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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기행 [제 5 부]다뉴브의 진주 헝가리의 고도 부다페스트
2010년10월19일 일요일 여행4일째가 밝았다.
타트라산맥의 만추는 겨울이나 다름이 없었다.
객실안쪽 내부에도 천장이 높아서인지 위풍이 있어 썰렁하다.
아침 일찍 일어났으나 침대속의 따스한 온기가 나를 붙잡고 있다.
5분만더, 5분만더 하다가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나 덜깬 눈을 비비며 욕실에 들어가 뿜어대는 더운물에 몸을 던져 잠을 깨었다.
샤워를 마치고 이중 커튼을 비집고 창밖을 보니
보이는 것은 안개속에 높은 산이 흐리게 보이는데, 흰눈이 하야케 뒤덮인것 같다.
아~ 춥겠다.
오늘은 국경을 넘어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가야한다고 한다.
먼 여정이기에 7시에 출발한고 하여 일찍이 로비에 짐을 챙겨나갔다.
사람들중에 여러사람들이 짐가방을 열고 두툼한 외투를 꺼낸다.
로비밖의 상황을 몰라 잠시 로비밖에 나가보니 삭풍이 귀를 에이는 한겨울이다.
얼른 로비로 돌아와 외투를 걸치고, 얼굴을 목도리로 감싼채 마누라의 옷 매무새를 다시한번 더 여며 챙겨서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묶은 이 호텔은 거의 산중턱에 위치하여 밤새 기온이 뚝떨어진, 완전한 고립무원의 한겨울이다.
추워서 그런지 보이는 만추의 풍경은 더욱더 쓸쓸해보인다.
평지가 나올때까지 한참을 내려가야 했는데,
산길을 감쌓안듯이 휘돌며 내려간다.
[높은 산이라서 발밑으로 하얀구름이 바다처럼 보인다. 이런것을 해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것 같다.]
안개낀 산을 돌아내려온 버스는 산아래 다운타운을 지나 부슬비가 내리는 고속도로로 진입을 한다.
국경을 지나는 고속도로인데 차량통행은 그렇게 많지는 않아보인다.
버스안에있는 온도계가 밖의 기온이 섭씨6도를 가리키고 있다.
아침에 출발할때의 산중턱 기온보다 상당히 따듯해져서 많이 올라간것이 보인다.
[슬로바키아에서 헝가리로 들어서는 국경의 표지판]
우리가 헝가리 하면 제일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었일까?
비가 드문드문 내리는 차창밖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해 봤다.
남자라면 당연히 월드컵축구를 생각하는데 1954년인가 우리가 헝가리에게 0대9로 진 것과 “헝가리 무곡” 그리고 영화 '그루미 썬데인'가 그렇고 얼마전에 T.V에서 방영된 연속극 '아이리스'의 촬영지가 이곳 헝가리 부다페스트라고 내 기억속에 있는것 같았다.
달리는 버스안에서 현지 가이드가 하는 말이 자기가 아이리스에 출현했다고 하는데,
첫 장면에 이병헌이 북한 고위급 인사를 저격할 때 그 옆에 서있던 북한 측 경호원으로 잠시 얼굴을 비쳤다고 해서 버스 안은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었다.
그런 인물로 보이지 않아서 였을까, 그사람만 보면 사람들이 키득거린다.
이 사람들 그러니까 헝가리인의 조상은 중앙아시아에서 흘러온 유목민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와 생김새가 흡사해야하지만 지금의 생김새를 보면 전혀 믿기가 어렵다.
얼굴은 거의 백인의 유럽사람들과 구별하기 어렵다.
이들을 유럽에서는 훈족이라고도 불렀고,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수시로 등장했었던 흉노족이었으며,
이들이 쓰는 언어도 우리와 같이 알타이어 계통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흉노,훈족등에 유래하여 헝가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한것은 연구를 해보아야 알겠지만 현재까지는 추측일뿐이라 한다.
[헝가리의 한적하고 깨끗한 국경마을]
[헝가리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을 진입하기전에 점심식사- 한식인데 김치찌게와 김치 및 나물류]
[점심 식사 후 식당건너편의 한적한 도심외곽의 다운타운]
헝가리에 사는 사람을 보통 마자르 족이라고 하는데 주로 헝가리에 거주하지만,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슬로바키아·우크라이나 등지에도 소수가 산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루마니아의 마자르 자치지역(지금의 코바스나 · 하르기타 · 무레슈 주 등)에는 꽤많은 사람들이살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약 80여 ~90여만 명 정도라고 한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세클레르(Szeklers)족'이라고도 하는데,
이 세클레르(Szeklers)는 원래 국경 수비대라는 뜻이다.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다름아닌 이들이 트란실바니아의 동쪽 경계를 지키는 용병 역할을 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고대 헝가리인은 시베리아 서부의 우고르족과 투르크족의 혼혈로 형성되었으며,
5세기초까지 이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카스피 해 부근에 있던 하자르 투르크 제국의 각지를 방랑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830년경 돈 강의 오른쪽 기슭에 정착해 있던 사람들과 하자르족 중 카바르족으로 잘 알려진 3개 집단이 이들에게 합류하면서 헝가리에 거주하는 인종들이 여러 부족들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9세기경 이들 헝가리인은 슬라브족과 훈족을 정복하고 현재의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헝가리인들은 1세기반 동안 브레멘, 오를레앙, 콘스탄티노플 등을 향해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한다.
