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집(謙菴集)
형태서지
권수제판심제간종간행년권책행자규격어미소장처소장도서번호총간집수
겸암선생문집(謙菴先生文集) |
謙菴先生文集 |
목판본(木版本) |
1803年刊 |
原集 6권, 年譜, 附錄, 遺墨 합 4책 |
10행 18자 |
21.2×18.1(㎝) |
上下二葉花紋魚尾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奎4513 |
한국문집총간 49 |
저자
성명생년몰년자호본관시호특기사항
유운룡(柳雲龍) |
1539년(중종 34) |
1601년(선조 34) |
응견(應見) |
겸암(謙菴) |
풍산(豐山) |
문경(文敬) |
이황(李滉)의 문인 |
가계도
기사전거 :
行狀(金弘微 撰), 柳仲郢行年記(柳雲龍 撰)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중종 | 34 | 1539 | 기해 | 嘉靖 | 18 | 1 | 8월 6일, 安東府 豐山縣 河隈里 집에서 태어나다. |
명종 | 9 | 1554 | 갑인 | 嘉靖 | 33 | 16 |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다. |
명종 | 12 | 1557 | 정사 | 嘉靖 | 36 | 19 | 9월, 杆城 임소로 조부를 찾아뵙다. ○ 금강산을 유람하다. |
명종 | 14 | 1559 | 기미 | 嘉靖 | 38 | 21 | 5월, 조부상을 당하다. ○ 부친의 명으로 퇴계선생에게 墓碣을 청하다. |
명종 | 16 | 1561 | 신유 | 嘉靖 | 40 | 23 | 11월, 陶山에서 퇴계선생을 뵙고 隴雲精舍에 머물면서 「史記」를 배우다. |
명종 | 17 | 1562 | 임술 | 嘉靖 | 41 | 24 | 동생 유성룡과 함께 퇴계선생을 배알하다. 溪上書齋에서 몇 달 머물면서 「近思錄」 등을 배우다. |
명종 | 18 | 1563 | 계해 | 嘉靖 | 42 | 25 | 2월, 豐山에서 퇴계선생을 배알하다. ○ 8월, 鄕試에 합격하다. ○ 9월, 陶山에서 퇴계선생을 배알하다. |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26 | 3월, 南致亨, 南致利, 金益仲과 함께 駱駝寺에 올라가 「啓蒙」을 강하다. ○ 4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凊凉山을 유람하다. ○ 趙穆과 학문을 논하다. 李德弘에게 편지를 보내 학문을 논하다. ○ 퇴계선생에게 상서하여 「朱子書節要」를 改修할 일을 여쭙다.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28 | 1월, 퇴계선생에게 상서하여 定州에서 중간된 「朱子書節要」의 수정 및 增註目錄의 일을 여쭙다. |
명종 | 22 | 1567 | 정묘 | 隆慶 | 1 | 29 | 봄, 謙巖精舍가 완성되다. |
선조 | 2 | 1569 | 기사 | 隆慶 | 3 | 31 | 가을, 鄕試에 합격하다.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32 | 11월, 퇴계선생을 뵙고 隴雲精舍에서 머물면서 「詩傳」을 배우다. ○ 퇴계선생의 병이 위독하자 溪堂으로 돌아와 모시다. ○ 12월, 퇴계선생이 졸하다. |
선조 | 5 | 1572 | 임신 | 隆慶 | 6 | 34 | 同門들과 陶山에 모여 尙德祠를 세워 퇴계선생을 享祀하는 일을 의논하다. ○ 典艦司 別坐가 되다. |
선조 | 6 | 1573 | 계유 | 萬曆 | 1 | 35 | 7월, 부친상을 당하다. |
선조 | 8 | 1575 | 을해 | 萬曆 | 3 | 37 | 9월, 服을 마치다. ○ 權好文, 南致利에게 답서하여 「理學通錄」의 교정 일을 논하다. |
선조 | 9 | 1576 | 병자 | 萬曆 | 4 | 38 | 봄, 陶山書院에 모여 퇴계선생의 位版을 봉안하다. ○ 5월, 의금부 도사가 되다. |
선조 | 11 | 1578 | 무인 | 萬曆 | 6 | 40 | 南致利, 權宇와 모여 「啓蒙傳疑」를 간행하기 위해 교정하다. |
선조 | 12 | 1579 | 기묘 | 萬曆 | 7 | 41 | 5월, 사포서 별좌가 되다. ○ 李安道와 京邸에 모여 퇴계선생 문집 편차의 일을 논하다. ○ 易東書院 會中에게 편지를 보내어 퇴계선생 문집에 대한 일을 논하다. |
선조 | 13 | 1580 | 경진 | 萬曆 | 8 | 42 | 여름, 퇴계선생 문집을 도산서원에서 모여서 교정하다. ○ 다시 의금부 도사가 되다. |
선조 | 14 | 1581 | 신사 | 萬曆 | 9 | 43 | 3월, 〈請安東復號疏〉를 짓다. ○ 의금부 경력이 되다. ○ 풍저창 직장이 되다. |
선조 | 15 | 1582 | 임오 | 萬曆 | 10 | 44 | 내자시 주부가 되다. ○ 가을, 眞寶 縣監이 되다. |
선조 | 16 | 1583 | 계미 | 萬曆 | 11 | 45 | 4월, 사직하고 귀향하다. ○ 賓淵精舍가 완성되다. ○ 許篈의 귀양길에 詩를 지어 주다. |
선조 | 17 | 1584 | 갑신 | 萬曆 | 12 | 46 | 9월, 도산서원에 모여 퇴계선생 문집을 교정하다. ○ 仁同 縣監에 제수되다. |
선조 | 18 | 1585 | 을유 | 萬曆 | 13 | 47 | 봄, 冶隱 吉再의 묘를 개수하고 吳山書院을 창건하다. |
선조 | 19 | 1586 | 병술 | 萬曆 | 14 | 48 | 4월, 〈松峴墓山記〉를 짓다. |
선조 | 20 | 1587 | 정해 | 萬曆 | 15 | 49 | 5월, 廬江書院에 모여 퇴계선생 문집을 교정하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50 | 3월, 吳山書院이 낙성되자 경내의 제생을 데리고 강학하다. ○ 趙穆이 縣齋로 내방하다. |
선조 | 23 | 1590 | 경인 | 萬曆 | 18 | 52 | 겨울, 광흥창 주부가 되다. |
