>은 <한영본>이 아닌 제3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필사되거나 인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영본>에 없는 글자를 <손필본>에서 모두 27자
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한영본>에서 순서를 바꿔 쓴 것이 <손필본>에는 바르게 되어
있으며 또한 몇몇 글자는 문맥의 내용에 있어 오히려 <손필본>이 <한영본>의 내용상 결점을
보완해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한영본: 敎]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特盛, 自能聞風驚奇. (X)
[손필본: 交]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交特盛, 自能聞風驚奇. (O)
[한영본: 事] 人事則軀殼厥冷, 骨肉梗固 (X)
[손필본: 死] 人死則軀殼厥冷, 骨肉梗固 (O)
[한영본: 民] 曾無一人, 民於南方而制天下者 (X)
[손필본: 起] 曾無一人, 起於南方而制天下者 (O)
이와 같은 내용으로 살펴볼 때, 비록 <한영본>이 그 지질(紙質) 등으로 보아서 조선 중기에
쓰여 진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북애노인]이 직접 쓴 친필 원본이거나 또는 [양주동 소장본]
의 필사 저본이 된 판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한뿌리사]의 <한영본> 영인 발문에서 밝혔듯이 서지학자이자 국립도서관에서
고서를 전문으로 다루고 있는 <장지연>씨가 종이의 질과 글씨 및 제호를 표지에 바로 쓴 것 등
으로 미루어 <한영본>은 조선 중기에 쓰여 진 것임이 틀림없음을 확인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지학 측면에서 한영본의 작성 연대를 추증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서지학상의 검토에 의해 <한영본>이 조선 중기에 쓰여 졌을 것이라는 결과만을 가지고
이 판본이 바로 저자인 [북애노인]이 직접 쓴 친필본일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단지 추측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하나의 책이 眞書냐 혹은 僞書냐를 판단하거나 원본 여부 등을 가늠함에 있어서 어느 한 측면
즉 문헌학이나 문자학 또는 서지학 등의 여러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그 판단 기준으로 삼아
결과를 논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이와 더불어 어느 한 측면의 연구 성과만을 가지고 전체의
결과를 논하거나 관련성이 없는 여타 분야의 결과까지 추론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 <한영본>의 친필본 여부를 검토함에 있어서는 <한영본>과 <손필본>의 두 판본만을
문자 교감의 방법을 통해 이자(異字)와 유무자(有無字) 및 탈오자(脫誤字)를 비교하여 먼저
교감표를 작성하고 그 교감표를 바탕으로 내용을 검토하여 보는 단순한 방식을 택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얻어지는 결과는《규원사화》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논거 가운데에서도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인지 여부의 판단에 대한 참고 자료라는 아주 제한된 분야에
참고 될 수 있는 자료가 될 뿐이다.
본문에서는 몇몇 내용을 지적하며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니라 친필 원본이나 또는
그 후의 원본을 필사한 또 다른 필사본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과가 <한영본>이 조선 중기에 쓰여 진 것이 아닐 것이라든가 혹은《규원사화》자체
가 조선 말기에 위작된 위서일 것이라는 논거로 말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서지학상으로 한영본이 지질(紙質) 등의 상태를 보아 조선 중기에 쓰여 진 것임이 분명하
다는 가정 아래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님을 확인하는 본 교감의 결과가 결합된다면《규원사화》
의 원 저작 연대가 적어도 <한영본>의 지질(紙質)로서 확인되는 연대보다는 오래되었음이 확인될
수 있으며 아울러 <한영본>은 원본의 저작 이후에 <손필본> 계열과는 다른 시기에 쓰여 진 또 다른
필사본임이 인정되어 다양한 필사 판본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되므로《규원사화》자체가 僞書가
아닌 眞書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한영본>의 발견으로《규원사화》가 조선 말기에 단순히 위작되었을 것이라는 추론
에는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더 나아가 정확한 저작 연도에 대해서는 문헌 및 문자 측면의
고증을 통하여 보다 엄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그러한 종합적인 고증에 의해 정확한 결과
가 나오기 전까지는《규원사화》를 僞書나 개찬서(改撰書) 혹은 眞書일 것이라는 어느 하나의 단정
은 금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