이 확장이라는 것이 그냥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토에 거주하는자를 몰아내는 것이므로 당연히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유럽내에서 게르만인들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을 결국은 이들의 힘에 밀려 살던 터전을 다른곳으로 옮겨가야만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헝가리인들을 부를때에는 악마와 같은 민족이라고 악명을 부여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Hungar'가 와전되어 영어의 'ogre'('귀신' 또는 '괴물'이라는 뜻)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고 하니 그들의 용맹함과 잔인성이 대단했던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이 중부유럽에서는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큐라백작이 악명이 나기로 유명한데,
그는 옛날 공포의 대상이였던 흡혈귀라고 영화에서 소개 되었지만,
드라큐라백작은 자기나라 영토수호를 위한 전쟁에 나가서 적을 소탕할때 잔인하게 살상을 하였기에 이런 악명을 아직도 달고 있다고 하는데, 헝가리인들도 영토전쟁을 벌일때 이와 같아서 악명을 부여받지않았나 한다.
본줄기로 돌아가서,
이들이 쓰는 언어인 헝가리어(헝가리어:Magyar머저르)는 헝가리와 인근 나라에서 쓰이는 말로 우랄어족의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고 하며,
헝가리와 유럽 연합의 공용어이고,
세르비아의 일부지방,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의 3개 자치 단체에서도 공용어로 쓰인다.
이 언어는 1천3백만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으며, 그중 1천만명이 헝가리에 살고 있다.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절에는 독일어와 함께 이 언어도 동등한 공용어였다고 한다.
언어는 그렇고 지정학적으로 볼때 헝가리는 유럽의 교차점에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끊임없이 타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반면에 이를 바탕으로 수세기에 걸쳐 외부로 진출하기도 했다.
헝가리인은 슬라브인,·독일인,·루마니아인 등 타민족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간에는 지속적으로 민족간의 융합과 문화적 동화가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16, 17세기 헝가리 영토를 정복한 투르크인과 강력한 독일화 정책을 시행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가 큰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헝가리인의 민족의식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헝가리는 1867년에 자치권을 획득한 이래 1918년에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들의 전통적인 미술·음악·문학 등이 오랫동안 보존되었고,
자수나 도자기 등 민속 공예는 아직도 널리 행해진다.
[헝가리 성 이스트반성당앞 광장-겨울이라 날씨가 대부분 흐리고 비가많이온다]
위쪽에서는 헝가리인들의 유럽에 대한 유입경로와 정착시기를 알아 보았고,
아래에 헝가리의 역사를 대충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인들은 헝가리 서부지역을 판노니아 라고 불렀다.
5세기에 유목생활을 하는 핀우고르어를 사용하는 마자르족이 이전의 정착지인 유라시아의 스텝을 떠나 서쪽지역으로 이동하여 생활하게 된다.
그 이후 헝가리 남동부의 평평하고 비옥한 저지대인 노디올 지방 .
그러니까 위치적으로 유고슬라비아 북부와 루마니아 서부까지 뻗어 있는지역을 말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서기 1000년경 "이슈트반"(마자르족장 "게조"의 아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위한 국가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국가가 창건된 이후 1241년 몽골인(징기스칸)의 침공을 받고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는 재난을 겪었으며.
마자르족이 세운 왕조인 아르파드 왕조가 막을 내린 1301년부터 1918년까지 헝가리는 단 1차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참 불행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부터 공격을 받아 큰 혼란을 격기도 하였으며, 1568년에 이르러 지금의 헝가리 영토는 타인들에 의해서 3개 지역으로 분할되게 된다.
1848년 빈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1년 뒤 “로요슈 코슈트”의 지휘 하에 헝가리는 독립을 선언했다고 하는데, 곳 바로 합스브르크가에 의해 진압되는 아픔을 격어야 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1987년 12월 부다페스트에 한국무역사무소가 개설되었고,
헝가리는 1988년 3월 서울에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상주시킨 이후 1989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헝가리를 방문하여 항공·관광 협정을 체결했으며,
1990년 11월에는 헝가리 곤츠 대통령이 방한했고. 북한과는 우리보다 앞선 1948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간혹 이곳을 관광할 때에 시내에서 북측사람이 아닌가 싶은 사람을 본 것 같기도 하다. 한국과는 1989년 2월 1일에 공식 수교를 맺었으며,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헝가리가 공산국가 가운데 정식 국교를 수립한 첫 번째 국가라고 한다.