선조 | 24 | 1591 | 신묘 | 萬曆 | 19 | 53 | 한성부 판관이 되다. ○ 윤3월, 光國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54 | 봄, 사복시 첨정이 되다. ○ 4월, 왜란이 일어나자 모친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 豐壤에 이르러 新門 밖에 우거하다. ○ 5월, 加平 懸燈寺에 우거하다. ○ 6월, 花嶽山에 들어가 朝宗寺로 옮겨 우거하다. 彌智山에 들어가 小雪寺에 우거하다. ○ 7월, 龍門山에 들어가다. ○ 8월, 關東에서 竹嶺을 넘어 豐基에 이르다. 浮石寺와 龍壽寺에 우거하다. 薪田村으로 옮겨 우거하다. ○ 9월, 河隈로 돌아오다. 다시 奉化에 이르러 太白山 아래 道心村에 우거하다. ○ 순찰사의 격문을 받고 豐基郡의 임시 군수가 되다. |
선조 | 26 | 1593 | 계사 | 萬曆 | 21 | 55 | 가을, 풍기 군수가 되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56 | 겨울, 통정대부에 오르다. |
선조 | 28 | 1595 | 을미 | 萬曆 | 23 | 57 | 6월, 〈錦陽精舍完文跋〉을 짓다. ○ 9월, 특명으로 原州 牧使가 되다. |
선조 | 29 | 1596 | 병신 | 萬曆 | 24 | 58 | 1월,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 용양위 부호군이 되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59 | 가을, 다시 모친을 모시고 奉化에 우거하다. |
선조 | 31 | 1598 | 무술 | 萬曆 | 26 | 60 | 봄, 모친을 모시고 돌아와 道心村에 우거하다. ○ 12월, 동생 유성룡과 함께 道心寓舍 에 우거하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61 | 4월, 모친을 모시고 河隈의 옛집에 돌아오다. |
선조 | 33 | 1600 | 경자 | 萬曆 | 28 | 62 | 7월, 㦤仁王后의 喪을 듣고 玉淵에 나가 거애하다. |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63 | 3월 5일, 졸하다. ○ 5월, 天燈山에 장사 지내다. ○ 동생 유성룡이 誌文을 짓고 李好閔이 碣銘을 짓다. |
선조 | 38 | 1605 | 을사 | 萬曆 | 33 | - | 4월, 扈聖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다. ○ 5월, 이조 참의에 증직되다. |
인조 | 21 | 1643 | 계미 | 崇禎 | 16 | - | 12월, 東麓 造火谷으로 移葬하다. |
숙종 | 34 | 1708 | 무자 | 康熙 | 47 | - | 11월, 愚谷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영조 | 18 | 1742 | 임술 | 乾隆 | 7 | - | 6대손 柳泳이 문집을 초간하다.(李光庭의 序) |
정조 | 10 | 1786 | 병오 | 乾隆 | 51 | - | 9월, 위판을 花川書院에 봉안하다. |
순조 | 3 | 1803 | 계해 | 嘉慶 | 7 | - | 9대손 柳宗睦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鄭宗魯의 重刊序) |
순조 | 31 | 1831 | 신묘 | 道光 | 11 | - | 3월, 吏曹 判書에 증직되다. |
순조 | 34 | 1834 | 갑오 | 道光 | 14 | - | 7월, ‘文敬’의 시호를 받다. |
기사전거 :
年譜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시문은 동생 柳成龍이 12권으로 편집하여 盧景任의 河上 寓所에 두었는데 1605년 홍수에 떠내려가 대부분 망실되었다. 이에 증손 柳世哲이 시문을 收拾, 編次하고 年譜를 붙여 4권으로 定稿本을 만들고, 저자의 종손 柳元之와 증손 柳世鳴이 함께 교정을 하였으나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 후 6세손 柳泳이 世哲의 정고본을 李光庭의 교정을 거쳐 1742년에 4권 2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구성은 李光庭의 序(1742), 6대손까지 기록된 世系圖, 1708년 사실까지 기록된 年譜가 앞에 편차되어 있고, 권1은 詩, 권2는 書, 권3은 疏, 記, 祭文, 雜著, 권4는 附錄으로 行狀, 墓誌, 墓碣銘, 祭文, 挽章, 祝文, 仁同去思碑銘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589),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晚松D1-A1018a)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03년에는 宗孫 柳宗睦, 7대손 柳象春 등이 초간본을 增補, 再編하여 8권 4책의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중간본》 詩 14題, 雜著 7편 등이 증보되고, 世系圖가 빠진 대신 저자가 지은 先代遺事가 들어갔으며, 附錄에 3편이 증보되어 재편되었다. 현재 규장각(奎4513),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6270)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834년에 ‘文敬’의 諡號가 내린 뒤 중간본이 증보되었는데, 年譜에 이 사실을 기록하고 洪奭周가 지은 諡狀과 純祖의 賜祭文을 추각하였다. 《추각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59-42)에 소장되어 있다.