헝가리는 일찍부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톨릭의 폐단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헝가리의 종교 개혁역사를 잠시 들여다 보면
종교개혁이 제일먼저 일어난 곳이 데브레첸이라고 하는데,
데브레첸은 상업 중심지로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에 말과 가축을 대규모로 사육하고 유통하는 곳으로도 유명하여 항시 사람들이 성시를 이뤗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곳에는 자연히 볼거리 먹거리와 상거래가 자연적으로 이루어게 마련인데, 그당시 여기서 열리는 박람회는 중세시대에 유명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데브레첸에는 1561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소가 있었다고 한다. 인쇄소라는 것은 문자를 조합해서 서적이나 간행물을 만드는 곳이다.
그 당시 가장 큰 베스트쎌러는 당연히 바이블(성경)이었다.
옛날에는 성경을 읽을줄 아는사람은 성직자나, 왕과 왕족, 영주들,소수의 귀족들이었다.
그들 즉 성직자, 왕족, 귀족들의 전유물이 성경이다.
특히 까막눈의 민초들에게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파하는자는 당연 성직자인데 그들의 혀끝에 하나님의 말씀과 올고 그름이 판단되는 세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생사여탈권을 가진자가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었던 그 성경이 이 인쇄소를 통해서 빠른속도로 민중들에게 전파되자 지금까지 몰랐던 하나님의 세계가 성직자의 혀끝이 아닌 민초들의 활자를 통한 문자로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
성직자들은 자기가 바라는것은 '신이 원하신다' 라는 한마디에 왕을 비롯한 모든이가 꺼벅 넘어가버린다. 또한 자기가 바라지 않는것은 '신이 원치 않으셔서' 라고 일축하면 그만이었다.
이렇듯이 지금까지 그것을 점유하였던 성직자들의 통치철학과 이념이 하루아침에 드러나게되고, 잘잘못을 따지는 윤리, 종교의 철학이 그들의 독점일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그래서 차츰 차츰 스마트해진 민중들이 늘어나게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되는 단초가 된다.
또한 인쇄물을 통해 전해진 각종정보는 민중들을 개몽하게되고,
위에서 거론 한바와 같이1849년에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 벗어나려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그것을 주도한 사람은 혁명정부의 지도자인 “로요슈 코슈트”였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바로 진압되었던 곳이바로 이곳 데브레첸이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상당한 것을 포기해야하는 아픔이 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볼 때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초기 카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받은 것을 생각해보거나,
전통적인 유교를 숭상하던 사대부가에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양반의 지체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카톨릭의 부패한 권력과 잘못된 신앙을 반대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용기를 가진자 사람들이었다.
성직자의 행동과 말로 이해되던 하나님의 세계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민중들에게 돌아온 시발점이 된것이다.
그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성직자들은 일련의 이러한 일들에 위기감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왕보다 더 큰 권력, 즉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으로 정해진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성직자였다.
이것은 불안한 시기에 정신세계에서 절대권자는왕 보다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권력을 가진자가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파워를 가진 자기에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발설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 절대적인 권력에 누수가 생길까 두려워 자기에게 없는 왕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단을 처벌하라고 왕에게 명한다.
만약 왕이 이를 거부 한다면 민초들에게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이단이라고 하면서 그를 왕권에서 쫓아낼것이 뻔하므로 왕은 울며 겨자먹기로 군대를 동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절대권력의 교황에게 반기를든 제후도 있었는데, 이러한 일들은 엄청난 시대적 제앙을 몰고오게 마련이다.
그 한 예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4세와 같이 교황에게 반항하였다가 파문을 당하자.
잘못하였다고 파문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흰눈이 펄펄내리는 성문밖에서 맨발로 용서를 구했다.
오만해진 교황은 자신의 큰 힘을 과시하기위해 추위에 떠는 황제를 오랜시간 방치하고 그 효과를 즐겼고 한다.
그후 힘을 축적한 하인리히4세는 이를 갈며 복수를 노리게되고, 그 결과 그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힘이 미치는곳에 머물지도 못하고 죽음도 타향에서 쓸쓸이 맞이해야 했다는 후문이다.
이야기가 본줄기를 자주 벗어나 엉뚱하게 흐른다.
어땋하든간에 이시기에는 종교,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거듭되었다.
그렇게 종교개혁으로 혼란이 거듭된후 178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2세는 헝가리 인들이 종교의 박해에서 벗어나도록 관용령을 선포한다.
이 관용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이령이 선포되기 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암청난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앙으로 인해서 큰 위기가 닦쳤을 때에도 마자르족(헝가리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개혁신앙을 가지고 신성로마제국 곳곳으로 흩어져 여러 곳에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광범위한 학교제도를 만들어 그들만의 철저한 기독교신앙에 따른 교육으로 신문화를 창조하였고, 헝가리의 사회문화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체결된 베르사유조약(1919)으로 헝가리는 산산이 흩어져 단지 절반만이 신생국 헝가리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나라들에 흩어져 소수 인종을 이루었다.
이 가운데 루마니아에 정착한 가장 큰 일파는 종교와 문화적인 이유로 심한 박해를 당했으나, 헝가리 정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더이상의 박해는 받지않았다고 한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여러 해 동안 헝가리, 루마니아, 그밖에 여러 나라들로 분산된 마자르인를은 하나의 정치적 단일체로 재결합하고 교회도 다시 연합할 날이 오기를 바랐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러한 바람은 모두 깨졌다고 한다.
그것은 1948년 공산주의자들이 헝가리의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질곡이 엄청 있었지만, 이 헝가리란 나라도 참 많은 간섭과 굴복 그리고 희생으로 아픔이 너무나 많았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사람들은 고통스런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않았다고 한다.
[겔레르트언덕에 있는 오스트리아요새- 세계2차대전당시 독일군과 라시아군의 대치장소로 방어진지로 사용하여 탄흔이 많이 보임]
그렇게 많은 사연을 가진 헝가리,
이 나라의 면적은 930만 평방㎢로 우리나라 남한의 면적과 비슷하며 인구는 약1천만명 이라고 하는데 이중 수도인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약 180만명이라고 한다.
내륙국인 이 나라는 북쪽으로 슬로바키아, 북동쪽으로 우크라이나, 동쪽으로 루마니아, 남쪽으로 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등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나라는 중부유럽의 경제, 외교, 문화, 상업, 물류의 중심지로서 과거 공산주의 시절의 때를 벗어내고 개혁의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로서 1999년 NATO, 2004년 EU에 가맹하여 유럽대륙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발전해가고 있다고 한다.
[헝가리의 영웅광장 우측에 있는 현대 미술관]
오늘 방문한 부다페스트(Budapest 부더페슈트 : 부다뻬슈뜨)는 헝가리의 수도이자 산업 상업 교통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180만을 상회하는데 1980년대 중반의 207만보다는 낮은 수치이라고 한다.
시내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 연안에 걸쳐 있는 대도시인 부다페스트는 이 강을 경계로하여 서쪽지역을 부다지역이라고 부르며 동쪽의 넓은 평원지대에 들어선 도시를 페스트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 두지역은 원래 별개의 도시로 발전해오다가 1873년에 도나우 강 서편의 부더(Buda)와 오부더(Obuda), 동편의 페슈트(Pest)가 합쳐져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에는 인근 소도시를 합병하여 현재의 부다페스트로 확장되었다고 하는데, 부다지역은 1세기부터 로마의 군(軍) 주둔지 아쿠인쿰을 바탕으로 14세기경부터 헝가리의 수도로서 왕궁을 비롯한 통치자들의 거주지역이 되었으며 강건너 페스트 지역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부다페스트는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그후 근대화의 물결과 전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는 다른 구도심의 복잡함과는 다르게 잘 정비되어 있고, 복잡하지 않아 걷기에 아주 좋다.
벽으로 둘러쳐진 성 지구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물들과 박물관이 소재하고 있다.
이곳은 두 개의 독특한 지역으로 나뉘는데, 중세에 평민들이 살았던 구시가와 13세기 성이 지어졌던 왕궁이라 할 수 있다.
구 시가에는 아름답게 채색된 거리, 장식이 많은 교회 그리고 유명한 어부의 요새 등이 있다.
어부의 요새는 부다 언덕의 동쪽에 네오 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 양식이 절묘하게 혼재된 건물로 1899년에서 190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중세에 이 벽을 방어하는 책임을 졌던 어부 조합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하여 어부의 요새라 불리운다.
이 요새에서는 시내 전경을 감상 할 수 있으며, 7개의 포대와 말을 타고 있는 스테판의 동상이 있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바라본 부다왕궁- 지금은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쓰여지고 있다고 한다]
구시가 바로 서쪽이 왕궁이다.
지난 7세기 동안 무너지고 다시 지어지고, 또 새롭게 디자인된 이 왕궁에는 헝가리 예술을 대표하는 많은 소장품을 지닌 국립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개의 박물관이 있다.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오부다(Obuda) 이다.
이 지역은 로마의 폐허와 세기의 변화에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작고 조용한 마을이 인상적이다.
이 곳에도 훌륭한 박물관이 있는데, 그중 키첼리 박물관은 많은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실은 엠파이어, 비더마이어, 아르누보 형식의 가구들로 치장되어 있다고 한다.