1972년에는 후손 柳時益, 柳秉夏 등에 의해 別集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重刊 이후 追得한 詩 2수와 行狀 1편, 그리고 附錄으로 延諡顚末, 延諡疏, 復主顚末 등을 묶어 3권 1책의 石印本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은 앞의 추각본에 함께 묶여 있어 별집을 간행하면서 함께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본서의 저본은 1803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序(李光庭 撰), 重刊序(鄭宗魯 撰), 跋(金應祖, 柳元之 撰)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 문집은 원집 6권, 연보, 부록, 유묵 합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1742년에 쓴 李光庭의 序와, 1803년에 쓴 鄭宗魯의 重刊序가 있고, 이어 目錄이 실려 있다.
권1에는 詩 37題가 실려 있는데, 창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앞쪽에 편차된 10題는 중간하면서 첨가한 작품인데, 이 중 〈敬次退溪先生遊淸凉山韻〉, 〈書懷上退溪先生〉 두 수는 연대순 편차를 무시하고 맨 앞에 편차해 놓았다. 이는 퇴계선생과 門下의 諸賢들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서로 酬唱할 때 저자가 퇴계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바친 시인데, 卷尾의 遺墨에 친필로 摹刻되어 실려 있다. 동생 柳成龍, 權好文, 李德弘 등과의 차운시도 다수 실려 있다.
권2에는 疏 1편과 書 36편이 실려 있다. 〈請安東復號疏〉는 이 고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1576년 안동부에서 申福이 모친을 살해한 일로 府에서 縣으로 강등된 것을 다시 府로 승격시켜 달라는 내용이다. 書는 趙穆, 金誠一, 南致利, 金富倫, 權好文, 李安道, 琴蘭秀 등에게 보낸 것이다. 초간본에는 李安道, 李德弘, 南致利, 權好文, 趙穆 등의 순으로 실려 있었다.
권3에도 書 64편이 실려 있다. 李德弘, 金圻, 鄭士誠, 李詠道, 權宇, 사위인 金弘微, 盧景任, 동생 柳成龍, 그리고 세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권4는 雜著로 〈追遠雜儀〉, 〈族中立議〉 등 8편이다. 〈記師門喪葬時事〉와 〈記日食〉을 빼고는 모두 중간 때 더 넣은 작품이다. 〈追遠雜儀〉는 正至朔望參禮 등을 도표로 그리고 설명한 글이며, 〈分句讀法〉은 句讀를 설명하고 「詩經」의 난해한 구절 등을 설명한 글이다.
권5에는 雜著 1편, 記 3편, 論 1편, 識跋 3편, 祭文 4편이 실려 있다. 잡저는 중간 때 넣은 〈遊金剛山錄〉으로, 1557년 9월 郡人 黃侯澄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이다. 論과 識跋은 초간 때는 잡저로 분류해 놓았었다. 제문은 퇴계선생, 李安道의 제문과 冶隱 吉再의 묘표를 다시 세운 데 대한 글이다.
권6은 先代遺事로서 〈世系錄〉과 〈先府君行年記〉가 실려 있다. 중간 때 새로 들어간 작품으로, 〈世系錄〉이 여기 들어가기 때문에 초간 때 권두에 실렸던 世系圖를 빼고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저자의 年譜가 실려 있다. 부록에는 行狀(金弘微 撰), 墓誌(柳成龍 撰), 墓碣銘(李植 撰), 祭文 7편, 輓詞 4편, 愚谷書院 奉安文, 花川書院 奉安文, 常享祝文, 仁同去思碑銘, 謙菴精舍記가 실려 있다.
권미에는 1667년에 쓴 金應祖의 跋文과 1669년에 쓴 柳元之의 跋文, 이어 遺墨이 실려 있고, 柳宗春의 遺墨跋이 附記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金圻彬) | 1998