오부다의 북쪽은 로마시민의 마을인 아쿠인쿰(Aquincum)이 있는데 가장 헝가리적이라고 한다.
1세기에 세워진 이 마을은 사치스런 단층집들과, 우물, 법정 등을 갖춘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마을이었다. 많은 것이 남아있진 않지만, 커다란 공중목욕탕, 시장, 태양의 신 미테라스를 위해 지어진 사원들이 있고,
이중에 부다페스트에 오면 꼭 봐야할 것은 3세기의 물 오르간, 토기 거푸집, 바닥의 모자이크, 조각품, 야외의 석관 등이라고 하며,
다뉴브강 크루즈 승선, 로맨틱한 다리 혹은 강가를 산책하는 것,
고서점과 보석상을 둘러보는 것,
많은 온천 중 한곳에서 '물맛보기' 등을 체험하는것 이라고 한다.
[겔레르트언덕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과 세체니다리 그리고 페스트지역 오른쪽검게 보이는곳이 힐튼호텔이다.]
우리일행은 날씨도 차고 시간이 없어서 다른것은 다 못하고 다뉴브강의 유람선을 타고 1시간 가량을 선상 유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뉴브강의 선상에서 부다 왕궁, 어부의 요새, 장엄한 국회의사당과 아름다운 세체니다리등을 보면서 여기에 어린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가이드가 설명하는데,
그 이야기가의 애절하여 지나는 것들이 아름다움보다는 비장함이 뭇어나는것을 느낀다.
이곳에는 파리의 샹제리제 거리와 같은 안드라시 거리가 있고 그 끝에 위치한곳이 우리가 맨처음 들어왔던 영웅광장이다.
이곳은 헝가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에 독일이나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였때 제일 먼저 이곳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헝가리에서 가장 중요한 영웅광장은 좌측에는 예술궁전과 우측에는 현대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고 광장 뒤편에는 시립공원이 펼쳐져 있다.
또한 이 광장은 영국의 트라팔가 광장과 비교되는 곳이기에
아직도 헝가리에서 벌어지는 모든 역사적인 집회와 기념식등이 열리는 대표적인 장소라고 한다.
[영웅광장에서 부다페스트 안드라시 거리로 가는중- 안드라시 거리에는 우리나라 대사관이있다.]
이 영웅광장은 서기896년 마자르족이 이곳 판나노니아 평원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고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에 지어진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36m 높이의 기둥이 있는데, 꼭대기에는 가브리엘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기둥 옆에는 마자르의 족장인 아르파트(Arpad)와 6개 부족장들의 동상이 있다.
그런대 이 기마상들은 잘 못 표현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자르족이 타고 온 우랄 쪽의 말들은 우리나라의 조랑말과 같이 덩치가 작았다고 하는데,
크게 과장해서 다리가 쭉쭉빠진 서양말을 표현한 것이 모순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것과 같이 천사 가브리엘 기둥을 기준으로 반원의 형태로 기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주랑이라고 해야 하나 2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반원형의 기단위에는 헝가리의 역대 왕과 영웅들이 연대순으로 조각되어 있다.
[영웅광장- 뒤에보이는것이 천사가브리엘탑이다 그 아래 7명의 부족장 기마상이 있고 병풍처럼생긴 두개의기단에 헝가리 역대 왕들의 동상이 서있다]
[영웅광장 왼쪽에 위치한 예술궁전의 모습]
[영웅광장-헝가리를 세운 마자르족 일곱족장의 동상]
기둥의 앞부분에는 무명용사의 기념비가 있다.
헝가리를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며,
우리나라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도 왔었던 곳이기도 하다.
영웅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안드라시 거리에 우리나라 대사관이 있다.
우리가 지나는 길에 유난히 펄럭이던 태극기가 자랑스러워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외국에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그 말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엘리자벳 씨시황후의 이름을딴 엘리자벳교의 모습]
이 교량은 부다페스트의 다뉴브 강 위를 가로지르는 현수교이고 1903년에 건설되었다.
당시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황후였던 엘리자벳 씨시가 헝가리에 대한사랑이 대단하여 이 다리를 건설하였다고 하며, 나중에 비엔나의 쉔브른 궁전을 소개하면서 설명하겠지만 엘리자벳 씨시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아름다워 헝가리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이 들이 그를 사랑한다고 한다.
[세체니다리-유람선에서 촬영한것으로 이 교량이 건설될 당시에는 유럽에서 최고의 다리였다고한다 ]
세체니 다리는 부다페스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빠지지 않고 찾는 이 도시의 간판 교량이다.
길이 375m, 너비 16m의 세체니 다리는 1842-49년에 걸쳐 건설된 부다페스트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현수교로서 부다와 페스트가 별개의 도시로서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예견해온 선각자 이슈투반 세체니 백작이 자기의 모든 재산과 역량을 다바쳐 건설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영국인 건축가 애덤 클라크의 설계에 의해 완성 되었다.
건설 당시만 해도, 세계에서 경이로운 다리로 여겨졌다.
세체니 다리는 헝가리의 경제와 국민 생활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장식물들과 구조는 주철로 만들었으며, 잔잔한 기품과 안정적인 모습을 발산하여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업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세체니 다리는 진보, 국민의 각성 그리고 동쪽 지구와 서쪽 지구를 한데 묶어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 다리가 완성됨으로써 부다지역과 페스트지역이 하나로 통합되어 오늘날의 부다페스트로 발전하였다고 하는데 이 다리는 2차 세계 대전으로 폭파 되었다가 전후 재건되었다고 한다.
겔레르트 언덕은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부다왕궁 언덕의 남쪽으로 도아우강 기슬에 있는 해발 235m의 바위산이다. 겔레르트란 지명은 헝가리인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킨 이탈리아의 전도사 성 겔레르트의 이름에서 유래 했다고 하며,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하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1900년도 초에는 매춘업소, 도박장등이 밀집한 슬램가였다고 한다.
[겔레르트언덕에 있는 오스트리아 요새- 2차세계대전중에 독일군 요새로 소련군의 공격으로 여러곳에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겔레르트 언덕에는 한 요새가 있는데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하여 일으킨 독립전쟁을 진압하고 나서 부다페스트의 독립군들과 왕궁을 감시하고 위협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요새 주위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됐던 대포들이 노천에 그대로 전시되고 있었다.
언덕의 남측에는 1945년 소련에 의해 독일군이 물러간 것을 기념하기위해 해방기념 동상이 서 있다.
이 여자동상은 14m 높이에 승리의 월계수 잎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방향은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향해 있다고 한다.
그 뜻은 모스크바(러시아)에게 감사하라는 뜻이라고하는데,
1989년과 1990년에 헝가리의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 기념물을 제거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의회에서 논의 되었으나,
아픈역사도 역사라며 동상은 놔두기로 하고 그 앞에 있는 소련군의 부조모습은 제거하였다.
그 논의 중에 과연 소련군이 해방군인가 아니면 점령군인가에 대해 논쟁이 심하였다고 전한다.
[겔러르트언덕의 전망에 서있는 해방기념동상 - 여자동상이 모스크바를 향해 월계수잎을 들고 서있는 모습]
[겔러르트언덕의 전망대]
[마챠시교회 에서 서쪽의 오래된 마을로 유명상표의 상점과 예쁜 레스토랑이 있다]
[마차시교화에서 서쪽으로 오래된 시가지의모습]
[게레르트언덕에서 보이는 다뉴브 강의 보이는것은 자유의다리]
마챠시 교회는 1541년 부다가 터키에게 점령당하면서 가장 먼저 모스크로 변한 교회이다.
1686년 터키군이 물러나자 가톨릭 교회로 다시 변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역대 왕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어 대관교회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우리가 가보았을 때는 공사중 이라서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나 지붕의 타일 색상이 상당히 화려하고 벽들이 고풍스러웠다. 입장료 200ft(약 1000원 상당)
[마챠시교회-현재 공사중으로 주변이 복잡하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마챠시교회는 1255년 ~ 1269년 벨라 4세의 지휘 하에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부다페스트의 상징적인 교회이다. 1470년 마챠시 왕의 명령으로 높이 88m의 첨답이 증축되면서 붙여진 이름이 마챠시 교회이다. 10시 반에 종소리가 울리고 이어 장엄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온 교회에 울려 퍼지는데 음향이 대단하다고 한다. 천장엔 성화가 없고 나뭇잎 무늬 등으로 도안되어 그려진 그림들이 특이하며. 전면 좌우 벽의 스테인드그라스 그림은 아름답다고 한다.
[어부의요새와 그뒤로 보이는것이 마챠시교회]
[어부의 요새 포대 위에서 다뉴브강을 뒤로하고 - 내뒤로 보이는 것이 국회의사당이다]
어부의 요새는 앞서 언급하였지만 부다 언덕의 동쪽에 네오 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 양식이 절묘하게 혼재된 건물로 1899년에서 190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헝가리의 애국정신의 상징물로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고 있을때 도나우강의 어부들이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을 막기위해 이요새를 방어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며, 중세에는 어부들이 도나우강에서 왕궁 지구에 잇는 어시장으로 가는 지름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깔모자형태의 7개 탑은 건국당시 7개 부족을 의미하며 하얀색의 화려한 성벽과 마챠시 교회까지 뻗어 나간 계단이 꽤 아름다운데 이것의 재료는 화강암으로 생각했으나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사암이나 혹은 시멘트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어부의요새- 7개의 포대가 있는대 7부족을 상징한다고하며 보이는것은 그중하나의 포대]
[어부의요새- 7개의 포대가 있는데 7부족을 상징한다고하며 보이는것은 포대 아래에 있는 회랑]
다뉴브 강(2,850 km)은 유럽에서 볼가 강(3,690 km) 다음으로 긴 강으로 독일의 알프스 지역에서 발원하여 헝가리 그리고 발칸의 여러나라를 지나 지나 흑해로 흘러 들어 간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다페스트는 다뉴브 강에 의해 본래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으로 나뉜 것을 13개의 다리로 이어 놓은 것이다.
부다는 '물', 또는 '온천'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온천이 150개가 넘는다고 하니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 오른쪽으로 보이는 현대식건물이 힐튼호텔이다. 부다페스트에 어울리지않는 건축물로 "이 힐튼 호텔을 볼 때마다 헝가리 사람들 가슴에 피눈물이 흐릅니다."라고 하듯이 국력이라는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극명하게 답해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유람하던 도중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성벽, 성당으로 이루어진 유적지 한가운데 생뚱스러운 현대식 건물이 버티고 있어 뭐냐고 물어보니 “힐튼호텔”이란다. 듣는 순간 모두가 혀를 차며 실소를 했는데,
헝가리가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자유경제체제를 선언했을 때 나라 살림이 거의 바닥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헝가리 정부가 국제연합(UN)에 부담해야 할 문화 예술 국제교류 분담금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 체인업의 거두 "힐튼"이 대신 내주기로 하고 여기에 호텔을 건립했다고 한다. 다만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는 건물을 짓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호텔 측에서는 구 시가지의 외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여 버리고 말았는데, 그 외모가 이곳 정서에 맛지않아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을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힐튼 호텔을 볼 때마다 헝가리 사람들 가슴에 피눈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금전 몇푼으로 나라의 자존심을 구긴것이 국민들 마음속에 큰 상처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다뉴브강에 떠있는 유람선 유럽사람들은 이 배를 타고 여러 도시를 관광한다. 이 배는 적은 규모의 것으로 가운데가 잠을자는 숙소와 레스토랑등으로 꾸며져있다.- 독일국기가 선미에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독일관광객을 싫고 온모양이다]
[다뉴브의 호화 크루즈- 특급호텔보다 나은 레스토랑과 객실, 연회장이 있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본 것 중에 부다페스트의 서쪽인 페스트 지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역시 국회의사당이다. 이 건물은 헝가리 왕국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2년에 신축된 신고딕 양식의 건물로 검붉은 색의 웅장한 중앙 돔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첨탑을 거느리고 있는 형태의 건물인데 길이 268m에 넓이 118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건물 안에는 691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다뉴브강 선상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성 이슈트반 성당의 돔-사진에는 잘 않나왔지만 상당히 아름답다]
[성이스트반 성당]
유람선에서 내려 성 이스트반(슈테판 혹은 스테파노)성당으로 향하였다.
성당 안에 들어 가 보니 이스트반의 오른 손목을 잘라 미이라로 만들어 놓은 함이 있고 예수의 십자가상이 보였는데 이 예수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서 왼팔과 오른 팔의 두께가 달라 보였다.
벽을 장식한 대리석이나 벽면과 지붕의 황금 장식, 돔 내부 천정의 벽화가 아름답고 세련되었다. 이 이스트반 성당은 건국 896년을 기리기 위하여 96m 높이로 지었는데 저지대 평지인 페스트 지역의 모든 건물은 이 높이 이상 지을 수가 없어 상대적으로 높은 부다 지역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어디서나 이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성 이스트반 성당내부- 돔부분]
[성 이스트반성당 앞에서]
[성 이스트반성당앞 광장- 성이스트반의 기념일에 이광장에서 기념식을하고 제벌들로부터 기부금을 받는다 한다.]
[ 란슬롯 식당의 르네상스 특식- 고기와 야체 감자가 함께나오고 포크없이 손과 나이프를 사용해서 먹는다]
[란슬롯 식당 로비에 있는 예쁜 아가씨- 히~]
성당을 보고 기념품상점을 둘러 보았다.
기념품 될만한 것이 토카이 와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달달한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지 않았으나 이번 여행사에서 1방에 1병을 무료로 주어 맛을 보긴 보았다.
꼭 우리나라 모과주와 비슷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이름이 ‘란슬롯“이다.
식당 앞에는 중세의 기사갑옷이 있고 중세 복장을 한 이쁜 여성이 로비에서 우리를 반긴다.
중세 특선요리를 하는 이집은 그리 비싼 집은 아니지만 역사가 오래되었고 특이하게 써빙하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사람들 복장이나 실내 장식이 중세풍이고 실내도 전기가 없던 시절답게 어두컴컴하였다.
고기와 감자와 채소를 모두 커다란 접시에 한꺼번에 담아 손으로 덜어먹는 방식으로 메인메뉴가 나오기 전에 빵 속에 담아 네오는 야채스프가 인상적이다.
스프의 맛은 엄청나게 짜서 못먹을 지경이 아니 였으나, 일행 중에 맛있다고 드시는 분이 있어 그 식성이 한없이 부러울 따름이다.
이 특식이 역시나 좀 짰지만 흑맥주와 함께 먹으니 꾀나 맛이 있었다.
짠 음식을 좋아하시는 분께 강력 추천하오며, 이 음식은 돼지고기의 껍질부분이 좋다고 하는데 짜도 너무 짜서 혀를 델 수 없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흑맥주는 한잔에 2유로를 받는데 맛은 우리나라 흑맥주보다 담백하고 쓴맛이 덜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유럽이라고 하면 대개 서유럽보다 경제나 문화 예술면에서 후진국이라 생각하는데 헝가리는 우리 남한 보다 면적이 약간 작고 인구는 1,000만 명 밖에 안되지만 1896년에 유럽대륙에서 첫 번째로 지하철이 생긴 나라다.
헝가리의 GNP는 약 16,000 불로 우리나라와 수준이 비슷하지만 교육, 의료, 연금 등의 복지 면을 비교하면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산다.
교육비가 거의 들지 않고 대학 학비도 일년에 백만원이 안든다고 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일행 중에 후진국인데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경제규모나 국민소득 따위로 그곳 사람들을 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다페스트의 동쪽지역 - 경제활동의 중심지로 도시가 고색창연하고 참 아름답다]
저녁을 먹기 전 성 슈테판성당 앞의 기념품 상점에서 팔던 파프리카 비타민이 생각이나 가이드에게 물어 보았다.
이곳 헝가리사람들은 파프리카 씨에서 비타민 C를 추출하고 성냥, 볼펜, 전자교환기등의 시스템을 발명하였던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10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나라다. 유로화의 가치가 자국통화에 비해 높게 평가되어있어서 도입을 미루고 있으며 우리네 주상복합아파트와 같은 형태가 대부분인 주택에는 발코니가 달려있고 더위, 추위, 소음 등을 차단하기 위하여 창문에 덧문이나 셔터를 달았는데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벽에 단열재가 들어있지 않고 통풍이 잘 안되어 더위에는 집이 찜통인데 에어컨 설치비가 비싸 거의 에어컨이 없으며, 이번여름에 이곳에 섭씨40도를 웃돌아 더위에 꾀나 고생하였다고 한다.
호텔로 이동하는데 가이드가 많이 서두른다. 유럽연합에서는 우리가 탄 버스같은 장거리 투어버스(LDT-long distance tour)에 하루 최고 운행거리와 시간을 정해놓고, 이를 어기거나 휴식 없이 2시간 30분을 초과 운행하면 버스기사의 라이센스를 박탈하고 회사에 무거운 과태료를 물린다고 한다.
그래서 내일 일찍 떠나려면 일찍 운행을 접어야 하므로 숙소로 향하는 일은 꾀나 바쁜모양이다.
항간에 관광버스가 추락해서 많은 인명을 앗아간 뉴스를 보고 참혹하다고 느꼈는데,
우리나라도 도입해볼 만한 제도인 것 같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다페스트 시내 중심가에있는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여느날처럼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이곳은 온천과 수영장, 스파, 사우나시설이 있어서 나는 오랜만에 일행들과 수영과 온천 스파를 즐겼는데,
수영장, 온천장, 스파가 함께붙어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온천처럼 뜨끈 뜨끈한 것이 아니라서 잠시 온천물에 몸을 담궛다가,
온천장에 붙어있는 수영장에서 몇바퀴 왕복을 하였는데 서양인들의 힘이 보통이 아니다.
우리일행중 수영을 잘하시는 분들도 있었으나, 우리네들은 수영폼만 좋고 그 사람들은 개수영을 엄청 잘한다.
지친몸을 끌고 객실로 돌아와 따스한물로 샤워를하니 대충 피곤이 풀리며 잠이온다.
저녁식사가 땡기지 않아 침대에 벌렁누웠는데,
마누라가 널부러진 나의 손을 당기며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고 쉬었다가 잠을자야 피곤이 더잘 풀린다며, 재촉을 한다.
식사를 하러 식당에 내려가니 동행녀석들의 주머니에 소주가 두어팩씩 들은 것이 보였다.
하~ 사람들 체력 좋다.
그렇게 헝가리의 첫날은 또 저물어 갔다.
-5부 끝-
6부에 계속
[결혼30주년이되는 우리부부는 이번여행에서 느끼는 감회가 남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